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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입문II] 초전법륜(初轉法輪)--일반2.

로덴
總[입문II] 초전법륜(初轉法輪)--일반2.



초전법륜(初轉法輪)


현대의 과학과 마찬가지로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의 역사는 진지한 탐구 끝에 발견한 진리의 전달사와 같습니다. 혹자들은 가끔 종교는 정신적인 탐구의 결과이고 과학은 현실적인 탐구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오히려 과학에 바탕을 둔 종교 즉 현실에 바탕을 둔 정신적인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시작부터 현실 탐구를 바탕으로 모든 진리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름답게 감상하고 있는 음악은 대부분 소리의 일정한 진동주기를 반복하여 만들어낸 정형화된 음정과 박자의 조합입니다. 지극히 수학적인 계산속에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과학적으로 분석 가능한 것들이 우리의 정신적인 감정을 순화한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개화되어 이런 사실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약이나 각성제와 같은 약물이 보통의 상태에서 보다 더 강력한 힘과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사실도 별로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약물들의 효과 역시 천천히 필요한 만큼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급작스럽게 폭발적으로 사용하여 일찍 고갈되고 마는 에너지의 순환 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인간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물리적인 에너지는 인간계라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 운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하지만 조금만 더 미세한 차원으로 넘어가 보면, 인간계의 물리적인 범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힘과 에너지의 원리가 적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앞의 <들어가는 말(槪論)>에서 이 세간의 형성 원리를 설명한 것처럼, 인간계는 전체 세간에서 지극히 한정된 일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인간의 물리적인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지극히 한정된 틀 안에 있는 인간은 스스로 갇혀진 의식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한정된 인식의 틀을 한참이나 벗어난 것 같은 이 세간의 형성 원리를 우리의 스승들은 어떻게 발견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 인간의 한정된 의식을 넘어설 수 있는 훈련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것이 수행이든 아니면 진지한 사색을 통한 지혜를 통해서 이든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정도의 한정된 의식의 차원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도 좀 더 미세한 차원의 의식을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상태에서는 한정된 인간계의 상황 보다 좀 더 다른 차원의 넓이와 깊이를 경험할 수 있겠지요. 물론 현대의 과학이 아직까지 이것을 다 증명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선정에 든 명상가의 뇌파(腦波)가 일반적인 사람의 뇌파보다도 훨씬 가라 앉아 있으며, 보이지 않는 큰 힘을 발휘한는 실험의 결과들을 접할 수는 있습니다.

인간계의 틀을 넘어 좀 더 넓고 깊은 차원의 상태를 경험하는 방법은 절대 진리를 경험하기 위한 방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의식을 무한대로 확장하거가 공간에 대한 인식을 무한대로 확장하는 하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마치 어린애가 조그만 마을을 세상의 전부로 인식하고 있어 더 넓은 세상에 대해 아무리 구체적으로 설명해줘도 잘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의식이나 공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어릴 때 고향 마을이 전부인줄 알았던 시절이 기억나실 겁니다. 자라서 어른이 되고 다시 본 고향은 어떻습니까? 조그만 마을이 하나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렇게 좀 더 큰 세계를 경험하지 않고는 현재 자기가 갇혀있는 한정된 인식의 틀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절대 진리를 향한 길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좀 더 깊고 넓은 의식의 차원을 하나씩 경험하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하면, 처음에는 가장 간단한 자기 인식의 틀도 깨기가 쉽지 않습니다. 스승들은 이것이 온갖 번뇌와 망상으로 인해 스스로를 한정된 틀 안에 가두고 있는 어린애와 같은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식에 때가 잔뜩 낀 것이지요. 단계적으로 자신을 정화해 나가면 의식의 폭은 점점 더 확장됩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수행의 경험들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불교는 이러한 과정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37 도품(道品)이나 십지(十地)와 같은 과정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공간이나 의식이 무한대로 깊이 확장된 상태에 머물 수 있게 되면, 부처님께서 깨닫기 직전에 들었던 선정 상태와 같은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과 식무변저청(識無邊處定)의 경지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외적인 것으로 보자면 이 한정된 인간계의 힘과 에너지만을 인식하는 차원을 무한대로 넘어선 것이며, 내적인 것으로 보자면 파도가 가라앉은 맑은 물처럼 티끌 없이 맑은 의식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물론 이 상태를 내적이다 외적이다 해서 따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이다 내적이다 하는 이런 구분은 인간계의 틀에 있는 것일 뿐, 조금만 의식을 확장하여도 이런 구분은 바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철학적이었던 자신의 어린 한 때를 돌아보십시오. 무언지 모를 깊은 생각에 빠져 하루를 보낼 때가 많았지만, 결론은 언제나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이러한 상대적인 구분의 벽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수행은 바로 이러한 상대적인 구분을 넘어서는 정화와 사색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분석해 보면, 수행이든 종교든 어느 것 하나 과학적인 분석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무조건 믿으라는 말은 불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比丘)와 학자들이여,
태우고 자르고 문지르는 황금처럼,
나의 말도 그와 같이 잘 분석하라.
존경심만으로 받아들이지는 말라.”

이 경전의 구절처럼 불교는 탐구와 사색을 공부의 기본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부처님은 무엇을 발견하셨고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시려고 하셨는지 하나씩 탐구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공부와 수행에 대해 보다 분명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그 각각의 가르침을 이 시대의 큰 스승인 달라이 라마의 법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일생에 세 번의 큰 가르침(法輪)을 굴리셨는데, 다음은 그 첫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 설하셨던 내용들입니다.


사성제(四聖諦)

“잘 알고 계신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成道) 얻으신 후 바로 법을 설하시지 않고 49일간의 법열(法悅)에 들어 계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대중에게 법을 설하신 것은 당신이 전에 수행할 때 함께 했던 다섯 고행자(후에 이들은 오비구라 불린다.)들에게 입니다. 고행만으로 고(苦)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싯다르타 고따마(Siddhartha Gautama)라고 불리던 부처님은 고행을 포기하고 함께 하던 고행동료들을 떠났습니다. 실망한 동료들은 그가 포기하는 것을 보고 다시는 그와 함께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변해버린 싯다르타가 자신들과 했던 고행의 맹서를 저버린 변절자였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나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이들은 절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당신의 법을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녹야원(鹿野園)에서 처음으로 이들에게 펴시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해 설하셨던 이 가르침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사성제는 고에 대한 진리(苦諦), 고가 생긴 원인에 대한 진리(執諦), 고를 모두 멸한 진리(滅諦) 그리고 이 고를 멸하기 위한 실질적인 길에 대한 진리(道諦)인 네 가지 진리를 말합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을 하실 때, 네 가지 진리의 특성과 그 구체적인 기능 그리고 그에 대한 성취 결과라는 세 가지 맥락에서 가르침을 펴셨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각각의 진리에 대한 특성입니다. 두 번째는 수행자가 그것을 수행할 때 알고 있어야 할 구체적인 사항들인데, 주로 고를 인식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여 고를 멸하는 실질적인 길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세 번째는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깨우친 궁극적인 결과를 설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고를 완전인 파악하여 그 원인을 벗어나고, 고통이 멸한 진리를 완전히 깨우친 다음 실질적으로 그 길을 모두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 자신 사성제의 가르침을 대할 때마다 그 심오한 깊이를 언제나 다시 인식하고는 합니다. 사성제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이론과 수행의 청사진(靑寫眞)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를 통하여 개인적인 수행의 기본 틀을 갖출 수가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넘어 행복을 얻고 싶어 합니다. 또 보통 고통은 피해야 하는 것이고 행복은 애써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행복과 고통은 어디에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원인(因)과 조건(緣)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사성제는 인과(因果)의 원리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점을 깊이 명심하십시오. 저는 가끔 모든 불교의 이론과 수행이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1) 이 현상계가 서로 의존하여 생겨난다는 세계관(緣起法)을 견지하는 것, 즉 모든 사물과 사건은 연기법에 의지하여 존재하고 생겨납니다. (2) 이 연기법을 바탕으로 하여(혹은 우리는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에), 비폭력과 평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두 가지 단순하고 명백한 이유로 비폭력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1) 모든 중생이 내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바라지 않으며, (2) 그 모든 고통은 원인(因)과 조건(緣)에서 생긴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불교에서는 그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 이 현상계와 나에 대한 무지(無知 혹은 無明)에서 비롯된 것이며, 잘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에서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 고통을 바라지 않는다면, 고통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행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고통과 행복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과 조건을 이해하려면 연기(緣起)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연기의 원리는 다름 아닌 원인에 의지하여 생기는 결과를 말합니다. 따라서 원치 않는 결과가 생기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에 따른 원인을 심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성제는 원인과 결과로 다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즉 고통은 결과이고, 고통의 근원은 그 원인입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멸하여 얻은 평화는 결과이고 고통을 멸하기 위한 실질적인 길을 가는 것은 평화를 위한 원인입니다

우리가 찾는 궁극적인 의미의 완전한 평화와 행복은 오직 마음의 정화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이 마음의 정화는 본래의 무지에서 오는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을 제거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지는 이 현상계가 실재한다고 믿는 우리의 전도된 생각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이 현상계가 우리의 전도된 생각에서 비롯된 환(幻)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현상계의 본성을 꿰뚫는 직관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경지를 성취하려면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戒) 정(定) 혜(慧)와 관련한 고도의 수행을 거쳐야 합니다. 직관 혹은 지혜의 수행은 무지와 거기서 파생된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실질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대상에 대한 고도의 집중의 힘인 선정의 힘에서 얻어진 직관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깊은 선정에 드는 수행은 직관을 통해 지혜를 얻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이 선정과 지혜 역시 청정한 계행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와 같이 계 정 혜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는 다리처럼 수행에 꼭 필요한 원인이자 결과입니다.”


삼학(三學)

“이와 같이 수행에 계 정 혜의 삼학이 있는 것처럼, 불교 경전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經)과 실천의 윤리인 율(律)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지식을 담은 논(論)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상의 경 율 논 삼장(三藏)에 대한 공부를 바탕으로 계 정 혜 삼학의 수행을 실천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회향하는 사람을 진정한 의미에서 불법(佛法, Buddhadharma)을 수행하는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계 정 혜의 삼학을 수행하는 데는 남녀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불법을 수행하고 공부하는 데에 성별의 구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승가 안에서 지켜야 할 계율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도 굳이 남녀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각각의 조건에 맞게 계율을 정한 것일 뿐입니다.

성별에 상관없이 함께 수행해야 할 기본적인 계율에는 10 선법(善法)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몸(身)으로 지켜야 할 세 가지와 말(口)로 지켜야할 네 가지 그리고 생각(意)으로 지켜야 할 세 가지를 말합니다.

몸으로 지켜야 할 세 가지 것은, (1) 살생(殺生): 인간이나 동물을 막론하고 심지어는 조그만 벌레까지도 의도적으로 죽이는 일 (2) 투도(偸盜): 허락 없이 남의 것을 제 것으로 만드는 행위 (3) 사음(邪淫): 정당하지 않은 성적인 행위를 말하고, 말로 지켜야 할 것은, (4) 망어(妄語): 다른 사람을 속이는 말 (5) 양설(兩舌): 듯을 다르게 옮기는 말 (6) 악구(惡口): 남을 험담하는 말 (7) 기어(奇語): 쓸데없이 농치는 말하며, 생각으로 지켜야 할 것은, (8) 탐욕(貪慾): 남의 것을 취하려는 마음 (9) 진에(瞋&#24666;): 성내고 남을 해하려는 마음 (10) 사견(邪見): 윤회나 인과, 삼보(三寶) 등을 부정하는 전도된 견해를 말합니다. 계율은 수동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서 얻어지는 개인적인 자유로움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개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수행해 나가는 계율을 별해탈계(別解脫戒, pratimoksha)라고 합니다.

구체적인 승가의 계율은 인도의 4대 주요학파(有部 經部 唯識 中觀)와 18 부파(部派)에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4대 주요 학파들은 각각의「별해탈계경(Pratimokshasutra)」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부처님의 권계(勸誡)와 승가에서의 행동 양식 등이 잘 담겨져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티벳 승가에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Mulasarvastivadin)의 계율을 수행해 왔습니다. 범어(梵語, Sanskrit)로 되어 있는 이 학파의「별해탈계경」에 보면, 비구는 253계를 비구니는 364계를 지키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방 상좌부(상좌부, Theravada) 전통의 빨리어(Pali)로 된「별해탈계경」에 있는 비구 227계, 비구니 311계와 조금 다릅니다.

계율을 수행하는 것은 여러분의 신(身) 구(口) 의(意) 삼문(三門 혹은 三業)을 잘 다스려 잘못된 행동을 피하고 항상 깨어서 기억하고(憶念) 주의하는 경각심(自覺)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이 두 가지 정신적인 수행은 부정적인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업을 경계함으로서 자신과 남을 해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입니다. 따라서 이 계율은 불교 수행의 가장 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정(定)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수행을 지(止, absorptive: 집중)와 관(觀, analytical: 분석)의 두 가지 기본 원리로 나눕니다. 첫 번째는 집중(禪定, 止. 等持)의 상태로 고요히 가라 앉아 삼매에 드는 것이나 그와 관련된 모든 수행을 말합니다. 반면에 분석적인 수행은 수행의 대상과 관련해 그것의 본질을 직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한 점에 응시하는 것이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좀 더 깊은 분석적 고찰을 의미합니다. 그러지만 이 두 가지 형태의 수행원리는 모두 앞에서 계율의 수행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억념(憶念)과 자각(自覺)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주 세속적인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 억념과 자각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즉 항상 깨어서 바라보고 점검해야 하는 것이지요.

정리해보면, 계율을 수행함으로서 우리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발전의 기초를 다질 수 있습니다. 거기에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삼매에 드는 훈련을 함으로서 보다 높은 차원의 수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고도의 직관력을 키움으로서 지혜를 얻기 위한 일련의 과정입니다. 감각을 한 곳에 집중하면 삼매에 들 수가 있고, 이 깊은 삼매 속에서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주의 집중을 원하는 곳에 둘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집중이 가능해진 고도의 평정심을 가지고 이 현상계의 궁극적인 진리를 직관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나오는 직관의 힘은 무지를 밝히는 등불과 같습니다. 따라서 무지에서 오는 우리의 모든 번뇌 망상과 그로 인한 고통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깨달음을 향한 37 도품(道品)

일반적으로 부처님께서 처음 굴리신 초전법륜의 수행은 깨달음을 행한 37 도품(道品: 수행의 단계)으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이 37 도품은 다시 7 종류의 단계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는 몸(身) 감각(受) 마음(心) 현상(法)을 항상 깨어서 관찰하고 생각하는(憶念) 사념처(四念處 혹은 四念住)입니다. 여기서 억념(憶念, mindfulness)이라는 것은 전도된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끊임없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돌고 도는 윤회 중생들의 삶을 항상 깨어서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사정근(四正勤 혹은 四正斷)입니다. 이와 같은 이름이 두 번째에 오게 된 것은 윤회의 모순을 절실하게 억념한 수행자는 결국 미래에 고통을 초래할 모든 원인을 벗어나 행복을 가져올 원인을 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네 가지가 있는 데, (1) 율의단(律儀斷): 아직 생기지 않은 모든 악을 끊고, (2) 단단(斷斷) 이미 나타난 악을 모두 끊으며, (3) 수호단(隨護斷):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을 바로 지키고, (4) 수단(修斷): 이미 생겨난 선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단 부정적인 행위와 그에 따른 동기들을 극복하고 나면, 여러분의 마음은 청정한 현상이 일어나는 긍정적인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주 고도로 집중된 마음에 사신족(四神足 혹은 四如意足)의 능력이 따라옵니다. 이 네 가지 능력은 감각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네 개의 다리(足)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제어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는 각각 욕(欲 혹은 誓願) 정진(精進) 심(心 혹은 意志) 혜(慧 혹은 分析)을 말합니다.

네 번째는 오근(五根)을 말하고, 다섯 번째는 오력(五力)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범주는 모두 신(信) 근(勤 혹은 精進) 념(念) 정(定) 혜(慧)를 다섯 가지 내용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이것은 수행자가 얼마나 능숙하게 자신의 감각을 제어하고 활용하는 가의 차이입니다. 즉 잘 제어한 감각은 유익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깨달음을 향한 길의 칠각지(七覺支)입니다. 티벳 불교식으로 분류하면 칠각지에는; 완전한 억념을 이루는 억념각지(憶念覺支), 완전한 분석을 이루는 택법각지(擇法覺支), 완전한 정진을 이루는 정진각지(精進覺支), 완전한 지복을 이루는 환희각지(歡喜覺支), 완전한 경안(輕安)을 이루는 경안각지(輕安覺支), 완전한 선정을 이루는 선정각지(禪定覺支), 그리고 완전한 평등성을 이루는 평등각지(平等覺支)가 있습니다.

끝으로 37 도품의 마지막에 분류하고 있는 일곱 번째는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즉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말합니다.

이상이 부처님께서 설하셨던 초전법륜의 일반적인 구조입니다. 티벳 불교의 모든 수행에는 이 초전법륜의 가르침과 수행 전통의 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조금은 지루해 보이지만, 우리가 늘 불교 안에서 보아왔던 내용들입니다. 혹시 너무 고상하고 높은 경지의 이야기에 빠져 있느라 정작 자신의 거친 몸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씩 밟아 가야할 과정들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아니라면, 지금 당장은 어렵게 느껴지는 용어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 이해해 나가는 것도 공부의 한 과정입니다. 천천히 공부하는 재미를 아는 것은 자신은 마음이 어느 정도 길들여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를 들면 요즘 항간에서 많이 따라서 공부하고 있는 ‘비빠샤나(Vipashyana)’와 같은 수행법은 위에서 설명한 37 도품의 첫 번째 과정인 ‘4념처’의 수행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즉 쉼 없이 깨어서 몸과 감각과 마음과 현상을 관찰하고 의식의 고삐를 죄어가는 수행이지요. 마찬가지로 새롭게 이름을 달고 나온 그 어떤 수행이나 명상도 이미 우리 안에 있지 않았던 것이 없습니다. 다만 시절인연이 닿지 않아 도외시 하거나 그 가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일 뿐이지요. 수행을 함께 한다는 것은 이 모든 가치 있는 수행들을 함께 재구성해 나간다는 말입니다. 나만의 깨달음으로는 완전한 완성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깨닫지 못하면 이 모든 현상계가 깨어나지 않습니다. 다 함께 한 걸음씩 서로 도와주고 이해하면서 그렇게 한 걸음씩 나가는 것입니다.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한 단계의 과정이 자신 안에서 정리되고 나면, 저절로 다음 단계의 과정을 밟도록 되어있는 것이 불교수행의 합리성이니까요. 서둘러 남에게 보여야 될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 하나씩 알아가고 성취해 나가는 재미가 더 클 것입니다. 거기에 선한 공덕을 쌓는 일은 완전한 깨달음을 향한 또 다른 조건을 함께 갖추는 일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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