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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입문III] 분노와 증오를 넘어--이타행3.

로덴
總[입문III] 분노와 증오를 넘어--이타행3.




3. 분노와 증오를 넘어



“앞에서 우리는 망상의 미혹하고 파괴적인 속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분노와 증오는 보리심(菩提心)을 수행하는 수행자에게 가장 큰 장애입니다. 보살은 분노와 증오를 일으키는 대신에 그에 맞서 당당하게 수행합니다. 인욕(忍辱)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샨띠데바 보살의「입보리행론」제 6 장은「인욕(忍辱)」의 장입니다. 여기서는 분노와 증오의 해로움을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분노와 증오는 일시에 과거의 공덕을 까먹게 하며, 미래의 해로운 원인으로 남습니다. 인내를 수행하는 사람은 이 분노와 증오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샨띠데바 보살은 먼저 분노와 증오의 원인을 밝히라고 말합니다. 일상에 불행과 불만이 쌓이면 이내 분노와 증오로 모든 것이 변질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위협받고 두려워하거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자꾸만 불행하게 흐를 때, 이 모든 어려움은 인내를 수행할 최선의 상황을 만들어 줍니다. 상황과 조건에 대한 불만과 불행을 느끼는 것은 분노와 증오의 좋은 연료이자 먹이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마음의 평화를 방해받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샨띠데바 보살은 분노에 대처하고 제거해나갈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내를 수행하는 수행자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충고입니다.

원치 않는 것과 원하는 것을
방해받는 일이 생겨나니,
불만의 먹이(燃料)가 생겨나고,
분노가 자라나 나를 무너뜨리네.

(Mi \'Dod Byas Dang \'Dod Pa Yi// Gegs Byas Pa Las Byung Gyur Pa//
Yid Mi bDe Ba\'i Zas rNyed Nas// Zhe sDang brTas Te bDag \'Joms So.)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제 6 장의 7 게송)

힘든 일을 만나도 마음의 평정과 행복을 잃지 않는 것은 분노가 잃어나는 것을 막는 것이 요점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만나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마치 좋은 먹이감이 생긴 것처럼 분노가 자라나게 됩니다. 샨띠데바 보살은 이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분노는 상황을 반전시키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불만과 갈증만 쌓아줄 뿐입니다. 나아가 불만과 갈증은 식욕 건강 수면 등을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에게 해를 입힌 적은 여러분의 정신적 불행이 쌓여갈수록 더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힘든 것도 문제지만, 그것을 통해 적을 더 즐겁게 할 일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에도 도움이 안 되는 불만과 갈증을 스스로 만들어 주변을 악화시킬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샨띠데바 보살은 ‘해결될 일이면 신경 쓸 이유가 없고, 해결되지 않을 일이면 불행해할 필요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는 않더라도 좋아하지 않는 누군가가 성공하고 번창하면 시기와 질투로 또 스스로 불행해집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해를 끼치는 유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직접적으로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부와 명예와 우정 등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아도 여러 가지 해로운 느낌을 갖게 하는 경우입니다. 누군가가 막대기를 들고 여러분을 때리면, 여러분은 때린 사람에게 화를 냅니까? 아니면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그 막대기에 화를 냅니까? 이것을 분별할 수 있다면 아마 쉽게 화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막대기나 분노를 일으킨 자신의 망상과 같은 부분적인 요소를 구별하기 보다는 때린 가해자에게 일방적으로 분노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살펴보면, 가해자도 역시 하나의 부분일 뿐입니다.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모든 고통은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들 요소 하나하나의 특성을 잘 살펴야 합니다. 만약 일방적으로 때리는 것이 그 사람의 변치 않는 본성이라면, 그 사람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샨띠데바 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어린아이(偶人)들의 본성일진대,
그것에 화가나 이성을 잃는 것은
타는 것이 본성인 불을 탓하는 것과 같아라.

(Gal Te gZhan La \'Tshe Byed Pa// Byis Pa rNams Kyi Rang bZhin Na//
De La Khro Bar Mi Rigs Te// Sreg Pa\'i Rang bZhin Me bKon \'Dra.)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제 6 장의 39 게송)

반면에 때리는 것이 그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면, 그 사건은 아주 우연한 일로 어쩔 수 없이 생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도 그 사람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순전히 그때의 상황과 조건 탓이니까요. 불특정 다수에게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을 묵인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상황과 조건을 잘 분석하여 남에게도 해롭고 나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분노의 대상을 굳이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 여러분의 부와 명예 등에 간접적인 해를 가하는 경우에도, 정말 그런 것들이 여러분의 가슴에 화를 나게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인지, 그래서 잠 못 들고 건강을 해칠 만큼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굳이 그런 것들에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그때는 화가 나는 것 보다 무언가 합당한 이유를 위해 과감한 결단이 필요할 경우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고의 습관은 실제로 자신의 화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아주 유용합니다.

여러분의 적들이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을 볼 때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화를 내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이렇게 인내를 수행하는 것과 함께, 샨띠데바 보살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수행자들은 현재의 사고를 전환하여 자비심을 키워야 합니다.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하기 위해 깨달으려는 마음인 보리심(菩提心)을 일깨우고 증장시켜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수행해도 아직도 적들의 성공이 못 마땅한 것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면, 아직 보리심을 수행할 단계가 안 된 것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보리심을 수행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남들에게 말하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말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보리심을 수행하는 수행자는 내가 도움을 주지 못했는데도 남들이 그렇게 성공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행복해 할 것입니다. 모든 중생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리심을 수행하는 수행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성공에 힘들어하지 말고 차라리 축하하고 기뻐해 주십시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적들에 대한 감정이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다면, 그때는 인욕의 바라밀을 수행할 너무나 좋은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보살의 이상인 인욕을 실천할 소중한 기회가 생긴 겁니다. 그 결과 가장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경지의 수행을 성취할 수 있는 공덕의 자량을 쌓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적들은 스스로의 부정적인 행위 때문에 자신의 업만 쌓은 것일 뿐입니다. 결국 가해자는 해를 입힌 사람에게 엄청난 공덕을 쌓을 기회를 주고 자신은 그 대가로 부정적인 업을 쌓는 희생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욕의 바라밀을 통해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주변에 적이 있을 때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인욕의 수행으로 쌓을 수 있는 공덕의 가장 큰 공헌자입니다. 이러한 사실들 때문에「입보리행론」에서는 적들에 대한 고마움과 자비를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적들에게 아무리 친절하게 대한다 해도 그들은 결코 나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만한 인욕의 수행처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내 마음을 비추는 자비의 거울임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고방식은 단지 인욕을 수행하는데 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의 대상에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고제(苦諦)가 없이 어찌 멸제(滅諦)를 이야기 할 것이며, 집제(執諦)가 없이 어찌 도제(道諦)를 이야기 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적이 없는데 어찌 인욕이 있으며, 분노가 없는데 어찌 평화가 있겠습니까? 항상 주의 깊게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불교를 제대로 공부한 흔적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일상의 사고방식에서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혹자들은 어떻게 감히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성제의 진리와 마음에 생긴 안팎의 적들과 비교할 수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성제를 존경하는데 적을 존경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만약 진심으로 여러분이 여러분의 적을 존경할 수 있게 된다면, 여러분의 적은 여러분 자신에게 너무나 특별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마치 여러분이 사성제를 존경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심과 보리심을 수행하는 수승한 수행자로써 여러분은 인욕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인욕을 정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여러분에게 해가 되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로운 사람들만이 여러분에게 진정한 수행의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의 인내를 실험하지만, 스승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수행의 황금 같은 기회는 오직 여러분의 적만이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결론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한번 적에 대한 존경심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무한한 이타심을 개발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은 쉽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샨띠데바 보살이「입보리행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완전한 일체지(一切智)를 이루신 부처님은 시방(十方)에 계시는 부처님들의 가피와 일체의 중생을 등에 업고 이러한 경지를 성취하셨습니다. 즉 일체지는 중생에 대한 연민과 부처의 사랑이 함께하는 공덕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길을 따르고 보살의 이상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대상에게도 적의를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든 불보살님들께서 가슴으로 품고 계시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적을 포함한 모든 중생들은 불보살님의 품안에 있는 바로 그 존재들입니다.

샨띠데바 보살은「입보리행론 인욕품(忍辱品)」을 인욕을 수행하는 공덕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인욕을 수행함으로써 미래에 일체지를 성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일상의 삶에서도 실질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마음 안에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인욕을 수행하여 분노와 증오를 극복하고 나면, 기쁘게 정진하는 힘이 수행 속에 갖추어 집니다. 이렇게 기쁘게 정진하는 힘은 수행의 깊이가 더할수록 너무나 중요합니다. 또 샨띠데바 보살은 마치 일반적인 업무를 수행하는데도 항상 주의 깊은 억념(憶念, 깨어서 기억하는 힘)이 필요한 것처럼, 기쁨으로 정진해 나갈 때도, 다른 것이 수행을 방해하거나 해롭게 하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는 동안에 큰 성취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달라이 라마의「입보리행론」법문 중에서)

그러므로 진정 스스로 수행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겉모습이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의 튼튼한 철학적 바탕으로 삼고, 세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항상 깨어서 관찰하여, 그 모든 것을 수행의 대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수행자에게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 정진력과 변함없는 수행의 기쁨이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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