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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입문II] 무아(無我)와 사법인(四法印)--일반5.

로덴
總[입문II] 무아(無我)와 사법인(四法印)--일반5.



무아(無我)와 사법인(四法印)



“철학적으로 보면, 모든 불교의 학파들이 인정하는 기본적인 학설이 있습니다. 그것을 불교 용어로는 사법인(四法印)이라고 합니다.

모든 현상은 무상(無常)하다: 제법무상(諸法無常: 一切法無常印)--제 1법인
모든 번뇌(有漏)의 산물에는 만족이 없다: 일체개고(一切皆苦: 一切行苦印)-- 제 2법인
모든 현상은 공(空)하며 무아(無我)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 一切法無我印)--제 3법인
열반(涅槃)은 완전한 고요와 평화이다: 열반적정(涅槃寂靜: 涅槃寂靜印)--제 4법인

불교의 모든 학파들은 모두 이 네 가지 진리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대승의 학파인 유식(唯識)과 중관(中觀)에서 설명하는 무아(無我)의 원리는 소승의 학파들 보다 좀 더 미세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무아에 대한 견해에는 소승과 대승의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해탈을 구하는 소승의 유부(有部, Vaibhāsika: 毘婆沙師, 分說者)와 경부(經部, Sautrantika: 經量部, 經部者) 학파는 부처님께서 처음 법륜(初轉法輪)을 굴리셨을 때 설하셨던 인무아관(人無我觀: 개별적인 존재에 대한 무아)을 따르며, 반면에 대승의 학파들은 두 번째 법륜을 굴리셨을 때 설하셨던 반야부 경전의 포괄적인 무아관(人無我를 포함한 法無我)을 따릅니다. 이 두 가지 무아관에 대한 미세한 차이를 살펴보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경험을 살피고 나서 점차로 다른 것과 세상과의 관계를 살펴 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 염주를 돌리면서 기도를 할 때 제 자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 염주가 나의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내 것”이라는 사고에 근거한 어느 정도의 분별과 집착이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 자신을 점검해 보아도 자기가 소유한 것에 대한 다양한 수준의 집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집착과 같은 이렇게 간단한 감정에도, 다양한 느낌과 인식을 통한 경험 사이에 얽히고설킨 복잡한 그물(網)이 쳐져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자기만족을 경험하는 이러한 존재가 실제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집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기 것이라고 느끼는 지속성(흐름, 相續) 즉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적인 자아(自我)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염주도 완전히 고정불변의 실체인 “나(自我, self, I)”의 것이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수행을 통해서 실제로 존재한다고 느끼던 자신의 실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그 동안 강하게 집착하던 주변의 친구나 자기 소유물들에 대한 집착을 점점 버리기 시작할 겁니다. 이렇게 해서 고정불변의 실체로 믿고 있던 나와 관계된 것들에 대한 관념을 버리고 집착과 번뇌를 극복하게 됩니다. 확실한 해방의 맛을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접근 역시 미세한 수준의 집착과 자기 인식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이며, 아직 외적인 대상에 대한 분별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예쁜 꽃을 보게 되면 우리의 습관적인 성향은 꽃의 아름다움이나 좋은 속성에 투영되고 거기서 대상에 대한 감각을 받아들여 마음에 지니게 됩니다. 즉 감각에 대한 반응을 미세한 의식 속에 소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결국 미세한 차원의 번뇌와 무지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두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 무아에 대한 개념을 모든 현상계 즉 모든 번뇌의 산물로 확장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공성의 보편적인 원리를 깨우칠 때만이 모든 수준의 무지(無知 혹은 無明)를 마음에서 완전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월칭(月稱, Candrakīrti) 논사(論師)의 입중론(入中論, Madhyamakavatara, 入中觀)을 통해 이와 같은 내용을 다시 한 번 짚어 보겠습니다.

‘[단순히 거친 나에 대한 결여를 인식하는] 인무아(人無我)를 깨달은 수행자는 색(色)과 그 외[受想行識]의 것에 대한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여전히 집착과 다른 번뇌들이 생겨나며, 그것은 색(色)과 [그 외(受想行識)의 것에 대한] 전도된 견해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는 색(色)과 [그 외(受想行識)의 것에 대한] 본래의 성품(空性)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월칭 논사께서는 소승적인 무아관이 불교의 완전한 학설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아관은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에 대한 원리를 설명한 것일 뿐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무아관은 자신을 다른 것과 차별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성품이 결여되어 있다는 정도를 깨우치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러한 수준의 무아관은 그것을 다 깨우쳤다 하더라도 아직 외적인 대상을 통해 미세하게 축적되는 집착 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무아 역시 완전히 깨우친 상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모든 학파들이 무아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수준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낮은 단계의 학파들에 비해 높은 단계의 학파들은 좀 더 깊은 차원의 무아를 설명합니다. 낮은 단계의 학파들이 설명하는 무아의 원리는 완전한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공성의 차원에서 보면 자성(自性)의 결여를 논하는 무아의 원리는 높은 단계의 학파들의 설명이 훨씬 더 포괄적이며, 이러한 견해는 현상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잘못된 망상을 없애는데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공성은 세속적인 현상만을 가지고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이 현상계는, 세속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대로 존재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무너지는 것은 전도된 망상으로 인하여 실재 한다고 생각하던 이 현상계에 대한 잘못된 허상입니다. 눈과 귀와 같은 거친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이 현상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여러분이 ‘나’라고 믿던 그 ‘어린 나’는 지금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른 후에 지금의 여러분이 ‘나’라고 믿는 존재는 먼 훗날 ‘기억 속의 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나’라고 믿는 이 존재도 좀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변하고 있으며, 더 깊이 보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불교 학파들이 주장하는 다양한 무아관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낮은 단계 학파들의 견해는 좀 더 높은 단계의 견해로 나아가기 위한 일련의 과정인 셈이지요. 그래서 이 학파들의 견해를 순차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무아관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하나의 공부 방법이기도 합니다. 또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연기의 법칙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불교의 존재 원리에 위배되는 여러 가지 무아에 대한 견해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연기의 법칙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상호 연관성에 관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행복과 고통이라는 결과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초기 경전에서는 이러한 원리를 12 연기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업으로 인해 태어나는 존재들, 즉 윤회하는 존재들은 바로 이 열두 가지의 과정(12 緣起)을 겪으며 그 생멸(生滅)의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이 연기법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어떠한 무아관이나 공성에 대한 주장도 불교적 견해에서 보면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이 상대적인 세계(俗諦)에 대한 여러분의 강력한 믿음은 좀 더 미세한 차원에서 부정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이 상대적인 세계의 상호의존 관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게 되면 될수록, 모든 현상계가 공하다는 확신은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성품이나 관심 그리고 지적인 수준이 다양한 만큼, 앞에서 정의한 공성에 대한 견해가 모든 수준의 수행자들에게 다 적합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자성의 결여(空性)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非存在).’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경우에는 극단적인 허무(斷見) 주의에 빠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좀 더 거친 수준에서 점점 미세한 수준으로 무아관의 차원을 높인 다음, 마지막으로 가장 미세한 차원의 공성을 설하신 것입니다. 방편을 쓰신 것이지요. 그래서 높은 단계에 있는 학파들의 어떠한 견해도 낮은 단계 학파들의 주장과 논리적으로 상충되는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낮은 단계 학파들의 견해에는 높은 단계의 학파들이 주장하는 논리와 모순 되는 점들이 가끔씩 발견됩니다. 이것은 그 깊이와 넓이의 차에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사법인(四法印)을 살펴보겠습니다. 불교의 모든 학파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 사법인은 불교 수행자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원리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제 1법인(諸行無常)은 모든 현상이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역사에서 보면, 이 무상에 관해서는 경부(經部) 학파에서 이미 그 완전한 탐구가 끝났습니다. 즉 모든 현상은 순간순간 변합니다. 여러 가지 조건이 모여 존재를 구성하고 그 원인과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는 것이지요.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도, 그것을 소멸시킬만한 부차적인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서로 다른 요소들이 모여야 그 결과로 인해 존재하게 됩니다. 또 존재가 성립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바로 소멸(해체)의 과정을 밟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소멸이 존재를 성립시키는 과정(mechanism)인 셈입니다. 마치 사물과 사건 스스로가 자신의 결과를 만드는 변화의 씨앗(원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현상을 이렇게 역동적이고 찰나(순간)적으로 바라보는 불교적인 관점은 무상의 보편적인 원리에서 나온 것으로서, 현대 물리학에서 발견한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 2법인(一切皆苦)은 모든 번뇌(有漏)의 산물에는 만족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물과 사건 그리고 경험 등에서 생기는 번뇌(有漏)는 잘못된 행위의 산물이며, 그것을 일나게 한 것은 망상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어느 것도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없으며, 생겨난 사물과 사건은 다 그에 대한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원인이란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의 무지와 번뇌 그리고 인식 작용과 잘못된 행위들을 말합니다. 무지를 단순히 무언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상태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무지는 오히려 존재에 대한 본질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미혹한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인도 불교의 큰 스승들이신 법칭(法稱, Dharmakirti)이나 세친(世親, Vasubandhu) 존자께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신 것들입니다. 세친(世親) 존자님은「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sha)」에서 무지는 단순한 지식의 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앎)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못알고 있는 것이지요.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지입니다.

중생들이 이러한 무지와 고통과 불만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언제나 중생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苦, dukha)는 단순히 몸과 마음에서 생긴 고통만이 아닙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라는 점을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무상(無常)과 고(苦)를 통해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인 출리심(出離心 혹은 厭離心, renunciation)을 기를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여러분 마음속에는 ‘그러면 내 자신, 한 개인으로서 완전한 자유를 성취하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답은 바로 제 3법인(諸法無我)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 3법인은 모든 현상이 공(空)하며 무아(無我)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상과 불만족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주 분명합니다. 모든 사물과 사건은 그에 따른 원인과 결과 없이 생겨나지 않는 다는 인과법의 원리를 바르게 배우면 됩니다. 또 우리 자신의 고통과 불만의 조건들이 바로 무지라는 원인에서 생긴 번뇌와 망상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모든 망상의 근원은 현상의 본질을 잘못 알고 있는 무지에서 생긴 것이라는 점입니다. 무지는 편견과 곡해입니다. 현상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한 진실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현상의 실제 모습과는 정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무지는 전도되고 왜곡된 마음의 상태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무지를 제거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는 이 모든 현상이 왜곡되게 눈에 비친 환(幻)과 같다는 직관을 얻음으로서 제거할 수 있습니다. 멸제(滅諦)는 바로 이렇게 전도된 눈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데서 자유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정신적인 흐름(相續)에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단순한 꿈이 아닙니다. 적멸(寂滅)을 이루는 것이지요. 열반을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제 4법인인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여러분이 직접 수행을 통해서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달라이 라마 법문 중에서)

이런 면에서 보면, 금강승의 많은 수행 방법들은 이 현상계를 환(幻)으로 볼 수 있는 직관의 힘을 키우고, 세상과 나에 대한 전도된 눈을 바로 잡아 어떠한 번뇌 망상에서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안배입니다. 나아가 환(幻)을 직접 조작할 수 있는 힘을 키우고 그에 따른 정신적인 성취를 이룸으로써, 거친 업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방편입니다. 근기가 높으면 높은 데로 또 근기가 낮으면 낮은 데로 자신의 무지를 벗어나고 세상의 무지를 벗어나게 할 능력을 기르기 위한 스승들의 방편 안배가 바로 금강승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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