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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달라이 라마께서 설하시는 <보살의 37수행법>

로덴
달라이 라마께서 설하시는 <보살의 37수행법> --둘째날



둘째 날



어제 설명한 것처럼, 지금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곳 즉, 깨달은 분이 되신 아주 특별한 곳에 있습니다. 용수(龍樹) 보살과 용수 보살의 정신적인 제자인 두 분(*역주: 여기서 용수 보살의 두 제자는 성천(聖天, Aryadeva)과 불호(佛護, Buddhapalita)를 말한다.) 그리고 수많은 티벳인들이 이곳 보드가야를 거쳐 갔습니다. 예를 들면, 아주 오래 전에 티벳의 캄(Kham) 지방에서 이곳으로 온 상계 예쉐(Sang-rgyas ye-shes)는 이 지역에서 승원장(僧院長)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양한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혜의 가피를 받기 위해 이곳에 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곳 보드가야의 특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힘차고, 바른 동기를 가지고 지금 여기에 와 있습니다. 그렇게 특별한 이곳에서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고, 적절히 수행한다면, 보다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특히 티벳에서 이 법문을 듣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힘들게 넘어온 분들은 이 성스러운 땅에서 더 많은 복덕을 짓고 이 생의 완전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 대부분은 아주 운이 좋은 편입니다. 수많은 번뇌 망상과 욕망, 증오가 만연한 지금 이 세상의 이러한 시기에 자애(慈愛: 사랑)와 자비(慈悲: 연민) 등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부유해진다 하더라도 늙고 죽어가는 것을 돈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마음에서 고통이 오는 것을 아는 이상, 재물과 같은 외적인 조건 만으로는 정신적인 고통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8226;종교적인 방법을 따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수많은 영적인 전통 중에서 이렇게 불교에 관심을 가진 여러분의 인연은 아주 놀랄만한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많은 서양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바로 불교에 대한 관심 때문에 여기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고 있으며, 불교에 대해서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불교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서구인들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향에 의한 것입니다. 이들은 불교를 받아들이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없이 점검하고 분석해왔습니다. 이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우리가 지금 이 성스러운 보드가야에서 얼마나 소중한 기회를 얻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으신 부처님의 위대한 행적과 성품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따라서 가능한 한 많은 복을 짓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특별한 곳에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강한 힘으로 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여기에 있는 동안 물건을 팔더라도 속이지 말고 정직해야 하며, 이익을 남기더라도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탑돌이를 할 때도 잡담하거나 방황하지 말고 집중력 있게 존경심으로 해야 합니다. 또, 주변의 아무 곳에나 휴지를 버리거나 용변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렇게 수많은 인파가 몰린 이곳 보드가야의 한정된 화장실로는 줄을 서서 기다리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 곳에 가서 용변을 보더라도 뒷사람을 위해서 가능하면 깨끗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티벳은 추운나라입니다. 그렇지만 여기 인도는 낮은 곳에 위치하여 여러 가지 조건이 열악합니다. 그러니 아무 곳이나 더럽히지 마십시오. 책임감을 가지고 조심하기 바랍니다.

절을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절을 할 때는 너무 구부리거나 펴지 않고 바르게 해야 합니다. 손을 잘 펴서 손바닥을 땅에 대고 해야 합니다. 초를 밝힐 때도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촛불을 밝힌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염송(念誦)해야 합니다. 마음을 한 곳에 완전히 집중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행위는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맑고 순수한 동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우리가 무엇을 하던 항상 자신의 동기와 마음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가능한 한 번뇌 망상을 줄이려고 해야 하며 부정적인 행동들을 피하려고 해야 합니다. 자신보다는 남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대승의 핵심입니다. 따듯하고 친절해야 합니다. 행동은 착하게, 마음은 사랑으로 따듯하고 친절하게 하는 것,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만약 외적인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경쟁과 자존심만을 키운다면, 부정적인 업만 쌓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항상 자신의 동기가 바른지에 대해 점검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스럽고 특별한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동기를 한 번쯤은 세워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왜 보리심을 일으키셨는지 그 이유를 기억하고,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스런 곳에서, 바르고 큰 동기를 세우고 친절한 마음을 발전시킨다면 큰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입보리행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언제나 화내지 않도록 하십시오. 화는 모든 복덕을 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잃고 화내지 않도록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마음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성숙하게 길들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시기하는 대신에 그들의 공덕을 향수(享受)해야 합니다. 칠지작법(七支作法)(*역주: 칠지작법(七支作法, Yan Lag bDun)은 티벳 불교의 가장 일반적인 기도 수행 방법으로, 정례지(頂禮支) 공양지(供養支) 참회지(懺悔支) 수희지(隨喜支) 권청법지(勸請法支) 소청주세지(所請住世支) 회향지(回向支)의 구조로 되어 있다. 각각의 지(支)는 간단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① 정례지(頂禮支): 법계(法系)의 스승들께 절을 올리며 예경(禮經) ② 공양지(供養支): 향 꽃 등불 산개(傘蓋) 등을 공양 올림 ③ 참회지(懺悔支): 신 구 의 삼업으로 지은 탐 진 치 삼독에 대한 참회 ④ 수희지(隨喜支): 시방에 계신 스승의 공덕에 수희 동참 ⑤ 권청법지(勸請法支):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 법을 청함 ⑥ 소청주세지(所請住世支): 항상 중생과 같이하기를 바람 ⑦ 회향지(回向支): 이 수행 기도 공덕으로 쌓은 복덕을 중생에게 회향.)의 기도문을 염송(念誦)하고 그 내용의 의미를 잘 생각하십시오. 가능한 한 많은 복덕을 쌓기 위해 노력 하십시오. 알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함께 복덕을 쌓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보리심(菩提心)의 동기에 대해 공부할 차례입니다. 톡메 상뽀 보살의 『37 수행법』에서는 이 부분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과 실제 가르침 그리고 끝 부분입니다. 실제 가르침은 『보리도차제론』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세 가지 수준의 보리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1. 가만(暇滿)*의 얻기 힘든 큰 배를 얻은 이 때에
나와 남을 윤회의 바다에서 건지기 위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으며
문사수(聞思修)**를 행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역주: 가만(暇滿)이란 팔유가(八有暇)와 십원만(十圓滿)을 말한다. 즉 (1) 지옥에 나지 않음 (2) 축생으로 나지 않음 (3) 아귀로 나지 않음 (4) 장수천(長壽天)에 나지 않음 (5) 변방(법의 불모지)에 나지 않음 (6) 몸이 불완전 하지 않음 (7) 사견(邪見)을 지니지 않음 (8) 여래 없는 때에 나지 않음 등의 여덟 가지의 여유인 팔유가와 (1) 인간의 몸을 받은 것 (2) 중심지(법이 잇는 곳)에 난 것 (3) 몸이 온전한 것 (4) 전도업(顚倒業 혹은 無間業: 최고의 악업)을 짓지 않은 것 (5) 불법(佛法)을 믿는 것 (6) 부처님이 계신 것 (7) 정법을 설하시는 것 (8) 가르침을 펴기 위해 머무시는 것 (9) 법의 수레를 굴리시는 것 (10) 법을 수행할 인연이 있는 것 등의 열 가지를 구족한 십원만을 말한다. 여기 열거한 가만(暇滿)의 구체적인 내용은 경론의 출전 근거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내용이 다르지는 않다.)

(**역주: 문사수(聞思修)는 불교의 교육과 수행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용어로서 듣고 생각하여 수행한다는 뜻이다. 역사 속에서 불교는 이 문사수(聞思修)의 전통이 바로 섰을 때 법이 흥하였고, 이것이 흔들릴 때는 어김없이 법난의 시대를 맞이하고는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佛法, Buddhadharma)은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린 마음을 성숙하게 하는 방법을 모은 하나의 체계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고통을 원치 않고 행복을 바라는 것은 똑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수행해야 하는 지에 대해 잘 모릅니다. 우리가 단지 우리의 몸만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 가지 유전적인 모습으로 볼 수 있겠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날 때부터 자유로움(有暇)과 온전함(圓滿)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것은 여기 있는 우리 자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수행할 수 있는 그런 자유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올 자유가 있었고 법을 수행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르침을 듣지 못할 정도로 소리를 못 듣는 것도 아니며 여러 가지 감각 기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는 여덟 가지의 자유로움(八有暇)과 열 가지의 온전함(十圓滿)을 갖추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몸을 받고 태어나지만,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할 자유와 독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그렇게 드문 기회를 얻었습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렇게 행동하며 법을 가르쳐 줄 스승이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생에 지은 그에 대한 원인이 현재 결과로 나타나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이 좋은 인연(善緣)은 우리가 전에 지었던 선한 원인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회를 얻은 것이며, 오늘의 이 선한 인연은 미래에 역시 그럴 수 있는 바탕입니다. 집착과 혐오 그리고 무지에 갇힌 마음을 버리고 바르게 행동한다면, 다음 생에도 고귀한 인간의 몸을 받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가끔씩만 이렇게 행동합니다.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이러한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낙담하지 말고 언제나 분명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가능한 한 많은 선행을 쌓아야 합니다.

선하고 성숙한 마음은 일반 가게에서 살수 있는 것이 아니며 땅에 심거나 은행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깨달음을 얻는 지혜를 구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과거의 위대한 스승들의 예를 따라야 합니다. 티벳에는 먼저 위대한 닝마(rNying-ma)(*역주: 닝마(rNying-ma)는 티벳 불교의 사대 종파 중에 하나이다. 티벳 불교에서 가장 먼저 8세기 경에 성립된 학파로 고파(古派)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파(新派)인 사꺄(Sa-skya) 까규(bKa\'-brgyud) 겔룩(dGe-lugs-pa) 종파와의 역사적인 구분에서 생긴 이름이다.)의 스승들이 계시며, 사꺄(Sa-skya)의 스승들과 까규(bKa\'-brgyud)의 마르빠(Marpa), 밀라레빠(Milarepa), 감뽀빠(sGampopa) 등의 스승들이 계십니다. 이 스승들은 모두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엄청난 노력을 다하여 깨달음에 이르신 분들입니다.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점검하고 물어봐야 합니다. “지난 오년, 십년, 십 오년 동안 나는 나의 마음을 성숙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였던가?” 그 동안 조금이라도 향상될 수 있었다면, 아주 다행이고 용기를 가질만한 일입니다. 다른 때 하던 것처럼 자만하지는 마십시오. 지난 오년 십년 동안 조금이라도 나아 졌다면 시간이 없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가르침을 듣고(聞) 생각하고(思) 수행(修)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공부할 때는 언제나 그에 대한 자세를 점검해야 합니다. 무엇을 들었든지 바로 수행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언제나 듣고 생각하고 수행해야 하며, 그 중에 어느 것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2. 친구를 향한 애착(愛着)은 물처럼 요동치고,
적을 향한 증오는 불처럼 타오르며,
취사(取捨)를 망각한 우매함은 캄캄한 어둠과 같으니,
고향을 떠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무지와 집착의 고향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더라도 집착이나 미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여기는 나의 조국, 이들은 나의 가족”이라는 관념을 버리고 적들에 대한 증오와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집착과 증오는 좋지 않는 고통을 불러들입니다. 집착과 증오는 최악의 번뇌 망상으로 모두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간다 해도 다시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 거기에서 집착이나 증오가 또 자라날 것입니다. 이것은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집착과 증오를 버리고 그 마음을 모든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매력 있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우리는 금방 그 사람에게 집착하며 조금만 그 매력이 사라져도 그를 미워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태도를 버리고 대신 사랑과 자비를 지니고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나쁘게 행동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의 행복을 빌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집착을 다른 이를 돕기 위한 자세로 전환해야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 크게 대단하거나 특별한 것도 없지만, 여전히 그곳에 집착하거나 증오합니다. 바로 지금이 그것을 버릴 때입니다.

3. 환멸(幻滅)의 땅을 떠나면 번뇌는 점점 줄어들고
방만(放漫)하지 않으면 선행은 저절로 늘어나리니,
이지(理智)에 밝아 법에 대해 확연히 알고서
고요함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번뇌를 떠나면, 우리의 머리가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더 쉽게 선행으로 돌아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조용하고 한가로운 곳에 사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홀로 조용한 곳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완전히 듣고 생각하여 집착과 증오를 버리고 홀로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고귀한 인간의 몸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바르게 활용하여 좋은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다음에 공부할 『삼종요도(三種要道)』에서 쫑카빠 대사(大師)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주로 이 생에만 사로 잡혀 있는 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미래의 삶에 더 중점을 두면 현재의 삶은 자연히 잘 따라 갈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삶에만 집착하면 미래의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지금 이생에만 집중하는 태도를 바꾸어서, 미래를 더 향상시키려고 해야 합니다. 또 이를 통해 모든 것이 변하는 무상(無常)함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4. 오랫동안 가깝던 친구들과 헤어져
애써 일군 재물을 뒤로 한 채
몸이라는 숙소에서 의식의 손님이 떠나가니,
이 생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이 세계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이 삼계(三界)(*역주: 삼계(三界)는 과거 현재 미래 또는 색계(色界) 욕계(欲界) 무색계(無色界)를 의미하며, 윤회의 속박에 얽혀 있는 시공간을 뜻한다.)에서 영원히 산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곳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불교 사상 가장 위대한 승원(僧院)이자 대학이었던 중세 인도의 나란다(Nalanda)는 위대한 아띠샤(Ati&#347;a) 존자(尊者)께서 승원장(僧院長)으로 주석(主席)하시던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폐허만 남아 무상함의 교훈만 그대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과거 티벳의 문화를 상기해 보십시오. 이제는 과거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게 사라졌습니다. 지금부터 또 백년이 지나면 여기에 계신 여러분 중 아무도 살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흐름(心相續)에 있는 분명한 인식만 이어질 것입니다. 과거나 미래의 생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과거에 지은 원인에서 생겨나 지금 자신이 향유하고 있는 이 부귀영화도 함께 가는 것은 아닙니다. 친척이나 가족들과 얼마나 친했던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모두 두고, 홀로 자신의 길을 가야 합니다. 선을 행한 사람은 행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미세한 차원의 자의식(自意識)의 흐름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저지른 행동의 결과를 미래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는 홀로 길을 떠나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도 죽음이 찾아오면 홀로 길을 떠나야 합니다. 모택동(毛澤東)이 생을 마감할 때도 홀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인민이나 가장 친했던 혁명의 동지 중 어느 누구도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얻었던 모든 명성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미래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렇게 고귀한 삶을 살았던 마하뜨마 간디(Mahatma Gandhi)도 역시 홀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동료와 매일 신었던 샌들 그리고 뒤가 둥글게 휘어져 귀에 걸 수 있었던 동그란 안경도 모두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식에 그는 함께 하지 않습니다. 물질적 소유물과 친구, 친척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부모님께 받은 몸조차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궁탕 린포체(Ghungthang Rinpoche)께서 설명하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홀로 가야 합니다.

티벳인인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어려운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인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고 나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리라는 것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직 인간으로 살고 있는 동안 좀더 발전하지 못하고, 다음 생에서는 인간의 몸도 받지 못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지금 우리는 먹어야 삽니다. 완전한 삼매(三昧)를 이룬 위대한 분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대부분은 이렇게 만질 수 있는 음식을 먹어야 삽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먹기 위해 이 생에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바쳐 먹기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30%는 이 생을 위해 70%는 다음 생을 위해 안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어렵다면 반반씩이라도 할애할 수 있을 겁니다. 홀로 이 생을 모두 떠안고 있는 건 아닙니다.

5. 누군가와 함께하면 삼독(三毒)*은 늘어가고
문사수(聞思修)를 행함은 점점 줄어드니,
자(慈: 사랑)와 비(悲: 연민)를 사라지게 하는
나쁜 친구**를 멀리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역주:삼독(三毒)은 탐착하고(貪) 성내고(瞋) 어리석은(痴) 세 가지 해로움을 말한다.)

(**역주: 여기서 나쁜 친구는 실제의 사람을 말하기도 하지만, 삼독(三毒)을 자라나게 하는 외적인 환경과 행위 그리고 내적인 번뇌망상(煩惱妄想)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로 미래의 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 그렇게 같이 할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스스로 가르침을 듣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따라서 좋은 친구들의 예는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줍니다. 자신과 같은 성향의 친구는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위의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쁜 친구는 길을 잘못 인도하여 그들이 가진 것으로 우리를 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만 그들이 주는 나쁜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6. 누군가와 가까이 하면 잘못이 줄어들고
공덕이 상현(上弦) 달처럼 차오르니,
선지식(善知識)*을 자신의 몸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역주: 선지식(善知識)은 선우(善友)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법을 가르치고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스승이나 도반을 뜻한다.)

만약 우리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 친구를 만나고 좋은 정신적인 스승과 관계를 맺게 되면, 그들은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를 발휘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알맞는 스승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사람도 완전한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티벳인들에게는 아주 유명한 툴꾸(sPrul-sku)(*역주: 툴꾸(sPrul-sku)는 화신(化身, Nirmanakaya)이라는 뜻으로, 보통 티벳에서는 전생에 위대한 깨달음이나 업적을 남기신 스승들이 다시 태어난 후신(後身)을 부르는 용어로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이 툴꾸들은 전생에 자신이 직접 세웠거나 머물렀던 승원을 그대로 승계 받는다.)나 라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완전한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유명한 이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이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많은 추종자와 재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돈, 명예, 재산이 누군가를 스승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자격이나 공부와 수행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세세하게 살펴보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부처님이 강조하셨고 쫑카빠 대사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제자와 정신적 스승의 관계에서 스승께 헌신(獻身)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스승이 완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면 스승이 무슨 말씀을 하더라도 완전히 스승께 헌신할 수 있습니다. 나로빠(Naropa)와 띨로빠(Tilopa)의 관계처럼 말입니다. 나로빠는 스승 띨로빠께서 높은 탑에서 몸을 던지라고 했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뛰어 내렸습니다. 하지만 스승이 그렇게 완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면 어떤 말을 한다 하더라도 함부로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저 탑 위에서 뛰어내리라고 한다고 정말로 그렇게 할 겁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 같은 초심자에게는 우리 스스로 쌓을 수 있는 계율 등의 튼튼한 기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티벳인들이 하는 이러한 계율적 수행 방식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계율을 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 사랑과 자비의 대승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정점에서 밀교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행(行), 작(作), 요가(瑜伽), 무상요가(無上瑜伽)의 네 가지 유형(*역주: 밀교 수행을 구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행(行, kriya작(作, carya), 요가(瑜伽, yoga), 무상요가(無上瑜伽,annuttara- yogatantra)로 나누는 위의 구분은 그 중에서 네 가지의 유형(四種瑜伽,rGyud-sde bzhi)으로 나눈 방식이다. 이러한 구분은 신파(新派, 앞의 역주 참조)의 방식으로 구파(舊派)인 닝마(rNying-ma)에서는 여섯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이 있습니다. 사실 부처님이 가르치셨던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수행의 모든 수행 방법을 모두 보존 전승해 온 곳은 티벳 불교 밖에 없는 걸로 압니다. 남방의 여러 나라에서 하는 수행은 주로 계율에 의지하는 수행으로 대승적인 전통이나 밀교적인 전통은 없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등에도 대승과 밀교적 전통이 있기는 하지만 행, 작, 요가 등의 유형만 있을 뿐 무상요가(無上瑜伽, Anuttarayoga)를 포함한 완전한 체계를 수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 공성(空性)에 대해서도 공부들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유식(唯識)이나 자립논증(自立論證, Svatantrika) 중관(中觀)학파의 체계를 따라 공부하고 있을 뿐, 마지막 단계인 귀류논증(歸謬論證, Prasangika) 중관학파의 견해까지 공부하는 전통은 거의 없는 걸로 압니다. 어떤 곳에서는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단지 밀교의 행법(行法)만을 수행하거나 아예 두 가지 다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완전히 모든 수행을 다 할 수 있는 체계는 티벳 불교에만 아직까지 그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여러분 자신 각자가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7. 자신도 윤회의 감옥에 갇혀 있는
세속의 신(神)이 누구를 보호하리까.
그러므로 그 곳에 의지하면 흔들리지 않는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이 게송은 귀의(歸依)에 대한 내용입니다. 수행을 할 때는 언제나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는 공덕을 기억해야 합니다. 티벳어로 부처님은 “상게(Sangs rGyas)\"입니다. “상(Sangs)”은 모든 것의 제거 즉, 모든 잘못을 제거하고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게(rGyas)”는 모든 공덕을 성취하고 깨닫는 다는 말입니다. 범어로 “다르마(Dharma)”는 확정적인 질서를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즉,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다르마(Dharma)\"를 따른다는 것은 고통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실제 “다르마(Dharma)에 대한 귀의인 법귀의(法歸依)”는 멸제(滅諦)와 도제(道諦)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마음에 번져있는 얼룩을 닦아내고, 그것을 청정한 공성(空性)의 상태로 녹이는 것이 멸제이고, 공성에 대한 본래 인식을 가지기 위한 마음의 길이 도제입니다. 이 두 가지를 법귀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승가에 대한 귀의는 공성에 대한 본래 인식을 가진 성인(聖人)들에 대한 귀의를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소중한 가르침의 대상들에게 귀의하는 것을 삼귀의(三歸依) 또는 귀의삼보(歸依三寶)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의사와 같고, 법은 약과 같으며 더 자세하게는 치료의 길 또는 멸제와 도제를 통해 치료된 상태를 말하며, 승가는 도움을 주는 간호사와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조금의 불편한 고통도 싫어하며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고통이 제거된 상태나 제거하는 방법이 법귀의(法歸依)입니다. 이 때 우리에게는 스승이 필요한데, 이것이 부처님에 대한 귀의입니다. 또 이를 도와줄 친구인 승가에 대한 귀의가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귀의의 대상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고통을 두려워하고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귀의를 위한 원인을 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정화의 길과 소멸의 진리인 멸제를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부처님 자신이 귀의의 대상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으니 그 가르침에 귀의해야 합니다. 결과적 귀의(*역주: 자신 안에 있는 궁극적인 대상인 불성(佛性)에 귀의하는 것을 의미하며, 수행의 마지막 결과물이다. 따라서 부처라는 결과에 대한 귀의를 의미한다. 반면에, 원인적 귀의란 지금 당장 부처가 될 원인을 하나씩 심는 것을 말한다.)는 고통을 제거하고 깨달음을 얻을 우리의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삼보에 대한 원인적 귀의는 지금 바로 고통을 제거하고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행위를 하나씩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삼보에 귀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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