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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덴
달라이 라마께서 설하시는 <보살의 37수행법> --셋째날



셋째 날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을 살펴보십시오. 가깝거나 멀거나 또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상관없이 모두가 똑같이 행복을 원하며 고통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루는 최선의 길은 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의 몸을 갖추었고, 대승과 밀법(密法)의 원리에 대한 완전한 가르침을 만났으며, 더불어 좋은 자격을 갖추신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번뇌 망상을 버리고 완전한 대승의 동기를 갖추어 모든 공덕을 쌓고 깨달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기본적인 것은 따듯함과 친절한 마음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적으로든 궁극적으로든 나와 남을 모두 행복하게 하는 근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보리심(菩提心)의 근본이며 모든 이에게 행복을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친절한(慈)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그냥 단순하게 “나에게 친절한 마음이 자라도록 하소서.”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하든 그것은 친절한 마음을 얻기 위한 수행과 수련의 과정들입니다.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에 적용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티벳 대장경은 두 부분으로 구분하는데, 그 중에서 경론부(經論部, bKa\'-\'gyur)는 100여 책(冊)(*역주: 여기서 사용한 책(冊)이라는 용어는 티벳 대장경에서 경전을 묶는 한 단위를 표시한 것이다. 이 책에는 다시 여러 권의 경전이 함께 묶여 있는 경우가 많다.)이 넘으며, 주소부(註疏部, bsTan-\'gyur)는 200여 책(冊)이 넘습니다. 인도의 스승들에게서 전해진 이 완전한 가르침은 티벳 대장경 안에서 모두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길을 확연히 드러낸 람림(Lam-rim)(*역주: 여기서 람림(Lam-rim)은 쫑카빠 대사의 『보리도차제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길에 대한 분명한 길을 제시한 일련의 문학작품들을 말한다. 아띠샤(Atisa) 존자의 『보리도등론』은 람림 문학의 시초에 해당한다.)의 완전한 가르침을 티벳에 전하신 분은 아띠샤(Atisa) 존자(尊者)입니다. 아띠샤(Atisa) 존자(尊者)께서 지으신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즉, “깨달음의 길을 밝히는 등불”은 이 『37 수행법』의 근본 경전입니다. 짧고 이해하기 쉬운 내용임으로 항상 기억하고 염송(念誦)해야 합니다. 또, 그 의미를 잘 생각하고 수행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계속하겠습니다. 먼저 고귀한 인간의 몸을 받은 것을 잘 알고 그것의 이로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죽으면 사라질 인간의 몸인 이 생에 사로잡혀 집착하는 마음을 바꾸어야 하며, 그렇게 해서 다음 생도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죽음이나 무상함 등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죽어서 세 가지 나쁜 윤회의 과보인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취(三惡趣)에 떨어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지옥과 아귀 중생들의 고통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축생과 그들의 고통은 지금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 입니다. 그들이 생존의 세계에서 얼마나 자신의 노력을 뜯기고 빼앗기며 위협 당하는지, 또 얼마나 잔혹하게 실험실의 실험용 동물이 되고, 먹는 고기로 팔려 가는지 잘 보십시오. 불교를 공부하는 우리는 그들에 대한 자비심을 길러야 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동물을 죽이는 것을 마치 나무를 베어 내거나 야채를 수확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다릅니다. 실제 그들의 고통을 진지하게 살펴보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그들 중에 하나로 태어날 수 있는지를 관찰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와 같은 동물의 윤회를 피해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길을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원인과 결과의 길인 인과법(因果法), 그리고 버려야 할 것과 수행해야 할 것들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할 수 있는 한, 어떤 허물도 없으며, 모든 귀의의 대상인 부처님의 완전한 가르침을 공부해야 합니다. 어제 법문에서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 대한 귀의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말한 것과 같습니다. 오직 삼보만이 완전한 귀의와 보호의 대상입니다. 물론 세속적인 신들을 믿고 따른다 하더라도 그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세속적인 신들을 믿음으로서 친구에게서 받는 것과 같은 도움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궁극적인 진리를 찾는 데는 무언가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태국이나 미얀마의 승원(僧院)에 있는 스님들은, 절에 석가모니 부처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시지 않습니다. 티벳의 절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외에도 다양한 보호신장과 본존(本尊)들을 모십니다. 일본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모시지 않고 조사(祖師)들의 영정만 모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스승들과 부처님은 둘이 아니지만, 이것은 좀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가피와 선한 행위의 대상이 결국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티벳인들이 부처님은 잊어버리고 보호 신장들 앞에서 북이나 두드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말입니다. 수행과 종교적 현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것이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승가에 대한 귀의는 태국이나 미얀마에서 아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스님들은 아주 존경받고 있으며, 재가자(在家者)들의 지원과 보시를 받습니다.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실제 귀의의 대상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의 두 가지일 뿐 승가는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두가 스님이 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성향을 판단하여 만약 적합하다면 출가 하여 수행자로서 사는 삶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최소한 출가 수행자를 비난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출가 수행자는, 외부의 비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승가는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예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여 짓는 업(業)을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8. 너무나 참기 힘든 악취(惡趣)*의
고통들은 악업(惡業)의 과보라고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셨네.
그러므로 목숨이 끊어져도 악업만은
결코 짓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역주: 삼악취(三惡趣) 혹은 삼악도(三惡道)라고 부르는 데, 지옥 아귀 축생으로 하열한 번뇌 속에서 윤회하는 중생을 말한다.)

(**역주: 원문의 뜻은 능인(能仁) 혹은 무니(Muni, 스승)인데, 일반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요약하면, 선(善)은 선을 낳고, 악(惡)은 악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원인을 심는 대로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조그만 원인이 커다란 결과로 찾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가적인 단위에서도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과거의 부정적인 행위로 인한 업(業)의 결과입니다. 티벳의 경우를 보면, 가끔 가뭄이나 한파로 농작물을 거의 수확하지 못하거나 전쟁이나 침략 등의 일들이 생깁니다. 우리의 공덕이 부족하고 아무것도 쌓은 것이 없다면 당연히 좋은 상황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다른 이들의 행복을 기원하며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중국도 역시 잘 되기를 빌어야 합니다. 그들이 잘 못되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그들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입니다.

부정적인 행동은 자신의 번뇌 망상과 좋지 않은 업들이 쌓여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부정정인 업은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습니다. 몸은 인간의 몸부터 조그만 벌레까지 모든 몸을 말하며, 몸을 죽이는 것은 생명을 빼앗는 살생(殺生)입니다. 살생은 아주 나쁜 업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살생만큼은 피해야 합니다. 모든 중생은 그들이 살 수 있는 만큼의 생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가시에 찔려 손가락에 상처를 입으면 우리는 “아야, 아파.”라고 말합니다. 모든 중생의 몸도 그와 똑같이 느낍니다. 동물을 희생하는 의식은 특히 좋지 않습니다. 동물을 희생하는 의식은 과거에 북인도 히말라야 지역의 낀노르(Kinnaur)와 스피띠(Spiti) 지역 그리고 네팔(Nepal)의 여러 지역에서 종교적으로 행해지던 관습입니다.(*역주: 물론, 동물 희생 제의가 이 지역에서만 행해지던 것은 아니지만, 이 지역들이 특히 불교의 영향권에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정법(正法)의 수호를 위해 법회 중에 자주 이에 대해 언급하고는 한다.) 심지어는 티벳의 몇몇 지역에서도 행해지고는 하였습니다. 세속적으로는 달라이 라마에게 귀의하면서 유목의 습관 때문에 동물을 바쳐 신장들에게 기도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지요. 아주 좋지 않은 풍습입니다. 입으로는 자비의 진언(眞言, Mantra)인 “옴마니반메훔”을 하면서 동물을 희생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다음은 훔치는 행위 즉, 투도(偸盜)입니다. 이것 또한 아주 부정적인 것입니다. 또, 적당하지 않는 성적인 관계 즉, 사음(邪淫)은 자신의 배우자 이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또는 그렇게 하는 잘못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문헌들을 살펴보면, 수많은 왕조들이 성적인 잘못으로 인하여 분열하고 싸워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파괴적인 것입니다. 다음은 거짓말 즉, 망어(妄語)입니다. 이것 또한 극히 부정적입니다. 물론 누군가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정직하려고 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불행만 늘어갈 뿐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내거나 거짓말이 탄로 날까봐 항상 전전긍긍해야 합니다. 이렇게 거짓말은 마음을 언제나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음은 교묘하게 이간질하는 말 즉, 기어(綺語)와 양설(兩舌)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나쁜 말을 듣고 소문을 내는 것은 아주 파괴적인 행동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공존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고 일할 때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중국 공산당은 모두를 서로 동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의석상에서의 일일뿐 밖에 나가면 비누 조각하나도 나누기가 힘듭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이 서로를 감시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교묘한 말로 이간질하는 기어와 양설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결코 이간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다음은 욕설 즉, 악구(惡口)입니다.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에게 “거지같은 놈”이라고 부르는 등의 욕설을 합니다. 이런 말은 남에게 상처를 주며 행복하지 않은 결과를 만듭니다. 농담은 언제나 의미 없는 것들뿐입니다. 시간 낭비이지요. 탐욕심도 있습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보면 그것을 잊지 못하고 온통 생각이 그 물건으로 향하여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무심코 물건만 생각하며 걷다가는 벽에 부딪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다음은 악의(惡意:瞋입니다. 이 또한 아주 파괴적으로 나와 남을 해롭게 하며 불행을 몰고 옵니다.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나쁜 생각을 갖는 것은 자신도 파괴합니다. 악의를 지니고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비와 사랑과 인내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그러므로 결코 악의를 품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은 잘못된 견해 즉 사견(邪見)입니다. 다시 말해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등의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살생부터 사견까지 열 가지의 부정적인 행동을 십악(十惡)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불이익을 생각하고 항상 삼가 해야 합니다. 살생과 거짓말 등의 모순과 잘못을 잘 살펴보고, 그것들을 삼가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실질적인 수행입니다. 완전히 삼가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가능한 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귀의(歸依)에 따르는 불교도의 행동 방식입니다.

지금부터는 중간 근기(根器)의 사람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9. 삼계(三界)의 안락은 풀잎의 이슬 같아서
한 순간에 사라지는 법이니,
결코 변치 않는, 수승한 해탈과(解脫果)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삼계(三界)의 어느 곳에 우리가 태어났는지는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불타는 빌딩의 어느 층에 있느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윤회는 번뇌 망상과 업이 쌓여 고통으로 물든 것을 말합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고귀한 인간의 몸을 받았어도 업과 번뇌 망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더 많은 고통만 따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반복되는 틀 속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어떠한 세속적 기쁨도 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세속적이고 순간적인 것일 뿐입니다. 언제고 더 열악한 세계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물리적 정신적 감각 기관에서 오는 것이라면, 고통은 업과 번뇌 망상의 힘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 자신의 물리적 정신적 모임(蘊)이 본래부터 고통으로 된 성질의 것이라면, 어떻게 거기서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고통의 원천은 번뇌 망상이고 그것은 집착과 증오 또는 분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집착과 증오는 무지(無知)에서 옵니다. 다시 말해, 본래의 성품인 자성(自性)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으로, 이것은 잘못된 견해인 사견(邪見)입니다. 반면에, 모든 것은 본래 그 자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견해 즉, 자성(自性)이 없다는 견해에 익숙해지면 자신의 무지는 점점 줄어듭니다. 무지의 얼룩이 마음에 번져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지의 얼룩을 지워야 합니다. 본래 성품(自性)이 있다고 이해하는 것과 본래의 성품(自性)이 없다고 이해하는 것은 두 가지 다 같은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동전의 양면처럼 무언가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무지의 반대편에서 찾을 수 있는 공성(空性)의 지혜, 또는 현상을 바르게 분석한 다음 얻을 수 있는 지혜인 분별지(分別智)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가지면, 집착과 분노를 제거하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착이나 증오 또는 적대감이 마음의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지 않은 사람이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의 본성이 그와 같다면, 만약 살아있는 감각으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집착과 적대감 등의 감각이 언제나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잠깐이라도 화를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감각들을 삶의 자연스런 한 부분으로 이해하거나, 집착과 증오가 마음의 본래 성품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진리(二諦)를 바로 보기 위한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궁극적으로(眞諦) 모든 것은 본래의 성품이 공(空)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으로(俗諦)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지혜를 고도로 발달시키고, 깊은 선정(禪定)을 이루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 바른 계율 속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재가자에게는 오계(五戒) 즉,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 등이 있는데, 최소한 이것만이라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야 우리는 좀 더 높은 수준의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10. 무시이래 [언제나] 나에게 인자하시던
어머니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나만이 즐거우면 무엇 하리까.
그러므로 가없는 유정을 제도하고자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허공에 두루 퍼져있는 모든 중생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중생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목적만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지극히 감정적인 것으로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차이는 자신은 하나이고 그들은 셀 수 없이 많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공평하고 이성적인 마음으로 하나를 넘어 모든 이들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보살들입니다. 보살들은 다른 모든 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일합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이룬 분들입니다. 그들은 남들을 위해 일하면서도 스스로 행복합니다. 남들을 위한 일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하며, 스스로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더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 보살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만 일하고 남들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면, 결국 모든 행복과 만족은 사라지고, 용기마저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심을 줄이고 가능한 한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스스로 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입보리행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다른 이들을 위한 목적으로 일한다면,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조건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서든 자신을 발견하는 그 순간부터 다시 남들을 돕기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용수(龍樹) 보살의 『보행왕정론』에서도 똑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는 것이 부처의 성품(佛性)을 얻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승 불교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대덕(大德) 쫑카빠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대승 불교도가 되려면, 대승의 성품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들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무언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깨달음을 향한 동기인 보리심(菩提心)을 키운다면, 저절로 모든 이를 이롭게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대승의 수행과 훈련을 따라 해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보살은 누구입니까? 부처님을 티벳어로 “상게(Sangs rGyas)”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살은 범어의 “보디사뜨바(Bodhisattva)\"에서 온 말로 티벳어로는 “장춥(Byang Chub)”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음절인 “보디(Bodhi)”는 티벳어의 “장(Byang)\"에 해당하며, “모든 허물을 제거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음절인 “춥(Chub)”은 “모든 공덕을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보디” 즉, “완전한 상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좀더 낮은 단계의 아라한(阿羅漢)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차원인 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사뜨바(Sattva)”는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하여 마음이 향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며, “보디” 즉,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보살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도 모든 유정 중생의 이익을 위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이것을 이룰 수 있는 깨달음에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보리심이며 우리가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1. 일체의 고통은 자신의 안락을 원하여 생겼고
원만하신 부처님은 이타심에서 나셨나니,
그러므로 나의 안락과 남의 고통을
참으로, 뒤바꾸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어떻게 해서 모든 고통이 자신만의 안락과 행복을 바라는데서 옵니까? 자기중심적인 열망은,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좋지 않은 행위 속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갑니다. 그 결과로 다양한 고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처님은 남들을 돕고자 하는 이타적인 동기에서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하고 자신의 행복만을 찾는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끊고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주고받기”(*역주: \"주고받기(gTong-len)\"는 티벳 불교에서 자비심을 수행하기 위해서 행하는 예비수행의 일종이다.)라는 수행을 합니다. 주로 다른 이의 고통을 대신 받고 자신의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유용한 관상(觀想: 생각으로 그려보는) 수행 방법으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돕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먼저, 자신의 오른쪽에는 일반적인 형태의 이기적이고 자신만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의 모습을 관상하고, 왼쪽에는 언제나 행복을 바라는 모든 유정 중생의 한량없는 모습을 관상합니다. 그런 다음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이기적인 사람인가, 아니면 모든 중생들인가?” 어느 쪽이 좋은지, 어느 편에서 함께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기적인 사람 쪽인지 아니면 안타까운 모든 중생들인지, 아니면 누구든 똑같이 행복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이런 방법을 수행하고, 『입보리행론』에 있는 다른 방법들을 수행하는 것은 평등한 마음을 키우는데 아주 유용합니다.

12. 누군가 큰 욕망의 힘으로 나의 재물을
모두 강탈하거나 강탈하려 한다 해도,
몸과 재산과 삼세(三世)의 모든 선(善)을
그들에게 회향(回向)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이제 보리심을 개발해야 할 차례입니다. 깨달음을 성취하려면, 먼저 보살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속한 무언가를 훔쳐간다고 화를 내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자신이 진정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남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도둑이 훔치려고 한 것들은 이미 그가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가 이제 그것을 얻었지만, 실제 그것들은 이미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에게 훔쳐서 가진 모든 것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의 몸과 재산과 삼세의 모든 선을 그에게 되돌려 주려고 생각하며 회향해야 합니다.

13. 나에게는 잘못이 조금도 없는 것 같은 데
누군가 나의 목을 벤다 할지라도,
자비의 힘으로 그들의 죄업을
내가 [대신] 받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다른 이들이 나를 해롭게 하더라도 자비심으로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해롭게 하는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14. 누군가 나에게 갖가지 비방을 하고
삼천세계에 두루 퍼뜨려도,
자애로운 마음으로 다시 그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다른 이들이 나를 비난하거나 나쁜 말로 험담을 하더라도 그것을 그들에게 다시 돌려줘서는 안 됩니다. 결코 불편한 내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입보리행론』(*역주: 『입보리행론』의 제 6 장 인욕품(忍辱品) 참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냥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15. 많은 중생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누군가가
감춰진 잘못을 들추어내고 나쁜 말로 떠들어도,
그에게 선지식을 대하듯이
겸손하게 공경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누군가가 다른 이들 앞에서 모욕하고 곤란하게 하더라도 마음의 수행을 위한 말로 생각해야 합니다. 잘못을 들춰내고 허물을 지적해도 사실 그들은 우리의 스승입니다. 나의 단점을 알게 해준 그들에게 감사하고 큰 존경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16. 내 아들처럼 귀하게 돌보던 사람이
나를 원수처럼 바라본다 하더라도,
병으로 드러누운 자식을 위하는 어머니와 같이
더 더욱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귀여운 장난꾸러기 아이가 병에 들면 아이가 얼마나 나쁘게 굴었든 상관없이 어머니는 여전히 아이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모든 중생을 이와 같이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17. 자신과 비슷하거나 부족한 사람이
아만(我慢)의 힘으로 무시한다 하더라도,
스승처럼 여기어 겸양(謙讓)으로 나의
정수리에 모시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누군가와 경쟁을 할 때 위의 구절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다가옵니다. 인내를 길러야 합니다. 『입보리행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만약 적이 없다면, 더 이상 인내와 인욕(忍辱)을 기를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누군가 귀찮은 존재가 필요하며, 그를 대상으로 인내하는 자세를 길러야 합니다. 부처님이나 스승을 대상으로 인내를 기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인내를 기를 수 있는 적과 같은 존재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달라이 라마라고 부르는 내 자신을 예로 들어 봅시다. 누군가가 신문에 “한 나약한 망명객 달라이 라마”라고 기사를 쓴다고 하면, 내 자신 불교를 진지하게 수행하는 한 사람으로서, 인내심을 길러주는 스승으로 그를 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인내를 수행할 때 선생님이 필요하다면, 적이나 누군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주 중요한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적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대승의 수행을 하고 있다면 어려운 상황을 참아 내는 인내를 개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적들이 없이 어떻게 실질적인 대승의 수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 나와 남을 바라보는 자신의 자세를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많은 시련과 고난이 필요하며, 여러 가지 상황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적들이나 귀찮고 어려운 사람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18. 삶이 빈곤하여 언제나 사람들이 무시하고
힘겨운 병마로 드러눕는다 하더라도,
모든 중생의 죄업과 고통을 내가 짊어지고서
비굴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법을 수행하는 데는 아주 어려운 두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의 원인으로 인한 가난과 곤란 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담합니다. 다른 하나는 너무 편안하거나 풍족하면 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다 경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플 때 나와 남의 상황을 바꾸어 생각하거나 “주고받기” 수행을 한다면, 아픔 속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대신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19. 명성을 얻어 많은 중생이 공경하고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재물만큼 쌓는다 하더라도,
윤회계의 번영이 허망함을 보고서
자만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역주: 욕계(欲界)의 사대주(四大州)를 수호하며 수미산(須彌山) 제 4 층에 거주하는 호법천(護法天)으로 북방(北方) 지역을 담당한다. 야차(夜叉)를 거느리고 항상 부처님의 설법 듣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다문천왕(多聞天王)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원래 인도에서는 재물과 부의 상징인 꾸베라(Kuvera) 신(神)인데, 불교에서 호법신장으로 귀의하였다.)

이것은 또 다른 예로 극히 중요한 상황입니다. 남에게 존경받고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면 우리는 게으름과 거드름을 피우며 자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의 장애입니다. 이러한 세속적 만족이 모든 것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0. 자신의 분노라는 적을 다스리지 못하면
외부의 적을 조복(調伏)받는다 하더라도 [적은] 늘어만 가리니,
그러므로 자(慈:사랑)와 비(悲:연민)를 무기로
자기의 흐름*을 제어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역주: 불교 용어로는 자상속(自相續)이라고 한다. 즉, 자신이라고 믿는 인식을 계속해서 이어 가는 연속적인 흐름을 말한다.)

분노보다 더 나쁜 적은 없습니다. 이 세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2차 세계대전 같은 예에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이 분노와 증오로 인해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서구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가 동맹을 맺었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적대감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그 여파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구(舊) 소련이 서구 세계와 적대 관계에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미래에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것은 다시 한 번 더 분노와 증오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면, 먼저 부정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평화와 행복은 오직 사랑과 자비심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증오를 극복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21. 원하던 맛은 소금물과 같아서
얼마를 즐기든지 갈증은 늘어만 가리니,
무언가 애착을 일으키는 대상(事物)들을
지금 바로 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어떤 것도 결코 충분한 만족을 주지는 않습니다. 마치 소금물을 마신 것과 같아서, 『보행왕정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갈증은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얼굴에 뾰루지가 났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긁으면 시원해집니다. 그러나 시원함만을 생각하고 계속 긁다가는 더욱 악화되고 맙니다. 결국, 상처가 나고, 피가 흘러 감염되면 수술을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 뾰루지가 났을 때 제대로 치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긁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상처는 곧 아물 것입니다.

22. 어떤 식으로 [대상이] 나타나든 이들은 자신의 마음일 [뿐],
마음의 성품은 처음부터 변희론(邊戱論)*을 떠난 것이니,
이것을 알고 나서 대상(所取)과 주체(能取)의 흔적들을
마음에 짓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역주: 변희론(邊戱論)은 중도(中道)를 벗어난 극단적인 사견(邪見)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생(生) 멸(滅) 상(常) 단(斷) 거(去) 래(來) 일(一) 이(異) 즉 나고 멸하며 항상 하고 단절되며 가고 오고 같고 다르다는 견해들로 이 여덟 가지를 팔변희론(八邊戱論)이라고도 부른다. 다시 말해, 이 모든 현상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지혜가 부족한 일반적인 눈으로 모든 현상을 왜곡하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잘못된 견해들을 가지게 된다. 궁극적 차원에서의 모든 현상은 실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 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것을 팔불중도(八不中道)라고 부른다.)

이 게송은 자립논증 중관학파의 용어를 모아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게송의 첫 구절에서, 현상은 “자신의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업이 쌓여서 생긴 것이며, 이것은 마음의 장난에서 생기는 유희(遊戱)라는 의미입니다. 처음부터 마음의 본래 성품은 극단적인 것들에서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공성을 바탕으로 한 의식의 주체와 공성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의식의 대상을 따로 구분하여 자신의 마음에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대상과 주체를 구별하여 번뇌 망상을 일으키기 보다는 차라리 공성의 청정한 상태인 삼매(三昧)를 이루는 데 자신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게송을 수행하는 대강의 내용입니다.

23. 마음에 다가 오는 경계(境界: 대상)와 만난다는 것은
여름날의 무지개와 같아서
아름답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진실은 볼 수 없나니,
[이에] 애착을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도 결국 본래의 성품이 공(空)하다는 것을 알고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24. 갖가지 고통이란 꿈속에서 자식이 죽는 것과 같이
환영(幻影)을 진실로 여기는 것, 아 피곤하여라.
그러므로 악연(惡緣)을 만나게 될 때,
미혹하는 환영으로 보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은 미혹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울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보리심을 개발하는 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다음은 바라밀(婆羅密) 수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25. 깨달음을 원하여 몸마저 버리는 것을
외부의 사물이야 무슨 말이 필요하리까,
그러므로 돌아올 과보를 바라지 않고
보시(布施)를 베푸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이 게송은 보시(布施) 수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26. 지계(持戒)가 부족하여 자신도 이롭게 하지 못하면서
타인을 이롭게 하려는 소망은 웃음거리,
그러므로 윤회계를 갈망하지 않고,
계율을 지키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율을 지니는 것입니다. 특히 부정적인 행위인 악업(惡業)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남을 돕겠습니까?

27. 선근복덕을 바라는 보살에게는
해롭게 하는 모든 것이 [공덕의] 보고(寶庫)와 같네.
그러므로 모든 것에 대한 원망과 미움 없이
인욕(忍辱)을 익히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인내와 인욕(忍辱)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공덕을 쌓고자 하는 보살이 자신을 해롭게 하는 적을 소중한 보물처럼 여기는 것은 그들을 통해 인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공덕의 자량이기도 합니다.

28. 자신의 이익만을 이루려는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도
[자신의] 머리에 불을 끄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본다면,
모든 중생을 위하는 공덕의 근원인
정진(精進)을 시작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이 게송은 기쁨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하는 정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소승의 수행자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정진하는데, 하물며 모든 중생을 위해 일하려는 대승의 수행자가 게으르면 되겠습니까?

29. 지(止)을 잘 갖춘 관(觀)*으로
번뇌가 영멸(永滅)함을 알고서,
사무색계(四無色界)**도 확연히 뛰어 넘는
선정(禪定)을 익히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역주: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yana)은 소승 대승 금강승을 막론하고 모든 불교 수행의 근간이자 선행 조건이며, 외부로 향하는 흐름을 가라 앉히고 그 본질을 직관하는 것을 동시에 완성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 사무색계(四無色界)는 수행의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선정(禪定)의 깊이이자 향유할 수 있는 시공간적 개념이다. 즉, 공간의 무한성을 확보하는 공무변처(空無邊處), 의식의 무한성을 확보하는 식무변처(識無邊處), 소유할 것이 없는 경계인 무소유처(無所有處), 미세한 관찰의 힘만이 남아 있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한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삼매와 지혜를 얻기에는 부족한 단계이다.)

이 게송은 선정(禪定) 바라밀에 대한 것으로, 여기서는 현교의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직관적인 관찰의 힘인 관(觀, Vipasyana)을 성취하려면 먼저 정신적 고요함인 지(止, Samatha)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이 두 가지가 함께 병행하는 상태인 지와 관의 합일 또는 지관쌍수(止觀雙修)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30. 지혜(智慧)가 없는 다섯 가지 바라밀로는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나니,
방편을 갖추어, 삼륜(三輪)**을 분별하지 않는
지혜를 수행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역주: 다섯 가지 바라밀이란 육바라밀(六婆羅密) 중에서 지혜(智慧)를 제외한 앞의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역주: 삼륜(三輪, Trimandala)은 삼위(三圍)라고도 하며, <입능가경(入楞伽經)>(일본 동북대학교 서장대장경 목록 1934년판(이하 동북판 목록) p. 25(no.107) 참조.) 또는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동북판 목록 p. 29(no. 127) 참조.) 등에서 볼 수 있는 용어이다. 세상의 구성 원리인 풍륜(風輪) 수륜(水輪) 지륜(地輪 혹은 金輪)이든, 현상계의 속성인 무상(無常) 부정(不淨) 고(苦)든, 업(業)을 짓거나 정화하는 세 가지 통로인 신구의(身口意)든 또는 보시에서 주는자와 주는 대상 그리고 주는 행위를 비유한 현상계를 인식하는 원리인 주관과 객관과 행위이든 이들은 모두 세 가지의 수레에 의해 굴러 가기 때문에 삼륜(三輪)이라고 부른다. 즉 삼륜을 분별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이 현상계의 구성 원리와 속성들을 바로 보고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방편에 해당하는 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을 토대로 현상의 속성을 정확히 꿰뚫는 지혜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 설명한 다섯 가지의 바라밀인 방편(方便)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지혜와 방편을 모두 개발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라밀을 행하는 세 가지 요소를 볼 수 있습니다. 즉 행위의 대상과 행위의 주체 그리고 행위 자체입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에는 본래의 성품인 자성(自性)이 없습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음은 보살의 일상 수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31. 자신의 미혹을 스스로가 구별하지 못하면
수행자의 형상으로 비법(非法)*을 행할 수도 있나니,
그러므로 언제나 자신의 미혹함을
구별하여 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역주: 여기서 비법이란 외도(外道)나 사견(邪見)을 뜻하는 데, 이들은 실유론적(實有論的) 견해를 가진 수행이나 이론을 말한다. 즉, 완전한 해방을 위해 수행하는 불교의 정법이 아닌 견해나 수행의 방법들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번뇌 망상을 매일 매일 또는 매 순간 마다 점검해 나가야 합니다. 번뇌 망상은 비교적 잘 드러나기 때문에 구별하기 쉬울 때가 많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32. 번뇌의 힘으로 다른 보살*들의
허물을 말한다면 자신만 쇠락하리니,
대승의 [길에] 들어선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역주: 원문은 승리자의 아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모든 이를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보살로 해석한다. 그러나 해석에 따라 법우나 도반 또는 모든 불자 등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허물이나 잘못을 들춰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무엇을 성취했는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특히 대승의 수행자인 우리들은 다른 이들의 허물을 탓할게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33. 재물이나 명예를 얻기 위해 서로를 헐뜯으면
문사수를 행함이 쇠락하리니,
친척집과 시주 집들에 대한
탐착을 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보시를 하는 시주나 친척들 집에 아무 때나 머무는 것은 위험합니다. 결국 사소한 논쟁이나 복잡한 구설수에 휘말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곳에 집착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34. 거친 말로 다른 이의 마음을 해롭게 하면
보살의 품행은 쇠락하리니,
그러므로 다른 이의 뜻에 맞지 않는
거친 말을 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화의 근원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집착입니다. 또, 화는 그 자체로 자극적일 뿐만 아니라, 험한 말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거친 말들은 자신의 공덕을 소멸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결국 스스로 해를 입는 원인이 됩니다.

35. 번뇌에 익숙해지면 대처(對處)하여 막아내기 힘드니
억념(憶念)*하는 사람은 대처(對處)의 검(劍)**을 쥐고서,
탐착 등의 번뇌가 처음 일어나자마자
들어내어 제거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역주:잊지 않고 항상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일반적인 알아차림이나 깨어 있음 보다 더 심층적인 용어이다. 원래는 부처의 깨달음과 중생 제도의 본원(本願)을 잊지 않는 수행을 말한다. 이 억념의 수행을 통하여 항상 깨어있는 자각(自覺)의 힘을 기를 수 있다.)

(**역주: 번뇌에는 탐(貪) 진(瞋) 치(痴) 무명(無明) 견(見) 의(疑)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根本煩惱)와 그에 따르는 스무 가지의 수번뇌(隨煩惱) 등이 있는 데, 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각각에 맞는 해독제들이 있다. 이 번뇌에 대처하여 사용하는 지혜로운 방법들을 여기서 검(劍)으로 비유하고 있다. 즉 번뇌의 다양한 대처법(對處法)은 단계별로 안배된 불교의 수행들이다.)

집착이나 증오가 일어나면, 그 순간 바로 깨어서 기억하고 바라보는 마음인 억념(憶念)으로 그것을 경계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36. 요약하면, 어디서 어떠한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 그렇게
언제나 억념(憶念)을 바르게 챙겨서
이타(利他)를 완성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입보리행론』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고 그 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즉시 억념하여 다양한 번뇌 망상에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소금을 실어 나르는 캬라반(Caravan)은, 티벳의 북쪽에 있는 장탕(Byangthang) 고원(高原)으로 갈 때면, 아무길이나 함부로 가지 않습니다.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조심스럽게 길을 찾아 움직입니다. 수행도 그와 같이 항상 조심해서 바른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아무데나 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37. 이와 같이 정진하여 성취한 선(善)은 모두
가없는 중생의 고통을 멸하기 위한 것이니,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한 지혜로
깨달음을 회향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이 게송은 『보살의 37 수행법』의 마지막 구절로 이 모든 행위의 공덕을 회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본문의 실제 내용을 모두 마쳤습니다. 다음은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세 번째 부분입니다.

현교, 밀교, 논서 들에서 설하신 뜻을
선지식들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라서 [지은],
『승리자의 아들 수행법 37: 보살의 37 수행법』은
보살도를 배우려는 이들을 위한 안배입니다.

저자는 이 『보살의 37 수행법』 안에 다양한 경전의 가르침들을 아주 농축하여 담아 놓았습니다.

지성이 떨어지고 배움이 부족하여
학자가 좋아할 만한 문장은 아니지만,
경전과 선지식의 말씀에 의지하였기에
보살의 수행법을 미혹하진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음은 내용에 대한 어떤 허물이 있다면, 그것을 참회하고 사과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보살의 위대한 수행들은
우매한 나 같은 이가 헤아리기 어렵기에
상위(相違:모순)한 것과 무관(無關)한 것 등의 많은 허물을
선지식들께서는 인내하시기를 계청(啓請)하옵니다.

그리고 회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로 인해 생긴 선(善)으로, 모든 중생이
승의(勝義:절대)와 세속(世俗:상대)의
수승한 보리심을 지니어,
윤회와 적멸(寂滅)의 끝자리에 머물지 않고
보호주(保護主) 관세음[보살]과 닮아가게 하소서.


이상은 나와 남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전승경전을 논설하신 대덕(大德) 톡메(Thogs Med)께서 응윌추(dNgul Chu: 水銀江)의 린첸푹(Rin Chen Phug: 寶窟)에서 마련하신 것이다.

-----마침.

이상으로 달라이 라마님의 초대법문을 모두 마치고, 다음 강좌부터는 본격적인 <티벳불교입문>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곳 북인도다람살라의 인터넷 상황이 좋지 않아 가끔씩 착오가 있더라도 너그러운 양해를 바랍니다. --로덴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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