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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팔훈(修心八訓)』--달라이라마 강설편.

화이트타라
『수심팔훈(修心八訓)』달라이라마 주석>>



마음을 다스리는 여덟 가지 길,

도제 셍게 재빠의 『수심팔훈(修心八訓)』


(*역주: 원제는 『bKa\' gdams pa\'i bshes glang ri thang pa rdo rje seng ges mdzad pa\'i blo sbyon\g tshig brgyad ma』이다.)




달라이 라마의 스위스 강설(講說)중에서,


“『수심팔훈』은 게쉐(Geshe) 랑리 탕빠(gLangri Thangpa)(*역주: 이 『수심팔훈(修心八訓)』의 저자인 게쉐(Geshe) 랑리 탕빠(gLangri Thangpa, 1054-1123)은 겔룩의 전신인 까담(Kadampa)의 학자(Geshe)이며, 랑탕(Langthang) 승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티벳에는 법이 융성하던 두 시기(*역주: 티벳의 랑 다르마(Lang darma)왕이 불법(佛法)의 암흑시기를 주도한 10세기를 전후로, 그 이전을 불법의 전기(前期) 전파 시대 혹은 구파(舊派, ꇅ rNying-ma)의 시대, 그 이후를 불법의 후기(後期) 전파 시대 혹은 신파(新派, T: gSar-ma)의 시대로 나눈다.)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시기는 아띠샤(Atisha) 존자(尊者)님을 비롯한 여러 위대한 인도의 스승들이 티벳에 법을 전하고 꽃피우던 시기입니다. 뛰어난 불교 학자였던 랑리 탕빠는 바로 이 시기에 활동하시던 분입니다. 『수심팔훈』의 처음 일곱 게송은 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상대적인 깨달음의 길인 세속적 보리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게송은 절대적인 보리심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 승의(勝義) 보리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 게송입니다.

1. 내, 모든 유정(有情)들을 위하여
여의주(如意珠)*보다 더
고귀한 뜻을 이루고자 하나니,
언제나 진정한 애정을 가지게 하소서.

(*역주: 진흙 속에 여의주(如意珠)는 언제나 탁한 것을 정화하여 세상에 이익을 준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남과 나의 관계입니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상황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기 것, 혹은 자기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에는 큰 흥미를 보입니다. 이것은 고통을 피해 행복을 찾음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주로 자신과 관련한 것으로 자신이 직접 그 짐을 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도 점점 멀어져 별로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이때가 바로, 자신의 이익만큼이나 남들의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상황을 바꾸어서 보는 정신적 훈련이 필요한 때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중요시 여기는 것에서 다른 사람의 이익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이러한 전환을 이루기 위한 정신적인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너무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수행을 하고 싶다면, 이에 대한 공부는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적절한 경전들을 요약해서 간단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이에 관련한 적절한 경전에는, 먼저 용수 보살의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王譚寶鬘)(약칭 寶鬘)』이 있습니다. 또, 좀 더 분명한 실천 방법을 담고 있는 샨띠 데바(寂天) 보살의 『입보리행론』이 있습니다. 이들 경전에서 보면, 모든 중생은 똑같이 고통을 벗어나, 행복을 얻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이유가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거기에 남과 나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개념적으로든 세속적으로든 “나”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 “나”가 고통에서 자유로워져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는 자의식을 때문에, 모두가 똑같이 고통에서 자유로운 행복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을 얻기 위한 우리의 잠재적인 상태도 모두 똑같습니다.

하지만 크기로만 봐도 나 보다는 다른 이들의 이익이 훨씬 크고 중요합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이 내 자신 보다 더 편안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말로 똑같습니다. 또 우리는 모두 그렇게 똑같지만, 여전히 나는 하나이며 남들은 무한합니다. 하나가 정말로 객관적이라면 이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상거래에서 보면, 한 단위 한 단위의 돈이 모두 중요합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종합적인 금액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소들 하나하나는 똑 같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순간이 오면 하나 보다 많은 쪽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많은 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수에는 관심이 없고 일개인인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경우와 자신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다른 많은 것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경우, 어느 쪽이 더 유익할까요? 분명히 나중의 것이 모두를 위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다른 모든 이들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은 무언가 불합리한 일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 중 밀교(密敎)의 수행법인 분노존(忿怒尊)에 대한 관상(觀想)을 수행하는 사람들도 이제 관상(觀想)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먼저 자신을 중심으로 오른 편에는 무한히 펼쳐진 모든 중생들을 관상하고 왼편에는 수백 명의 중생들을 관상합니다. 이제 이러한 상황을 편견 없이 관찰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을 다 버리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겠습니까? 아니면 내 자신을 버리고 이 무수히 많은 이들과 함께 하겠습니까? 다시 오른쪽에는 자기 한 사람을 두고 왼쪽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두고 관찰해 보십시오. 일반적인 방식으로 결정한다면 결국 다수를 생각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방식에 적용해 보면 아주 흥미로운 일입니다. 결정을 할 때, 단 하나가 됐든 수백만이 됐든, 어느 쪽이든 많은 쪽이 선택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을 객관적으로 분명하고 편견 없이 살펴보면,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금방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비현실적인지 살펴보았습니다.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당장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마음을 쏟는다면, 아마 누구나 인정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소중하고 고귀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게쉐 랑리 탕빠의 게송들에서 키워나가야 합니다. 관심은 결국 모든 중생에게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중요하지 않고 무가치한데에다 쏟았던 관심들을 여의주(如意珠)처럼 가치 있고 소중한 데로 돌려야 합니다.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이러한 소망을 키워야 합니다. 이기적인 관심을 버리고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더라도
내 자신 누구보다 부족하게 보게 하시고,
남을 위한 진심어린 생각으로
지고지순한 애정을 가지게 하소서.

이 게송은 남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무시하던 이전의 태도를 바꾸어, 모든 중생을 올려다보고 내 가족처럼 여기려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헌신하여 남들을 행복하게 해야 하며, 모든 유정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회향해야 합니다.

3. 모든 행동을 자신의 흐름(自相續)으로
헤아리게 하고, 번뇌가 일어나는 순간
나와 남을 해롭게 하리니,
강력한 방편으로 처음부터 막아내게 하소서.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던 것에서 남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전환하려면, 다양한 자신의 번뇌 망상을 먼저 찾아내야 합니다. 즉, 번뇌 망상이 지금까지 우리를 이기심 속에 가두어 두고 자신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갖도록 한 것입니다. 이 게송은 이렇게 해로운 번뇌 망상을 처음부터 막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번뇌 망상이 일어나기 전에, 마치 자신의 소중한 집을 지키는 것처럼,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분석하여 구분하는 분별(分別)과 조심스럽게 깨어 있는 억념(憶念)으로 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는 내면의 마음을 지키는 경찰과 같습니다. 이들이 마음에 있으면, 나쁜 일이나 해로운 일은 저절로 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외부의 경찰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별과 억념이라는 내부의 경찰을 잃고 나면, 외부의 경찰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의 흐름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경찰을 피해 제 멋대로 일을 저지르는 테러범과 같습니다.

이 게송은 또 나와 남들이 항상 맞서 싸우고 있는 위험인 번뇌 망상을 제대로 인식하라고 가르칩니다. 내부의 보호자인 관찰의 힘을 잘 유지하면 집착과 분노 등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자마자 강력한 힘으로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즉, 번뇌 망상이 자신과 남들에게 끼치는 해로움을 기억함으로서 번뇌 망상은 곧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안정과 평화를 잃고, 이성과 균형을 잃고 맙니다. 번뇌 망상에는 분노, 집착, 시기, 질투, 자만, 의심, 무지 등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여섯 가지의 근본번뇌(根本煩惱)가 있으며, 더불어 스무 가지의 부차적인 번뇌인 수면번뇌(隨眠煩惱)가 있습니다. 번뇌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로운 번뇌들 안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려는 마음을 찾아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분노와 증오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분노와 증오는 폭력적이고 악의적인 결과를 몰고 오며, 다른 이들을 해롭게 하고 불행하게 합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오늘 난 정말 화가 나, 그래서 난 행복해! 화는 나를 착하게 해.” 이것이 말이 됩니까?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말합니다. “아, 당신은 병이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화를 내는 것이 당신의 병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화는 오직 파괴적인 결과만을 몰고 올 뿐입니다.

4. 성품이 사악(邪惡)한 유정(有情) 중생이
강력한 죄업(罪業)에 굴복하는 것을 볼 때,
보물(寶物)의 창고*를 만난 것처럼
얻기 힘든 애정을 가지게 하소서.

(*역주: 나와 남이 다르지 않는 경지에서는 남의 모든 허물이 나에게 숨겨진 잘못이 된다. 이 숨겨진 허물을 찾아내어 수행하고 극복하면 깨달음의 길 보다 가까워지듯이 남의 허물은 나의 모든 허물을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것이며 보물의 창고처럼 소중한 수행의 원동력이다.)

이 게송은 식인종이나 아주 악독한 사람 등 아주 혐오스러운 중생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중생들을 만나면 우리가 남들을 해롭게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고 해도 저절로 그들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눈을 돌리고 접촉을 꺼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 역시 버려야 합니다. 그들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런 중생들에게도 애정 어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지. 이들의 짐을 덜어 줘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만약 그런 중생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소중한 보석이나 보고(寶庫)를 만난 것처럼 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5. 나를 남이 시기하니,
욕설과 비웃음 등의 부당한
피해는 내가 받고
승리는 남에게 돌리게 하소서.

따라서 남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봉사하는 자세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나를 비난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을 만나서도 모든 것을 자신의 수행으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 나를 해롭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을 만나도,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하든 상관없이,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수행을 위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악의에 찬 사람들을 만나도 모든 피해는 스스로 감당하고 그들이 승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6. 누군가 내가 도와주며
큰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
아주 부당한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최고의 선지식(善知識:스승)으로 보게 하소서.

수많은 중생들 중에서도 남을 위한 봉사에 열심이고, 상대방을 극진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고귀하고 올바른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사랑과 친절을 다시 되돌려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도 오히려 화를 내거나 거칠게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또 다시 사랑과 자비를 잃고, 흥분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런 경우 보살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보살은 사랑과 자비로 대하던 누군가가 거칠게 반응하더라도, 그들을 자신의 스승으로 보고 대합니다. 이런 좋은 수행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인내와 관용을 기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살은 이렇게 마음의 자세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조심스럽게 수행해 나갑니다. 다른 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가진 보살은 인내를 바탕으로 수행합니다. 즉,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인내를 기르면 기를수록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한 정신적 바탕은 더욱 자라납니다. 인내는 적이나 자기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면 언제나 수행에 큰 도움을 주는 정신적인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도의 생활 방식 즉, 보살의 수행은 적이나 자기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따듯한 애정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존경과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씩 수행해 나가면, 결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적이나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불행의 원인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소리치고 화내는 대신에 애정과 감사를 가지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를 기름으로서 항상 일어나던 답답하고 힘든 감정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간단한 조언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아주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이 마음을 길들이는 수행입니다. 마음을 바꾸고 발전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무언가 조금씩 해나갈 수 있습니다. 제 자신, 대단한 수행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法)을 지금까지 계속해서 수행해 왔습니다. 그 결과 저는 스스로 마음을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행에 대한 확신이나 신뢰가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에게 단 한달이든 일년이든 시도해보기를 권합니다. 그것이 가능한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하고 시험해 봐야합니다. 저는 제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전환하는 일이 가능한 일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원인과 조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항상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내면의 세계 역시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전환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이 강론의 여덟 게송 중 여섯 번째 게송이 끝났습니다. 일곱 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7. 요약하면, 직접 간접적으로 [생긴]
이익과 안락은 모든 어머니들께 드리며,
어머니들의 모든 손해와 고통은
아무도 모르게 내가 받게 하소서.

이 게송까지는 아직도 세속적인 보리심(菩提心)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비심을 바탕으로 자신보다는 다른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자비심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마음이며, 그들을 고통에서 자유롭게 하려는 마음입니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들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비심은 자(慈)와 비(悲)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즉, 사랑(慈)과 연민(悲)의 마음입니다. 자비심은 자신보다는 남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근본입니다. 자비심을 바탕으로, “이익과 안락은 모든 어머니들께 드리며, 어머니들의 모든 손해와 고통은 아무도 모르게 내가 받게 하소서.”라는 게송의 내용처럼, “주고받기(T: gTon\g-len)” 수행을 쌓아 나가야 합니다.

실제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하여 일하거나 그들의 고통을 직접 대신 받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전생부터 자신과 아주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경우일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그래도 자신이 대신 고통을 받거나 일할 수 있겠지만, 그 외에는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마음을 훈련하겠습니까? 그것은 최소한 스스로 용기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동기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또 보리심(菩提心)을 개발하기 위한 자신의 수행을 극대화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주고받기”같은 수행을 시작하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불행과 고통으로 가득한 그들의 애처로운 상황을 그려보는 관상(觀想)을 말합니다. 지금 당장 그러한 모습뿐만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것까지 함께 그려보아야 합니다. 지금의 고통은 바로 이전에 지은 업(業)의 원인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 지은 업이 바로 미래의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다른 이들의 상황을 그려봄으로서 마침내 그들의 고통스런 상황에 진심어린 애정을 보일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에서 그들을 구하려는 급박한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의 짓고 있는 업이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면, 모든 중생들의 다가올 고통의 원인과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을 제거하고 싶은 급박한 마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혐오감 없이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을 끊임없이 마음에 그려 보는 수행입니다. 실제 이 수행은 마음에 특정한 상황과 조건을 깊은 집중의 상태로 만들어 수행의 대상을 그려 보는 특별한 수행의 방법인 관상법(觀想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생각만으로도 마음을 훈련할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다른 이들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대신 받는다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중생들에게 충만한 행복을 주려는 적극적인 원(願)을 세워야 합니다.

이렇게 바른 원을 세우고, 이 수행의 두 번째 단계인 “주기(T: gTon\g)” 수행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줍니다. 즉,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들, 생각과 말과 몸으로 가진 모든 것을 말합니다. 모든 중생들의 이익과 편안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는 관상(觀想)을 해야 합니다. 물론 사랑과 연민인 자비심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들의 채워지지 않은 모든 행복을 채우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기”수행입니다. 다음은 마지막 여덟 번째 게송입니다.

8. 이 모든 것 역시 세간팔풍(世間八風)*으로
분별하는 객진번뇌(客塵煩惱)**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제법(諸法:현상)을 환몽(幻夢)으로 아는 지혜***로
애착 없이 [윤회의]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역주:세간팔풍(世間八風)이란, 『불지경론(佛地經論)』 第八에 보면, 세상에서 마음을 흔드는 여덟 가지 요소를 바람에 비유한 말한다. 즉 이득, 손실, 뒤에서 비난 하는 것, 뒤에서 칭찬하는 것, 앞에서 칭찬하는 것, 대 놓고 비난 하는 것, 고통, 즐거움의 여덟 가지를 말한다.)

(**역주: 분별의 객진번뇌(客塵煩惱)란 본래 분별할 것이 없는 청정한 성품에, 이것저것을 분별하는 사유가 얽히고설키어 마치 먼지가 쌓인 것처럼 번뇌로 그 본성을 가리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역주: 즉 모든 현상계가 꿈속의 허깨비와 같은 것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 마지막 게송에서는 절대적인 승의(勝義) 보리심을 개발하는 방법에 대한 핵심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반면에 앞의 일곱 게송들은 보리심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방법들과 관련한 것입니다. 자신보다는 남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마음을 개발하는데 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세월을 번뇌 망상에 물들어왔습니다. 이것이 법(法)을 수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입니다. 명예와 재산, 욕망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법을 수행하는 사람조차도 “나는 종교인이야, 난 법을 수행하는 수행자야.”라는 자만심이 생겨 마치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처럼 행세하거나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아래로 내려다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모든 번뇌 망상은 모두 자신을 괴롭히는 원인이 됩니다. 이것은 또한 보리심을 개발하는데도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소위 “세간팔풍(世間八風)”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분별심(分別心) 즉, 남과 나를 비교하여 따로 구분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보호해야 합니다. 이 세간팔풍에는 이득, 손실, 뒤에서 비난 하는 것, 뒤에서 칭찬하는 것, 앞에서 칭찬하는 것, 대 놓고 비난 하는 것, 고통, 즐거움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기르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을 향한 끊임없는 관심 속에서 이루어 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게송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제법(諸法:현상)을 환몽(幻夢)으로 아는 지혜로 탐욕 없이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중생과 부처,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기쁨과 슬픔, 선과 악 등을 담고 윤회하는 이 모든 현상계가 나타나는 대로 혹은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보면, 이들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단지 서로 의지하여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 그 본래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집착과 분노 같은 수많은 번뇌 망상 즉, 번뇌의 때가 잔뜩 낀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현상계의 특성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무지(無知)로 인하여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확실히 현상계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 기쁜 것과 슬픈 것이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현상계의 모든 것들이 언제나 그렇게 독립적으로 본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바른 마음을 키우는데 아주 중요한 구분입니다. 이런 구분을 통하여 남을 위한 마음을 바르게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적이고, 상대적인 구분이며, 그에 따른 수행의 방법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언제나 그렇게 같은 상황과 조건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게송의 두 번째 구절은 선과 악이라는 상대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은 원인과 조건의 결합일 뿐 본래 그러한 성품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과 악은 단지 세속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자칫 정신적인 수행을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구분은 단지 세속적인 것으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하나의 이해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 게송의 두 번째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모든 현상을 환몽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여러 가지 맥락에서 다양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즉, 인간과 현상을 미세하게 관찰해 보면, 꽉 차 있는 실체가 아니라 무언가 비어있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실질적인 상태를 공성(空性)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 인간이나 현상에 본래의 성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현교(顯敎)와 밀교(密敎)를 막론하고 아주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밀교에는 “환광(幻光)”이라는 의미의 용어가 있습니다. 이 용어 역시 현교에서는 다른 맥락으로 사용합니다. “환(幻)”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합니다. 항상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위의 게송에서 의미하는 것은 현상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상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마치 본래 그러한 성품(自性)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현상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 자세하게 살펴보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상은 “환(幻)”이며 환상과 같습니다. 모든 현상이 실재(實在)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 『반야바라밀경(般若婆羅蜜經)』에서는 일체의 근본 지혜에서 생긴 다양한 현상의 유형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유형들을 다시 세세하게 살펴보면, 본래 그러한 모습(自性)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마치 부서진 시계에는 원래 시간을 보여주던 시계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에는 본래 이것이라고 할 만한 성품이 없다는 것을 수행에서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실제 현상에서 이것을 점검하면 모든 현상의 성품이 결국 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수행으로 돌아와, 모든 현상이 비추어서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되면, 존재의 궁극적인 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이전의 수행 중에 경험했던 것을 적용하여, 이 현상에는 본래 이것이라고 할만한 성품이 없다는 것을 보면서도 보이는 현상계 역시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눈에 보이는 이 모든 현상 역시 꿈과 다르지 않은 환상으로 인식합니다. 즉, 환몽(幻夢)의 경험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현상의 궁극적인 존재 형식을 깨달음으로써, 공성(空性)을 깨닫고 자성(自性)이 없음을 이해합니다. 이렇게 해서 눈에 보이는 모든 상대적인 현상은 단지 세속적으로 이름 붙인 것임을 확인합니다.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된 이 모든 현상에 대한 오해를 말끔히 지울 때까지 끊임없이 수행하고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윤회의 근본적인 원인인 무지와 편견을 뿌리 뽑을 수 있습니다. 무지와 편견이 사라지면, 윤회 속에 다시 태어나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게송에서는 현상의 실제 자성(自性)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 “속박에서 벗어나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애착 없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것이 게쉐 랑리 탕빠께서 지으신 『수심팔훈』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요약한 구절입니다.

이상은 까담빠(*역주: 티벳 불교의 한 종파인 까담빠(bKa\' gdams pa)는 신파(新派)의 막을 연 학파이기도하다. 개조는 아띠샤(Atisha) 존자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의 방법을 아주 체계화 하였다. 겔룩 종파는 이 까담빠의 후신이다 그래서 겔룩을 신 까담빠라고 부르기도 한다.) 게쉐 랑리탕빠(glang ri thang pa)께서 지은신 『수심팔훈(修心八訓)』으로, 다른 모든 로종(blo sbyon\g, 修心) 문헌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내용을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을 참고 하여 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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