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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입문II] 대승의 자비와 공성--일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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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II] 대승의 자비와 공성--일반6.



대승의 자비와 공성



대승 경전 읽기: 요의(了義)와 불요의(不了義)

불교를 공부하다보면, 때로는 논리적인 힘이 경전 자체보다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진실이 겉으로 드러난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경전의 내용 역시 문자 그대로만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밀법(密法, Tantra)의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담은 수많은 밀교 경전의 내용들은 겉으로 보여 지는 형식이나 상징(象徵)만 가지고는 도저히 그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때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의미만 가지고 섣부르게 혼자서 무언가 해보려고 하다가는 너무나 큰 시행착오를 경험해야 합니다. 따라서 고도의 상징성을 가지고 이어져 온 밀교의 수행 방법은 그 만큼 치밀한 논리적인 힘과 분석력을 필요로 합니다.

티벳 불교에서는 수행의 방법만을 서둘러 공부하는 것을 극히 경계합니다. 그래서 튼튼한 논리적 훈련을 기반으로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오류에 대처하고, 더불어 바른 수행을 해나갈 수 있는 힘을 먼저 키웁니다.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방대한 양의 경전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도 논리적인 훈련은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와 관련한 달라이 라마의 법문을 들어 보겠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개념들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초전법륜 때 설하신 사성제의 가르침은 불교 전체의 교리를 대표하는 청사진(靑寫眞)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승을 포함한 불교의 다양한 철학적 학파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각 학파들이 의지하는 다양한 경전들에서 그들의 철학적 견해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경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경전들은 아주 분명하게 그 뜻을 드러내 보이고(了義, Nges Don, niithartha) 있으며, 또 다른 경전들은 뜻이 숨겨져 있어서(不了義, Drang Don, neyartha) 좀더 깊은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어느 특정한 하나의 경전을 이런 식으로 구분하고자 한다면, 실제 그 경전의 뜻이 분명한 요의(了義) 경전인지 아니면 뜻이 감추어져 있는 불요의(不了義) 경전인지를 결정해줄 또 다른 경전이나 논서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전이 그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줄 것인지에 대해 또 다시 검증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의 표준을 세우지 못한 채 무한 반복의 과정만 되풀이 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경전들끼리도 요의와 불요의를 구분하는 견해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어떤 경전이 요의 경전인지, 어떤 경전이 불요의 경전인지는 바른 전통에 의지한 논리적인 기반을 가지고 결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승의 전통에서는 논리적인 능력이 경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경전이나 경전의 특정한 문구(文句)가 불요의적인지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뜻이 다 드러나지 않은 불요의 경전에 속하는 몇 가지 범주의 경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경전에서 ‘자신의 부모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면, 이 문구는 겉으로 드러난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은 해석이 필요한 경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모’는 재생(再生)의 윤회라는 결과를 낳게 하는 오염된 업과 집착, 번뇌 등을 말합니다.

또 비밀집회(秘密集會, Guhyasamaja) 딴뜨라와 같은 밀교 경전에서도 유사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여래인 부처를 죽여야 한다. 부처를 죽여야 완전한 성취를 이룰 수 있으리라.’(비밀집회 딴뜨라 제 7 장중에서) 이러한 가르침은 당연히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유형의 불요의(不了義) 경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2연기법을 설명하는 경전에서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일어난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다음의 경구(經句)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무지라는 원인이 있으면, 오염된 업이라는 결과가 생길 것입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에 저것이 생겨난다.
따라서 무지로 인해 작위적인 행(行)이 있으며,
그 행(行)으로 인해 의식이 일어난다.......
(「불설대승도간경(佛說大乘稻竿經, Shalistambha)」중에서)

이러한 유형의 경전은 아주 분명한 내용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아직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오염된 행위를 낳게 하는 무지란 세속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결여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세속적인 차원(俗諦)에서는 무언가가 그 밖의 무언가를 생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진리의 차원(眞諦)에서 보면, 그 모든 생산된 것들의 본성은 공(空)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 경전에서는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에는 좀더 깊은 차원의 해석적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 역시 불요의 경전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요의(了義) 경전은「반야심경(般若心經, Prajnaparamitahrdaya)」과 같은 반야부(般若部) 경전들입니다. 이 경전들에서 부처님께서는 ‘색이 공이요(色卽是空), 공이 색이며(空卽是色), 색을 떠난 공이 없으며(色不異空), 공을 떠난 색이 없다(空不異色).’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경전들은 본래 공한 모든 현상의 궁극적인 특성과 그 존재 형식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요의 경전으로 분류합니다. 또 부처님께서 세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 설하셨던「여래장경(如來藏經)」도 이러한 요의 경전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경전은 용수(龍樹) 보살의「찬법계송(讚法界頌)」과 같은 찬송(讚頌) 모음집과 미륵(彌勒) 보살의「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의 원래 출전근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불교의 학파들이 요의 경전과 불요의 경전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티벳 불교에서는 용수 보살과 월칭 논사 전통의 중관(中觀)을 따르는 귀류논증(歸謬論證, Prasangika) 학파의 논서들을 가장 신뢰할 만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학파에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공성에 대한 궁극적인 견해를 아주 광범위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들이 제시한 공성에 대한 견해는 분석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어느 것 하나 서로 위배되는 것이 없습니다. 또 이들의 모든 가르침은 논리적인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타공견(他空見, gZhan sTon\g)’을 제시한 귀류논증 학파가 인정하는 요의(了義) 경전은 10 가지 밖에 없으며, 모두가 세 번째 법륜(三轉法輪)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역주: 티벳에서 이 ‘타공견(他空見, gZhan sTon\g)’을 전면에 내세운 학파는 조낭빠(Jon\agpa) 학파이다. 이들이 인정하는 경전에는 「여래장경(如來藏經)」,「승만경(勝鬘經)」,「화엄경(華嚴經)」,「금광명경(金光明經)」,「대보적경(大寶積經)」,「열반경(涅槃經)」등이 있다.)

이 학파는 세속적인 현상이 그 자체로 공하며, 모든 현상은 세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조차도 궁극적으로 공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현상이 그 자체로 공하다고 보는 이런 식의 공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현상은 세속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자신의 궁극적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그 자체로 공하다.’ 하지만 ‘타공견(他空見, gZhan sTon\g)’을 따르는 많은 티벳 불교 학자들은 공성(空性)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만약 현상이 그 자체로 공한 것이라면, 즉 그들의 세속적인 성품으로 인해, 어느 것도 [진실로] 존재할 수 없다.’라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불교의 역사 속에서는 [타공견의 관점에 의지한 수행인] 밀교(密敎, Tantra)의 생기차제(生起次第, bsKyed Rim)와 구경원만차제(究竟圓滿次第, rDzogs Rim)를 실제로 성취하여 고도의 깨달음에 이른 많은 스승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 모두 자신의 공견(空見)을 그대로 수행에 적용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만큼, 공성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이나 심오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물은 그 자체로 공하다.’는 이 스승들의 견해는 자칫 문자 그대로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똑같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도 결국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결론은, ‘타공견(他空見, gZhan sTon\g)’에서 인정하는 것은 ‘현상은 단지 다른 것에 의지해서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인데, 이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문자적으로 ‘세속적인 현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공하다.’라는 견해를 유지하는 것을 궁극적인 진리 안에서 살펴보면, 분명히 그러하며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궁극적인 본성만이 본래의 실제 현상’이라는 견해를 유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옳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궁극적인 성품이 공하다고 말할 때, 그들이 말하는 궁극적인 진리는 세속적인 현상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융모 미꾜 도제(Yungmo Mikyo Dorje)의 법제자(法弟子)이며, 이러한 견해를 선구적으로 개진한 주창자 중에 한 분인 다르메슈와라(Dharmeshvara, 法自在)는 용수 보살의 중관 사상에 대한 그의 저술에서 허무적인(斷見) 입장을 피력합니다. 다르메슈와라의 입장에서 보면, 세속적인 현상이 그 자체로 공하기 때문에 오직 궁극적인 진리만이 존재하며, 궁극적인 진리만이 본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철학적 견해를 고수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반야부 경전에서 설하신 것과는 직접적으로 위배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세속적인 현상과 궁극적인 현상에는 어떠한 구별도 없다.’라고 공성의 실체에 대해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설하고 계십니다. 절대 진리(眞諦)에 대한 여러 가지 동의어를 사용하여 궁극적인 현상의 공한 성품에 대하여 설명하셨으며, 나타나는 현상은 궁극의 일체지(一切智)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공한 것이라는 공성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을, 당신이 굴리신 법륜의 한 부분으로, 분명히 정리하셨습니다.

심오한 견해

모든 존재와 현상이 공하다고 말하는 최고의 철학적 견해를 가진 귀류논증(歸謬論證)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모든 현상은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그 의미를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현상은 그 자체(獨立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현상은 다른 원인과 조건 등에 의지하여 나타나고 그 힘으로 존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만의 독립적인 성품은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무언가에 의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현상이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분명한 사실은 그들에게 독립적인 성품이 없다는 것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귀류논증 중관학파에서 주장하는 공성은 이와 같이 상호 의존하는 연기법을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성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세속적으로 실재하는 현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류논증 중관학파가 현상의 공성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내세운 궁극적이고 결론적인 이유는 현상(現象)이 가지고 있는 상호 의존(緣起)적인 속성입니다. 현상은 다른 요소에 의존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성품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본래 성품은 비어있습니다. 이렇게 연기의 법칙을 논리적 기반으로 한 공성에 대한 견해는 아주 심오한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현상의 본래 성품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허무에 빠지는 것을 막아 줍니다.

용수 보살은 자신의 논서에서 ‘공성은 연기(緣起, 상호 의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중론(中論根本頌, Mulamadhyamkakarika)」에서는 ‘하나의 체계 안에서 만약 공성이 가능하지 않다면,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공성이 가능하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또 다른 구절에서는, ‘현상이 없다면 의존할 곳이 없고, 현상이 없이는 공도 없다.’ 라고 말합니다.

공성에 대한 용수 보살의 이러한 견해는 모두 연기법에 의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용수 보살 자신의 저서뿐만 아니라 불호(佛護, Buddhapalita) 논사의 간략하고 분명한 후대의 주석서나「중론(中論根本頌)」에 대한 월칭(月稱, Candrakirti) 논사의 주석서인「근본중관주명어(根本中觀註明語, Prasannapada)」와「입중론(入中論, Madhyamakavatara)」그리고 그에 대한 자주(自註) 문헌에서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더불어 성천(聖天, Aryadeva) 논사의「사백론(四百論, Caturshatakashastrakarika)」에 대한 월칭 논사의 주석서도 있습니다. 이러한 논서들을 잘 공부하고 이해하면, 용수 보살께서 연기법에 의지하여 공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밝히신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석서를 읽고 나면 용수 보살에 대한 존경심은 저절로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간단하게나마 불교 경전에 들어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불교는 단순한 신앙만으로 그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씩 공부하고 논리적으로 증명해 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 만의 깊은 철학적 성찰을 경험하는 것은 불교 공부의 또 다른 매력입니다. 이것은 수행에서 오는 웬만한 지복감과도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더불어 바른 불교적 세계관과 논리적 합리성을 가지고 하나씩 체험해 나가는 수행의 경지들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자유의 길로 연결해줍니다. 문사수(聞思修)!!! 이 땅에 남아 있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즐겁게 듣고 행복하게 공부하며, 하나하나를 깊은 사색과 탐구로 성찰하고, 그 모든 것을 심오한 수행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것이 불교의 정통적인 공부 방법입니다. 따로따로 가끔씩 하는 공부여서는 안 됩니다. 이 세 가지 공부의 방법이 자기 근기에 맞는 다양한 수행과 방편으로 어우러져 일상의 삶에 자리 잡을 때, 스스로를 불교 수행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바로 그 끝자리에 서게 되면 맑은 부처의 미소는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어서 다음 장부터는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궁한 힘의 원천인 따듯함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바른 가르침과 논리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세상의 아름다운 마음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바로 이타심(利他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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