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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라이 라마께서 설하시는 <보살의 37수행법>

로덴
달라이 라마께서 설하시는 <보살의 37수행법> --첫째날

<보살의 노래: 보살의 37수행법>

(*역주: 톡메 상뽀의 『승리자의 아들, 보살의 37수행법』 원제는 『rGyal sras thogs med kyis mdzad pa\'i lag len so bdun ma』이다.)



첫째 날

오늘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여기 인도의 보드가야에 모였습니다. 이 중에는 오직 법을 들으려는 일념으로, 티벳의 여러 지역에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먼 길을 넘어 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소중한 기회가 헛되지 않도록, 여러분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해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보드가야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곳으로, 다른 곳 보다 훨씬 힘 있는 복덕의 자량(資糧:밑천)을 쌓을 수 있는 성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과 성의를 다해서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복덕을 쌓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좀더 크고 넓은 동기를 가져야 합니다. 법문을 듣기 위해 참석한 여러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라마(Lama: 스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을 이루신 자비로운 부처님은 서른 두 가지의 주요한 특징(32相)과 팔십 가지의 보조적인 특징(80種好) 그리고 육십 가지의 법을 전하는 소리의 특징(혹은 64梵音)을 모두 갖추고 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은 언제나 모든 현상의 근본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고 계시며, 그들의 본성이 공(空)한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모든 번뇌 망상(煩惱妄想)에서 자유롭습니다. 2500여 년 전 바로 여기 보드가야에서, 부처님은 당신의 완전한 깨달음을 설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한 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전쟁, 기근, 재난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안고 사는 이런 시대에 여러분은, 전생에 지은 복덕의 인연으로, 스승과 만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가능한 한 여기서 들은 것을 실천하고 수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단순히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법(法, Dharma)의 참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 보다는 스스로 직접 실천하는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단지 아무 생각 없이 입으로만 중얼거리며 부처님께 귀의(歸依)하는 것 보다는, 자신이 말한 것을 일상에서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법을 실천한다는 것은 가르침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법은 어떻게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입니까?

법은 우리를 좀 더 행복하게 하는 무언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행복은 자기가 전에 지은 여러 가지 선행의 결과로 생기는 복덕입니다. 그냥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부처의 추종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좀 더 나은 행복을 만들어 줍니다.

여기 보드가야에 있는 동안 우리가 공부할 대승의 가르침은 여러분 각자가 자신의 행복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하는 지에 대한 핵심적인 방법을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동기를 심는 것입니다. 좀 더 넓고 긍정적인 동기를 가질수록 훨씬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기가 없이 수행에 들어간다면, 뚜렷한 결과를 얻을 수도 없으며, 끝까지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라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의 길에 서서 가르침을 펴는 사람은 명성을 얻고 존경 받기 위해 아만(我慢)으로 가르쳐서는 안 되며, 경쟁이나 시기로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오직 동기는 남들을 얕보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가르침을 펴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만하지 말고, 부처님의 소중한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존경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가 바르고 주의 깊게 행동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이며, 모든 복덕의 자량을 함께 쌓아 나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번뇌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번뇌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 원인들에 대응하는 방법을 하나씩 적용해가다 보면, 점차로 문제는 해결되고 번뇌는 사라져 갈 것입니다. 해마다 점점 나아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래, 마음의 성품은 번뇌로 물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맑히는 것이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은 마음을 잘 제어하지 못하고 성숙하게 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응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아주 거칠고 무례한 사람을 평화로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할 때, 단번에 고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천천히 해 마다 나아지게 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가끔씩 잘못을 저지를 때도 있겠지만, 천천히 나아질 수 있습니다. 아이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지요. 하지만 세월이 흘러 학교에 가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들은 지성을 갖추어 갑니다. 집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로 한 층 한 층 또 한 계단 한 계단씩 만들어 가야 합니다. 단번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그것이 얼마가 걸리든 걱정하지 말고, 단계적으로 하나씩 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 가지 공정을 거쳐 그 모든 작업이 끝 날 때까지 똑바로 쭉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데도, 이와 똑같은 방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먼저 바른 동기를 세우고, 지금 자신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 해서 해야 합니다. 그러면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역주: 쫑카빠 대사의 저서인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 [T] Byang-chub Lam-rim che ba)』은 일반적으로 람림(Lam-rim)이라고 약칭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람림’이라는 이름은 깨달음의 단계(菩提道次第)를 뜻하는 일종의 문학군(文學群)이기도 하다. 이 경우에는 티벳어 이름 그대로 ‘람림(Lam-rim)’이라고 표기하기로 한다.) 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점차로 나아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 대부분은 잘 알고 있겠지만, 처음 온 사람들을 위해 조금 더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법을 수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복이나 자신의 지위 또는 부를 바꾸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자세를 바꾸고 마음을 성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나를 달라이 라마라고 부르지만, 법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우리들 각자가 어떠한 이름과 어떠한 직위를 가진 사람인가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성숙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스스로 법을 얻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숙한 마음은 단지 옷을 갈아입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내면의 조건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가장 핵심적인 요점은 자신의 마음을 성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원하는 것은 행복이지 고통이 아닙니다. 심한 두통이 생기면 누구나 그것을 가라앉히려고 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것은 몸의 고통이든 마음의 고통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의 여러 과정들은 원하는 행복을 얻고 원치 않는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을 담고 있습니다. 한 번에 모든 행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동물을 돌보고 조련하는 것에서도, 행복을 맛보려고 한다면 먼저 그 동물에게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해주어야 합니다. 먼저 잘 먹여야 하고 나무라거나 두렵게 하는 것 등을 자제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에게도 그와 똑같이 단계별로 하나씩 적용해 나가야 합니다.

먼저 올해에 내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내년, 그리고 후년, 그렇게 해서 마침내 이십년 후나 또는 다음 생에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까지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좀 더 긴 세월을 두고 행복을 얻고 고통을 받지 않도록 확장해 나가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과정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 몸을 받은 지금 앞일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한 순간 겉으로만 그런 것이 아닌 궁극적인 행복을 얻으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음식이나 옷 그리고 주택 등 몸의 편안함을 위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부자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더 많은 고통을 안고 살 때가 많습니다. 특히 발전된 서구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풍요로운 돈과 물리적 안락을 누리고 있지만, 그에 비례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울이나 불안 등의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약물 처치나 마약에 의존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시사하는 것은, 물질적인 안락과 풍요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정신적인 행복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지요. 단순한 물리적인 행복이나 재산만으로는 정신적인 행복까지 동시에 얻을 수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주 건장하고 힘이 넘치는 어떤 사람의 마음이 언제나 불안한 상태에 있다면, 몸의 건강만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우리가 마음과 함께하는 이상, 마음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의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마음의 행복은 생각의 흐름을 타고 옵니다. 마음과 생각의 작용을 활용하지 않고, 행복을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행복은 마음과 생각 두 가지 다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번뇌가 강한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그 번뇌에 굴복하여 성내고, 욕심 부리며, 자존심을 세우고, 질투할 때,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잦은 행동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더욱 고통 받게 됩니다. 즉, 화를 내면 번뇌는 커지고 그래서 더 화가 나고 더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번뇌에 부정적으로 반응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만일 티벳의 상황을 놓고 한탄을 하거나 분노를 한다면, 그때 우리는 행복할까요? 말할 것도 없이 스스로 불행해 지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반해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면, 분노는 가라앉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따듯한 마음과 애정 어린 생각이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행복을 원하며, 고통을 제거하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의 뿌리에 해당하는 마음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집착과 미움이 강하면 강할수록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이들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행복은 깊어만 갑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사람이 행복하겠습니까? 우리가 끝내 죽음을 맞이해야 하듯이 질투의 대상 역시 끝까지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질투와 시기는 완전히 충족되지 않습니다. 질투와 시기가 마음 속에 있는 한 행복은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자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같은 상태를 영원히 경험하지는 않습니다. 항상 젊거나, 젊음을 유지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자랑스러워하던 어떤 것도 끝내는 잃게 됩니다. 그래서 자존심 역시 아주 불행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식당에 가서 남이 먹는 비싼 음식을 보고 질투한다면, 자신에게는 무엇이 돌아옵니까? 자신의 위장은 끝내 좋은 음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주 초라해져서 불행하기만 할 뿐이지요.

티벳인인 우리들 자신을 생각해 보면, 중국에 분노하고 시기한다고 우리가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이 마음의 행복입니까? 물론 아니지요. 집착과 증오를 가지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그런 사람은 큰 힘을 얻고 유명해져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무엇을 얻은 것일까요? 단지 역사의 한 장에 자신의 이름을 장식한 것일 뿐입니다. 그는 끝내 자신의 행복을 찾지 못하고 죽어 갑니다. 마찬가지로, 일생을 다 바쳐 욕망을 가지고 일해도, 행복은 얻지 못합니다. 여기서 부와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오늘날의 여기 보드가야만 놓고 생각해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성스런 땅에서 달라이 라마와 함께 있다고 해도, 지저분한 거지만 보면 화를 내고, 몸이 조금 불편하다고 화를 낸다면 스스로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마음을 가라 앉혀 번뇌를 줄이고 선(善)이 될만한 무언가를 이곳에서 행한다면, 그때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이웃이나 친구 그리고 아이들에게 바로 전달됩니다. 한 가족의 상황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화가 나서 아이를 쫓아가 손찌검을 하고,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가족 모두가 행복해 하겠습니까? 하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이 장난치고 놀도록 놔두면, 모두가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이 될 겁니다. 하나의 국가도 마찬가지로 공평과 관용이 충만하면, 그곳에서는 모두가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가족 그리고 국가 할 것 없이 똑같습니다. 더 많은 번뇌와 망상은 더 많은 불행을 나을 뿐입니다. 반면에, 번뇌와 망상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자신만 하더라도 수많은 번뇌와 망상의 꺼리가 생겨나 좋지 않은 것을 몰고 올 때가 많지만, 어느 것 하나도 계속해서 마음에 두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삶 속에서 번뇌와 망상을 줄여 갑니다. 그러면 덤으로 음식 맛은 더 좋아 지고, 모든 것이 좋기만 하여 삶은 더욱 즐거워집니다. 하지만 마음에 번뇌와 망상이 가득하다면, 아무리 수행을 하고 염불(念佛)을 해도 행복을 찾는 것은 멀기만 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번뇌 망상의 해로움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성숙해지면, 번뇌 망상은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성숙해지고 번뇌 망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때, 최선의 상태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다음 순간 더 이상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 차선(次善)입니다. 언제나 화내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래도 화가 나면 화를 가라앉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이 성숙해지면 그런 감정 상태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즉, 누군가를 손찌검하거나, 별명을 부르며 놀리지도 않고, 상대방에게 거칠게 반응하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천천히 점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보다 분명하게 찾아내면, 마음은 점점 더 성숙해지고 갈수록 행복해집니다. 따라서 초심자들은 자신의 마음에 번뇌 망상과 분노, 집착 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마음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성숙시키는 것이 곧 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번뇌와 망상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적멸(寂滅)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법입니다.

네 가지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에는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가 있습니다. 먼저, 고제를 통하여 우리는 생(生) 노(老) 병(病) 사(死)와 같은 다양한 유형의 불행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고통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고통의 근본은 거친 마음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번뇌 망상입니다. 그래서 번뇌 망상을 고통의 실제 근원이자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번뇌 망상의 힘으로 업(業)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뇌 망상과 업은 고통의 실제 원인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고통도 원치 않으며, 실제로 그 모든 고통을 제거하고 싶다면, 고통의 원인이 자신의 거친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을 진심으로 소멸하기를 원한다면, 번뇌 망상의 원인을 소멸하는 법계(法界, Dharmadhatu)나 공성(空性)의 상태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야만 실제 번뇌를 소멸하고, 열반(涅槃)을 이룰 수 있습니다.

번뇌 망상을 버리는 과정이나 그 원인을 제거하는 데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이 구체적인 과정을 일컬어서 ‘성자들의 실질적인 길’ 즉, 도성제(道聖諦)라고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다양한 번뇌 망상을 제거해 나가는 동안 그에 비례하여 더 나은 성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번뇌와 허물을 제거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선한 성품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질적인 길인 도제(道諦)입니다. 다시 말해 고통(苦)의 원인(集)을 제거(滅)하려면 실질적인 길(道)에 들어서야 합니다. 그 결과로 완전한 소멸(消滅)이나 적멸(寂滅), 또는 모든 슬픔의 고통을 넘어선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때야 비로소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지요. 이것이 부처님께서 사르나트(Sarnath)에서 사성제를 설하신 이후 이곳 보드가야에서 그에 대한 예를 들어 설명하신 내용입니다. 즉, 사성제중에 앞의 두 가지는 실제 고통(苦諦)과 그 원인(集諦)은 탁한 번뇌를 말하며, 뒤의 두 가지인 실제 소멸(滅諦)과 실질적인 길(道諦)은 정화된 상태와 정화의 길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법을 수행하는 데도 여러 가지 동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가 부모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동기가 모호하며 맹목적인 것입니다. 법을 수행한다는 것은, 아이가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그냥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마음을 성숙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고통을 제거하는 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즉, 배고픔이나 추위 같은 다양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농업이나 상업 활동은 배고픔이나 추위를 해결할 수 있는 생계 수단입니다. 또, 만약 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면 의사를 찾아가거나 약에 의지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임시 대응책일 뿐입니다. 병이 들면 좀 더 강력한 약의 효과로 잠시 고통을 제거하고 치료할 수 있겠지만, 그 약으로 늙음이나 죽음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임시방편으로도 생로병사의 고통을 완전히 제거 할 수는 없습니다.

힌두교의 여러 종파나 기독교 같은 많은 종교들이 고통과 행복을 창조한 신의 존재를 믿습니다. 이들은 신에게 기도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고통과 행복이 신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일한 보물인 신에 의지하는 것만을 인정하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불교는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 그리고 그 가르침을 보존 전승하는 승가(僧伽)의 세 가지 보물(三寶)을 인정합니다. 부처님은 인정해야할 것과 거부해야할 것에 대한 길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창조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길을 밝히신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업(行爲)이 자신의 행복과 고통을 결정합니다. 행복은 긍정적이고 선한 행위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그렇게 행동하려고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원인과 결과(因果)의 길입니다. 운명은 신이 아닌 우리 자신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실질적인 귀의처는 진리에 대한 가르침인 법(法)입니다. 자신의 내적 흐름(自相續)을 발전시켜줄 가르침이지요. 즉, 자신의 마음에서 번뇌 망상과 고통을 제거하여 행복을 얻게 해 줄 가르침을 말합니다. 더불어, 법에 귀의하고자 하는 자신의 내적 흐름을 발전시키려면, 그 과정에 대한 예를 들어 주고 이끌어 줄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승가(僧伽)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법을 보여 주신 부처님과 실제 귀의해야 할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法)과 부처님의 법(法)을 실천하는 예를 보여주는 승가(僧伽) 공동체를 삼보(三寶)하고 하며, 여기에 돌아가 의지하는 것을 삼귀의(三歸依) 또는 귀의삼보(歸依三寶)라고 합니다. 결국 불교에는 행복을 주고 고통을 제거해주는 유일한 신은 없습니다.

영어의 “릴리젼(religion)” 즉, “신과의 재결합”을 종종 “다르마(Dharma, 法)”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르마(Dharma, 法)와는 다르게 “릴리젼\"이라는 단어는 “창조자 신(神)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하나의 체계”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 종교에서는 보통, 불교가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無神論)이라든가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중국 공산당은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말하면서도 불교는 종교이며 불교도는 종교인이라고 사상적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위의 “릴리젼\"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불교는 분명 무신론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신앙의 행위에 있어서도 맹목적이지 않으며, 진리에 대한 주의 깊은 탐구를 끝내고 나서야 부처님이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가르침이 합당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윤회와 같은 현상에 대한 수많은 논리적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잘 검증한 후에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만약 무언가가 논리적으로 합당하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맹목적인 믿음에 의한 것이라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나는 믿는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입니다. 만약 무언가가 논리나 실제와 관련이 없다면 수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의 바탕은 이성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전생에 대해 말씀하실 때도 언제나 완전한 설명과 함께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덧붙여서 고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은 실질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약에 대한 비유로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개별적으로 환자들을 진찰합니다. 그런 다음 그에 맞는 약을 각각 처방합니다. 만약 치료에 효과가 없다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 잘못이 약에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현명한 사람은 약이 듣지 않는 이유가 약 그 자체가 아니라, 의사의 처방이 문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불교의 진리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모아 놓은 “삼장(三藏) (*역주: 삼장(三藏)은 경(經) 율(律) 론(論)을 말한다.)”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점검할 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수행적 깊이와 논리적 이해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해를 발전시키려면, 경전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따라 하나씩 적절히 공부하고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을 성숙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잘 듣고 바른 동기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모두 펴셨습니다. 대승에서 중요한 것은 남을 돕는 일입니다. 소승에서는 남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없기 때문에 최소한 남을 해롭지는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두 가지 다 남들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은, 만약 스스로 남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며,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최소한 그들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하고나 쉽게 싸우려고 들 것입니다.

대승의 가르침에서는 또 자신만의 이기적인 목적을 버리고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도의 본래 목적입니다. 따라서 맑고 따듯하며 친절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 다음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의 바른 동기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톡메 상뽀 보살께서 지으신 『승리자의 아들, 보살의 37 수행법』에서 설한 것과 같은 바른 동기를 갖추어야 합니다.

톡메 상뽀 보살은 쫑카빠 대사(大師)보다 두 세대가 빠른 부똔 린포체(Buton Rinpoche)와 같은 시기에 사신 분입니다. 톡메 상뽀 보살은 티벳 불교의 사대 종파 중에 하나인 사꺄빠(Sa skya pa)에서 대부분을 수행한 스승으로, 아주 어릴 적부터 남들을 돕는데 관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남들을 돕지 않고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을 볼 때면, 언제나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곤 하였습니다. 자라면서 비구가 되었고, 여러 스승들께 헌신하였으며, 주로 두 분의 스승 밑에서 공부하였습니다. 현교(顯敎)와 밀교(密敎) (*역주: 현교(顯敎, Sutra)와 밀교(密敎, Tantra)는 부처님의 드러난 가르침의 전통과 비밀스런 가르침을 말한다. 그래서 현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경전(Sutra)을 의미하고 밀교는 스승에게서 제자로 이어지는 흐름(Tantra)을 의미한다. 딴뜨라(Tantra)는 형식이나 내용의 구분에 따라 밀교(密敎), 밀법(密法), 금강승(金剛乘)이라는 말로 쓰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를 모두 수행하였으며, 뛰어난 학식과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였습니다. 톡메 상뽀 보살은 특히 보리심(菩提心)을 아주 발전시킨 대표적인 분으로 주로 남과 나를 바꾸어 생각하는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실제 보살들의 삶을 마음 속에 그려보면, 톡메 상뽀 보살은 바로 생각나는 전형적인 예 중에 한 분입니다. 티벳인들은 그 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만큼 위대한 분이며 특별한 분입니다. 톡메 상뽀의 가르침을 들을 때면 누구나 조복(調伏)하고, 언제든지 편안함을 느낍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이 『37 수행법』을 지으신 것처럼, 우리는 이 가르침을 반복해서 점검하고 수행해야 합니다. 대승의 수행자라고 말하면서, 실제 대승 수행을 항상 점검하지 않는다면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37 수행법』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대부분의 게송은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에서 설명하고 있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동기에 대한 가르침과 같습니다.

이제 이 톡메 상뽀 보살의 원문(原文)에 대한 간단한 해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가르침을 뀐누 라마 린포체 뗀진 걀짼(Kunu Lama Rinpoch Tenzin Gyaltsen)께 전수 받았는데, 뀐누 라마께서는 티벳의 캄(Kham) 지방에서 바로 전생(前生)의 족첸 친포체(Dzogchen Rinpoche)께 전수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이 법이 전수된 간단한 역사적 배경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티벳어 본(本)은 티벳의 수도 라사(Lhasa)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관자재(觀自在) [보살님]께 배례(拜禮) 올립니다.

어떠한 사물 모두 가고 옴이 없음을 보고서도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념(一念)으로 정진하시는
존귀하신 스승님과 보호주(保護主) 관세음 [보살님]께
언제나 삼문(三門)*을 다 바쳐 배례(拜禮) 올립니다.

(*역주: 삼문(三門)은 신(身) 구(口) 의(意)의 세 가지 통로를 말한다.)

톡메 쌍뽀 보살께서 가르치고 있는 본문의 주요한 내용들은 주로 적천(寂天, Santideva) 보살의 『입보리행론(入保提行論, Bodhicaryavatara)』, 미륵(彌勒, Matreya) 보살의『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 용수(龍樹, Nagarjuna) 보살의『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 Ratnavali)』 (*역주: 고려대장경에는 진제(眞諦)의 저서로 되어 있다.) 등에서 참고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작 단계에서 하는 복덕(福德)이나 공덕(功德)의 자량을 쌓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실제 가르침이며, 세 번째는 결론인 회향(回向) 부분입니다. 첫 번째도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처음 부분에는 가르침의 대상께 귀의 예경하는 귀경게(歸敬偈)와 편찬발서(編纂發誓) 즉, 책을 짓고 만든 동기를 쓰고 있습니다. 위의 게송은 그 중에서도 예경(禮敬)을 올리는 부분인 귀경게(歸敬偈)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절을 하며 예경하는 대상은 관자재(觀自在, Lokesvara) 보살로 관세음(觀世音, Avalokitesvara) 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즉, 깨달음의 근본 뿌리에 해당하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 보살님께 예경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또한 우리에게 장차 불교의 본래 글자 중에 하나인 범어(梵語)를 공부하고 만날 수 있는 인연을 심어 주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로께슈와라”는 범어(梵語, Samskrta)입니다. 스승과 한 몸이신 관세음보살님께 예경을 올리고 있으며, 삼문(三門) 즉, 세상과 만나는 세 가지 통로인 몸(身)과 마음(意)과 말(口)로 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예경을 올리는 이유는 관세음보살 같은 훌륭한 공경(恭敬)의 대상이 지닌 공덕 때문입니다.

여기서 공덕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승의 근본은 깨달음을 이루려는 동기 즉, 발보리심(發菩提心)입니다. 이것은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려는 기본적인 동기를 가지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을 말합니다. 이 목적을 이루려면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여섯 가지 대승 실천인 육바라밀(六婆羅密)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 결과로 몸과 마음의 깨달음을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근본 깨달음인 법신(法身)과 완전한 깨달음의 몸인 색신(色身)을 동시에 얻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경지를 얻으려면 그에 해당하는 원인을 축적해야 하며, 그 결과로 이와 유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부처의 몸인 색신(色身)을 얻기 위해서는 공덕의 자량을 쌓아야 하며, 부처의 마음인 법신(法身)을 얻으려면 지혜의 자량을 쌓아야 합니다. 이를 위한 바탕이 두 가지 진리 즉, 세속적 진리인 속제(俗諦)와 절대적 궁극적 진리인 진제(眞諦)의 이제(二諦)입니다.

“로께슈와라(Lokesvara, 觀自在)”는 “실제로 오고 감이 없는 모든 현상”을 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속적 진리인 속제의 차원에서 관찰해 보면 사물은 실제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절대적 궁극적 진리인 진제의 차원에서 보면 가고 오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존재할 뿐입니다.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본래의 원인이 없고 실제 공(空)한 상태라면, 그 결과도 역시 나타날 수 없음으로 공(空)한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서진 시계에 원래 시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처럼, 잘 살펴보면 본래의 성품(自性)이 없기 때문에 사물은 모두 무언가에 서로 의지해서 모습을 만들어 냅니다. 다시 말해, 모든 현상은 서로 의지해서 생기는 원리인 연기법(緣起法)에 의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수 보살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물은 실제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머무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현상을 보면 실제 오고 감이 없다.”라는 게송(偈頌)으로 공성(空性)을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여기서 예경을 올리고 있는 대상인 스승이나 관세음보살도 본래는 공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해서 생기는 원리인 연기법에 의존하기 때문에 본래 공(空)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모든 사물은 본래 공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의존해서 생기며 원인과 결과라는 과정을 반복할 뿐입니다.

번뇌 망상이라는 원인에서 고통이라는 결과가 오며, 선한 행위라는 원인에서 행복이라는 결과가 옵니다. 그렇게 번뇌 망상과 선하지 않는 행위에 의존하여 고통이 오는 것처럼, 여기서 예경의 대상인 스승이나 관세음보살님께 예경을 올리는 것은, 당신들이 자비라는 근본 동기를 가지고 남들에게 고통을 물리치는 법을 가르치시고 있기 때문에, 예경을 올림으로서 그와 똑같은 공덕을 쌓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게송은 이러한 사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와 공덕의 자량을 쌓는 방편을, 어느 한 쪽도 버리지 않고,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로께슈와라(Lokesvara, 觀自在)”는 모든 것의 자성(自性)이 공(空)한 것을 보고 계시며, 모든 것이 공(空)하기 때문에 모든 현상이 원인과 결과로 생겨나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구체적으로 관자재보살님은 모든 중생들이 자신의 번뇌 망상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자비심으로 그들에게 고통을 제거하는 법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따라서 지혜와 방편을 모두 갖추신 관자재보살님을 찬탄(讚歎)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관자재보살님을 찬탄하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이 단지 원인과 결과의 순환임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자재살님은 모든 이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자비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다음 게송은 책을 짓고 만든 동기 즉, 편찬발서(編纂發誓) 부분입니다.

복락(福樂)의 근원이신 원만한 부처님들께서
정법(正法)을 성취하시고 나셨으니, 이에
당신들의 수행법을 알고 의지하여
보살의 수행법을 해설하고자 합니다.

부처님은 먼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처님의 유일한 목적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성숙시키고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들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이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도 역시 부처님이 하신 그대로 수행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하신 그대로 따라서 수행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행복을 그대로 얻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부처님을 “행복과 이익의 근원”이라고 설명합니다.

부처님 자신도 처음부터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도 먼저 스승들께 의지하여 그들의 가르침을 수행하고 자신의 마음을 성숙시켰습니다.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눈의 인식 작용인 안식(眼識)이 대상을 바라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안식이 그것을 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몸이 병들었을 때도 내가 아프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이 암시하는 것은 나는 마음이기도 하고 나는 의식이기도 하며 나는 몸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먼저 어머니의 자궁에서에서 형성되었으며, 죽음과 함께 해체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단순히 몸이 아닙니다. “나는 마음이다.”라고 할 때도, 그것은 아마 몸이 있음을 근거로 해서 쓰는 표현일 겁니다. 그렇다면 몸이 사라지고 나면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나”는 모양도 형태도 색깔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하나의 몸을 보고서, “어, 저기 내 친구가 보이네.”하고 말하며 아주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그 사람은 그의 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사에게 가면 의사는 “몸은 괜찮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몸이 아닙니다. 미국에 있는 몇몇 유명한 병원들에서는 의사들이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명상 수행을 처방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들이 환자들에게 그렇게 비물질적인 처방을 하는 것은 몸과 마음에 무언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 “나”를 단순히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제 마음의 본성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무언가를 확실히 알거나 뚜렷하게 인식할 때, “나는 그것을 알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뚜렷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그 정의만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마음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색깔이나 모양도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생각하자면, 마음은 맑은 허공과 같은 것입니다. 아주 텅 빈 공간에서는 모든 현상이 사라집니다. 또 그렇게 맑은 공간에서는 어떤 것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그렇게 나타납니다.

동시에 마음은 처음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 바람의 기(風氣)와 밝은 점(明点) 등과 같은 극히 미세한 몸을 생성합니다. 필요에 의해서 생각으로 시작한 하나의 현상은 생각이라는 이전의 원인과 그 속성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와 같은 범주인 생각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이라는 원인이 일어나는 순간을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서, 현상이 생겨나기 바로 이전의 순간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합리적인 이성으로 전생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과거 생이 존재한다면 미래의 생도 역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분명한 인식으로 우리는 무언가 지속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미래의 생까지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양한 번뇌 망상과 고통의 원인이 되는 어둠이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어둠이나 장애를 제거한다면 아주 분명하고 명확한 인식의 상태인 본래 의식의 바탕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의 완전한 마음의 상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바탕은 깨달으신 분의 완전한 마음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완전한 마음의 상태를 분명히 얻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깨달으셨던 분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다양한 원인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처님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얻어야 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똑같이 수행해 나가면 우리도 똑같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완전한 깨달음의 이익과 행복의 근원이신 부처님은 법을 깨닫고 나오셨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요? 경전에서는 “수행에 의지해야만 알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법을 알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직접 수행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모두 잘 이해하셨습니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수행해야 합니다. 즉, 현상의 모순에서 벗어나려는 출리심(出離心)과 그것을 깨우치려는 보리심(菩提心) 그리고 그 본래의 성품인 공성(空性)을 수행해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주의 깊고 솔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품이나 성향 그리고 경향 등에 대해 살펴보고 스스로에게 맞는 길을 찾아 수행해야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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