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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바 사가행 강의(4)

화이트타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는 귀의에 대하여 말씀드렸고 오늘은 이어서 보리심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느끼기에 왜 계속 보리심과 귀의에 대해서만 말하고 사가행과 스승님께 기도하는 수행에 대해서는 언급도하지 않는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차제대로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차제대로 수행하고 어떤 사람은 초월적이고 건너뛰는 방식으로 해탈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차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비교적 실질적이라고 느껴집니다.

(이하는 까르마파성하께서 직접 중국어로 법문하신 내용입니다.)

대승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아닌가는 보리심수행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보리심을 발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떠한 선행을 하더라도 그것은 대승법에 속하지 않습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계단을 오르듯이 기초부터 천천히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차제로 훈련을 해야하기 때문에 보리심수행은 기초와 근본이 여법한가 여법하지 않은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리심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어떤 것이 여법한 것이고 어떤 것이 여법하지 않은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갸파의 네 가지 집착을 여위라는 구결에 “만약 이 생에 집착하는 이는 수행자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로 볼 때 이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진정코 여법한 수행인 것입니다. 모든 불법의 수행은 삼승(三乘)으로 귀결되는데 이 삼승가운데 가장 먼저 소승을 수행해야 합니다. 소승수행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출리심으로 기초를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출리심도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대승의 수행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출리심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서너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습니다. 당시에 너무 어려서 자기 부모이름조차 몰랐을 때이니 출리심이 무엇인지를 알 리가 없었습니다.

  출리심은 이생에 대한 탐착을 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출리심, 즉 이생에 대한 탐착을 끊는 한계나 표준이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티베트불교에서는 세간의 명예나 이익 손해에 관한 여덟가지 법을 포기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인(因)이 무엇인가하면 그것은 바로 윤회계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생을 포기하는 연(緣)이 무엇인가하면 그것은 이 생에 대한 허물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과 연의 두 부분에 대해서 알아야합니다. 만약 이 둘을 갖추지 않는다면 이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을 포기했는가의 표준을 어디에 두는가하면 세간의 여덟가지 법에 대하여 혐오감과 반감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생을 포기한 징조는 무엇인가하면 바로 세간의 여덟가지 법을 아무리 배워도 배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까르마바성하께서 농담으로..아마 저는 배우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세간의 여덟가지 법, 즉 世間八法은 利(이익)、衰(손해)、譽(명예)、毀(훼방)、稱(칭찬)、譏(비방)、苦(괴로움)、樂(즐거움)을 가르킵니다.  곧 눈앞에 일시적인 이익과 손해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거나 괴롭게하는 느낌등의 여덟가지 상황을 말합니다.



일반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표준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간법에 의지해 살면서 세속에서 일을하게되면 세간의 여덟가지 법에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고 세간 팔법(世間八法)과 상관없는 일을 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일을 하거나 말을 한다거나 꿈을 꾸는 등의 일이 모두 세간 팔법(世間八法)과 관련된 일이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잠이나 자버려야 되겠습니까?(웃음)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속사람들은 절대로 법답게 살 수가 없는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서 우리 모두 생각해보고 저 또한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세간팔법을 끊어 없애려면 다만 이론적으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세간팔법의 문제의 관건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맹목적인 집착이라고 제가 이름을 붙였습니다. 맹목적인 집착의 의미가 무엇인가하면 그것은 좋고 나쁘고를 막론하고 일종의 완고하고 완강한 습관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한 사람이 어떤 때는 불법에 대하여 환희심을 내고 수행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수행을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으로 생각하거나 편안한 레저활동 정도로 생각하여 마음을 안마하는 정도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간법에 떨어져서 여전히 세간법이 실제적이고 맞다고 확고하고 뿌리깊게 느낍니다. 일단 세간법에 초점을 맞추게되면 정법 위에 힘을 쓰는 것이 점점 줄어들게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상황은 긴장을 푸는 것입니다. 긴장을 풀고 느슨한 생활을 하게 되는 데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체적인 긴장을 풀기위해 산책을 하거나 태극권을 한다든지 요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마음의 긴장을 푸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선정을 닦아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참선을 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오히려 더 피곤해서 쉬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몇 년을 수행해도 전과 다름없이 똑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아래 암에 걸린 환자와 같이 암세포가 온 몸에 퍼졌다하더라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 세간법 위에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도 느끼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를 한 가지 들자면 우리가 평소에 하루종일 일을 하다가 저녁에 집에 와서는 꿈 속에서조차도 계속해서 일을하는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하루종일 수행을 했다하더라도 밤에 법과 수행에 관계된 꿈을 꾸는 일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행을 안마정도로만 생각하기때문이지요. 안마하는 일 따위는 밤에 꿈에서까지 나타나지는 않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집착은 수행의 진전을 막을 뿐만 아니라 조용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을 세간법 위에 얽어매게 됩니다. 이러한 맹목적인 집착이 우리로 하여금 세간법에 대해 일종에 수요를 느끼게 하여 갈수록 간절하게 필요로 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더욱 실질적이고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되게 만듭니다.

후에 우리는 망령된 마음으로 불법을 가지고 없어서는 안된다고 느끼는 것들을 얻고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점차 불법이 독약이 되어 수행까지 망치게되니 이것은 매우 안타깝고 애석한 일입니다.

어쩌면 제가 이 자리에서 애석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제가 세간팔법에 떨어졌다면 그것이 정말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텔레비전의 광고와 같습니다.

TV에서 텔런트가 오토바이를 타고 멋지게 공중으로 날아오릅니다. 그러나 사실상 오토바이가 날아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타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연출을 하는가하면 반드시 그 까닭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음에 광고를 볼때는 아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고가 매일 나오고 광고가 반복해서 나오고 끊임없이 나오면 우리는 훈습이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습관이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오토바이를 사고 싶게 되고 마음 속에 그 오토바이를 타고 멋지게 하늘을 나르던 그 텔런트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 영상에 이끌려서 어느새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로 믿게되어 생각을 바로 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습관화될수록 감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맹목적인 집착을 일으켜서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맹목적으로 가고 얻고자합니다.  

그래서 강포바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여법하게 불법을 수행하지 않으면 불법을 수행하는 것이 오히려 삼악도에 떨어지는 인(因)이 된다.”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중해야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주로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는 세간의 칭찬이나 비방등의 상황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세간법에 대한 완고하고도 완강한 강렬한 집착을 없애지 못한다면 우리의 수행에는 언제나 장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승을 수행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날 어느 불자께서 보리심에 대하여 물었는데 오늘은 바로 보리심을 발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리심을 발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구결도 많이 있습니다. 발보리심은 입으로만 발할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보리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구결은 많이 있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광행파(廣行派)에서 전해져 내려 온 인과칠결「因果七訣」과

두 번째는 심견파(深見派)의  자타교환법「自他交換法」입니다.

인과칠결「因果七訣」의 수행방법에는 두 가지 다른 전승이 있는데, 하나는 까담파 아띠샤존자님의 전승에서 내려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디공까규파의 전승에서 수행해 온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까담파 전승의 인과칠결「因果七訣」입니다.

  1. 어머니인 줄 아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인 줄 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일까요? 자신의 이생의 부모를 아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어머니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보리심을 발하고 난 후에 일체중생이 모두 마치 자신의 친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윤회를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윤회를 알수있는가 하면, 예를 들자면 금방 태어난 아기가 태어나면 그는 각지(覺知)하는 심식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한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은 전인(前因)을 의지해서 생겨납니다. 인(因)이 없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다른 부류의 인(因)을 연유해서 생겨나지도 않습니다. 조물주에 의해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이 심식은 연속적인 순인(順因)을 연유하여 같은 부류의 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적인 사유를 통해서 우리는 같은 부류의 전심식(前心識)과 각지(覺知)가 하나 하나가 줄이어서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존재함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심의 연속성을 통해서 윤회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유방법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심식이 같은 부류의 전인(前因)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거나 어떠한 다른 외적인 인연을 필요로 하지 않고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언제든지 수시로 생겨나거나 존재할 수 있거나 혹은 전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세상에 많은 정확하고도 딱 맞는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내생에 환생할 곳을 예언하고 정말로 그가말한대로 그곳에서 출생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전생의 일들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윤회는 이미 과학자들의 연구와 주의를 기울이는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비록 아직까지는 실제임을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완전히 윤회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윤회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야합니다. 만약 윤회가 정말로 존재하는데 우리가 무지해서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장차 큰 잘못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도를 바꾸어 윤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생과 내생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시작도 없이 끊임없이 연속되는 것입니다. 매번 생을 받을 때마다 우린 부모가 있었을 것입니다. 대부분 중생들은 부모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작도 없는 윤회계에서 세세생생을 더해가며 우리의 부모는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다른 방향에서 말하자면 세간에 부모를 우리는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낳아주신 부모요, 둘째는 길러주신 부모요, 셋째는 우리를 이익케하는 부모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속에서 말하는 부모는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입니다. 만약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면 길러주신 부모를 부모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중국에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가 낳아주신 은혜보다 더 크다는 말이 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이익을 주는 부모는 여러분들도 잘아실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많은 티베트라마들이 외국으로 불법을 널리 전하러 갈 때 많은 시주자들의 도움을 받게됩니다. 시간이 흐름에따라 그들은 시주자들을 부모처럼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익을 주는 부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꼭 낳아주신 부모만이 아니라 세속에서 우리를 돌보아주시는 분을 부모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넓게 보아서 서로 의지가 되고 직접 간접적으로 이익을 주는 친구들을 모두 부모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지금 가사를 입고 있는데 제가 태어나자마자 가사를 입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가사는 많은 중생들의 노력을 합하여 천을 만들고 재단하여 깁고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에 모든 물건은 다 그렇습니다.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여 이익케 한 연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도움이 되는 중생들을 모두 부모라 불러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긍정적인 면에서만 말한 것이라구요. 맞습니다. 확실히 이 세상에는 많은 부정적인 부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는 서로 해치고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강도질하고 하는 나쁜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이와 같이 부정적인 면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되며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를 말입니다.


두 번째는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낳아주신 부모든지, 이익을 주는 부모님이든지간에 모두 우리에게 셀 수 있거나, 셀 수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가장 중요한 은혜는 생명을 구해준 은혜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 것입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혜가 크지만 부모님의 은혜는 그 보다 더 큽니다. 왜냐하면 만약 부모님이 내가 태어나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때까지 어느 하루라도 나를 버려두고 상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곧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은혜가 매우 크다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하루만 우리를 돌보아준 것이 아니라 해마다 달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보살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우리의 생명을 백 번 천 번 구해주신 은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이라해서 모두가 그렇게 책임감있게 자식을 돌보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거북이는 알을 낳자마자 곧 떠나버립니다. 혹 어떤 부모들은 정말로 나쁜 부모도 있습니다. 여기서 은혜를 생각하라하는 것은 은혜로운 부모님에 대한 은혜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중생은 부모를 의지해야하니 모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생각할수록 우리는 은혜에 보답코저 하는 마음을 갖게되고 은혜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할수록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마음 또한 더욱 간절해집니다. 

네 번째는 자애로운 마음입니다.

  자애로운 마음이란 아껴주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한 가지 고사가 있습니다. 파추린포체에게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죽첸사원에서 무문관을 할 때에 어느 날 파추린포체께서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어머니를 생각하는가?” 이 제자는 출가했으니 세속에 모든 것을 버려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문득 대답하기를..“저는 스승님을 의지한 그 날부터 고향에 모든 것과 부모님 가족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파추린포체는 말씀하셨습니다. “자네의 그런 생각은 옳지 않네. 일체만법의 근본은 보리심인데 보리심을 일으키는 因은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라네. 그런데 자네말대로라면 자네는 만법의 근본이 매말라 버렸으니 정말 큰일이구만!” 하고 말씀하시고는 그 제자에게 어머니께서 어떻게 은혜로운가를 자세히 생각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몇 개월 동안은 오로지 어머니의 은덕에 대해서만 사유하는 수행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이 제자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서 파추린포체께 휴가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평소에  파추린포체께서는 공양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 파추린포체께서 돌아가는 길에 도중에 받은 모든 공양을 가지고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공양을 하고 열흘을 넘게 어머니 곁에 머물고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후에 이 제자가 어머니를 보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의 은덕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렸다.

파추린포체는 보시고 매우 기뻐하시면서...“여러분들 보십시오. 우리 아이가 만법의 근원을 세웠습니다.”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애심을 이야기할 때에 그것은 좋고 나쁜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의 자애심이 자신을 어쩔 수 없이 속박에 얽히게 하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가 보리심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어떤 조건들을 갖추어야 하는가 하면 마음 속에 항상 기쁘고 환희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자애심을 수행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평소에 우리가 싫어하던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우리는 큰일 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단지 작은 일처럼 느낍니다.

이러한 차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자비심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쁜 마음인 자애심을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면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것은 잘 지키고 더욱 더 증장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기뻐하는 마음으로 자비심을 가지고 불법을 수행한다면 우리의 보리심을 증장시키는데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섯째는 자비심입니다.


자비심의 의미는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고통스러운 수행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자비심으로 인해서 생기는 고통은 일반적인 고통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고통의 느낌은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그러나 자비심을 수행하여 일어나는 고통의 느낌은 고통을 소멸해 주고자 하는 힘이 생겨나게 합니다. 그래서 자비심으로 인해서 생기는 고통은 일반적인 고통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달리말해서 만약 어떤 사람이 자비심을 수행하여 더욱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것은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착오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하면 우리의 아집을 버리지 않는다면 자비를 수행할수록 아집은 도리어 더 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나의 모친이 병들었고 나의 아들이 아프다라고 말할 때 비록 자애심이 있지만 아집이 섞여있습니다. 아집은 모든 고통의 원인입니다. 본래 내가 없는 것인데 내가 있다고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근거로한 자비로운 행위로 해서 고통을 만든 것이지 자비로운 행을 수행하여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다 아집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여섯째는 增上意樂心입니다.


增上意樂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반드시 일체중생들을 도와서 離苦得樂하여 불도를 성취하겠다고 하는 굳건한 선심과 열성적인 마음을 갖추는 것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나 한 사람이 감당하여 일체중생들을 이익케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增上意樂心이란 굳건히 감당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일곱째는 發菩提心입니다.


  앞에서 말한 여섯가지 마음을 의지해서 보리심이라는 과를 일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보리심에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중생을 반연하여 타인을 이롭게하는 대비심이고 다른 하나는 佛果를 반연하는 대지혜입니다.

이상은 인과칠종차제(因果七種次第)로 보리심을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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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혜 ( 서울 ) 고맙습니다 2015-12-02 오후 3:47:18 덧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