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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입문II] 삼승지도(三乘之道)--일반1

로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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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승지도(三乘之道)




티벳 불교의 많은 스승들은 초심자들을 위하여 법문할 때면, 부처님께서 단계적으로 보여주신 세 가지 수행의 길에 대한 차이와 깊이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합니다.

능가경(入楞伽經)과 같은 대승의 주요한 경전들에서는 다양한 불교의 철학과 수행 방법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의 체계와 방법들을 ‘승(乘, yanas)’이라고 합니다. 인간이나 천계(天界)와 같이 이 현상계 안에도 다양한 수준의 영역이 있는 것처럼, 불교의 가르침 안에도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는 체계(小乘, hinayana), 모든 중생의 보편적인 해방을 구하는 체계(大乘, mahayana), 딴뜨라(密法)의 방편을 수행하는 체계(金剛乘, vajrayana) 등 다양한 승(乘)들이 있습니다. 또 불교의 교의(敎義)에 따라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의 삼승(三乘)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가르침이나 근기에 따라 구분하려고 한다면, 더욱 다양한 구분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행의 방법과 체계들은 모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전승하신 것들입니다. 수행의 방법과 근기의 차이로 인해 어떤 것은 긴 시간의 정화와 정진이 필요하고, 어떤 길은 상대적으로 조금 빠른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보통 자기중심적인 수행이냐, 보편적인 이타행의 수행이냐에 따른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성문(聲聞)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들은 바의 가르침에만 머무는 수행을 합니다. 이들이 하는 수행은 본래의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현상계의 본질(空性)을 매 순간 잊지 않고 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들은 대로 그대로 실천하여 깨닫고자 하는 수행입니다. 이러한 수행은 부분적인 깨달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상계에서 발견하는 자아(自我)가 결국 공한 것(人無我)임을 깨달을 수는 있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여전히 무언가 실재한다는 믿음이 남아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무엇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딱히 무엇이라고 할 만한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자아의 부재(不在)를 인식하는 수준인 성문의 수행자들은 아직 이 마음의 속성을 정확히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무상(無常)의 이치를 알고 무아(無我)의 원리를 깨우쳤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갖가지 의식이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공성을 반 정도만 깨우친 것이지요.

이와 같이 마음의 공성을 경험하지 못한 탓에, 이들의 마음속에는 다양한 감정의 상태들이 서로 부딪치고 있으며, 사고(思考)의 흐름 역시 불안정합니다. 소승의 수행자들은 이 모든 마음의 부딪힘과 불안정한 사고의 흐름을 일단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고통과 혼동의 원인을 마음에서 억지로 끊으려 하거나 차단하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마음에 접근하는 것은 아주 거친 방식입니다. 이들은 실제 수행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을 그대로 적용합니다. 즉 물리적인 몸과 주변 환경에 이런 식의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지요.

물리적인 구성 요소를 가진 이 공간을 그대로 인식하며 살기 때문에 소승의 길을 가는 성문들에게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모든 요소가 다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성문들에게는 물리적인 이 몸이 집착의 기본적인 원인이며, 윤회를 지속하는 근본 원인입니다. 따라서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물리적인 몸의 부정(不淨)한 요소를 모두 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취하는 수행의 방식은 당연히 고행입니다. 이러한 수행은 보통 살과 뼈 골수 배설물 오줌 내분비 기관 등으로 구성된 이 물리적인 몸을 분해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몸에 숨겨져 있는 갖가지 불순물을 하나씩 분석하고 정화함으로써 윤회 속에 마음을 속박하고 있는 물리적인 원인을 끊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등의 모든 감각적 경험과 인식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것이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부정관(不淨觀: 인간의 몸을 부정한 것으로 관하여 집착과 번뇌를 제거하고자 하는 수해)이나 백골관(白骨觀: 시체의 피부와 근육이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백골만 남아 있는 모습을 관하는 것)과 같은 유형의 수행입니다.

이와 같이 단순히 감각이나 집착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음이나 경험하고 있는 현상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반 정도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문승의 수행자는 갖은 노력을 다한 끝에 결국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도 모든 현상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깨우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즉 법무아(法無我)를 체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 수준에서도 개인적인 고(苦)에서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경지를 아라한(阿羅漢)한의 과위(果位)라고 합니다. 아라한은 문자 그대로 ‘적을 무찌른 자’를 말합니다. 소승의 수행 방식에서 보면, 감정과 생각은 자아에 대한 집착심을 일으키는 적입니다. 그러므로 이 적과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이지요. 결국 어떠한 찰나에도 생겨나는 모든 인식이 공한 것임을 터득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감정과 관념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苦)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가 아닙니다. 잠시 고가 결여된 상태로 편안함을 맛보고 있는 것뿐이지요. 즉 일시적인 마음의 평형상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치 거친 파도가 잠시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와 같습니다. 아라한은 개인의 고통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무기력합니다. 비교적인 정적인 상태에서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의 평정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어느 정도의 공을 깨우치고 있는 경지입니다. 즉 업에 끄달려 고통 받는 윤회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지만, 아직도 윤회의 고통 속에 허덕이는 이 현상계의 아픔을 돌보고 깨우쳐 주는 데는 아주 무기력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경지는 그저 중립적으로 요동이 없는 고요한 상태일 뿐입니다.

아주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아라한도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 대승의 길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끔 아라한도 스스로 마음을 넓히고 중생의 업과 고통에 연민의 마음을 가졌던 과거의 인연으로 불 보살이 현몽하는 자비 광명의 꿈같은 것을 경험을 합니다. 아라한이 한번 이러한 자극을 받고 나면 지극히 고요한 자기만족의 상태에서 벗어나, 부분적인 공성에 대한 자각을 넘어 대승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야 비로소 아라한은 중생의 이익을 위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완전한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차원을 벗어난 아라한은 이제 더 이상 소승의 성자가 아닙니다. 대승의 완전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한 과정으로서의 아라한인 것입니다.

다음은 연각(緣覺) 또는 독각(獨覺)이라고 부르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공성에 대한 자각이 조금 더 확장된 경우입니다. 깨우친 정도는 아라한의 경지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수행하는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이들은 무명(無明)에 가려진 채 생 노 병 사에서 허덕이는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윤회의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지혜인 12 연기법(緣起法)을 관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들이 하는 수행의 과정을 보면, 먼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12 연기법을 순차적으로 관(順觀)하고 다시 이를 역순으로 관(逆觀)하여 하나씩 그 고리를 풀어 나가는 방식인데, 결과적으로 자아의 무자성(人無我)뿐만 아니라 현상계의 무자성(法無我)에 대해서도 부분적인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 현상계도 더 이상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지만, 아직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인식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즉 모든 현상은 상호 의존하여 일어남으로 본래 실재하는 것이 있을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무언지 모르게 아직 존재할 것이라는 의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연각 혹은 독각은 아라한과 비슷한 지위면서도 현상계의 무자성도 어느 정도 깨우친 경지를 말합니다.

연각이나 독각의 경지 역시 개인적으로는 완전한 해방을 경험하지만, 아직 모든 중생을 위해서 일하고자 하는 결과적인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특히 홀로 고립된 곳에서 갖가지 신통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여 주거나 손 안에 불타는 공을 만드는 신통을 보여줄 수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통의 힘으로 다른 사람에게 신심(信心)을 일으키게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인간계나 천상계에 태어나도록 하는 원인을 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도 어느 정도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실질적인 법을 가르칠 만한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사실 신통한 힘에만 집착하여 깨달음의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독각의 길은 여러 가지로 경각심을 일으키는 바가 많습니다. 실제 이들이 경험하고 성취한 신통의 힘이라는 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며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즉 효율성과 목적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지요. 독각불도 역시 결과적으로는 아라한들처럼 대승의 길을 만나야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됩니다. 중생을 위한 능력은 오로지 대승의 길에서 수행할 때만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법륜을 굴리셨던 전통에서 이어진 법맥을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그 뒤를 이으셨던 일곱 분의 스승과 초기 승가의 장로였던 열여섯 분의 아라한 그리고 부처님의 상수(上首) 제자들이었던 사리불이나 목건련 같은 분들이 바로 소승 수행을 통하여 각기 아라한과의 지위를 얻었던 전형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이 분들이 단순한 소승의 수행자만은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분들은 자기 해방을 구하는 많은 중생들을 위해 몸소 그 길을 보여주셨던 수승한 보살의 화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자유자재로 나투는 수승한 경지에 오른 보살입니다. 대승의 길에서만 가능한 심오한 수행의 경지이지요.

대승의 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생의 이익을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대승의 길이야 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완전하고 수승한 길입니다. 비록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이타심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대승의 길에 들어서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보편적인 실천을 위한 대승의 길 뿐만 아니라 특별한 방편을 수행하는 금강승의 길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가장 바탕이 되는 마음이 바로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이타심입니다.

마음이 공한 것을 인식하는 지혜가 생김으로서 모든 현상계 역시 공한 것임을 알게 되고, 그래서 또한 현상은 마음에서 생긴 꿈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실재한다고 믿고 삽니다. 하지만 수행의 과정을 하나씩 거치다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상대적인 감각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물리적인 몸은 우리 안에 잠재한 특정한 업연의 결과일 뿐이며 그나마 이 몸도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는 것인데, 잠시 몸을 인식하는 시간 동안 이 몸을 자신이라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때가 되면 그렇게 나라고 믿어왔던 이 몸과도 결국은 헤어져야 합니다.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법이지요.

무상(無常)의 진리는 물리적인 몸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쉴 새 없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탐욕 집착 어리석음 욕망 자신감과 같은 감정들도 순간 일어났다 사라질 뿐 어느 것 하나 지속적인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유형과 무형의 모든 감각적 경험들이 순간순간 조건의 화합으로 경험되어지는 것일 뿐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몸과 마음의 속성입니다.

이렇게 본래부터 존재한다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생겼다가 사라지는 이 모든 것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것이 고정불변으로 항상 꽉차있다면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서 이것저것을 구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 원리로 모든 것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냥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을 공부하고 수행하여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변하는 원리를 활용하여 스스로 능동적으로 변하는 것이지요. 힘들고 고통스러운 윤회 속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청정하고 맑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법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에 그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가 바라는 세계를 구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탁함의 업과 인연이 있다면 청정함의 업과 인연도 있는 법이지요. 거칠고 탁한 현상계를 청정하고 따듯한 세계로 다시 펼쳐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에서 대승의 모든 방편 수행은 다 그 독특한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편을 수행하는 체계가 고도로 정교화 된 특별한 대승의 길이 바로 금강승의 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방편들 때문에 금강승은 다시 방편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불교 안에 안배된 세 가지 유형의 수행(三乘之道)은 각각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근기의 중생이 따를 수 있는 길들입니다. 티벳 불교는 언제나 이 세 가지의 수행을 하나로 아울러 수행하는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즉 수행자 개인의 생활양식은 소승의 관점에 두고, 깨달음을 향한 의식은 이타행의 대승적 관점에 두며, 깊고 심오한 내면의 깨달음은 지혜와 방편이 합일된 금강승의 길에 의지해왔습니다. 티벳 불교에서 꿈꾸는 완전한 수행자의 모습은 바로 이 세 가지의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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