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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의 응답 I.

로덴
질의 응답 I.>>

(* 여러분과의 대화를 좀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중간 중간 이렇게 질의응답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질의응답은 주로 여러분이 남겨주신 <코멘트>에 대한 답입니다. <코멘트>에 바로 바로 답하기가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아 이런 대안을 내봅니다. 지혜의 길에 들어 선, 여러분 모두에게 법계의 가피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로덴 합장.)



질문 1)

지혜가 없어 이해가 부족하여 여쭙고자 합니다. 인에 대한 과가 없을 경우도 있는지요? 가령 남이 나를 때렸을 경우에 내가 남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사랑했을 때 말입니다. [2004-06-18 08:06:03]


“님의 의문에 법계의 가피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불교에서 말하는 인(因)에 대한 과(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또 앞으로 전개될 모든 의문에 대한 해결점을 스스로 찾아 나갈 때도 이 두 가지 차원을 먼저 잘 이해한 다음 담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님께서 홀로 앉아 수행을 할 때면, 거칠게나마 그 동안 님이 경험하던 것들이 잠시 사라지는 경험들을 하게 될 겁니다. 마음에 답답한 것들이 가라앉는 다든가, 일정한 감각에 대한 의식들이 사라지는 경우 말입니다. 그와 반대로 눈을 뜨고 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감각들이 더 거칠게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님이 감각을 가지고 경험하는 차원에서 의식하는 것들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상대적인 감각에 의지하여 경험하고 반응하는 차원을 세속적이라고 말합니다. 좀 더 전문적으로는 속제(俗諦, 세속의 틀 안에 있는 진리)라고 합니다. 이는 절대적 궁극적 진리인 진제(眞諦)에 대한 상대적 용어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설명하는 진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거친 수준의 몸이나 말 또는 의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 진리인 진제는, 마치 무한히 펼쳐진 우주의 끝을 상상할 수 없고, 깊은 사색에 들어 끝없이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세속의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사색(혹은 수행)의 끝자리에서 또는 보편적이고 완전한 의식으로 충만하여 더 이상 세속적 상대적 감각이 끼어들 여백이 없는 상태 정도로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수행의 길에서는 거친 감각들이 모두 맑혀지고 맑혀져서 더 이상 얼룩이 없는 투명한 맑음과 같다고도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님께서 질문하신 인과(因果)에 대한 의문은 절대적 진리인 진제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극히 상대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사실들을 관찰한 결과로 얻어진 원리이자 진리입니다. 예를 들어 중력에 의해 사과가 떨어질때 우리는 그것을 “중력의 법칙(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부르며, 발견자를 뉴턴(Newton, 1642-1727, 영국의 물리수학자)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깊은 관찰의 결과로 얻어진 이 인과(因果)의 원리를 불교에서는 “인과법 혹은 인과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발견자는 바로 부처님입니다. (물론 인과의 법칙을 부처님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인도의 많은 성자와 현인들이 이 법칙을 통해 자유로움을 얻었고, 그 외에도 많은 지혜로운 이들이 여기에 의지하여 세상의 원리를 깨우쳤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세상에 대한 바른 원리(俗諦)를 이해할 수 있고, 지속적인 훈련을 통하여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 접근할 수 있다면, 이를 두고 불교에서는 수행한다. 혹은 깨달음을 향해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가끔씩 우리는 “한 생각만 바꾸면 된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한 생각은 바로 이 세속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 순간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고 꾸준하게 원인을 심을 때 그 결과로 한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의 법칙”입니다. 몸을 가진 존재는 모두가 세속적 진리의 영향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의 스승들도 몸과 마음이 세속에 머무는 동안은 이 “인과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몸이라는 원인(因)과 조건(緣)이 있기에 죽음이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자신도 세속의 진리 안에서는 몸의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불행한 원인을 심으면 불행한 결과를 맺고 행복한 원인을 심으면 행복한 결과를 얻는 것이 바로 이 세속적 “인과의 법칙”입니다.

님이 질문하신 것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만약 남이 나를 때린다면, 또 그것을 맞고도 나는 오히려 남을 불쌍히 여기다면, 이 역시, 세속적 차원에서 나를 때린 사람은 누군가를 때린 인연을 심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 스스로 그가 지은 행위의 결과를 언젠가는 받아야 하는 것이 “인과의 법칙”입니다. 또 그렇게 맞고도 오히려 때린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연민의 마음을 낸 자신에게는 스스로의 마음을 성장시키는 아름다운 결과가 돌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나만이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그것 역시 인과의 법칙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때린 사람도 결국 궁극적 차원에서는 나와 다르지 않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내 마음의 한부분과 다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의 모든 부분이 다 좋아져야 내 모든 것이 좋아 지는 것처럼, 나를 때린 이가 행위의 결과로 인해 어둡고 불행한 결과 속해 살아야 한다면 궁극적으로 나의 행복 역시 보장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때린 사람을 연민으로 대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그의 마음이 가라앉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과의 법칙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현재 자신의 능력으로는 자신의 화도 가라앉히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단순히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쁜 원인을 정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이니까요.

그러면 왜 불교에서는 수행이라는 것을 합니까? 간단히 말해, 세속적인 인과의 법칙을 바로 알고 깨우침으로서 완전한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모든 중생이 궁극적 진리 안에서 나와 다르지 않다는 큰 깨우침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몸의 한 부분과 같이, 서로의 인연으로 얽히고설켜있는 모든 중생의 아픔을 달래고 도울 수 있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즉 세속의 진리 안에서 바른 깨달음의 모든 원인을 심는 것이 수행이이라면, 그 결과로 중생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된 것이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2)

모든 만물이 저의 스승입니다. 청정한 계를 지키는 것이 보살의 가장 기본 된 도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혜를 깨쳐주기 위한 방편이 아닌 무지 속에 저질러진 악행이 수행자의 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도 악행이라 생각해야 합니까? 어린 아이같이 질문하여 죄송합니다.[2004-06-18 08:06:27]


“세상에 어린 아이 같은 질문은 없습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의 질문에 충실합니다. 의문이 풀릴 때까지 열심히 답을 찾는 우리의 모범이지요.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이 모르는 것은 슬며시 덮어버리고, 아는 것만을 끊임없이 떠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입니다.

앞에서 두 가지 차원의 진리를 설명한 것처럼, 깨달음을 얻은 지혜로운 이가 세상에서 하는 행위는, 그의 행위 역시 인과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기는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모두가 좋아지기 위한 안배입니다. 하지만 그의 행위가 세속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상, 원인과 결과라는 틀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지혜로운 이는 그 결과가 아무리 힘든 것이라도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은 물론 처음부터 그 행위의 동기가 분명하고 바르게 서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하는 행위를 방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절대적 진리를 잘 깨우치고 있으면서도, 거친 업과 인과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이 세상 속에 다시 오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의 행복과 깨달음이라는 바른 동기를 가지고 다시 옵니다. 이들은 세속의 거친 틀에서 오고 가는 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직 바른 동기 안에서만 방편을 행합니다.

하지만 수행자라고 하더라도 아직 공부의 과정에 있는 사람이 하는 행위까지 모두 바른 행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이 만약 악행을 저지른다면, 그것을 지혜로운 이가 하는 방편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남을 깨우쳐 준다고 하면서 자기 아만으로 하는 행동은 분명 악행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그래서 공부의 과정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항상 깨어서 지켜보는 일(憶念)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며, 자연히 청정한 계율 안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설프게 완전한 지혜를 갖춘 스승들이 하는 파격적인 행동을 따라 하려다간 자신의 무거운 업에 짓눌려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더 큰 고통 속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챙겨야 할 것은 저 멀리 있는 기인들의 이상한 행동이 아니라, 스스로의 답답한 삶을 맑히고(戒) 조용하고 깊은 속(定)에 머물러 바른 깨우침(慧)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맑고 아름다운 지복의 삶을 맛보아야 합니다. 단계에 맞게 바른 길에 서서 한걸음씩 나아가면, 지금 일상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들이 다, 남 몰래 간직하는 나만의 깊은 수행으로 새롭게 다가 올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맑고 푸른 하늘이 눈물나게 고맙고, 흐린 날 촉촉한 호흡이 폐 속 깊숙한 후련함을 줄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다시 점검하고 바른 지혜에 비추어 공부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방편 역시 점점 더 바르고 깊어질 것입니다........”


완전한 답이 아니더라도 용서하시고,
끊임없이 함께 공부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부족함 속에 법계의 지혜에 기대어,
로덴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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