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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입문II] 이전법륜(二轉法輪)--일반3.

로덴
總[입문II] 이전법륜(二轉法輪)--일반3.



이전법륜(二轉法輪): 공성(空性)



인간의 역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절대 진리가 쉽게 대중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절대 유일신을 믿는 많은 종교들의 예를 보더라도, 세상의 근원인 창조의 신은 언제나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인간들 곁으로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힌두교의 창조신인 브라흐마(Brahma)는 쉬바(Shiva, 파괴의 신)나 비슈누(Vishnu, 유지의 신)만큼 대중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고, 여호와(Jehova, 구약성서의 전능의 신) 역시 인간으로 현신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친 그리스도(Christ)만큼 신앙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막의 절대 빛의 신인 아누(Anu) 등도 한 단계를 더 거친 번개의 신 인드라(Indra)만큼은 사랑 받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시작부터 자신에게 좀 더 영향력이 있어 보이는 그래서 가까이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무언가 에게 더 애착을 가진다는 사실이 종교적 성향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의 가까이에서 사랑받고 신앙되는 신들 역시 그들의 근원인 절대 근본이 없으면 스스로의 존재 기반을 잃고 맙니다. 마치 지반이 약한 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같아서 언제 스러질지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중의 사랑을 넘어선 절대 근원에 대한 확인은 언제나 재점검되어야 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이들 유일 신앙의 대상을 가진 종교들에서는 절대 근원을 탐구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대중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즉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자기보존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이지요. 대중은 단지 거기에서 전달되는 진리와 사랑의 신봉자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면 불교는 어떨까요? 불교의 절대 진리는 무엇입니까? 절대 진리가 쉽게 상상할 수 없고 쉽게 이해할 수 없으며, 감각적 영역을 넘어 오직 완전한 지혜와 수행의 힘으로만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 절대 진리라는 것은 언제나 멀게만 느껴지는 타인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 바른 공부를 통해 그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언제나 많은 오해를 낳고 법을 흐리게 마련입니다. 절대 진리는 밝은 날에 태양과 같아서 언제나 곁에 있어도 잘 느낄 수 없지만, 길을 가려고 하는 자에게는 꼭 필요한 그런 것입니다.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요 길을 찾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 절대 진리에 대한 이해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 혹시 길을 잃더라도 다시 찾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전법륜에서 이 현상계의 삶과 진실을 그대로 내어 보이시고 어떻게 개인적인 자유로움을 성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성제의 법을 설하셨던 부처님께서는 이제 좀 더 성숙해진 당신의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진리를 말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이 모든 현상계가 연기의 법칙 속에서 생멸(生滅)한다는 상대적 진리를 터득하고 거기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공부한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제 그 모든 것을 넘어선 절대 진리에 대해 말해야 할 때가 온 것이지요. 아니 부처님 스스로 중생들의 눈을 좀 더 넓히고 성숙해지도록 깨달음의 근본 자리를 이야기해야 할 때가 온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일생에 두 번째의 큰 법륜(二轉法輪)을 굴리시게 된 것이지요. 즉 불교에서 말하는 절대 진리인 공성(空性)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계속해서 달라이 라마의 법문을 들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두 번째의 큰 법륜을 굴리신 것은 현재 인도 비하르(Vihar) 주(州)에 위치한 왕사성(王舍城, Rajagraha)의 영취봉(靈鷲峯, Grdhrakuta)에서 입니다. 거기서 부처님께서는 지혜의 바라밀이라고 알려진「반야부 경전(prajnaparamita)」들을 설하셨습니다. 이 경전들은 공성(空性)에 대한 주제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수행의 과정과 경지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큰 법륜(二轉法輪)은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 가르치신 것을 좀 더 넓게 확장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서 설하신 것은 한정된 틀 안에서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본질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한걸음 나아가 두 번째 큰 법륜을 굴리실 때는 공성에 대한 가르침을 주로 설하셨습니다. 만약 수행자가 절대 진리의 세계인 공성을 바로 이해하게 되면, 수행자는 자신의 고통에 한정되어 있던 관심을 모든 중생에게로 확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굴리신 법륜은 그 시야나 깊이가 훨씬 넓은 차원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의 근원을 다스리는 방법도 훨씬 넓고 다양해졌습니다. 반야부 경전에서는 초전법륜에서 설하셨던 고통의 근원인 무지와 집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한 형태의 번뇌 망상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번뇌 망상은 모든 현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우리의 잘못된 관념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원인은 무지와 집착으로 인한 분명한 의식의 작용뿐만 아니라, 본래의 성품에 번뇌 망상의 미세한 얼룩이 덮여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치 거울에 때가 낀 것과 같습니다.

또 두 번째 법륜에서는 사성제 중에 세 번째의 진리인 멸제(滅諦)를 아주 심도 있고 정교하게 다루고 계십니다. 초전법륜에 속하는 경전들과는 달리 두 번째 법륜에서는 멸제의 일반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 등을 아주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심도 있고 정교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사성제의 네 번째 진리인 도제(道諦)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야부 경전에서는 깨달음에 대한 실질적인 길은 물론 공성과 무아(無我) 그리고 모든 현상의 본성에 대한 직관을 키우는 수승한 길에 대해서 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직관은 보편적인 자비심과 보리심, 즉 오직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려는 이타적인 마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 수행자의 특성이며 행동 방식입니다. 보리심과 공성에 대한 바른 직관의 조화를 통해 지혜와 방편의 완전한 합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공성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방편은 자비심이 충만한 지혜에서 나오는 이타적인 동기를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두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 설하신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이 지혜와 방편을 합일하는 길입니다.

그러면 왜 초전법륜 때 보다 두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 더 심오한 차원의 사성제를 설하셨을까요? 이러한 내용은 초전법륜에는 없는 내용으로 반야부 경전에서만 그 특성이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초전법륜에서 다루고 있지 않는 내용을 반야부 경전에서 논의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초전법륜 때 사성제를 설하시면서 강조한 인과법을 보다 정교하고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현상계의 본질(절대적 차원의 진리)인 공성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가 힘들었던 초전법륜의 한계를 벗어나 이제 그에 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보다 광범위한 차원에서 다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굴리신 큰 법륜(二轉法輪)을 “본래의 성품이 결여되어 있는 현상계의 본질을 꿰뚫는 법륜”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두 번째 법륜에서 설하신 반야부 경전에는 초전법륜에서 설하셨던 깨달음의 길에 대한 일반적인 구조와는 조금 다르게 보이는 내용들도 발견됩니다. 서로 모순 되게 보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승 불교에서는 경전의 범주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만 해석해서는 그 본래의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좀 더 깊은 차원의 해석(interpretable)이 필요한 불요의(不了義, Drang Don) 경전이며, 다른 하나는 확실한 의미(definitive)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이해해도 좋은 요의(了義, Nges Don) 경전입니다. 대승에는 이와 같은 해석상의 문제에 부딪힐 때 의지해야 하는 네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즉 해석상의 애매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는 (1) 가르치는 스승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 자체에 의지해야 하고, (2) 겉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이 아니라 그 뜻을 생각해야 하며, (3) 일시적인 의미가 아닌 확실한 뜻에 의지해야 하고, (4)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깊은 경험에서 나오는 초세간적인 지혜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원칙 중 첫 번째 부분은 가르침을 듣거나 경전을 읽을 때 단순히 가르치는 사람의 명성이나 지위 혹은 권력이나 부에 의지하여 그 유효성을 판단하지 말고 가르침 그 자체에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경전에 보이는 문자 그대로 판단하지 말고 다루고 있는 주제의 내용을 심사숙고하여 본래의 뜻을 살피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 원칙은 어떠한 주장이나 명제(命題)를 대할 때 일시적으로 혹인 잠정적으로 그럴 수 있는 의미만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고 분명하고 정확한 뜻에 의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끝으로 네 번째 원칙은 분명하고 정확한 뜻에 의지하더라도 단순한 사실에 대한 지식에 의지하여 판단하지 말고 경험을 통해 얻어진 깊은 지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부처님께서는 멸제(滅諦)에 대한 가장 심도 있는 가르침인 공성에 관한 내용을 두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 아주 폭넓게 다루셨으며, 그 내용은 지혜의 바라밀인 반야부 경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적인 접근은 다양한 경전들에 숨겨져 있는 본래의 뜻을 이끌어 내도록 도와줍니다. 예를 들어 반야부 경전에도 공성에 관한 뜻이 아주 분명하게 들어나 있는 내용이 있는 반면, 자세히 보면 잘 드러나 있지 않은 보다 깊은 뜻도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잘 드러나지 않은 내용이란 공성을 깨우치고 경험하는 다양한 차원들에 대한 내용을 말합니다. 즉 깨달음의 길을 갈 때 경험하는 모든 성취의 과정을 말합니다. 이러한 경험적인 단계들은 반야부 경전에 그대로 다 드러나지 않고 감춰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성은 불교에서 말하는 절대 진리에 가장 가까운 용어입니다. 이미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절대 진리라면 그와 가장 가까운 용어를 통해 그 진실을 터득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공성을 논할 때는 언제나 논리적인 직관과 지혜를 요구합니다. 끊임없는 사색의 과정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을 체득하는 것은 실질적인 수행을 통해서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수행을 해야 그 절대 진리를 맛볼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이 현상계가 공한 것이라면,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공성의 차원을 이 거친 몸과 말로 어떻게 경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직접적인 공성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너무 멀리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근기의 중생들이 공성에 대한 절대 진리에 보다 실질적으로 다가설 수 있도록, 당신이 수행을 통해 성취하신 구체적인 과정과 원리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들을 설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당신의 일생에 마지막으로 큰 법을 펴신 세 번째 법륜(三轉法輪)입니다. 다음에는 바로 이 실질적인 수행의 원리와 특성을 살펴볼 수 있는 세 번째 법륜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여기서 한 가지, 지금 여러분이 접하고 있는 내용들은 일반적인 설법을 위한 가벼운 내용들이 아닙니다. 불교의 전반적인 내용과 역사적인 사실들을 살펴보는 개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간단하게 다루고 있는 내용들도 대장경 안에 있는 많은 경전들을 통해서 공부해야 될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또, 수행을 통하여 하나씩 경험하고 성취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덮어버리지 마시고, 또 지금 당장 수행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서두르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이 실제 수행과 공부에 들어갔을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지도와 나침반을 잘 간직하십시오. 실제 산에 오르게 될 때 너무나 소중한 것들입니다. 맑은 날 구름 살짝 걸린 靑山의 상쾌함을 생각하십시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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