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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마파 관음법문(1)

화이트타라
 

제 17 대 까르마파 관음법문


時間:2006年01月07日~2006年01月13日

장소:인도 보드가야 밍귤린포체 사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기억하기로 작년에도 이곳에서 우리가 함께 공부를 했던 것 같은데 올해도 또 여기에서 만나게되니 마치 이미 관례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대중이 함께 웃다)

이곳은 모여서 법문을 듣기에 좋은 환경이 못되고 모기도 아주 많습니다. 많은 외국인들은 수행환경을 아주 중요시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넓고 쾌적한 환경을 선호하는데 이곳은 그런 조건들을 갖추지 못해 사실상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에 이곳에서 여러분들에게 법을 설하게 된 것이 매우 기쁩니다. 왜냐하면 바로 얼마전까지만해도 일이 너무 많아서 전혀 쉴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이곳에서 여러분들과 법담을 나누는 것을 저는 엄숙한 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바쁜 가운데에 긴장을 풀고 쉬는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저에게 이렇게 쉴 수 있는 기회를 주신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법회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관세음보살과 상관있는 법문을 하려고 합니다.

원래 오늘 저녁에 관세음보살 관정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까지 저녁에 어떠한 관정도 준 적이 없습니다. 비록 해외에서는 여러분들의 생활패턴에 맞추어서 대부분 저녁에 강의를 하거나 관정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러한 습관이 없기 때문에   오늘도 관정을 할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법다운 차제로 말하자면 먼저 관세음보살에 대한 가르침을 먼저 받고 난 후에 관정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먼저 수행하는 방법을 알고 난후에 다시 관정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원만한 차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며칠간 저는 먼저 가르침을 드리고나서 하루 날을 잡아 여러분들께 관정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수행법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은 산스크리트어로 ‘아왈로끼데쉬에라’라고 발음하는 “관음”이라는 낱말의 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낱말을 통해서 우리는 관음법문에 대해 전체적으로 탐구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왈로끼데쉬에라’를 티베트어로는 ‘쩬레식’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눈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눈은 무엇을 가르키는가 하면 그것은 곧 ‘자비’입니다. 여기서는 자비를 곧 눈과 같은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럼 보아야하는 대상이 누구이겠습니까? 모든 자비의 대상은 고통에서 벗어나서 행복을 얻고자하는 중생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보는가 하면 보살의 광대한 대비원력으로 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관음’이라는 뜻은 항상 자비로운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관음의 의미는 내재적인 공덕을 의미하는 것이지 한 사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우리가 관음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 모든 도리를 알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세음보살을 하늘의 신처럼 생각합니다. 신으로서 어느 곳엔가 존재하면서 우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만약 외적으로 이러한 신이 있다고 해서 이러한 존재가 우리자신의 마음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불법을 수행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평정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이지 더욱 더 많은 망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평소에 우리 마음속엔 이미 많은 망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늘나라에서 온 신이 우리를 도와준다는 망념을 더 보태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해야만 자신의 마음에 이익을 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마음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관음이라는 명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로 공덕의 부분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한 인간적인 존재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관음의 공덕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관음이라고 칭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음이란 사실상 그 공덕과 특질, 효용등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 관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할까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생활하는 항상 가운데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인 문제로든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에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문제를 만나야만 되는가고 물어봅니다. 일반사람들이나 불교도들은 아마 그것은 과거의 업일거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혹은 마구니의 장애이거나 인위적인 상해이거나 자신의 잘못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엇비슷한 대답일 뿐입니다.

그럼 문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은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확실치 못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반복해서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하는데에는 마음과 합일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음의 밖에 존쟁하는 신이 아니라 관음과 자신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의사로서 비유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부처님께서 “해탈은 자신을 의지해야지 부처님이 손을 잡아서 해탈의 길까지 끌어올려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기만하면 관세음보살께서 곧 와서 구해주시고 우리를 도와서 해탈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다른 설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곧 의사와 약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병이 나면 의사를 보러 가야하는데 우리는 내가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고 병이 나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자세히 따져보면 의사가 약을 처방하여 치료를 통해서 병이 나은 것이지 의사가 병을 없애버린 것은 아닙니다. 이른 바 의사가 우리를 치료했다는 것은 의사가 여러 가지 치료방법과 내외용 약을 통해서 우리의 병이 회복되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관음수행을 성취하고 관세음보살의 과위를 증득한다는 것은 관세음보살의 자성인 대비심의 법문을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의 본질이 자비라면 자비수행만 하면 되지, 어째서 관세음보살의 탕카를 보면 팔이 네 개이거나 손이 천개이거나 남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의 관음상을 무엇때문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 사람들은 관세음보살의 내적인 의미를 직접 수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일반사람들은 오히려 외적인 상을 알고 인식하는 것에 예민하고 분명하고 비교적 쉽게 관상할 수 있습니다.  


일반사람들이  외적인 상을 관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쓸모가 있습니다. 중점은 외적인 힘을 가진 관세음보살을 존재에 대해서 신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신심은 아주 요긴하고 쓸모가 있습니다. 에를 들자면 환자가 의사와 약, 간호원과 치료법등 모두가 매우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처가 되시는 관세음보살의 존재에 대해 신심을 가진다면 그의 고통을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외적으로 존재하든 아니든 간에 확실히 관세음보살님이 구호자로 존재한다는 신심을 가지는 그 한 생각이 우리에게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적인 상을 인식하는 데에 익숙하고 분명히 관상할 수 있으므로 먼저 외상을 의지한 후에 다시 이 법을 수행하고 이 수행법으로 하여금 마음의 의지처가 되게 하여 점차로 내심의 힘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서 원만하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심오한 의지처이고 외적인 상을 가진 관세음보살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원인인 것입니다. (계속)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이 무엇인가하면 그것은 방금전에 말한 자비심인 것입니다. 평소에 자비심 수행에 대하여 말할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자비를 닦는다라고 하며 이 자비는 내가 그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앞에서 고통속에 있는 한 사람이 걸어온다고 할때 우리가 그에 대해서 자비를 관한다면 그러한 생각이 그에게 얼마만큼이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실상 우리는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영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자비심의 큰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분을 의지한 상대방은 찰나사이에도 마음속에 거대한 힘이 생겨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기 손으로 따귀를 때릴 때 그 힘이 아주 세서 매우 아프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볼을 손에다 가져다 덴다면 아프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내는 자비심은 바로 볼을 손에 가져다 대는 것과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아무런 느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누구에게 자비를 준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각도를 조금 바꾸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상 자비의 큰 힘은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럼 자비는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한 사람을 보았을 때 바같 경계의 인연으로 해서 우리에게 어떤 느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의 힘이 생겨나게 되는 근원은 사실상 상대방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과 잘 화합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우리가 수행해야할 대상은 자신이자 자신이 바로 타인인 것입니다. 대비심과 보리심으로 그 사람의 입장에서 타인의 느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체험으로 느끼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점에 대해서  잘 생각해본다면 훗날 자비심을 닦을 때는 달라질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자신에게 있는 한계가 있는 자비의 힘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정한 자비의 큰 힘을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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