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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입문IV] 딴뜨라(金剛乘)의 길--금강승1.

로덴
總[입문IV] 딴뜨라(金剛乘)의 길--금강승1.



***권고(勸告):

지금부터 함께 할 밀법(密法, Tantra)의 모든 내용은 단순히 시비를 가리기 위해 주변에 비슷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과 쉽게 토론하거나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공부하고 잘 사유하여 좀 더 깊은 의미를 터득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궁금한 것은 바른 법에 대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법계나 스승에 기대어 답을 찾으십시오. 이 권고 사항은 여러분에게 두려움을 주거나 위화감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전해질 내용들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처럼 그 뜻이 잘 드러나 있어서 큰 오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 보다는, 수행을 통해서 직접 경험하고 체득한 다음에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밀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접근하지 못한 수행자들을 많이 목격하고 있는 현실에서, 스스로 자기 근기를 키우지 않은 채 작위적인 해석을 통해 함부로 법을 논하는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이렇게 불필요한 말을 먼저 덧붙입니다. 또 혹시라도 이 <티벳불교입문>을 보시면서 이 장부터 처음 접하게 되신 분은 앞에서 설명한 불교 전반에 관한 내용을 먼저 잘 이해하신 다음에 공부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수승한 근기를 가지고 이 공부를 접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전체적으로 입문의 장이니 만큼 순서대로 하나씩 공부하는 것이 여러분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로덴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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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뜨라(金剛乘)의 길



마침내 금강승(金剛乘)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티벳 불교하면 바로 이 금강승 혹은 딴뜨라(Tantra)의 길을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티벳 불교는 금강승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불교가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통에서 전해진 인도 불교 1500년 역사를 그대로 이어받은 전통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티벳 불교는 금강승을 포함한 모든 인도 불교의 모습을 비교적 원형 그대로 간직해온 전통을 말합니다. 티벳 불교에서 활발하게 전해지고 있는 금강승의 수행 전통은 지금까지 우리가 <티벳불교입문>이라는 이름으로 앞에서 함께 공부해온 내용들을 바탕으로 한 수행 전통입니다. 비록 짧은 시간 너무나 간추려서 소개한 것이긴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티벳 불교의 승가에서는 20년 30년씩 공부해 나갑니다. 그런 다음, 중생의 이익을 위해 회향할 수 있는 심오한 방편을 체득하기 위한 밀법수행에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일상 곳곳의 의례의식 속에서나 중간 중간의 안거 중에도 밀법 수행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밀법 수행의 승부처를 찾는 것은 대부분 긴 세월 동안의 전통적인 승가 교육을 마치고 난 다음에 시작합니다. 즉 부처님 말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력을 갖추고 난 다음에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티벳 불교의 수행에 입문하는 방식이 꼭 이런 경우만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이제부터 소개할 금강승의 전통 역시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내용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징성이 강하게 베어있는 모든 밀법의 의미들은 언제나 다양한 차원의 이해 수준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 이해하고 체득한 내용만을 가지고 섣부르게 설명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공부한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라고만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있는 이 <티벳불교입문>의 전체적인 순서는 티벳 불교에서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의 수행 과정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내용만 큰 무리 없이 잘 소화해 왔다면,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 금강승의 길을 공부하고 이해할 준비가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티벳 불교를 밀교(密敎)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만나본 티벳의 여러 스승들은 밀교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근기가 부족한 이들이 그 깊은 뜻을 다 알아듣지 못하고 오해할 여지가 많기 때문에, 근기에 맞추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전통을 밀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비밀은 없다고 말합니다. 단지 눈을 뜨고서도 그 뜻을 못 알아듣는 것일 뿐이지요. 딴뜨라(Tantra)라는 말은 비밀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교 대승 중에서도 특별한 방편의 길인 금강승을 우리는 흔히 밀교(密敎) 밀법(密法) 딴뜨라(Tantra)라는 말로 부릅니다. 또 진언(眞言)을 위주로 한 다양한 방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언승(眞言乘) 혹은 방편승(方便乘)이라고 부르는 등 보이는 모습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나 이 금강승의 길은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헌신을 통해서만 수행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전통이기 때문에, ‘스승 불교’라고 하기도 합니다. 원래 스승이라는 용어는 인도말(梵語, Sanskrit)로 ‘구루(Guru)’라고 하는데, 이것을 티벳어로 번역한 말이 ‘라마(Lama)’입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티벳 불교를 ‘라마교’라고도 합니다. 해석하면, ‘스승(Lama)의 종교’이니 틀린 말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라마교가 불교가 아니라, 티벳에서 발달한 색다른 종교인양 하는 오해는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내용을 가지고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엄청난 오해와 편견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가장 깊은 차원의 의식을 다루고 있는 금강승의 길에서 법을 바르게 알아듣고 이해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그 공부가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언제나 자신의 근기를 잘 점검하시고, 그래도 길이 잘 안보일 때는 바른 법에 근거한 법계와 스승에 의지하십시오.

딴뜨라(Tantra, rGyud)라는 용어는 밀교 경전들에 근거한 수행 전통을 말합니다. 딴뜨라(Tantra)라는 말의 본뜻 역시 ‘연속(連續) 계속(繼續) 본속(本續) 밀주본속(密呪本續) 비밀본속(秘密本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티벳어로는 ‘규(rGyud, 續)\'라고 하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딴뜨라의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로 관상(觀想)의 과정들, 의례절차, 상징들의 구체적인 묘사를 통한 깊은 철학적 의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들을 활용한 수행을 통하여 의식을 전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체계화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딴뜨라의 내용들은 오늘날 우리가 티벳 불교에서 관찰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딴뜨라’는 모든 수행 양식과 관념들 그리고 다양한 상징물들과 함께 구전 전승되고 있는 의례 의식과 광범위한 경론들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포괄적인 이름의 딴뜨라 안에는 각각의 수행 방법을 담고 있는 구체적인 딴뜨라들이 있습니다. 이 구체적인 딴뜨라들은 각각의 고유한 수행 방법과 소의(所依, 근본으로 삼는) 경전을 가지고 있어서 각각이 하나의 독립된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모든 딴뜨라가 각각의 성취 방법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완전한 체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의례나 명상의 대상인 본존(本尊, Yi-dam)도 서로 다른 모습에 다른 이름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무상 요가 계열의 ‘헤바즈라딴뜨라(Hevajratantra, 呼金剛)’를 보면, 본존불인 ‘헤바즈라(Hevajra, 呼金剛)’께서 깨달음의 청정 세계인 만달라(曼茶羅, mandala)의 한 가운데 있으며, 그에 대한 자세한 수행 차제와 의례 차제들은 ‘헤바즈라딴뜨라(Hevajratantra, 密典)’라는 경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각 딴뜨라의 수행 전통에는 그에 따른 본존과 법계(法界)와 경전들이 따로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구체적인 딴뜨라들은 하나의 독립적인 체계가 될 수 있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바른 스승에 의지하여 공부하고, 자기 근기에 맞는 방법을 찾아서 해 나간다면, 어떤 방법도 다르지 않다고 스승들은 말씀하십니다. 굉장히 복잡해 보입니다만, 밀교 수행의 본질적인 특징을 알고 나면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밀교의 많은 근본 경전들에는 딴뜨라라는 이름이 함께 따라 옵니다. 그러나 몇몇 밀교 경전들의 제목에는 딴뜨라라는 용어가 없는 경우가 있으며, 딴뜨라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도 실제 밀교 경전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름만 가지고 밀교 경전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딴뜨라’라는 말은 광범위합니다. 다시 말해 ‘딴뜨라’는 밀교 수행 전통에 대한 다양한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는 광범위한 의미의 개념적 용어라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됩니다.

딴뜨라의 수행자들은 딴뜨라 수행의 전통이 대부분 석가모니(Sakkyamuni)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가끔씩 다른 세상의 부처님들께서 설하신 것도 있으며, 말이 아닌 의식 속에서 전해진 것(意傳)이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것(心傳) 등 다양한 형태로 전해진 딴뜨라들이 있습니다. 티벳 불교 학자들 대부분은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일반적으로 역사학과 관련한 현대의 분과학문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내용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 이후, 최소한 천년 동안, 불교 딴뜨라들이 출현한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재세시와 인도에서 딴뜨라가 꽃 핀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해 티벳 역사가들 중 17세기의 유명한 역사가인 따라나타(Taranatha) 같은 이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당신의 재세시에 직접 딴뜨라의 가르침들을 전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 사람들의 근기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단지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전승되고 나머지는 때가 되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감추어져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딴뜨라의 기원에 관한 이런 식의 설명은 현대의 학자들에게 큰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수많은 딴뜨라의 경전들이 언제 어디서 누가 편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딴뜨라를 직접 수행하는 사람들의 전통에서 보면, 딴뜨라는 한번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 확실한 법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수행자들이 그 전통을 따라 성취를 이루었고, 지금도 그 법맥을 따라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많은 딴뜨라의 경전에는 법맥의 전수자들이 한생에서 다음 생으로 딴뜨라의 법을 전해준 증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족보 속의 인물들이 아버지에서 아버지의 아버지로 이어진 것과 같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약 7세기경부터 티벳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이들 수행 전통들은 이미 잘 정립되어 있던 인도불교 경전들에 대한 방대한 규모의 번역 사업과 함께 긴 세월을 동안 국가적인 관심 속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전해진 내용들은 대부분 인도의 위대한 불교의 스승들에게서 전해진 것이라는 사실이 아직도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티벳에 전수한 인도 불교의 산실이 중세 인도 불교의 총본산(總本山)이라고 할 수 있는 나란다(Nalanda)와 같은 대규모의 승원대학들 이었다는 점에서도 그 정통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티벳 불교의 전파발달사는 일개인에 의한 전법(傳法)의 역사가 아니라, 법을 안배하기 위한 스승들의 원력과 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은 중후반기 인도 불교의 대규모 이식작업이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나란다(Nalanda) 승원 대학 같은 경우는 근래에 들어 인도 학자들이 진행한 역사적 기록에 대한 연구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실제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내용들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법현 스님과 현장 스님이 방문 했던 시기의 중간에도 승원들이 발견된 기록들이 보이지만, 법현 스님이 이곳을 지나던 보통력(C.E.) 427년에는 대학으로서의 나란다를 목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곳을 ‘나로 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사리불이 열반한 자리에 서 있는 열반탑을 보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633년 현장이 들렀던 시기만큼 그 지역이 많이 번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과 용수보살의 시기로 소급되는 이 지역이 대승불교에 관한 여러 가지 중심적 역할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온전한 대학의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은 5세기 무렵 후기 굽따 왕조 시대(480-535)로 보인다. 이 시기에 꾸마르 굽따 I 세가 학숙 형태의 사원인 나란다 대학을 설립한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에 불교적 전통의 이와 같은 발전에 따른 영향으로 힌두 전통의 사원 대학들이 함께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 승원들은 우안거 때 집중적인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3차 결집시기에 축출된 수많은 승려들이 나란다로 모여들었고, 그들이 주장하던 대중부의 가치를 재 고찰하였다. 이 시기부터 마우리야왕조 시기까지의 나란다는 용수 보살과 성천 보살 등의 활약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후 굽따 왕조 때까지는 소강기에 접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나란다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인장(印章)들의 연대 측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란다가 대학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한 것은 법현 스님이후 현장 스님이 들르기 전으로 보이며, 현장 스님이 방문할 즈음에는 이미 그 꽃을 피우고 있던 시기이다.” (B.N. Misra,「NALANDA」vol. I, 1998, B.R. Pub: Delhi, pp. 181-182)

물론 여러 가지 이견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와 같이 약 2세기 인도 불교의 대중부(大衆部) 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된 나란다의 전통은 12세기 이슬람의 침입으로 소멸하기까지, 물론 그 이후에도 소규모의 복구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인도 불교와 대승 불교의 흥망성쇠를 그대로 담아 그 천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승 불교의 모태인 대중부와 용수 보살과 성천(聖天, Aryadeva) 보살 그리고 샨띠데바 보살을 포함한 수많은 불교 사상가와 수행자들의 산실이었던 나란다는 거의 모든 불교 학파들의 흔적들을 그대로 담고 있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굴 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4세기 이후로 추정되는 고고학 자료들에는 다양한 밀교적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나라다는 지금도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2000년 현재) 이와 관련한 증거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승된 티벳 불교가 딴뜨라를 단순한 수행적 신념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인도의 범어(梵語)에서 번역된 대승의 공인된 경전들과 당대의 위대한 학자이자 밀교의 스승들이었던 인도불교의 대가들로부터 전수받은 법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라는 정통성에 대한 자부심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기록들은 13세기에 이르러 방대한 양의 대장경으로 결집되었으며, 지금도「티벳 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불교문화의 커다란 유산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나 수행적으로 끊임없이 보존 전승되어온 금강승의 전통이 1959년 이후, 티벳이라는 국가적인 운명과 시절 인연을 만나 이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사이에 다양한 형태로 밀법이 세상에 유통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온전한 체계를 가지고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제 우리는 대승의 특별한 방편의 길인 금강승을 가까이 접하고 수행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앞에서도 보리심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설명한 것처럼, 대승의 수행자들이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진정한 목적은 나와 다르지 않는 모든 중생들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내적인 평화는 물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따듯함을 마음껏 나누기 위한 힘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금강승의 길은 어느 한 가지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단 몇 줄에 모든 것을 전하고 싶지만, 인생의 생 노 병 사를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금강승의 수행도 각각의 단계와 과정을 거쳐야 전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근기를 갖추기만 한다면, 단 한 생에도 부처의 모든 경지를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이 안배되어 있는 것이 금강승의 길이라고 합니다. 각자가 어떤 인연에 어떤 수행을 만나게 될는지는 오직 자신의 법 인연에 의한 것이겠지만, 전통적으로 딴뜨라를 공부하는 방식이 있고 그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은 스승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살펴볼 내용들은 딴뜨라의 수행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들입니다. 밀교의 어떤 수행을 접하든지 기본적인 과정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내용과 순서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스스로를 최상의 근기로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하며, 틈나는 대로 모든 중생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법연을 얻기 위한 스승들의 가피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딴뜨라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항상 마음속에 간직해왔던 내용들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최소한 한 생에서 더 이상 허망한 망상의 놀음에 속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조그만 것들 속에서 큰 행복을 얻는 힘을 성취하였습니다. 딴뜨라에 입문하는 기본적인 마음 자세는 윤회하는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出離心), 본래 공한 현상계를 바르게 꿰뚫어 보는 눈(正見)으로,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깨달으려는 마음(菩提心)을 끝없이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금강승(金剛乘, Vjrayana)이라고 알려진 불교 딴뜨라의 이론과 수행체계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불교 딴뜨라의 가르침과 관계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많은 의문들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언제 어디서 그렇게 많은 딴뜨라들을 가르치셨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물론 모든 딴뜨라의 가르침이 다 부처님 재세시에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딴뜨라의 가르침들은 인간의 몸과 마음에 있는 모든 물리적인 요소들과 그 잠재력을 완전히 탐구하여 고도의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들의 출세간(出世間)적 직관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깊은 직관을 가진 수행의 힘으로 고도의 깨달음과 통찰력을 얻을 수 있으며, 미세한 의식의 차원에서 법계로부터 딴뜨라의 가르침을 직접 전해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정된 시공간(時空間)에 갇힌 눈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몇 가지 하급 딴뜨라는 부처님께서 일반적인 비구의 몸을 하시고 직접 가르치신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딴뜨라는 특정한 딴뜨라의 만달라(曼茶羅, mandala, 본존의 청정 거주처)에 거주하시는 본존(本尊, Yi-dam)의 형태로 가르치신 것들입니다.(* 역주: 수행을 통하여 이 딴뜨라의 보존을 친견하고 법의 가르침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을 본존요가(本尊瑜伽, Deity Yoga)라고 한다. 무상요가의 생기차제는 대부분 이 본존요가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딴뜨라의 수행은 앞에서 설명한 현교(顯敎, sutra)(*역주: 딴뜨라를 감추어진 것이라는 의미의 밀교라고 하는데 대하여, 일반적인 경전의 가르침은 밖으로 드러난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현교라고 한다.)에서 깨달음의 길에 대한 기본적인 요소를 튼튼하게 갖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딴뜨라에 입문하는 수행자로써 여러분이 갖추어야 할 것은 고통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리려는 마음(出離心)을 가져야 하고, 부처님께서 두 번째 법륜(二傳法輪)에서 가르치신 공성에 대한 바른 견해(正見)를 가져야 하며,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사랑(慈)과 연민(悲)을 바탕으로 한 이타심인 보리심(菩提心)을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의 출리심(出離心)과 공성에 대한 정견(正見) 그리고 보리심(菩提心)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육바라밀에 대한 수행을 함께 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현교와 밀교 수행의 적절한 기초를 다 갖춘 것이며, 이런 경우에만 딴뜨라의 수행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습니다.

딴뜨라의 심오함은 무상요가(無上瑜伽, Anuttarayoga) 딴뜨라에서 완전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께서 세 번째 굴리신 법륜(三傳法輪)에서 설하신 경전들에 나타나는 ‘청정지혜(淸淨智慧)’나 ‘부처의 진면목(眞面目)’ 등에 대한 완전한 의미는 무상요가를 수행해야만 터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정광명(淨光明)의 본래 마음 상태에 대해 분명하게 설하고 있는 미륵(彌勒, Maitreya) 보살의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Mahayanottaratantrashastra)」의 주장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이 근본 마음의 상태가 바로 궁극적인 의미의 부처의 진면목이며 불성(佛性)입니다. 따라서 불성(佛性)을 가르치는 궁극적인 의도는 무상요가에서 분명하고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는 정광명의 본래 마음 상태를 통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무상요가는 깨달음에 이르는 접근 방식 중에서도 아주 심오하고 독특한 것입니다. 무상요가에서는 거친 수준의 마음 상태를 깨닫는 방법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극히 미세한 수준의 마음 특히 정광명의 본래 마음 상태를 깨달음의 길로 전환하는 다양한 방법과 기술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정광명의 본래 마음 상태를 깨달음의 실질적인 상태로 전환할 수 있을 때, 여러분은 아주 강력한 수행의 힘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보통 한 곳에 집중하는 삼매가 이루어지면 거친 수준의 마음 상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수행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언제나 잊지 않는 억념(憶念)과 그것을 깨어서 지켜보는 자각(自覺)의 강력한 힘을 갖추고, 번뇌에 이끌리는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항상 깨어서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의식의 작용이 언제나 산만하게 움직이는 거친 수준의 마음을 한번 벗어나게 되면, 이와 같은 강력하고 지속적인 자각 상태는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됩니다. 무상요가에서도 이와 같이 거친 수준의 마음을 유도하여 해체시킬 수 있는 특별한 수행의 방법을 설명합니다. 즉 일반적인 수행들이 삼매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바로 미세한 수준의 마음 상태로 들어가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무상요가 수행에서는, 가장 미세한 수준의 마음인 정광명의 본래 마음 상태를 깨달음의 실질적인 상태로 전환하기 위하여, 거친 의식을 움직이게 하는 기반인 거친 풍기(風氣, rLung)와 거친 수준의 마음을 유도하여 해체시키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주요한 방법이 있는데, (1) 풍기요가(風氣瑜伽, pranayoga)(* 비밀집회(秘密集會, Guhyasamaja) 딴뜨라의 경우), (2) 네 가지 유형의 지복(至福) 일으키기(* 총섭륜(總攝輪, Cakrasamvara) 딴뜨라와 같은 모계(母系) 딴뜨라의 특징 중에 하나임), (3) 무분별(無分別)의 경지를 개발하는(* 대구경(大究竟 혹은 大圓滿, Dzog-chen) 딴뜨라 계열) 방식입니다. (* 원주(原註): 이외에도 다른 방식의 분류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현대 티벳 불교의 대학자인 게쉐 툽뗀 진빠(Geshe Thupten Jinpa)의 증언에 따르면, 달라이 라마는 겔룩빠의 스승들인 케둡 노르상 갸초(Khedrup Norsang Gyatso, 1423-1513)나 창꺄 롤뻬 도제(Changkya Rolpai Dorje, 1717-1786)의 분류 방식을 따라 이런 식으로 구분하여 법문하는 경우가 많다.)

딴뜨라를 수행하는 이러한 방식들은 그 다양함 못지않게 각각의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방식 중 어느 것이든 거친 마음과 그에 상응하는 풍기들을 다스리고 해체할 수 있는 방법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방식으로 고도의 능력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실제 수행에 들어 갈 때는 함께 병행해야할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여러분이 선한 공덕을 쌓으면 그것은 먼 훗날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기 위한 원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한 공덕만으로 일체지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비밀집회(秘密集會, Guhyasamaja) 문수금강(文殊金剛, Manjushrivajra)의 구경원만차제(究竟圓滿次第) 전통의「구전(口傳, Manjushrimukhagama)」이라는 경전에 보면, (* 원주(原註): 티벳 불교에는 무상요가인 비밀집회 딴뜨라와 관련한 세 가지 주요한 전통이 있다. 하나는 악쇽비야(Akshobhya, 阿觸不動) 비밀집회 전통의 아리야(Arya, 聖者) 학파이고, 두 번째는 만주슈리바즈라(Manjushrivajra, 文殊金剛) 비밀집회 전통인 갸나빠다(Jnanapada, 智慧足) 학파, 그리고 세 번째는 위의 두 학파에 모두 속해 있는 관자재(觀自在, Lokiteshvara) 비밀집회 전통이 있다. 이 새 가지 전통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은 쫑카빠(Tsongkhapa) 대사 전집(全集) Jagkd(7), folio 21b에 나와 있다. 이 세 전통 중에 티벳에서는 주로 아리야 학파의 악쇽비야 비밀집회 전통을 수행한다.) 인도 불교의 위대한 스승 중에 한분이신 붇다슈리갸나(Buddhashrijnana, 覺吉祥智)의 말씀에 따르면, 이 지구상에 사는 인간의 몸이 가진 물리적인 구조와 구성 요소들 때문에 일상적인 평범한 상황에서도 극히 미세한 상태의 마음인 정광명(淨光明)이나 무분별(無分別)의 경지를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주로 잠을 자거나 재채기를 할 때, 또는 기절하거나 성적인 절정에 이를 때 발생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정광명의 경험이 생겨나는 네 가지의 경우 중에, 정광명의 경험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경우는 성적인 절정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성적인’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서 그것을 일반적인 성행위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성(異性)과 합일할 때 정수리 맥륜(脈輪, Cakra)에서 녹아내리는 정수(精髓, Thig Le, 菩提液)의 흐름을 수행의 힘으로 역행(逆行)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이렇게 고도의 합일 수행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여러 가지 선행되어야할 조건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정수리 맥륜에서 흘러내린 정수가 밖으로 유출(流出)되지 않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특히「깔라짜끄라(Kalacakra, 時輪) 딴뜨라」와 같은 밀교의 경전에서는 만약 이 정수가 밖으로 유출되게 되면, 수행자는 스스로 큰 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딴뜨라에서는 남녀 모든 수행자가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이 정수를 유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딴뜨라의 가르침에는 수행자가 꿈속에서도 정수를 유출하지 않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율장(律藏, Vinaya)에 있는 승가 계율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율장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꿈속에서 정수가 유출되는 것을 범계(犯戒)에서 예외로 두고 있습니다. 이때 율장에서 의미하는 것은 일반적인 수행자가 깨어서 제어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하지만 딴뜨라의 길에서는 심지어는 꿈속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의식을 제어해야 하기 때문에, 정수의 유출은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실제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 역주: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보리심’이라는 용어는 극히 미세한 생리적 분비물이다. 딴뜨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보리심은 우리 몸 전체 어느 곳에나 있다. 이 용어는 남녀가 생산하는 재생액(再生液, 精과 血)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보리심이 ‘녹아’ 내리면, 몸 전체의 신경통로를 따라 이동하거나 몸 안의 특정한 장소(주로 맥륜)에 모일 수 있다. 따라서 딴뜨라에서 말하는 지복의 경험은 보리심이 ‘녹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보리심’이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현교의 가르침에서처럼, ‘깨달음에 대한 마음’이다. 특히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을 경험하기 위해서 지극히 평범한 수준의 수행자들은 성적으로 매력 있는 사람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는 것으로 대치할 수도 있습니다. 이 욕망의 힘으로 몸 안에 있는 보리심을 녹이고 어느 정도 무분별(無分別)의 경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때 여러분의 모든 의식은 깨달음에 대한 마음(菩提心)에 완전히 집중해 있어야 합니다.

수행자의 몸 안에서 보리심이 녹아내린 결과로 무분별의 지복감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지복의 경지에서 공성(空性)에 대한 실질적인 경험이 일어나면, 여러분은 번뇌와 망상을 가지고 공성을 깨닫기 위한 지혜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이 지혜는 이전에 주로 욕망에서 비롯된 번뇌와 망상들입니다. 이렇게 지복감에서 오는 무분별의 경지를 통하여 공성을 깨닫게 되면, 아주 강력한 지혜의 힘이 생기고, 이 지혜의 힘은 모든 번뇌와 망상에 대처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보면, 망상에서 생긴 지혜는 본래 망상 그 자체이기 때문에, 망상으로 망상을 부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의 원리에서, 성적인 욕망에서 일어난 공성의 지복감으로 성적인 충동의 힘을 해체 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무에서 생긴 벌레가 자신이 생겨난 나무를 갉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망상을 제어하는 이러한 방식은 딴뜨라 만의 특징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유형의 고급 딴뜨라들을 가르치셨는데, 이때 부처님께서는 청정한 만달라의 세계 안에 거주하는 합일존(合一尊, Yab-yum, 父母尊)의 형태로 나투십니다. 따라서 딴뜨라를 수행하는 수행자들 역시 고도의 딴뜨라를 수행할 때는 스스로를 합일존의 모습으로 관상(觀想)해야 합니다.

딴뜨라의 또 다른 특징 중에 하나는 깨달음의 본신(本身)이 구현된 두 가지 몸(kayas)인 색신(色身, rupakaya)과 법신(法身, dharmakaya)을 성취하는 과정과 관련된 것입니다. 일반적인 현교(顯敎, Sutra)의 체계에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가꾸어 온 이타심으로 수행자는 두 가지 깨달음의 몸을 성취하기 위한 서원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의 본신이 구현된 이 두 가지 몸은 원인과 조건 없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는 원인과 조건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말은 원인에 대한 결과는 그 특성상 중요한 유사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현교의 체계에서 말하는 색신(色身)을 이루기 위한 원인으로써, 이렇게 영적으로 특별한 몸인 색신은 오직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보살들만이 성취할 수 있습니다. 현교의 가르침 안에서는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며, 정화의 과정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색신을 성취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독각승(獨覺乘 혹은 緣覺乘)의 경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강조합니다. 독각승의 가르침에는 비록 일체지(一切智)를 이루기 위한 원인과 방법들이 완전히 다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이들도 부처의 다양한 상호(相好)를 성취하기 위한 특정한 수행 방법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딴뜨라는 부처의 색신을 이루기 위한 아주 특별한 방법입니다. 무상요가에는 이러한 부처의 색신을 이루기 위한 특별한 원인과 방법들뿐만 아니라, 부처의 법신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색신을 성취하기 위한 원인을 심고 그 방법을 수행하기 전에, 딴뜨라의 수행자들은 먼저 자신의 정신적인 기관들을 성숙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런 특별한 원인을 이루기 위한 “예행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딴뜨라에서는 ‘본존요가(本尊瑜伽, Deity Yoga)’를 먼저 행하는데, 이것은 딴뜨라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과정입니다. 본존요가는 기본적으로 수행자 스스로가 자신을 본존으로 관상하는 방법입니다.

「성다지금강루딴뜨라대왕의궤(聖茶枳金剛蔞恒特羅大王儀軌, Dakinivajrapanjaramahatantrarajakalpa)」와 같은 해석 딴뜨라들과 그와 관련한 인도 학자들의 주석서에서는 법신을 성취하려면 그와 유사한 특성을 갖춘 결과적 상태를 관상 수행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직접 지각을 통한 공성에 대한 관상 수행은 모든 이원론적인 현상과 분별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색신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부처의 색신에 해당하는 결과적인 상태와 유사한 특징을 가질 수 있는 길을 따라 수행해야 합니다.

부처의 결과적 상태 특히 색신과 유사한 특성을 가진 길을 수행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며,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성취를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딴뜨라에서는 결과와 유사한 수행을 네 가지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을 사청정(四淸淨)이라고 부르는데, (1) 주변 환경의 완전한 청정(界淸淨), (2) 몸의 완전한 청정(身淸淨), (3) 재료의 완전한 청정(財淸淨), (4) 행위의 완전한 청정(行淸淨)이 있습니다.

두 가지 깨달음의 본신이 합일한 결과적인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방편의 합일로 특징지어지는 수행을 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모든 대승의 학파들이 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교에서 가르치는 지혜와 방편의 합일은 완전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현교의 체계 안에서 지혜는 공성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며, 방편은 육바라밀의 수행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합일한다는 것은 서로를 보완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지혜는 방편행으로 채우고, 보리심과 자비심 같은 방편은 지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교적 체계 안에서는 지혜와 방편을 완전한 하나의 의식으로 합일하기가 힘들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현교의 수행을 통해서도 지혜와 방편이 둘이 아닌 공부를 해나갈 수 있지만, 그것이 완전히 드러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현교의 수행은 부처의 색신과 법신이 완전히 합일한 결과를 맺는 궁극적인 원인으로 작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지혜와 방편을 완전히 합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답은 본존요가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본존요가에서는 본존의 신성한 모습과 공성을 순간 동시에 알아차립니다. 이때 본존에 대한 수행과 공성에 대한 자각은 찰나에 완전한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그 찰나의 의식은 지혜와 방편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지혜와 방편이 하나로 합일된 금강살타(金剛薩陀, Vajrasattva)의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본존요가의 주요한 특징들 중에는 범부(凡夫)적인 인식과 감각을 극복하기 위하여 신성한 존재로서의 ‘자부심’을 기르는 것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수행은 우리 안에 있는 깨달음의 잠재력을 확장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본존으로서의 확실한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개발하려면, 본존의 모습에 대한 강력하고 안정적인 관상의 힘이 필요합니다. 보통 ‘나’라는 의식은 우리의 자연적인 습성과 자의식 때문에 일반적인 몸과 마음에 의지해서 표출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본존의 형태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자각하기 시작하면, 신성한 모습을 갖춘 자의식을 가지고 신성한 존재로서의 자부심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자기 안에서 일체지의 마음을 드러내려면, 일체지의 마음이 될 수 있는 근본원인을 심어야 합니다. 근본원인은 우리 안에서 근본적으로 자의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의식을 말합니다. 다른 어떤 의식도 근본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앞에서 설명한 것들을 잠깐 요약해 보겠습니다. 부처의 일체지를 성취하려면, 먼저 마음의 본성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체지를 이루기 위해 알아야 하는 마음은 아주 특별한 유형의 마음입니다. 언제나 계속되는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어떠한 의식도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번뇌와 망상에 의해서 일어나는 의식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의식입니다. 계속해서 지속되는 의식이 아니라 지극히 순간적인 의식들입니다. 하지만 일체지의 마음은 일상에 흔들리는 위태로운 마음이 아니라, 무한히 계속해서 이어지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공성의 청정한 마음입니다. 즉 어떠한 번뇌 망상으로도 오염되지 않는 본성을 가진 마음입니다.

공성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봄에 자라나는 새싹과 같은 세속적인 현상의 공성이나 비로자나(Vairocana) 부처님 같은 본존불의 공성이나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공성의 대상을 놓고 보면,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공성의 대상은 무상을 일깨워주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부처의 일체지를 이루기 위한 원인이 되지는 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부처의 일체지를 이루기 위한 원인으로 작용하는 ‘본존의 공성’은 일체지를 깨닫게 해주는 아주 특별한 유형의 공성입니다. 이것이 본존요가의 핵심입니다. 본존요가는 본존의 관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선명한 집중의 힘인 명료(明瞭)함과 공성을 깨달아 얻어지는 심오(深奧)함의 합일을 성취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또 현교의 체계 안에서 보면, 부처님께서는 대승의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의 깨달음과 행복에 대해서 어떠한 망상을 일으킬만한 예외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보살이 다른 중생의 이익을 위해 할 수 없이 일으킨 필요에 의한 망상이라면 예외가 있을 수도 있다고 경전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대승 경전에서 ‘시골의 분뇨(糞尿)는 더러워도 비옥한 땅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와 같이 보살의 망상은 다른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현교의 가르침에 보살이 화를 내거나 증오심을 일으켜도 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떠한 예외도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같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가끔 화를 내는 것이 무언가 강력한 동기를 유발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보통 사람의 속성을 활용하여, 딴뜨라에서는 분노를 일으키도록 하는 예외적인 방식을 사용합니다. 딴뜨라에는 이렇게 거친 분노나 증오 같은 감정의 힘을 긍정적인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고도의 방편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분노나 증오 같은 감정을 긍정적인 힘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깨달으려는 이타적인 마음의 근본 동기를 끊임없이 지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근본 동기를 잊어먹고 너무 지나치게 되면, 우리의 행동은 분노와 증오 속에서 아주 거칠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잘 이해할 수 있다면, 딴뜨라에서 왜 그렇게 무서운 형상을 한 분노존(忿怒尊, Drag po)이 본존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딴뜨라의 본존요가 수행에 있어서 분노존이 차지하는 중요성 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설명한 딴뜨라의 수행에 관한 모든 내용은 현교의 체계에서 하는 수행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또 특별히 수승하다고 하는 딴뜨라의 길을 구분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달라이 라마의 법문 중에서)

이와 같이 딴뜨라의 길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거친 속성을 활용하여 부처의 완전한 속성으로 전환하는 길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수많은 오해와 왜곡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딴뜨라의 길은 먼저 그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근기를 키우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수행에 들어가서도 달라이 라마께서 앞에서 설하신 내용들만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 딴뜨라의 복잡한 용어와 구성 원리가 자연스럽게 이해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수행은 자신의 근기에 맞는 법계와 인연을 맺고 충분한 예비수행을 거친 다음, 스승의 입문 허가와 함께 시작되기 때문에, 정상적인 불교 딴뜨라의 수행에서는 그렇게 큰 왜곡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딴뜨라의 계율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수행하거나 임의대로 법을 전하는 경우에는 법의 왜곡현상이 심하게 일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 바른 법계의 인연 없이 마음대로 수행을 하거나 법을 왜곡하게 되면, 인간 세계에 남아 있는 정법(正法)의 인연은 더욱 줄어만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딴뜨라의 길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적법한 절차에 의한 과정을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원하는 바를 큰 무리 없이 성취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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