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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과 슬픔을 넘어.......

로덴
여보게 너무 멀리 가지는 마시게나,

세상의 많은 슬픔이 어찌 그대만의 것일까?
누가 꽃이 아름답다고 했는가?
그대인가?
아니면 시인인가?

여보게 너무 멀리 가지는 마시게나,

세상의 많은 고통이 어찌 그대만의 것일까?
누가 세상을 고(苦)라고 했는가?
그대인가?
아니면 부처인가?

세상의 수많은 성자들도 어찌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네.
그것은 바로 인과의 법칙,

세상사를 긍휼히 여기되 자신을 먼저 돌보시게.
먼저 그대의 마음에 자유를 주셔야 하네.
먼저 그대의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네.
자신의 무지함을 방치한 채 천만 명을 구한들,
그 자리에 어찌 꽃이 피겠는가?

그러니 먼저 그대의 무지에 빛을 밝히시게,

그때야 그대 진정한 부처의 미소를 보리니........
그때야 그대 진정한 기도로 세상을 감싸리니.......

그대가 세상의 슬픔에 아파하듯,
누군가는 그렇게 그대의 무지에 아파한다네.

그러니 그대, 그대의 무지에 빛을 주시게.
그러니 여보게 너무 멀리가지 마시게.
그대 안에 돌보아야 할 많은 것들을 두고,
그대 너무 멀리 가지는 마시게.

그리고도 남은 슬픈 세상일랑,
우리 함께 가지 않으려나........


맑은 영혼들의 신선한 아침을 위하여,


“탐(貪) 진(瞋) 치(痴) 삼독(三毒)으로 인한 번뇌 망상 때문에 생긴 업(業, karma)은 습관적인 성품(習性)의 형태로 마음속에 잠재합니다. 한 생이 끝나면 또 다시 이미 지은 원인에 따르는 몸과 마음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렇게 쉴 새 없이 윤회를 반복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생에 주어진 업을 완전히 다 쓰고 다음 생으로 옮겨갑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생명을 유지할 만한 조건이 부족하여 주어진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습니다. 이런 경우를 불시(不時)의 죽음 또는 복덕을 까먹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잠재된 업력(業力)에 의해 받은 생일지라도 지금 당장 필요한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전생의 업력에 상관없이 그 결과를 맺지 못합니다.

사람은 선하거나(善) 선하지 않거나(不善) 혹은 둘 다가 아닌(無記) 속에서 죽어갑니다. 첫 번째 선함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나 스승 등 상서로운 대상이 마음속에 나타나 지극한 신심을 가지고 죽어갑니다. 또는 무한한 평등성을 일깨워 어떠한 중생에게도 분노나 집착을 보이지 않게 되며, 자비와 공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임종시(臨終時) 마음에 일어나는 이러한 선한 생각들은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통해서 일어나거나 아니면 다른 이의 도움으로도 가능합니다. 이렇게 선한 생각을 가지고 죽어가는 사람들은 다음 생에서도 좀 더 나은 과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선한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끔 주변이 아주 산란하고 시끄러워 죽어가는 사람을 예민하게 자극하고 화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친구나 친척들이 죽어가는 사람 옆에서 집착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집착이든 분노든 이렇게 깨끗하지 못한 마음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아주 위험합니다. 아주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죽어가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선한 마음이나 부정적인 마음 없이 지극히 중립적인 상태의 마음으로 죽어 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의 세 가지 심적인 요소는 죽음을 경험하는 마음이 아주 미세한 상태에 이를 때까지 나타납니다. 이렇게 미세한 마음의 상태에서도 선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무상요가(無上瑜伽, anuttarayoga) 딴뜨라의 가르침과는 달리, 일반적인 경전들은 거친 수준의 마음에 대해 설명하거나 아주 미세한 상태의 마음은 그저 중립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고도의 밀법 수행자(mantrika)들은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미세한 마음의 상태를 선한 의식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수행자는 아주 심오한 경지의 수행을 성취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죽기 바로 직전의 상태는 아주 중요합니다. 아주 고도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라 하더라도 죽는 순간을 방해받게 되면 순간 좋지 않는 마음의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방해는 전에 지은 부덕한 행위가 순간 마음에 일어나서 좋지 않은 조건을 형성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잠재된 성향은 축생 등으로 하생(下生)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전의 선한 행위를 잘 간직하게 되면, 긍정적인 조건을 만나게 되고 다음 생에도 복덕이 구족한 인간 등으로 상생(上生)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업력은 우리의 가장 깊은 의식 안에 이미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선하든 악하든 그 흐름은 언제나 활성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좋지 않은 업이 활성화 되면 지옥 아귀 축생 등의 악취(惡趣)의 결과를 맺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좋지 못한 행위를 많이 했던 사람이라도 선한 마음을 가지고 죽어 간다면 좀 더 나은 상황의 조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상생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죽어 가는 사람에게 집착이나 분노를 피하고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쫓아가는 선한 죽음은 갈애(渴愛)를 느끼지 않고 상서로운 현상들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선함 속에 죽어 가는 경우는 깊은 병에 들어서 죽는 경우라도 병에 상관없이 지극히 편안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병이 거의 없이 죽어가는 경우도 두려움에 죽어가는 경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죽어가는 경우는 밝음 속에서 어둠을 쫓아가는 것과 같아서 불길한 것들을 보게 됩니다.

병 때문에 따듯함을 잃어가는 경우는 따듯함에 대한 갈망으로 극열(極熱) 지옥과 같은 뜨거운 곳에 태어나기 쉬우며, 차가운 것에 집착하는 경우는 차가운 물을 들이 키고 싶은 갈증으로 인해 극한(極寒) 지옥과 같은 추운 곳에 태어나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죽는 순간에는 애착을 일으키는 어떠한 생각도 피하고, 오직 선한 대상에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생에 집착과 분노와 질투 같은 감정에 익숙해 왔습니다. 따라서 아주 조그만 자극으로도 금세 이러한 감정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실제 그러한 자극을 잘 살펴보면 별로 반응할 만한 이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에 죽는 것(非存在)에 대한 두려움을 가득 안고 살아갑니다. 너무나 확실하게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자신이 사라질까봐 두려운 거지요. 이러한 존재에 대한 집착이 중음의 세계에서도 중음신(中陰身)을 취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즉 죽음과 재탄생의 중간을 방황하는 동안에도 자신이라고 생각할 만한 집착의 대상을 가지는 것이지요.

선하지 않은 업을 강하게 지어온 경우는 몸의 위쪽 온기(溫氣)가 먼저 소멸합니다. 반면에 선한 업을 강하게 지어온 경우는 몸의 아래쪽 온기가 먼저 사라집니다. 어째든 두 가지 경우 모두 온기는 마지막에 가슴의 한 중심으로 모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의식이 빠져나가는 것이지요. 정(精)과 혈(血)로 이루어진 수정체(受精體)에 들어간 의식은, 생명을 시작하면서 먼저 어머니 태중(胎中)으로 들어가, 가슴의 미세한 한 중심이 됩니다. 죽을 때도 바로 가슴의 그 한 중심에서 죽음을 마치고 떠나는 것이지요.

죽음을 마친 직후에 바로 무한한 공간(空無邊處), 무한한 의식(識無邊處), 윤회의 마지막 자리(有頂天 혹은 非想非非想處)에 나는 경우를 제외한, 중음 상태의 존재(中陰身)들은 죽음을 마치고 나서 바로 새로운 생을 시작합니다. 중음신 상태에서 욕계(欲界)나 색계(色界)에 태어날 존재들은 중음에 있는 동안 사람의 형상을 하게 됩니다. 즉 남자나 여자의 형태로 중음의 몸을 받습니다. 중음신 역시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원하는 곳에 장애 없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이 중음의 존재들은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계의 육도(六道)의 서로 다른 중음신들을 직접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음신들은 이들을 볼 수 있는 신통자들의 눈에 직접 보이기도 합니다.

처음 중음 상태에서 자신의 업과 성향에 맞는 적절한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칠일이 지나면 조그만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 다시 생겨납니다. 그렇게 해서 또 다른 중음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음의 반복은 최대 여섯 번까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가장 긴 중음의 상태는 49일간 계속됩니다. 죽고난지 1년이 지나도 다시 태어날 곳을 발견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중음 상태로 계속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영혼(靈魂, spirit)이 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경우는 먼저 미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누어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남자로 태어날 중음신은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고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일으킵니다. 마찬가지로 여자로 태어날 중음신은 그와 반대의 감정을 일으킵니다. 욕망을 일으킨 중음신은 성적 결합을 위해 달려듭니다. 하지만 욕망의 지점에 이르면 욕망을 일으킨 중음신에게는 오직 욕망하는 대상의 성기 부분만 보일 뿐입니다. 이에 분노가 일어나서 중음신을 버리고 새로운 탄생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가게 되고 새로운 인간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어서 아버지의 정(精)과 어머니의 혈(血)이 새 생명의 의식과 함께 결합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인간의 구성요소를 하나씩 갖추어 나가게 됩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지옥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미래에 태어날 곳이라면 그곳으로 향하는 욕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도살을 업으로 삼던 푸주한은 마치 꿈을 꾸듯이 나타나는 양떼를 보자마자 죽이려 달려듭니다. 이내 그 영상은 사라지고 푸주한의 중음신은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바로 중음의 죽음을 지나 지옥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뜨거움이 이끌린 중음신은 극열지옥으로 가고, 차가움에 이끌린 중음신은 극한지옥으로 갑니다. 중음의 상태에서 악취(惡趣)로 다시 태어나는 존재는 그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다시 태어나기 직전에는 언제나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여 분노를 일으키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중음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욕망과 분노와 무지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러한 번뇌를 모두 넘어설 때까지 속박의 사슬에 메여있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눈에 보이는 이 현상계만 해도 좋고 나쁜 탄생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여전히 속박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윤회의 속박에 갇힌 이상의 번뇌와 망상으로 인한 몸과 마음의 짐을 달게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쉴 새 없이 계속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생 노 병 사의 고통을 넘어서려면 무지에서 생기는 욕망과 혼동과 증오를 벗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윤회의 근본은 바로 무지입니다. 물리적인 고통은 약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욕망이나 집착에 대한 내면적인 수행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려면 근본 뿌리에 해당하는 무지를 제거해야 합니다. 오직 무지의 장막을 완전히 거둠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무지가 걷히고 나면 번뇌와 망상이 사라지고 거기에 의지하던 업의 녹게 됩니다. 나아가 이전에 지은 모든 업의 작용이 멈추고 마침내 윤회의 그물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 1972년 <보리도차제론 중근기편> 법문 중에서)


인간의 몸을 받은 진정한 소중함은
바로 이 모든 윤회의 근본인
무지를 제거할 기회를 가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힘들고 어려운 중생들이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슬픔과 고통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을 받고서도
스스로 무지에서 벗어날 인연을 갖추지 못한
그들의 상황 때문입니다.
진정 그들의 슬픔과 고통에 함께 하려면,
무명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를 먼저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하는 겁니다.
그것이 진리의 맛을 본 이들이 함께 가는 길이지요.

조용히 밤바다를 비추는
조그만 등대를 생각하며.........

로덴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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