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경향신문 평화는 정치적 기술과 타협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티베트 불교에 ‘자비명상’이라는 전통이 있다. 화가 나있거나, 미움과 탐욕이 가득차 있는 사람에게 검은 연기가 나온다고 생각하면서 그 연기를 내가 깊숙이 들여 마셔 정화하는 명상법이다. 일견 쉬워 보이지만 체득하기에는 녹록치 않은 이러한 명상법으로 티베트인들은 타인에 대한 미움을 줄이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처음엔 가족을 대상으로 시작하는 자비명상은 그 대상을 이웃과 사회, 나라, 세계로 넓혀가면서 궁극적으로 지옥중생에까지 명상의 대상을 확장한다.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세계평화는 궁극적으로 자비와 사랑, 관용과 같은 보편적 심성을 지니려 애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늘어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체제·제도가 아닌 보편적인 심성계발이 보다 중요한 평화의 원동력이라는 달라이 라마의 주장은 이미 많은 세계인들에게 평화의 유일한 해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 우리는 현정부들어 심혈을 기울여 온 남북관계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궁극적인 평화가 정치적 기술과 타협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뉴욕 테러가 발생한 다음날인 9월12일 달라이 라마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는 “자비심만이 테러를 근본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다”며 전쟁을 일으키지 말 것을 촉구했다. 내로라 하는 나라들도 미국 눈치만 살피던 때여서 적절하고도 용기있는 행위였다. 물론 미국정부는 공식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내심 불쾌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반면 지난 4년간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 공을 들여 온 우리는 미국정부의 철저한 무시에 가슴만 앓고, 나아가 ‘악의 축’ 운운하는데도 변변한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 여전히 많은 국민들은 미국의 세계패권을 위해 한반도가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불과 12만명의 망명 티베트인들을 이끄는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전쟁 일으키지 말라”고 당당하게 미국에 말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민족 모두의 명운이 걸린 문제에 제대로 우리 생각조차 전달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물론 김대중 정부는 강경한 부시 정부와 국내 보수야당에 원인을 돌리고 싶을 것이다. 또 티베트와 한국과는 사정이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절박한 형편으로 치자면 티베트가 우리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문제의 본질은 남북 화해공존을 위해서는 민족 내부부터 자비와 관용의 심성을 확산하는데 있는데도, 이를 여전히 정치적 기술이나 타협 문제로 접근해 온 정부와 대통령의 마음상태에 있다. 부시의 방한만 해도 그렇다. 부시 정부가 강경책을 펼칠 때마다 ‘북한이 많이 변했다’고 미국을 설득하려했던 정부는 이번에도 역시 전투기 구입과 햇볕정책 지지를 연계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변하지 않았다. 북한 역시 당분간 먼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물음, 예컨대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발언을 자제해달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왜 없는 것일까? 일견 실용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번 심성과 철학이 결핍되어 용두사미가 되는 정부와 대통령 때문이라면 너무 지나친 폄하인가?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공존의 시대가 오려면 무엇보다 먼저 타인의 분노, 미움의 검은 연기를 빨아들이겠다는 자비심이 확산되어야 한다. 50년 동안 한반도를 휘감았던 증오와 대립의 검은 연기일랑은 모두 다 내가 마셔 정화하겠다는 마음이 지도자로부터 확산될 때 화해와 통일의 길은 열린다. 앞이 흐릿함을 느낄 때마다 달라이 라마가 한국에 방문하기를 희망하는 마음 간절하다. 평화는 정치적 기술과 타협으로가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심성에서 비롯됨을 우리 국민이 확인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까닭이다. <정웅기·달라이 라마 방한 준비위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