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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바 사가행 법문(2)

화이트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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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마파 사가행강의 둘째날


오늘은 정식수행부분으로 들어가서 하사도의 수행차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가행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대부분 밀교수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만다라공양, 금강살타수행, 귀의대배등 다 밀교수행과 관계된 수행인데 만다라공양등은 네 가지 不共加行이고 사람 몸 받기 어렵다라든가 죽음이 무상함을 사유하는 것은 共加行입니다. 이 不共加行과 共加行 두 가지는 명칭도 다르고 의미도 다릅니다.

오늘은 주로 일반사람들의 수행차제(道次第加行),혹은 下士道의 수행차제법에 대해 말씀드릴 것인데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음이 무상함을 사유하는 등 네 가지 共加行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행수행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귀의의 의미를 알고 귀의계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귀의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불교도인가 불교도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근거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근거는 귀의를 했는가 안했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제자로서 귀의의 의미와 종류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계속해서 귀의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겠습니다.

첫째는 귀의의 因과 緣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과 후대에 조사스님들이 저술한 논장 가운데에서 설한 가장 중요한 因與緣이 두 가지가 있는데 공포심과 신심입니다.

공포심 때문에 귀의를 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무서워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고통입니다. 누가 무서워하는가 하면 바로 자신입니다. 두려운 것은 윤회의 고통입니다. 苦에는 총괄적으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苦苦、壞苦와 行苦입니다.

여기에서 주로 두려워할 것은 행고(行苦)를 가르킵니다. 왜 주로 行苦를 두려워하는가하면 苦苦는 불제자나 사람뿐만 아니라 축생이나 곤충들까지도 苦苦에 대해 느끼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래서 苦苦의 공포는 진정한 공포롤 볼 수 없습니다.

壞苦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괴멸해 가는 고통에 대해서 느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상을 관하는 관법수행을 통해서 곧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로 인식해야하는 것은 行苦입니다. 우리는 모든 업과 번뇌를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모두 고통이고 苦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업과 번뇌를 통해서 생겨난 모든 有爲法이 모두 고통이라는 것을 관찰했을 때 이 점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귀의를 하려고 생각한다면 이것을 비로소 진실하고 이익이 되는 힘이 있는 귀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원력을 가져야합니다. 또한 누가 나를 도와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누가 나를 구해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구원해줄 수 있는 분에게 신심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신심으로 인해서 귀의하는 것입니다.(因信心而皈依)

여기에서 우리는 가장 먼저 어떤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바로 현재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는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중국사람들이 미신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한 신도가 달람살라로 나를 보러 왔습니다. “지혜롭고 판단력있는 신심을 가지는 것은 물론 좋지만 비록 미신이라고 나쁘게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미시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하고 내 생각을 물었습니다.

중국어에서 迷信 혹은 迷路라는 뜻이 헷갈리고 확실히 알지 못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미신에 대해 해석하여 말하기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귀신같은 것인데 어쨌든 근거없는 신심을 미신이라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불법의 삼보님에 대해서 말할 때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삼보님께 신심을 낼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신심이 상근기자의 지혜있는 큰 신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미신이라고 치부해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불법승 삼보님이 본래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삼보님는 진실하고 정확한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삼보님께 귀의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또한 진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이유인지 모르고 삼보님에 대해서 신심을 내는 것도 아주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신심을 유지해야할 것입니다.다만 한발짝 더 나아가서 우리는 지혜와 판단력을 길러야 합니다. 철저하게 모든 의심을 끊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미신이 곧 해탈하여 正遍智의 果位를 성취하는 종자가 될 것입니다.


둘째는 귀의의 대상입니다: 귀의의 대상은 불법승 삼보님입니다.

먼저 불보(佛寶), 붓다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의 의미에는 증장한다, 발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티베트어에서는 붓다를 의역해서“상게”라 했습니다. 이 가운데 “게”는 곧 증장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다 덮혀있는 없장을 소멸한다는 뜻으로 “상”을 덧붙힌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분이 부처인가를 알려면 먼저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그들의 교주는 무시이래로부터 본래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관점에서는 교주이신 석가무니불이 본래 성불하신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범부이셨고 성불하고자하는 원력을 가지고 차제를 거쳐서 수행하여 불도를 성취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과정은 범부의 지위에서 차제로 수행하여 성인의 지위에 오르신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도 마찬가지로 성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성불의 의미는 마음 속에 번뇌와 여러 가지 習氣의 장애를 없애는 것입니다. 만약 한 물건이 우리에게 본래 있다면, 우리의 본질의 일부라면 이 물건을 없애버린다면 바로 자신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호랑이 몸에 얼룩무늬를 없앤다면 곧 호랑이를 없애버리는 것과 같은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는 그렇치 않습니다. 번뇌는 우리 본질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평소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번뇌가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자비심과 사랑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금방 태어난 아기가 사랑과 관심으로 보살피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번뇌는 우리 본질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계속)

그러나 우리가 모든 업장을 소멸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제도 말씀드린바 대로 어떤 사람은 모든 업장을 없애고 모든 공덕을 갖추는 것이 실제로 불가사의하고 실현불가능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것을 밖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외부에 물질은 한계가 있어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심을 돌아보면 우리는 마음의 힘이 한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이러한 힘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든 업장을 끊고 모든 공덕을 갖출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힘이 무량무변하다는 관점은 불교에만 있는 견해가 아닙니다. 특히 과학이나 심리학에서도 모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법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법보는 성자의 마음가운데 구비되어 있는 道諦와 滅諦를 말합니다. 도제(道諦)는 탐욕을 없애는 방법이고 탐욕을 없애고 욕망을 여윈 것을 멸제(滅諦)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르침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각종 경전이나 부처님의 말씀을 적어둔 문자들은 다 법을 대표하는 것이니 법보로서 존중해야 합니다.

법보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부처님께 귀의했더라도 부처님께서 우리를 윤회에서 바로 구원해서 해탈하게 하시지는 못합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그러한 능력을 갖추셨더라면 윤회계가 이미 텅 비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신 후 열반에 드시고는 나머지는 우리 자신의 일인 것입니다. 스스로 해탈도와 해탈 법문을 잘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많은 제자와 많은 사원을 가지고 불사를 크게 하신 한 큰스님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많은 사람들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와서 스님께 묻고 조그만 일까지도 다 큰스님께서 신경을 쓰고 처리해야 했습니다. 어쨌든 매일 사람도 일도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스님을 모시던 사람들은 보고 걱정이 되어 큰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 이렇게 바쁘고 일이 많으시니 장차 불사가 더 커지면 번거로운 일들이 갈수록 많아 질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큰스님께서 그 말을 듣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실상 아직은 괜찮네만 만약 어느 날 정말로 힘들고 안되겠다고 느껴지면 내가 주무랑마봉이 있는 산으로 가면되걸세.” 그래서 큰 스님은 정말로 주무랑마봉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주무랑마봉이 워낙 유명하고 좋은 산이다보니 등산오는 사람도 많고 주변환경이 좋다보니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큰 스님께이것저것을 물었습니다. 결국 큰스님은 할 수 없이 달나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달나라에도 외국인들이 갈수록 많이가서 상황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아는 사람만 찾아왔는데 지금은 모르는 사람들까지 찾아오겠으니 결국 전세계 사람들이 달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스님은 생각을 내어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은 밖에 어느 곳에도 있지 않고 그대들의 마음 가운데 있다. 그러니 자신에게 있는 문제들을 자기 마음에 물어보면 된다.” 이렇게 큰 스님께서 말씀하신 후 큰스님 귓전이 훨씬 청정하고 조용해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비유하고자하는 것은 비록 부처님께서 이미 열반에 드셨지만 우리가 일부러 부처를 다시 찾으려고 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이미 소중한 가르침을 보이셨습니다. 이 법이 바로 부처님 자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법을 보는 자는 바로 부처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불법을 들을 때 바로 부처님의 현신 설법을 듣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법보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어서 승보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범어로는 ‘상가’라 하고 티베트어로는 ‘겐둔’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선을 향한 마음이 끊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승보의 표준정의는 이미 성자의 과위를 증득한 사람을 가르킵니다.  네 명의 비구가 모여 있으면 승단이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부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시기를 네 명의 비구가 모인 곳은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이 부처의 공덕을 갖추고있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승보에 대하여 우리는 공경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승보’란 우리가 수행하는 길에서 함께하는 도반을 말합니다. 세속생활은 물론 출세간의 불법에서도 친구는 아주 중요합니다. 저는 중국의 손자병법에도 전쟁때에도 전우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생 가운데 우리는 많은 좋은 벗들을 의지해야 하는데 하물며 정변지의 불과를 증득하기 위하여 세세생생 끊임없이 노력해야하는 수행의 길에서 우리는 더우 더 좋은 벗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善友인지 惡友인지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만약 우리 곁에 있는 친구가 성자라 하더라도 만약 우리의 생각과 행위가 청정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아무런 이익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옆에 나쁜 친구가 있더라도 만약 우리가 언제든지 방일하지 않고 정념(正念)과 正知를 잘 지킨다면 그의 나쁜 습관이 자신에게 오염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거기에서 오히려 어떤 공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계셨던 때에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탁발을 하러 한 집에 가셨는데 그 집주인이 귀찮게 했다고 생각이 되어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욕적인 말투로 당신들은 거지같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미소만 띠고 서 있다고 욕을 하였습니다. 그 집주인이 계속해서 욕을 하였으나 부처님의 아무 반응도 얻지 못했습니다. 화가 난 주인이 실컷 욕을 하고 난후 화풀이도 할만큼 했고 화도 풀리고 해서 그 다음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 있었습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 미소를 띠시고 물었습니다. “아직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신지요?”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나도 욕을 할 만큼 다 했소.” 이 때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물건을 하나 주었는데 그 사람이 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티베트 사람같으면 상대방이 받기를 원하던 안원하던 간에 억지로 떠 안겼을 것입니다.(대중이 한 바탕 웃음.)

이 주인은 대답하였습니다. “만약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그냥 가져오겠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방금 나에게 많은 말을 하고 욕을 했지만 내가 또한 받아들이지 않으니 도로 가져가시지요!”

이상 간단하게 삼보의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계속해서 설명할 것은 왜 삼보님은 우리가 귀의할 만한 대상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을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본생담에 과거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해치려고 미친 코끼리를 풀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미친 코끼리를 조복 받으셨습니다. 동물조차도 부처님께 공경심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이미 안팎의 공포를 없앤 분입니다.

  둘째, 지혜로서 다른 중생들을 도와서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은 모든 공포에서 벗어났지만 만약 타인을 돕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것은 마치 두 팔이 없는 어머니와 같아서 자기 아들이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구할 방도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각종 선교방편을 구비하시고 중생들을 잘 조복하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면 당시 인도에는 알굴리마라라는 극악무도한 살인자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조복하지 못했는데 부처님께서는 말씀 몇마디로 긔 마음을 바뀌게 하여 그를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셋째, 멀고 가까움이 없는 평등한 대비심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선교방편을 자신과 친한 사람만을 위해서 쓰고 원수나 적은 죽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일체중생에 대한 자비와 사랑은 멀고 가깝다거나 친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당시에 제바달다와 같이 시종일관 부처님과 경쟁하려고 했던 그가 어느 날 약을 먹고 소화를 시키지 못해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을 부처님께서 아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만약 내가 친 자식인 라후라와 제바달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똑같아서 조금도 분별이 없다면 제바달다의 병이 금방 나을 것이다.”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으로 해서 제바달다의 병은 그 자리에서 좋아졌습니다. 이 故事는 부처님의 대비심이 평등하여 私心이 없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거나 이익이되지 않거나 간에 다 도움을 주시는 부처님은 친한 이나 원수거나를 막론하고 다 대비심으로 대하시고 심지어는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나 도움을 주든 주지 않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보시는 분입니다.

부처님의 일대기에 부처님은 국왕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내시면서도 동시에 천한 거지나 천민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도와주는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러한 모습들 모두가 칭송하고 존경할 만한 것입니다.

이상 몇 가지는 주로 불보(佛寶)의 공덕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불보의 공덕은 이와같이 수승하고 불가사의합니다. 법보와 승보의 공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삼보님은 우리의 귀의의 대상이 될 만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첫날 귀의의 이익에 대해서 해설을 하고 둘째 날은 귀의계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내일 귀의계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인연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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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와 응답)


대만 제자의 질문: 어떻게 하면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어느 경전에서 주로 보리심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요?

법왕 까르마파 답변: 내일과 모레 보리심계율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에 더욱 상세히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어느 경전에서 보리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사실상 모든 대승경전에서는 모두 보리심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전에서는 직접적으로 보리심이라는 단어를 거론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리심의 인(因), 혹 보리심의 과(果), 菩提心의 道, 보리심의 地를 수행하는 방법과 보리심의 공덕등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은 기본적으로 보리심을 여위지 않습니다. 특히 대승의 가르침은 주로 보리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질문하신 분도 대승경전들을 많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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