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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바 사가행 법문(1)

화이트타라
 

<2005.12.30> - 첫째날

제17대 까르마파 우겐틴레도제 설하심

時間:2005年12月30日~2006年1月3日

지점 :인도 바라나시 사르나트 까규파 지혜금강대학

번역: 석 설오


  먼저 해도큰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과 여러불자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여러분 모두가 항상 길상하고 만사형통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무阿彌陀佛!

이번에 여러분들이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이곳까지 오셔서 이렇게 수승한 인연을 맺게되니 저 자신 너무도 기쁩니다.

오늘은 실수행의 법을 전수하는 첫째날입니다. 정식으로 가르침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먼저 저의 생각을 좀 말씀드리고 내일부터 정행의 가르침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正行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대부분 직접 중국어로 강의를 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오늘부터 바로 중국어로 강의를 해야하겠지만 현재 나의 중국어 실력이 부족한데다 더구나 중국사람들앞에서 준비를 잘하지 않고는 제가 긴장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티벳말로 여러분들에게 저의 견해를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오늘 아주 수승한 성지에 함께 모였습니다. 이곳은 교주이신 석가모니불께서 인간세상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신 초전법륜 성지-녹야원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처음 법문을 하셨을 때 그 당시 와서 법을 들은 사람은 겨우 다섯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수백명의 불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가피력이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더 흥성했고 세상에 널리 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21세기에 이르러서는 불법이 더욱 더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배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불법에 이미 신심이 있는 불제자뿐만 아니라 불법을 신앙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부처님 경전가운데에 설하고 있는 일체중생들을 해치지 않는 자비사상의 실천에 매료되어 점차 불법에 대해 신심과 환희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불법을 신앙하기 시작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이 부처님의 제자를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무량한 일체중생들을 차별없이 모두 이롭게하기 위하여 법을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동양에는 과거에도 많은 불교종파와 전승이 있었고 지금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도의 대승불법이 일찍이 전해진 곳이 바로 중국입니다. 이것은 매우 수승하고 소중한 역사입니다.

  불법이 인도에서 생겨났으나 시절의 변천을 따라서 인도에서는 불교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불법의 가르침이 다른 나라에 전해져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불법이 크게 발전하여 이미 중화문화의 한 부분이 되어 실로 한족 문화의 소중한 보배가 되었습니다.

  옛말에 道高魔盛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법이 성행할수록 마장도 더욱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중국에도 불법이 흥성할 때에 많은 마장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 조사님들의 큰 용기와 큰 지혜로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정법의 맥을 유지해왔습니다.

 저도 두 차레 중국에 가서 많은 사원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당시에 수행이나 견해면에서 깊은 대화를 가질 기회는 없었지만 다만 사찰을 순례하고 불상과 경전, 탑들을 참배하고 스님들을 만남으로서 그 전승의 가피를 체험하고 매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매우 영광스럽고 뿌뜻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과거생의 인연소치로 말미암아 어려서부터 중국문화와 연결고리가 있었고 이와같은 연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으로 전해진 불법과 문화를 매우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모두가 부처님의 제자이고 도반입니다. 우리가 석가모니부처님의 제가가 된 후에 만약 스물 네시간동안 항상 자신을 이롭게하고 남을 이롭게하는 자리이타의 동기와 수행하는 마음을 지키고 그 마음과 행위를 일생동안 관철할 수 있다면 정말 바람직한 일인 것입니다. 저 자신도 평소에 늘 이렇게 자신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할 것인가를 알기 전에 먼저 부처님의 견해와 수행에 대해서 관찰하고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는데에도 먼저 그 일에 대해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동시에 그 일에 대한 신심이 생겨야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또 신심도 없다면 그 일을 성취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하여 철저하게 그 일을 잘 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불법을 배우는 것도 같습니다. 만약 좋은 성과를 얻기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곧 진실로 불법이 어떻게 自利利他를 실천하는지 그 이치를 잘 이해하고 아울러 신심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불법이 진실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으려면 먼저 법을 설한 교주이신 부처님께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불법승 삼보님께 귀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불법승삼보는 왜 귀의처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귀의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바로 부처님께서 갖추고 계신 공덕인 것입니다. 

공덕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공덕있는 사람은 많이 있는데 부처님의 공덕만 특별히 다른 무엇이 있고 부처님의 공덕만이 특별히 소중하고 수승한 것인가고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두 가지 수승한 공덕을 지니고 계신데 그것은 바로 지혜와 자비입니다.

먼저 지혜의 공덕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큰 지혜라고 말하는 것은“일체법을 두루 다 아는 지혜(遍一切智)”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법을 다 안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범부의 마음으로 추측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현상계의 물질이나 色法에 대해서도 습관에 젖어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습관적인 사고방식으로 어떤 것이 큰 지혜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면 물을 끊이게되면 물의 온도가 어느 정도에 도달하게 되면 물이 끓어 오릅니다. 그러나 만약 계속 불의 온도를 올리면 물이 말라버리게 됩니다. 범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버렸기 때문에 큰 지혜의 공덕에 대해서 듣더라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옛적에 法稱이나 陳那와 같은 논사들이 많은 사람들이 큰 지혜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을 고려해서 해석해서 말씀하시기를, 遍智란 해탈을 성취하고자하는 제자들에게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그들이 필요로하는 것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다 아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한발짝 더 나아가서 만약 遍智가 몸에 기생충이 몇 마리 있고 이 세상에 생명체가 얼마나 있고 사람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 것을 가르킨다면 이러한 지혜는 우리가 귀의할만한 대상이 안된다라고 부연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러분들을 일깨워드려야겠습니다. 이상 큰 지혜에 대한 해석은 논사들이 신앙심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에게 방편으로 설한 것 뿐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러한 해석을 듣고 “어-- 부처님이라도 뭐든지 다 아시는 게 아니구나.”라고 이해한다면 제 마음이 몹시 서글플 것입니다.

그럼 큰 지혜의 공덕을 갖춘 것만으로 부처님께서 진실한 귀의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오직 대지혜의 공덕만 갖춘 것으로 붓다께서 진실한 귀의처가 되기에 합당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인도에는 많은 티벳 학생들을 위한 학교가 있는데 요즈음 학생들이 과학에 매우 흥미를 느끼고 있어서 그 아이들은 부처님은 과학자처럼 총명하고 머리가 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붓다는 큰 지혜를 갖춘 것만이 아닙니다. 더욱 더 찬탄할 만한 것은 붓다는 대자대비한 마음을 갖추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아주 머리가 좋고 총명한 사람이 만약 타인을 이롭게하고 다른 이를 돕고자하는 마음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의 총명과 재능은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자나 의지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공덕은 다만 역사적으로나 위인전에 기재되어 있는 붓다의 대지혜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수행하고 있는 모든 법이 부처님께서 우리를 이롭게하고 도와주기 위해서 대자비한 마음으로 친히 설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가장 먼저 보리심을 일으키시고 그 후에 무량겁동안 보살도를 행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최후에 불도를 성취하셨습니다. 성불하신 후 최초에 대원을 세운 바대로 법륜을 굴리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께서는 오로지 중생들을 이롭게 하겠다는 대비심, 그 한 마음을 계속 유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유한 후에 우리는 부처님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알게 되고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하신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발짝 더 나아가서 자비로운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자신을 이롭게 하고 지혜를 증장케 하는 법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도와줄 수 있는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불법을 수행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불법이 청정하고 정확한 법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 중에 누군가가 “불법이 확실히  좋기는 하지만 수행을 하거나 안하거나 별상관은 없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불법은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을 하는가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동안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만나게 되어 있고 또한 많은 잘못을 범함으로서 수많은 고통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자신을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사회, 심지어는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와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가 오직 불법을 수행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만약 질문사항이 있으면 내일 두 번째 시간에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비록 중생들마다 깊고 낮은 느낌의 차이는 있지만 고통을 여위고 행복을 얻고자하는 마음은 똑 같습니다. 사람은 유난히 고통을 떠나고 어떠한 행복을 얻고자하는 강렬한 느낌이 있지만 비교해보면  많은 곤충들은 아마 그렇게 강렬한 느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중생들이 끊임없이 행복을 구하고자 노력하고 끊임없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출생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곧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행복을 얻으려고 생각하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만족할 만한 행복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대에도 만족한 사람은 없었고 현재에도 “내가 만족스럽다. 이젠 됐다.”라고 말하고 안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특히 21세기에 처해있는 우리는 옛날과는 달리 마치 마귀처럼 예측할 수 없는 다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전을 생각해보면 약간의 자연 재해외에는 인위적인 재앙은 비교적 적었습니다. 현재는 과도기에 있는 시기입니다. 인류가 끊임없이 거대한 고통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미 세계의 멸망위기까지 영향을 미치기 되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정확하고 좋은 이상과 소망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일찍이 만족을 얻은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도대체행복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것인가를 묻고 사유하고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항상 밖에서만 행복을 찾는다면 행복은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고 마음도 만족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른 바 만족이라는 것이 밖에서 찾은 것으로 보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심으로부터 생겨나는 일종의 만족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자신의 마음으로 돌이키고 안으로 찾고 안으로 관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으로 관찰할 때 우리는 자신의 많은 괴로움, 많은 잘잘못과 영원히 만족하지 못함등의 문제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사실상 일어난 원인은 바로 우리의 나쁜 마음인 탐심, 진심, 자만심, 질투심,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고 이모든 과실의 주요인은 바로 무지와 무명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모두 행복한 결과를 바라고 나쁜 결과는 원치 않습니다. 果위에 우리는 취하고 버릴 줄은 알면서 因위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선하지 못한 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것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모르는가하면 나쁜 因으로는 영원히 선한 과보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마음속에 원하는 것과 실제의 행동은 완전히 상반되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고 정신없이 계속해서 악업을 짓는 일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계속)

무명이란 마음속에 있는 욕구가 만족을 얻지 못하고 실현되지 못함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무명 속에 있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불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저는 불법이 다만 일종의 견해나 학설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불법은 우리의 무명을 없애주고 복덕이 증장되게 할 수 있는 심오한 지식이요, 아주 수승한 방편법인 것입니다.

범어로는 불법을 다르마(Dhama)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는 허물을 고친다는 뜻이고, 둘째는 구원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변화를 통해서 우리들을 고통 속에서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변한다”라고 형용한 것은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청부지 어린아이가 학교를 가서 차차 글자를 알기 시작하고 더 많은 지식을 배움으로서 앞날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아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에서 철이 들기 시작하고 심지어 타인을 이롭게하고 지도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는 것이 바로 변화의 힘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각자 사람마다 본래 공덕과 지혜를 갖추고 있는데 다만 어떻게 운용해야할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을 수행하고 배움으로서 본래 구족한 공덕과 지혜를 분명하게 펴고 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공덕과 지혜는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것이지 불법의 수행한 후에 비로서 만들어진 새로운 물건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대승의 가르침에서는 특별히 慈心、悲心과 菩提心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본래 구족하고 있는 것이지 불법이 우리에게 새롭게 慈心과 悲心의 종자를 줄 수는 없습니다.

  만약 불법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자신의 마음과 일생동안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불교를 배울 아무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불법과 우리자신의 생활이 그토록 연결되어 관계가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 우리의 慈心과 悲心이 경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위대하게 아직 완전히 개발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자비의 종자나 혹은 사랑하는 마음의 원소는 확실히 모든 사람마다 갖추고 있고 심지어는 곤충과 같은 미물에게도 있습니다. 

불법의 수행은 바로 우리자신이 본래 구족하고 있는 慈愛종자를 개발해내는 방법이어서 우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불법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도 아니고 혹은 한편의 화려한 문장도 아닙니다. 불법의 배워야 할 것이고 배우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불법은 또한 실천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일종의 지식으로 광대한 이익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의 헛된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과 자신의 마음과 긴밀히 연관되어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쓸데없는 공허한 말만 해서는 아무 이익도 없습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입니다. 자비를 수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렇지만 이 시대에 실천하기에는 좀 어려울 것 다구요.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머리 속이 온통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롭게 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상업적인 경쟁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해서 조금도 들어 갈 틈이 없고 자비를 들어갈 틈새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전혀 그렇치 않습니다. 아마 확실히 우리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손해하려는 마음이 조금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선량한 마음을 본래 구족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가족이 모여서 한 끼 식사를 즐겁게하고 노래하고 아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방송이나 신문매체에 보도가 되지 않고 누구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느 날 부부가 싸움을 심하게 하고 심지어 법정에 까지 가게되면 신문매체에서 흥미를 가지고 반드시 보도를 할 것입니다. 이 예에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화합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보도꺼리가 않됩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싸우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참을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자비심은 이 시대에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많이 사유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에게 탐진치(貪嗔痴)의 마음은 없어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자비심과 사랑이 없다면 그는 생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첫쨋 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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