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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서

제  목:  <티벳 死者의 書>

 

티벳 사람들에게는 <中間界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책>

으로 알려져 있음.


영역본명 : <THE TIBETAN BOOK OF THE DEAD>

영역자 : Robert A.F. Thurman

출판사 : BANTAM BOOKS

출판년도 : 1994년 1월.

판권소유 : 1994 by Robert A.F. Thurman


한글판 번역자 : 정 창 영


참고사항: 이 책은 <시공사>와 <Bantam Books>가 한국어판 출판 계약을 맺고, 현재 출판 준비 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상업용으로 복제 출판한다면 저작권에 관련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읽으신 다음 잘못된 부분이나 고쳤으면 좋을듯한 표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그러면 원고를 다듬어 더 좋은 번역본을 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참고로, 이번 작업을 위해 나름대로 세운 번역 원칙을 소개하겠습니다.

1. 문법적인 형식의 일치 보다는 내용의 동등성을 먼저 고려한다.

2. 번역의 기본 단위는 문장이 아니라 문단이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서는 한 문단 안에서 문장 순서의 재배열도 가능하다.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이런 방법은 삼간다.

3. 수동태 문장은 될 수 있는한 능동태 문장으로 바꾼다.

4. 불교에 익숙치 않은 독자들을 위해, 불교의 전문 용어는 가급적 서술적 표현으로 바꾸거나 함께 표기한다.

5. 원문의 관용어나 관용적 표현을 그대로 번역할 경우 본문이 지닌 뜻 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거나 오해를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있을 때는 우리말의 용법에 따라 적절히 표현을 바꾼다.





달라이 라마의 서문


서구 세계에 <티벳 死者의 書>로 알려진 <바르도 쉐돌>은 티벳 문화가 산출해 낸 아주 중요한 책 중에 하나다. 서구인들은 우리 티벳인을 대단히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본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땅 위에서 실제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체계적인 연구와 분석을 죽음을 신중하게 맞기 위한 실제적인 준비라고 여긴다. 다소 빠르고 늦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죽음의 과정을 고통 없이 지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등을 우리 티벳인들은 실제적인 문제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티벳 사람들은 죽음에 관한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인간적으로 잘 죽는 방법을 개발하고 습득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티벳 사람들은 <中間界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책>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티벳에서 이 책은 아주 일반적인 책이다. 이 책은 자신이나 가족 또는 친구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이 실려 있는 안내서이다. 티벳에는 죽음과 그 현상을 조사하고 탐구한 문헌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데, 이 책도 그 중에 하나다. 모든 불교 사회에서, 죽음이 실재한다는 사실이 덕스럽고 지성적으로 행동하도록 고무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죽음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병적인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두려움을 벗어버릴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삶을 건강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나의 옛친구 로버트 터만 교수가 이 중요한 책을 새롭게 번역했다니 기쁘기 그지없다. 그는 실력은 물론 헌신적인 마음까지 겸비한 학자다. 나는 그가 정확하고 풍부한 표현력으로, 서구 독자들을 위해 훌륭한 번역을 했다고 확신한다. 티벳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서구의 독자들도 이 책을 근본적으로 유용하고 깨달음을 빛을 비쳐 주는 책으로 인식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달라이 라마 친필 서명

1993. 1. 29.



영어판 번역자의  머  리  말


여러해 전이었다. 스승 게쉬 가왕 왕걀은 <티벳 사자의 서>라고 제목이 붙은 인도에서 출판된 책 한 권을 나에게 주었다. 그는 게쉬 가왕 왕걀 수도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무엇이든 한 번 들으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분명하게 말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자, 앞으로 이 책이 필요할거야!"라면서 그 책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당시로는 다른 일 때문에 그 책을 연구하는 데 몰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스승의 통찰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필요할 것이라 여기고 그 책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나는 카지 다와-삼둡과 에반스-벤츠가 공역한 <티벳 死者의 書>를 오랜 전부터 알고 있었다. <티벳 死者의 書>라는 책 이름은 에반스-벤츠가 번역한 영역본 제목에서 비롯되었는데, 사실 이 제목은 잘못 붙여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책을 읽었고, 친구나 친척이 죽으면 그 책을 이용하곤 했다.  그 책은 죽음 이후에 누구나 거쳐야만 되는 과정, 즉 죽는 순간부터 다시 태어나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또 프란체스카 프레맨틀과 초걋 뚜룽빠가 함께 옮긴 책도 읽어보았다. 뚜룽빠의 번역본에 대해서는 몇 해 전에 관련 학술지에 논평을 기고한 일도 있다. 그의 번역은 심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용어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문제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반스-벤츠의 번역보다는 낫다.

<티벳 死者의 書>는 8, 9세기 경에 위대한 스승 파드마 삼바바가 인도와 티벳의 불교도들을 위해 쓴 책이다. 파드마 삼바바는 후세대를 위해 그 책을 감추어 놓았는데, 14세기에 이르러 유명한 비장 문헌 발굴자인 까르마 링빠에 의해 발견되었다. 내용은 죽은 사람이 죽음과 재탄생 사이의 中間界(티벳어로 bar-do)에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죽은 사람은 대개 자신의 기대에 상응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기대하는 내용에 따라 신성한 우주를 묘사하고 있는 만다라에 나타나 있는 수많은 붓다와 보살과 신들 중에서 자애로운 모습의 붓다와 보살을 만나기도 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의 붓다와 보살을 만나기도 한다.

최근에 나는 쯔옹 까빠(1357-1419)가 화려하게 전개시킨 구야사마자Guhyasamaja 요가 탄트라 수행을 했다. 이 요가 탄트라는 내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비밀스럽게 전수되어 온 수행법으로써 그 체계와 설명이 현대의 과학기술 못지않게 정교하게 짜여 있다. 이 수행 체계는 마음과 자아, 삶과 죽음, 그리고 中間界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 특별한 요가 기법을 사용하는데 특히 죽음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죽음의 육체적인 측면, 심리적인 측면, 정상적인 죽음의 경험, 요가 수행 중에 체험하게 되는 죽음의 상태 등에 대한 매우 자세한 가르침이 이 요가 탄트라에 포함되어 있다. 나는 이 가르침이 매우 명쾌하고, 죽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생명과 삶과 건강에 대해서도 대단히 유용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 수행법을 배운 이후, 나 자신의 죽음이나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늘 이 요가 탄트라의 가르침에 따라 그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탄트라 요가를 배운 후에 <티벳 死者의 書>를 다시 보았을 때, 나에게는 딱 어울리는 책이 아니며, 현대적인 죽음의 체험과도 잘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티벳 死者의 書>는 요가 수행자가 아니라 평범한 일반 대중을 안내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이었다. 나는 스티븐 레빈Stephen Levine을 비롯하여 현대 미국인들에게 죽음과 관련된 요가를 소개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보았다. 그들은 <티벳 死者의 書>에 나오는 상징들이 현대인에게는 낯설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기조차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톨레도나 도피카에 사는 사람 중에서 <티벳 死者의 書>에 나오는 헤루까(영웅적인 남성의 원형을 상징하는 신)나 다끼니(활력이 넘치는 여신, 또는 천사)를 만났을 때 그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자애로운 모습의 붓다나 무시무시한 모습의 진노의 신을 만날 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오히려 그들에게는 유대교이든 기독교이든, 그들이 속해 있는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죽음의 길을 안내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는 <티벳 死者의 書> 보다는 요가 탄트라의 문헌에 나오는 죽음에 대한 묘사가 훨씬 더 체계적이고 명확하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 대중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처음 밴텀 북스BANTAM BOOKS에서 <티벳 死者의 書>를 현대적인 해설을 붙여 다시 번역하자고 제의했을 때, 내가 과연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밴텀 북스의 제안을 거절하는 쪽으로 마음이 거의 굳어졌을 때, 스승의 말이 기억에 떠올랐다. 나는 집에 와서 에반스-벤츠와 뚜룽빠의 번역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스승이 준 티벳어 판도 대충 훑어보았다. 그 결과 죽음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는 에반스-벤츠나 뚜룽빠의 번역서가 제공하는 것 보다 더 쉽고 명확하고 안내서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먼저 <티벳 死者의 書>라는 제목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이름은 副題로 삼았으면 좋겠다. 티벳어 판에는 "死者의 書"라고 번역할 수 있는 표현이 없다. 티벳어 판의 原題인 Bardo thos grol에서 bardo는 단순히 "중간계(中間界)"라는 뜻이다. 中間界란 일반적으로 죽음과 재탄생 사이의 기간과 과정을 가리킨다. 티벳 사람들은 中間界를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분류한다. 탄생과 죽음 사이의 中間界(이승 중간계), 잠과 깨어 있음 사이의 中間界(꿈 중간계), 깨어 있음과 초월 사이의 中間界(명상 중간계), 그리고 죽음 직후의 中間界(죽음 중간계), 죽음과 재탄생 사이의 中間界(저승 중간계), 태어나기 직전과 태어나는 순간 사이의 中間界(탄생 중간계).

티벳어로 토스 빠Thos pa는 듣고 배움으로 개발되는 지혜나 관조를 통해 개발되는 지혜, 혹은 명상을 통해 개발되는 지혜 중에 하나를 가리킨다. 이 책의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thos grol이라는 말은 이 책이 오랜 시간의 관조나 명상이 아니라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리하여 中間界에 관한 이해가 깊고 명확해짐으로써 자연스럽게 해탈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티벳 사람들은 흔히 이 책을 <中間界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책>(Bardo thos grol chen mo)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책은 <자애로운 모습과 무서운 모습의 붓다와 보살들에 대한 명상을 통해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근본 가르침>이라는 방대한 문헌의 일부이다. (앞으로는 <티벳 死者의 書>를 포함하고 있는 <자애로운 모습과 무서운 모습의 붓다와 보살들에 대한 명상을 통해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근본 가르침>이라는 문헌 제목을 <명상을 통한 해탈>이라고 줄여서 표기하겠다.)

나는 티벳어 판의 제목에 깊이 고무되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육체 주위를 떠돌며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알아듣기 쉽도록 쉬운 말로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다. 동시에 방대한 요가 탄트라의 문헌에서 수집한 죽음의 과정에 대한 개념과 설명을 해설로 붙이기로 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이 책이다. 이 작업을 하는 중에 신뢰할 만한 몇몇 티벳어 판 본문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스승이 나에게 주었던, 인도에서 출판된 책 보다 더 믿을 만했다. 그것을 통해 애매했던 부분이 많이 밝혀지기도 했다. 또 앞서 언급한 <명상을 통한 해탈>이라는 방대한 문헌에서 <티벳 死者의 書>의 가르침을 보다 더 명확하게 확인해 주는 몇 개의 章을 번역해서 부록으로 실었다. 아직 번역된 적이 없는 부분들이다. 이번 작업이 나에게는 매혹적이었으며 귀중한 체험이 되었다. 스승께 다시 한 번 고마움의 인사를 드리며, 독자 여러분에게도 이 책이 유용하게 되길 바란다.


 1992년 8월, 뉴욕의 '간덴 데끼 링'에서

로버트 A. F. 터만

 附記 : 일반적인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각주를 다는 것을 피했다. 필요한 정보는 그 페이지에서 다 읽을 수 있도록, 해설을 본문 단락 사이에 끼워 넣었다. 낯선 용어와 개념들은 책 뒤에 별도로 어휘 사전을 만들어 붙였다. 거기에서는 특별한 개념이나 중요한 이름, 장소, 물건 등에 관한 간단한 해설을 실었다.

□ 제 1 장 □

   배   경


1. 티벳의 역사


티벳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뵈Bo라고 부르든지 아니면 카와잔 뵈Khawajen Bo라고 한다. "눈 덮인 땅"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역사 기록은 2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제국,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 중국의 周 왕조 말기와 비슷한 시기이다. 티벳 역사 초기 8세기 동안은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왕조가 통치했다. 종교적으로는 무당들이 주도하는 占, 마술, 희생 제사가 널리 행해지는 精靈信仰(애니미즘)의 시대였다. 정치적 세력은 王家에 집중되어 있었고, 백성들은 王族을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첫 번째 7명의 왕은 허공에 걸린 마법의 사다리를 타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해 내려 왔으며, 죽을 때가 되면 다시 그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나 궁정 내부에 모종의 갈등이 생기자, 8번째 왕이 사다리가 매달린 밧줄을 끊어 버렸다. 그때부터 티벳 왕들은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아내와 부장물과 함께 거대한 무덤 속에 묻혔다.

초기 왕조는 동쪽에서 오늘날의 쩨땅 근처인 짱추 방면으로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얄룽 계곡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주변 종족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넓혀 나갔다. 그리하여 군사력을 기반으로 봉건제도가 확립되었다. 티벳 왕조에 병합된 각 종족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고, 언어와 종교적인 경향도 비슷했기 때문에 쉽게 융합되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은 넓이 약 100만 평방 마일, 평균 높이 약 4000미터에 달하는 티벳 고원이었다. 그렇게 높은 지역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도 타고나야 한다. 그곳 토박이의 후손으로 태어나기 전에는 적응하기가 힘들다. 티벳 말은 그 주변 국가인 고원 아래의 몽골, 인도, 중국, 터키 어 등과 상당히 다른 티벳-버마 語族에 속한다. 고대의 티벳 사람들은 자연계의 사물이나 현상, 특히 산과 하늘을 신성하게 여겼다. 그래서 땅 아래, 땅 위, 그리고 하늘에 있는 수많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드리고 점을 치는 종교 행위가 성행했다.

고원 산악 지대의 문화는 평지의 문화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영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고원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수명이 짧다. 그리고 장관을 이루고 있는 주변 산들은 자연스럽게 명상적인 분위기로 이끈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영적인 분위기를 실제 생활에 연결시켰다. 대부분의 샤머니즘이 그러하듯이, 고대 티벳의 샤머니즘도 현실적인 성공, 전쟁에서의 승리, 건강, 부, 자손의 번창 등을 구했다. 특히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던 시기에는, 용한 무당이 왕권 수호를 비는 굿판을 벌이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었다. 그에게는 절대 권력이 주어졌다. 무당은 하늘에서 왕의 후손이 내려오기를 기원하는 굿이나, 왕이 내려온 것을 축하하고 왕국의 안녕을 위해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신들의 도움을 청하는 굿을 주도했다. 옛 왕이 물러간 다음 새 왕을 등극시키는 것도 무당의 일이었다. 왕권이 바뀌는 공백 기간에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알기 위해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서 자문을 받아 오기도 했다. 무당은 죽은 자들 세계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 혼돈의 힘이 산 자들의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도 했다.

티벳 왕조 문화는 여러 세기 동안 번성했다. 낮은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들은 높은 고원 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티벳을,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침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대 티벳 문화는 외부의 간섭 없이 발전할 수 있었다. 티벳 종족들 간의 영토 분쟁은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A.D. 6세기에는 고원 지대 전체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통일로 인해 강력해진 티벳 제국은 고원 아래 지역을 사방으로 점령해 나갔다. 그리하여 중국, 몽골, 터키, 인도 등에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군사적인 대제국 건설은 7세기 초, 송쩬 감뽀 황제 시대에 마무리되었다. 무력을 기반으로 한 통일 제국은 그 결속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또한 티벳 사람들은 고원 아래 평지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일에도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송쩬 감뽀는 윤리와 도덕에 토대를 둔, 보다 평화적이고 영적인 방향으로 티벳 문화의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인도의 팔라 왕조와 후-굽타 왕조, 실크로드 주변에 산재한 중앙 아시아의 여러 도시국가, 그리고 중국 唐나라의 정신적인 등뼈가 된 대승불교를 받아 들여 티벳 문화를 체계적으로 개혁해 나가기 시작했다.

송쩬 감뽀는 학자들을 인도로 보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게 했다. 그런 다음 산스크리트어를 기반으로 티벳 문자를 만들어, 여러 가지 불교 문헌을 티벳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 아홉 나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그 중에는 네팔과 唐나라의 공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 수많은 불경과 불교 예술품을 티벳으로 끌어 들였다. 또한 새로운 도읍지 랏사에 조캉과 라모체라는 왕궁 사원을 건립하여, 온 나라의 종교적 중심지로 삼았다.

이후 약 250년 동안, 티벳의 왕들을 송쩬 감뽀의 뒤를 이어 문화적인 개혁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경전 번역, 연구 기관 설립, 사원 건축, 교육 사업 전개 등이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이 문화적인 개혁은 치송 데쩬 시대인 79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치송 데쩬 황제는 인도에서 온 성자 파드마 삼바바와 철학자 샨타라크쉬타의 도움을 받아 삼예에 티벳 불교 최초의 僧院을 세웠다. 샨타라크쉬타가 그 승원의 승원장이 되었다. 이때 인도의 불교 대학 제도와 커리큘럼이 함께 소개되었다. 치송 데쩬은 또한 아시아 전역에서 다방면의 학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 학술 도입 사업은 이후 60년 동안 계속되었다. 불교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수학, 약물학, 시, 예술, 정치학, 조각 등 다방면의 학문이 이때 발전했다. 페르시아, 인도, 위굴, 몽골, 중국의 唐나라, 그리고 실크로드 주변의 여러 도시국가에서 학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가르침을 비교하고 조화시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티벳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갖기에 이르렀다. 한 가지 예로, 830년 대에는 세계 각처에서 수백 명을 학자를 초청한 다음 그들에게 10년 동안 인도, 중국, 페르시아, 몽골, 위굴의 의학 체계를 비교하고 연구하도록 했다. 그 결과로 건강에 관련된 불교의 영적인 가르침에 더하여 심리학, 해부학, 신경생리학, 외과 의학, 식물학, 화학, 영양학 등이 종합된 티벳 특유의 의학 체계가 성립되었다.

삼예가 종교적인 중심지가 된 이후, 치송 데쩬의 후계자들은 삶 전체를 불교화 할 것을 강요했다. 강요의 도가 지나쳤던 까닭에 王家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암살과 반란이 계속되면서 통일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급기야는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불교 탄압도 있었다. 하지만 1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불교의 가르침과 제도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지방 귀족들의 보호 아래 백성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후 3세기 동안, 백성들은 점점 더 깊이 불교에 빠져들었다. 불교적인 교육 제도가 재확립되고, 전국 방방곡곡에 승원이 세워졌다. 방대한 불경 번역 작업도 이 시기에 완료되었고, 티벳 고유의 불교 문헌들도 엄청난 양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로는 티벳 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통일 왕조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군사적 패권주의가 나타날 가능성 자체가 아예 없어졌다. 백성들의 마음 속에 불교의 비폭력에 대한 가르침이 깊이 뿌리 내렸기 때문이다. 지방의 귀족들이 자기 지역을 다스렸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급속히 확장하던 승원 세력에 사회적.정치적 관할권을 점점 더 많이 넘겨주게 되었다.

13세기와 14세기에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일대를 통일했다. 그때 티벳도 대몽골 제국의 관할권 안에 들어갔다. 하지만 티벳 사람들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티벳은 이미 13개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지역은 지방 귀족과 승원이 협력하여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티벳 불교의 사키야 파와 콘 가문에게 티벳의 통치권을 주었다. 그러나 사키야 파는 정치적인 세력보다는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았다. 14세기가 끝나 갈 즈음, 몽골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자 토착 팍모드루 왕조가 일어나 티벳 통치를 자임했다. 쯔옹 까빠가 주도한 종교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것은 그 즈음이다.

쯔옹 까빠는 1409년 수도 랏사에서 범민족적인 불교 축제를 열어, 민족 전체가 불교 수행에 헌신하는 새 시대의 막을 열었다. 쯔옹 까빠는 그 축제에서 붓다의 영원한 현존에 대한 민족적인 깨달음을 상징하는 행위로, 화려하게 장식된 조보 린포체(아띠샤)의 불상을 조캉 사원에 봉안했다. 음력 정월 초하루가 되면 온 백성이 모여 2주 동안 종교적인 축제를 벌이는 전통은 그 때부터 생긴 것이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일상적인 모든 일이 중지되고, 승원장들이 시민의 모든 일을 책임진다. 이 축제는 1960년 티벳 정부가 인도로 망명할 때까지 티벳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연중 행사로 치러졌다.

쯔옹 까빠가 불어 일으킨 개혁의 바람은 15세기와 16세기에 이르러 꽃이 피었다. 티벳 사람들의 영적, 사회적, 현실적인 삶 전체가 변화되었다. 각 지역에서 승원의 영향력이 커졌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고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는 남녀 구도자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점점 더 평화로운 쪽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군인이 점점 줄어들어 지방 귀족을 호위하는 몇 사람 정도만 남게 되었다. 쯔옹 까빠가 창시한 겔룩파는 젊은 제자 겐둔 드룹빠(제 1대 달라이 라마)가 이끌어 나갔다.

겐둔 드룹빠는 오랜 세월 동안 영감이 넘치는 가르침을 베풀고 글도 많이 남겼다. 여기저기 사원도 많이 건립했다. 그가 죽은 다음, 태어나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자기가 겐둔 드룹빠라고 자칭하는 어린 아이가 나타났다. 그 아이는 겐둔 드룹빠가 살던 동네와는 다른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여러 가지 시험을 거치고 상서로운 징조들을 종합한 결과 위대한 스승 겐둔 드룹빠의 還生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충분한 교육을 받은 다음, 겐둔 갓초(제 2대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으로 겔룩파를 이끄는 영적인 스승이 되었다. 그의 다음 번 還生도 비슷한 시험과 징조를 통해 승인 받아, 소남 갓초(제 3대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을 갖고 16세기 어간에 겔룩파를 이끌었다.

1573년 소남 갓초가 몽골을 방문했을 때, 몽골 황제 알탄 칸은 그에게 '달라이 라마'(바다와 같은 스승)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헌사 했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는 이렇게 소남 갓초가 처음 들은 것이지만, 티벳 사람들은 그를 그의 앞선 두 前生의 뒤를 이은 제 3대 달라이 라마로 여긴다.

소남 갓초와 그의 뒤를 이은 제 4대 달라이 라마 욘뗀 갓초 시대에, 세속의 통치자들은 지속적으로 확산되던 종교 부흥 운동을 못마땅히 여겼다. 너나 할 것 없이 승려가 되려고 나섰고,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사원을 건립하고 유지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티벳은 동시대의 북유럽이나 중국 또는 일본처럼 군부 독재자가 나타나 종교 중심의 삶을 산산 조각내 버리느냐, 아니면 세속의 지도자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영적인 진화의 길을 받아들일 것이냐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조캉 대승원이 건립된 지 거의 천 년이 지난 1642년, 제 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갓초(1617-1682)는 간덴 宮을 건립하고 티벳의 왕으로 즉위했다. 티벳 사람들은 그 이후 오늘날까지, 僧王 달라이 라마가 통치하는 간덴 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여긴다. 티벳 사람들이 '위대한 5대'라고 부르는 이 첫 번째 僧王은, 티벳의 사회적 특성에 적합한 독특한 정치 제도를 만들었다. 그는 승원과 비폭력이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으며, 사실상 귀족 집단을 없애 버렸다. 그들이 세습적으로 물려 오던 토지를 몰수하고, 간덴 정부 아래서 일한 만큼 받는 보수로 살아가게 했다. 귀족들은 더 이상 私兵을 거느릴 수가 없었다. 봉건 영주로써 소작 농민들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흔들던 그 당당하던 세력도 완전히 날개가 꺾였다. 당시 티벳의 소작 농민들은 중세 유럽이나 러시아의 농노들처럼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티벳은 만주(淸나라)가 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覇者로 등장했을 때, 그들과 우호 관계를 맺어 국가적인 독립과 동질성 유지를 보장받았다. 1644년, 한반도 북쪽 산악 지대에서 발원한 퉁구스 족(淸나라)이 明나라가 멸망한 틈을 타 중국 내지로 진출한 다음, 주변 다른 나라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그때 淸나라의 가장 강력한 적수로 떠오른 존재는 몽골이었는데, 달라이 라마는 몽골이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몽골에서 권위 있는 존재였다. 이런 사정 때문에 淸나라 황제의 눈에는 티벳이 도움이 될 만한 동맹 상대국으로 보였다. 그래서 1651년 淸나라 황제 順治帝(世祖)는 '위대한 5대' 달라이 라마와 동맹을 맺고 티벳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었다.

淸나라는 달라이 라마의 티벳 통치권을 인정해 주었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알고 있던 온 세상의 영적이 지도자로 떠받들었다. 달라이 라마는 淸나라 황제를 만주와 중국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해 주었다. 또 불교의 진리와 수행자와 사원을 보호해 주는 국제적인 수호자로 여겼다. 달라이 라마는 몽골의 불교를 육성시켜 불교 사회로 만들고, 淸나라 황제는 무장을 해제한 불교 사회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약속이 티벳과 淸이 맺은 동맹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티벳이 거칠기로 소문난 무력 국가인 몽골을 평화스러운 나라로 만든 것은 주목할 만한 사회 변혁의 한 예이다.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다. 그러나 천 년 동안 티벳 스스로가 경험한 변화에 비하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2. 티벳 : 영적인 문명


승원은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최근 3세기 동안, 티벳 사람들의 삶의 중심 역할을 했다. 교육, 문학, 철학, 명상 수행, 제의와 축제, 예술의 발달 등이 모두 사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영적인 스승들은 최고의 존경을 받았으며, 자아를 계발하는 영적인 과학인 요가 탄트라 수행을 통해 완전한 붓다가 될 사람들로 인정을 받았다. 그들은 서양의 우주 비행사들과 같은 용기로 내면 세계를 탐색하는 모험가들이었다. 사실 '정신세계 비행사'(psychon\aut)라는 말을 만들어 그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는 게 좋을 듯도 싶다.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던 사회가 그렇게도 발견하기를 열망하던 내면 세계의 깊은 미개척지를 향해, 삶과 죽음의 바다를 건너 개인적으로 배를 저어 나갔다.

물질 세계의 정복을 목표로 하는 서구 문명의 마지막 미개척지는 우주 공간이다. 그러므로 서양에서는 미지의 우주 공간을 여행하는 우주 비행사가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티벳 사람들은 내면의 우주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죽음과 중간계, 그리고 환희가 넘치는 無我의 세계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그들은 의식을 가진 채 죽음이라는 해체 과정을 통과하는 능력, 마음을 육체에서 분리하여 마음으로 신비한 몸을 만들어 내는 능력, 그리고 그 몸으로 인간의 의식이라는 다른 우주를 여행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티벳에서는 이런 능력을 갖춘 '정신세계 비행사'들이 영웅이다. 달라이 라마와 수천을 헤아리는 환생한 라마(이들은 '뛸꾸'라고 하는데 '붓다의 化身'이라는 뜻이다)들은 모두 티벳의 영웅들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죽음과 중간계와 환생 과정을 마스터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티벳 사람들과 다른 모든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자비로운 마음에서, 스스로 환생을 결정한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근대 티벳 문명은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문명이다. 죽는 방법과 죽음에 대한 과학은 티벳 문명과 같은 문명이 아니고서는 만들어 내지 못한다. 현대 티벳 문명의 정신적인 특성은 '내적인 현대성'이다. 현대 서구 문명의 특성인 '외적인 현대성'과는 사뭇 대조가 된다. 서구 문명의 현대성은 보통 근대 이전의 '전통적'인 특성과 대조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개인주의, 개방성, 유연한 주체성, 끊임없는 사색, 이성과 합리성 등이 서구에서 말하는 현대의 특성이다. 이러한 서구의 현대적인 특성들은,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심리적이고 정신적 것까지 포함하여-을 물질적인 量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 서구 문명은 '외향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나 티벳 문명은 모든 것이 영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의식 영역에서는 모든 것 사이에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불교적인 생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티벳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영적인 것은 어떤 경우에도 물질적인 量으로 환산할 수 없으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 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으로 활동하는 에너지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티벳 문명의 특성은 자연히 '내향성'을 띠게 되었다. 서구 사회의 '현대화'라는 말과 티벳 문명의 '현대화'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이렇게 다르다. 서구 사회는 현대화될수록 외부의 물질 세계를 향해 밖으로 나갔고, 티벳은 현대화될수록 마음을 향해 안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차이는 그 구성원들의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미국의 국가적인 목표는 물질적으로 보다 더 번영하는 데 있는 반면, 티벳의 국가적인 목표는 영적으로 보다 더 풍요로와 지는 데 있다. 영적인 풍요는 지혜를 얼마나 깊게 갈고 닦느냐, 또 사랑의 힘을 얼마나 널리 펼치느냐에 달려 있다. 티벳의 불교도들은 외부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를 거듭하며 성숙하는' 내면 세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얼마나 더 성숙해야 되고, 주위 환경을 얼마나 더 좋게 바꾸어야 하는 지에 대해 한계를 두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나 완전한 지혜와 자비의 존재인 붓다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또한 이 세상이 아무도 고통받는 이가 없고 서로가 서로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완전한 붓다의 땅(佛國土)으로 바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죽음에 관련된 가르침은 티벳 사람들이 내면 세계를 탐색한 결과로 나온 것들 중에 하나다. 밖으로 치달리고 있는 서구인들의 마음 속에서는 죽음이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그들은 이런 생각을 고리타분하게 여긴다. 물질적인 사고 습관은 그들의 마음을 물질에 붙들어 매 놓고, 영혼에 대한 문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애써 죽음 이후의 삶을 무시하면서, 죽음을 단지 뇌파 측정기에 직선이 나타나는 육체적인 현상 정도로 여긴다. 그들은 죽음 이후의 마음과 존재의 상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과학적인 탐구라는 것은, 육체적인 존재로 살아 있는 동안,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量을 기계의 힘을 빌려 측정하는 데에 국한되어 있다. 그들은 또 외적인 세계에서 가장 멀고 깊은 곳을 향해 탐험의 닻을 올렸다. 은하계를 향해 끝없이 먼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세포와 미립자와 원자의 세계를 탐색하기 위해 끝없이 깊은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내면 세계에 관심이 있는 티벳 사람들에게는 물질 세계는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깨어 있음, 인과 관계, 상관성, 감각과 인식, 미묘한 이미지의 영역, 빛, 무아경, 脫身, 꿈, 죽음, 초월 등과 같은 내적인 체험에 쏠려 있다. 티벳 사람들은 신비한 내면 세계가 주관적인 체험과 객관적인 사건 일체를 조절하고 통제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분석적인 통찰과 매 순간 집중하여 깨어 있는 명상을 통해 내면 세계를 탐색하고자 한다.

내면 세계를 탐색하기 위해 그들은 꿈을 조절하고,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意識下意識 세계를 여행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또 미묘한 의식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육체와 관련된 '나'라고 하는 주관적인 느낌과 자신을 분리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마치 꿈처럼 느껴지는 죽음과 태어남 사이의 중간계의 체험을 포함하여, 前生의 체험을 기억해 내기 위해 집중력과 기억을 확장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3. 티벳의 곤경


물질적인 진보에 대해 거부감이 있긴 했지만, 현대로 들어오면서 티벳은 어느 정도 근대화 과정을 겪었다. 티벳 사회는 내적인 발전에 대한 개인의 잠재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구조로 짜여 있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궁핍했지만 티벳 자체로서는 큰 문제가 없었고, 내부적인 갈등이나 외부와의 전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아직 완전한 붓다의 땅은 아니었다. 현대적인 정치 지리학 입장에서 보면, 20세기 상황에서 티벳은 매우 상처받기 쉬운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비무장 상태로 오랜 세월을 지냈기 때문에 갑자기 밀려 닥치는 영국과 중국의 군대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지리적으로 티벳 자체가 다른 나라들로부터 고립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세계 정세에 너무 어두웠고, 다른 나라들도 티벳을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티벳이 불교 국이라는 정도였다. 티벳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고 나라는 영국과 중국 정도 였는데, 그나마도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그 밖의 다른 나라들은 티벳을 약탈 대상 정도로 여겼다. 영국은 티벳 정부와 통상 협정을 맺으면서 티벳을 독립국으로 대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국이 티벳을 장악하려고 할 때 그것을 묵인해 주었다. 결국 영국은 티벳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내고 중국 세력이 들어서는 것을 도와준 셈인데, 그 대가로 무역 거점인 홍콩의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은 자기들이 티벳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티벳 사람들은 중국과 동질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중국 사람들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티벳이 마치 자기들 소유인 양 주인 행세를 했다. 그들은 티벳을 '서쪽 창고'(西藏)라고 부르며, 옛날부터 자기들 나라의 일부인 것처럼 선전했다. 1949년 모택동 정부는 티벳을 점령한 후, 자기들의 고국인 티벳 지역에 사는 동족을 외국 사람의 손에서 '해방'시켰다고 세계 앞에 선전했다. (그 당시 티벳에는 유럽 사람 6명이 있었다.) 그러나 티벳 사람들에게는 중국이 외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해방'되는 것에 저항했다. 모택동의 붉은 군대는 티벳을 완전히 점령했다. 그러나 티벳 사람들의 저항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은 붉은 군대의 잔인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티벳의 소유권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때 100만 명이 넘는 티벳 사람이 죽었으며, 불교 문화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티벳을 중국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중국 정부는 티벳의 언어와 불교 문화를 탄압했다. 티벳의 민족적인 동질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파괴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벳 사람을 중국인으로 개조하려는 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기미를 보이자,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 14대 달라이 라마는 백성들을 이끌고 티벳을 탈출하여, 인도 정부의 도움을 받아 망명 정부를 세웠다. 이제 지금 1990년 대에는, 세계 각국이 티벳을 올바로 이해하고, 600만을 헤아리는 티벳 유랑민의 생존권에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기대해 본다.


4. 간추린 불교


불교란 무엇인가? <티벳 死者의 書>는 독자들이 '불교도'라고 가정하고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펼친다. 그러나 '불교도'라는 말이 문자적인 의미의 불교도만 가리킨다면, <티벳 死者의 書>는 그들에게만 필요한 책이 되리라. 그렇다면 불교도가 아닌 일반인들을 위해서는 굳이 번역할 필요도 없다. 또 서구인들이 <티벳 死者의 書>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티벳 死者의 書>는 어떤 특정한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점에서 '종교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불교를 종교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도 믿음을 토대로 성립된 체계라는 사실 하나 뿐이다. 하여튼 <티벳 死者의 書>는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꼭 불교도가 아니라도 종교적인 입장에서 이 책에 관심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불교는 약 2500년 전에 활동한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다. 인도에서 생겼지만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나 문화를 개혁한 것도 아니고 또 그런 것을 기반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신적인 계시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석가모니는 당시 인도 사람들이 믿고 있던 전능한 창조자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서구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느님과 같은 신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서구인들의 눈에는 그가 (전능한 존재는 아니지만, 그는 초인간적인 존재들을 '신들'이라고 부르면 그들의 존재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자로 보이기도 한다.

석가모니 붓다는 일반 대중들을 위해서는 실천적인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그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종교적인 믿음이나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적인 믿음을 의심해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잘못된 것임이 판명되는 믿음이나 신앙은 거부할 것을 요구했다. 진리를 탐구하는 그의 태도 역시 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실재와 본성에 관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노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의 '붓다'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그는 왕자로 태어나 왕궁에서 교육받았다. 그러나 출가하여 6년 동안 요가 수행을 했고, 그에 만족하지 못하여 실재의 본질을 파고드는 깊은 명상에 들어갔다. 그는 인간의 마음은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영웅적인 수행을 했다.

그는 35세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45년 동안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르침을 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그가 살아 있을 당시 이미 높은 수준의 깨달음에 도달한 제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제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그 가르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점차 거의 모든 아시아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붓다의 가르침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전파되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회적.지적 운동 차원에서 확산되었다는 점도 꼭 기억해야 한다.

붓다는 자신이 전하는 진리나 가르침을 일컫는 말로 '다르마'Dharma라는 산스크리트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가 사용한 '다르마'라는 말에는 새로운 의미가 덧붙어 있었다. '다르마'는 '붙잡다', '유지하다', '지탱하다'를 뜻하는 동사 어근 dhr에서 파생된 말로써 유지하고 지탱하는 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중요한 뜻이 있다.

1) 다르마는 특별한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나 현상 또는 특별한 성격 그 자체를 가리킬 수 있다. 2) 다르마는 인간의 행동을 어떤 특정한 형태로 유지시키는 관습이나 의무나 법률을 가리킬 수 있다. 3) 다르마는 특별한 믿음이나 의식을 유지한다는 관점에서, 종교를 가리킬 수도 있다.  하지만 붓다가 발견한 진리의 핵심은 모든 존재의 현재 상태는 궁극적으로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그는 누구나 자신의 진정한 본성은 고통과 구속과 무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런 깨달음은 일상의 습관적인 고통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고, 아무 것도 '붙잡지' 않으며(집착하지 않으며), '매여' 있던 습관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이런 이유로 붓다가 사용한 '다르마'라는 말은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뜻이 되었다.

더 나아가 '다르마'는 붓다의 가르침,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길, 수행의 힘, 붓다의 가르침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 그리고 진리가 가져다주는 자유인 니르바나 등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의 폭이 확장되었다. 붓다의 가르침으로서의 다르마는 크게 두 가지, 문헌 다르마와 수행 다르마로 나누어진다. 문헌 다르마는 經(붓다 자신이 설한 가르침과 교리).律(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論(진리에 대한 논리적인 탐구) 三藏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행 다르마는 戒(윤리적 실천).定(명상 수행).慧(지혜의 연마) 三學으로 구분된다.


<도표 1. 다르마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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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經.가르침과 교리

          +----- 문헌 다르마 --+-- 律.수행자의 계율

          |                      +-- 論논리적인 탐구

다르마 --+

          |                      +-- 戒.윤리적 실천

          +------수행 다르마 --+-- 定.명상 수행

                                +-- 慧.지혜의 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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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45년 동안 인도 전역에 다르마를 전파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제자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그 공동체를 '샹가'Shangha[僧家]- 이 말은 원래 단순히 공동체를 일컫는 용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남녀 출가자들인 비구와 비구니들로 조직된 수행자 제도가 자연스럽게 생겼다. 붓다 이전에는 떠돌아다니는 고행자나 수도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붓다는 도시 근교에 붙박이 사원 공동체를 이곳 저곳 설립했다.

사원 공동체는 불교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사원 공동체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 불교에서는 붓다[佛/스승]와 다르마[法/가르침]와 샹가[僧/공동체]를 3가지 보물[트리라트나/三寶]이라고 한다. 즉 무지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3가지가 가장 귀중하다는 뜻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이 3가지 보물에 몸과 마음을 맡긴 사람을 불교도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불교도란 붓다처럼 살고자 애쓰고, 다르마를 깨닫고자 정진하며, 그런 소원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결국 붓다는 역사적으로 세 차원 즉 사회.정치적 차원, 종교.윤리적 차원, 철학.과학적 차원에서 발전한 일종의 교육 운동을 창시한 셈이다.  이 세 차원의 운동은, 만물은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포함하여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붓다 자신의 깨달음을 토대로 전개되었다. 붓다는 인간의 이성을 평가 절하하거나, 비이성적인 것을 정당화하려는 독단, 그리고 권위로 억누르려는 태도를 비판했다. 그는 일체의 선입관을 배제한 상태에서, 종교적인 교리에 구애받지 않는 체험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진리를 깨달으면 삶의 모습이 완전히 변하고 초월적인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과 삶의 본성에 관한 다양한 이론은 붓다 시대에도 있었다. 정교한 유신론적 논리로 무장한, 실체로서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이론부터 현대의 물질적 허무주의와 아주 흡사한 이론까지 실로 다양한 이론이 있었다. 그런 중에 붓다는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영혼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한다는 견해를 거부했으며, 이것은 그의 無我(아나트마anatma)에 대한 가르침을 요체가 되었다.

붓다는 '나'라고 하는 견고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로 말미암아 삶의 고통이 생긴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나타나는 '나'라고 하는 현상은 결코 부인한 적이 없다. 그는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변화하며 흘러가는 '영혼의 흐름'의 '연속성'을 인정했다. 그는 영혼을 포함한 모든 것을, 되는대로 나타나는 물질적인 부대 현상 정도로 여기는 동시대의 허무주의를 단호히 배격했다. 그는 (절대적인 실체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상처받기 쉽고, 스스로의 삶에 책임이 있으며, 성숙할 가능성이 있는 '상대적인 현상으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인정했다. 자아의 상대성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각각의 모든 생명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새로운 깨달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불교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움과 동시에 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 전체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만들었다.

붓다 이후 약 400년 동안 인도에 널리 퍼진, 깨달음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대승불교 경전에는 붓다가 3가지 몸[三身]을 가진 우주적인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붓다의 세 몸 중에서 첫째는 붓다의 완전한 지혜를 상징하는 진리의 몸[法身]이다. 진리의 몸은 궁극적인 실재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은 사람은 이 진리의 몸 안에서 온 우주와 자신이 하나임을 체험한다. 다음에는 붓다의 지극한 자비를 상징하는 두 몸이 있다.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순수한 기쁨을 누리는 몸[報身]과 뭇 중생을 그들 본래의 모습인 자유로 인도하는 나투는 몸[化身]이 그것이다.

깨달은 몸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 순수한 기쁨을 누리는, 육체 뒤에 있는 일종의 신비한 정신적인 몸이다. 이 몸은 무한하며, 붓다는 이 몸을 통해 만물 속에 기쁨을 전달한다. 나투는 몸은 붓다의 무한한 기쁨의 몸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무지한 중생들을 돕기 위해, 기쁨의 몸이 육체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 몸이다. 붓다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상황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가 있다. 역사적인 인물인 석가모니 붓다는 바로 이러한 붓다의 나투는 몸이었다. 하지만 석가모니의 모습으로 나툰 붓다는, 뭇 존재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모든 붓다에게는 진리의 몸, 깨달은 몸, 나투는 몸이라는 세 몸이 있다. 붓다의 몸에 관한 이런 분류는, 티벳 사람들이 붓다나 성자의 환생이라고 말하는 '뛸꾸'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붓다는 우주의 본질을 깨닫고 온 세상을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려면 물질과 마음의 본성을 철저하게 탐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제자들에게 합리적인 이성의 힘과 내적인 반성과 정확한 판단, 그리고 훈련을 하지 않은 사람은 감도 잡을 수 없을 정도의 예민한 집중력을 통해 감각과 마음의 작용을 조사할 것을 요구했다.


붓다는 후대에 큰 나무로 자라난 마음을 탐구하는 과학(아디야트마비드야adhyatmavidya)을 창시했다. 이것을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한 방법으로 마음을 밝히는 훈련으로 체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들은 이 과학적인 훈련을 통해 자신의 긍정적인 요소를 깨달음과 동시에 부정적인 요소들로부터 해방된다. 붓다는 이후 오랜 세월 인도와 아시아 각지에서 번성하게 될, 남녀 출가 수행자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 단체들은 이슬람 세력과 세계적인 세속화 바람이 불어닥치기 전에는 아시아 거의 전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들 중에는 죽음과 중간계와 환생 과정을 탐구하는 단체와 수행자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누적된 연구 결과는 방대한 문헌으로 남게 되었다. 죽음에 관한 이 과학적인 문헌들은 세계 문명의 역사에서 아주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티벳 死者의 書>도 그런 문헌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책이다.


5. 티벳 사람들의 죽음을 보는 눈


티벳 사람들은 죽음과 중간계를 신비스럽게 여기지도 않고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중간계의 여행을 안내하는 <티벳 死者의 書>는 티벳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보는지, 또 전생과 현생과 내생의 연속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태양계의 구조나 계절의 변화를 종교적인 믿음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처럼, 수없이 여러 번 태어난다는 견해가 결코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다. 티벳 사람들은 생명체의 연속적인 삶, 즉 일정한 패턴을 따라 진행되는 죽음과 중간계와 환생을 당연한 과학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명료한 의식을 가진 채로 중간계를 탐험하고 돌아온 깨달은 성자들이 전하는 중간계에서의 체험담을 믿는다.

티벳 사람들은 마치 우리가 달에 다녀 온 우주 비행사들이 달이 어떻더라고 말하는 것을 믿는 것처럼, 그들 정신세계 비행사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티벳 사람들은 또한 정해진 방법에 따라 명상함으로써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낼 수 있다고 믿는다. 티벳 사람들은 일상 생활을 이런 불교적인 관점에 따라 영위해 나간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배우고, 그리고 윤리적인 행위와 올바른 마음 씀씀이와 비판적인 통찰력을 통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생을 준비하는 데 일생을 보낸다.

티벳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죽음과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아주 다른 부분도 있다. 그들도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죽음을 인생의 종말에 찾아오는 비극으로 본다. 또한 사고로 비명횡사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심지어는 죽을 때가 되어서 죽는 것임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더 살아 보려고 한다. 이런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죽음을 고통 없는 망각으로 여기는 서구 유물론자나 현실주의자들 보다 티벳 사람들이 오히려 죽음을 더 두려워하는 면이 있다. 그들은 무감각한 망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죽음을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이 생에서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나쁜 습관을 가지고 그릇된 행동을 일삼은 사람은 죽음의 문을 통과한 다음 이 생에서 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몰래 숨어서 기다리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심술궂은 존재로 본다. 티벳 사람들은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무시무시한 죽음의 신 야마에 대한 관념을 인도에서 물려받았다. 야마는 들소 머리에 양 손에는 해골 바가지가 달린 가시돋힌 곤봉과 올가미를 들고 검푸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야마는 발기한 좆을 드러내고, 거친 숨을 몰아 쉬는 들소 뒤에 우뚝 선 모습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소름끼치는 모습을 하고 있는 배우자 차문다와 함께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차문다는 야마의 에너지를 여성으로 인격화시킨 상징이다. 야마 밑에는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수많은 졸개들이 있다. 그들 죽음의 사자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죽은 자의 영혼을 야마 앞으로 끌어온다. 죽음의 사자가 부르면 아무도 거역하지 못한다. 지하 세계로 끌려가 문도 없고 창문도 없는 쇠감방에 갇힌다.

야마는 쇠감방에 갇힌 죽은 자의 선악을 심판한 다음, 선한 행위가 월등히 많았으면 하늘 나라로 보내고 악한 행위가 많았으면 동물 세계나 지옥으로 보낸다. 그러나 동정심과 아량이 있고, 지적인 능력도 어느 정도 갖추어진 가능성 있는 영혼이라면 인간 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한다. 영적이 수행에는 하늘 나라 보다는 인간 세계가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티벳 사람들은 야마를 대단히 두려워하며, 붓다와 보살들이 자신들을 야마의 손에서 건져 줄 것을 기대한다. 티벳 사람들은 야마가 붓다에게 굴복하는 과정을 가면 무도회를 통해 묘사하는 축제를 벌인다. 그때 울긋불긋한 의상을 입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가면을 쓴 승려가 춤을 추며 야마의 모습을 재현한다. 그러면 붓다의 화신인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 만주스리(文殊菩薩)나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 아발로키테스바라(觀世音菩薩)가 나타나 야마를 굴복시킨다. 특히 아발로키테스바라(觀世音菩薩)는 위대한 성자이며 티벳의 영적인 구원자인, 역사적인 실존 인물 파드마 삼바바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죽음을 인격화시킨 야마의 모습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하지만, 실제로 무서운 것은 야마가 아니다. 악한 사람이 받을 심판과 그들이 처할 운명이 무서운 것이다. 티벳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생명이 무한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생명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무로 돌아갈 수도 없다고 믿는다. 인간의 생명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인간은 항상 어떤 상태이든 관계의 영역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처해 있는 관계의 영역 속에서 내적인 자유를 성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지에서 비롯되는 속박의 굴레에 끝없이 휘말릴 수밖에 없으며, 반복되는 고통과 괴로움을 영원히 피하지 못한다.

인간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상태와 기쁨이 넘치는 상태의 중간에 놓여 있는 존재다. 인간은 베푸는 행위, 도덕적인 행위, 그리고 관대함 등의 미덕을 쌓음으로써, 또 비판적인 지혜를 계발하고 통찰력을 기르는 명상 수행을 통해 지적인 능력을 강화시킴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 태어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다. 인간은 엄격하게 프로그램된 본능적인 반사 행위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운 존재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이 주어져 있다. 인간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스스로 무한한 행복을 누림과 동시에 다른 생명체들을 도와 그들을 고통에서 건지는 자비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 죽는 것, 즉 인간 상태로 존재하는 동안 얻을 수 있는 자유와 기회를 잃어버리고 원하지 않는 비참한 상황에 수없이 반복하여 태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 중에 비극이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깨달음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길을 따르지 않고 살다 죽은 사람의 상태는, 죽으면 완전히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죽자 마자 하늘 나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보다 훨씬 더 비참하다. 그런 사람은 지옥이나 연옥에 떨어질지 모르며, 그런 사람에게는 죽음이 끝없는 고통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티벳 사람들은 이렇게 시작도 끝도 없이 돌아가는 삶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즉 다음 생에 처할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이런 믿음은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도록 한다. 티벳 사람들의 진한 종교성과 영성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고원 지대의 눈 덮인 산이 아니라 바로 이런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보다 깊은 영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티벳 사람들은 죽음을 오히려 삶에 밀접하게 관련된 힘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죽음을 악하고 무자비한 것으로만 여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착하게 살도록 하는 힘, 즉 바람직한 태도와 선한 행동을 강화시키는 힘으로 본다. 또한 죽음 자체를 삶과 동떨어진 별도의 절대적인 실재로 여기지도 않는다. 죽음조차도 이렇게 상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티벳 사람들의 정신적인 태도는 항상 현존하고 있는 자유, 즉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근거로 존재하고 있는 자유와 관련하여 죽음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티벳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나 항상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상황, 그리고 깨어 있는 상태의 감각과 그 감각이 인지하는 대상들이 견고한 실재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다.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 내가 하는 행위, 나의 느낌,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서 변하지 않는 본성[自性]을 갖고 있는 실체가 아니다. 우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몰두하고 있는 자기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은 언제든지 무로 돌아갈 수 있는 잠재적인 무이다. 만약 지금 죽는다면 그 모든 것이 당장 해체되고, 기억에서 사라지고, 우리의 손에서 떠난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떠나 텅 빈 마비 상태가 될 것이다.

죽음의 가능성이 현존하고 있음을 늘 기억하며 사는 사람은 상상을 뛰어 넘는 자유를 누린다. 그런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본성은 언제나 자유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모든 혼란은 이 세상을 고정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실체로 보는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깊은 자유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보통 습관에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이지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완전히 그의 자유 의사에 따라 행동한다. 죽음에 대한 이런 고차원적인 이해는 자신을 '비우고 죽이는 지혜'를 인격화시킨 무시무시한 죽음의 신 야마와 관련되어 있다. 모든 것을 종결시키는 죽음의 신 야마에 대한 명상을 통해 만물의 '비어-있음'[空性]을 철저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티벳 문화는 매우 다양하고, 티벳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는 기쁨과 생동감이 넘친다. 그들은 고정된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개성적으로 살며, 무슨 일에서든지 자유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 생을 붓다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한 수행에 바친다. 결코 물질을 추구하거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랜 세월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자신의 잠재적인 진화 가능성을 꽃 피우기 위해, 내면의 빛에 따르는 지적인 삶을 살아 왔다. 그리하여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냈다. 티벳 문화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죽음이 늘 현존하고 있다는 생생한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서 비롯된 자유로움에서 분출된 현상이다.




□ 제 2 장 □

죽음에 대한 티벳의 과학적인 견해


1.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과학 차원에 속한 질문이다. 서구 과학은 심장의 박동이 멎고 뇌파 측정기의 그래프가 직선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유물론자들은 뇌가 활동하고 있는 동안 '나'라고 하는 개체적인 의식이 존재하며, 뇌의 활동이 멈추면 의식도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으면 의식이 소멸된다는 견해는 과학적인 탐구의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라는 가정일 뿐이다. 실제로는 한동안 뇌파가 정지된 상태로 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많으며, 그들은 한결같이 뇌파가 정지된 상태로 있는 동안에도 이런저런 체험을 했노라고 증언한다.

현대적인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죽음을 생명의 활동이 완전히 소멸된 영원한 무와 망각 상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죽음을 잠, 어둠, 무의식 등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앞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괴로움에 지친 사람은 고통을 의식하지 못하는 영원한 마취 상태로서의 죽음을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이 확실히 그러한 것인지 과학적으로 탐구해 보아야 한다. 사실 내면[마음]의 과학은 무에 대한 분석에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무는 말 그대로 무일 뿐이다. '무'라는 관념은 무가 아니다.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무인데, 관념은 나름대로 의미의 범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는 범위가 없다. 또한 안도 없고 밖도 없다. 따라서 무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 안에 무엇을 넣을 수도 없다. 무는 무이기 때문에 없애 버릴 수 없으며, 어떤 힘이나 영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무는 그 무엇도 아니며, 어떤 상태나 영역도 아니다. 무는 두려워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절대적인 무일 뿐이다.

무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의 반대편에 있는, 만물의 궁극적인 종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를 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갖고 있다. 무에 대해 이러저러한 생각을 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관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깊게 환상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를 명백히 보여 준다. 무가 '있다[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이것', '저것', '그것' 또는 '이러한 상태', '저러한 상태', '그러한 상태'라고 대명사를 써서 지칭하는 것도 잘못이다. 무는 무이기 때문에 상상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무를 일종의 종착역 즉 인생이 도달하는 마지막 상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뇌파 그래프가 직선으로 나타나는 상태를 무라고 상상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모든 감각 활동이 정지한 일종의 마비 상태를 무라고 보는 것이나, 의식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영역으로 보는 것 또한 논리적으로 앞 뒤가 안 맞는다. 무는 겉도 없고 속도 없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음과 같은 어떤 상태를 무라고 상상하는 것은 스스로 위안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의 상태가 깊은 잠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깊이 잠들면 감각, 생각, 걱정, 그리고 의식 마져 사라진다. 우리는 어떤 근원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듯한 편안함을 느끼며 잠에 '빠진다'. 잠에 빠져들기 직전까지는 의식이 있지만, 다시 꿈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가지고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는 의식이 없다. 꿈은 기억할 수도 있고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의식은 말 그대로 '무'의식이기 때문에 체험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무의식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는 동안 의식이 없는[무의식] 상태에서 편히 쉬었다는 느낌은 무의식의 체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잠들기 직전과 깨어나는 순간의 느낌에서 오는 것이다.

잠은 휴식, 평화, 고요, 원기 회복 등과 관련되어 있다. 정신적 혹은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사람은 심한 고통을 겪으며, 지속적으로 잠이 부족하면 육체의 건강을 잃는다. 잠을 자는 것과 뇌파가 뛰지 않는 것은 비슷한 것이 아니다. 잠자는 동안에도 두뇌의 활동은 멈추지 않는다. 깨어 있을 때보다 꿈을 꿀 때 오히려 두뇌가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육체적.물질적 관점에서 보면 잠과 죽음은 완전히 다르다. 죽음을 무의 세계로 들어가는 入場으로 여기는 것은 죽음의 실상에서 눈을 돌리고자 하는 자위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을 잠과 비슷한 그 어떤 상태로 여기는 것은 물질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추측에 불과하다. 이런 견해는 마치 세상과 결별해야만 자유가 있다고 보고 그런 상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소승 불교, 힌두교 신비주의, 도교, 그리고 서구 唯一神敎의 이원론적인 해탈관 내지는 구원론과 흡사하다. 그들은 걱정과 괴로움과 문제 투성이로 뒤얽힌 세상을 떠나, 평화와 안식으로 충만한 잠과 비슷한 축복의 상태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적인 이상인 니르바나는 고통과 슬픔의 세계와 완전히 결별한 영원한 축복의 상태, 즉 무의식적인 잠과 같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유물론자들이 영적인 구원이나 종교적인 해탈을 비웃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들은 종교적인 계율을 지키지 않고도, 배우거나 수행하지 않아도, 또 깨달음이 없어도 매일 밤 저절로 그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쓸데없는 고생을 하느냐고 조롱한다. 세상 걱정을 모두 여읜 깊은 잠과 같은 상태가 해탈이라면, 유물론자들은 수많은 밤을 지나면서 이미 해탈하는 방법에 숙달되어 있는 것이다.

죽은 다음에는 잠과 같은 무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그들의 견해는 사실에 부합되는 것인가? 그렇게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가? 무의 세계를 경험한 다음 그 세계는 이렇더라고 보고한 사람은 없다. 아무도 그 세계를 본 사람이 없고, 그 세계에 대한 기록도 없으며, 자신이 죽은 사람의 주관적인 의식을 가지고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도 없다. 육체적으로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 그 상태를 탐색하거나 규명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무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티끌 하나라도 무로 돌아가는 것을 관찰한 바가 없다. 그들은 에너지는 없어지지 않고 형태만 바뀐다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들먹인다. 그렇다면 의식도 에너지일진대 어째서 의식 에너지만이 그 법칙에서 예외가 된다는 말인가? 유물론자들이 일종의 에너지 연속체인 의식이 무로 돌아간다고 그렇게도 강력하게 믿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유는 명백하다. 그들에게는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입증할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막연한 소원을 등에 없고, 머리로 짜낸 허황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는 그들의 견해는,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털 끝만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되뇌이는 과정을 거치면서 강화된 공허한 교리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는 만물의 실상을 알고 싶어하는 종교적인 충동이 있다. 그래서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고 하면 당연히 무는 어떤 상태일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유물론자들은 인간 본연의 이런 종교적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증거도 없고 경험도 해 보지 못한 것을 아는 체한다. 그들은 죽음 이후의 무가 예상할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으나, 쓴 약을 꿀꺽 삼키듯이 이것 저것 따지기 전에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 어떤 상태라고 주장하는 무모한 사람들이다.

유물론적 과학자들이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증거들을 교리적으로 거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활동한다는 것이 자기들의 믿음에 의문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런 증거들에서 눈을 돌린다. 어떠한 의문도 허용하지 않는 종교적인 교조주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증거도 없고 때로는 비합리적인 빈약한 논리의 믿음을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한다.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존재하며, 의식과 감각이 살아 있는 삶이 계속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증거는 많다. 첫째, 만물은 변화를 통해 형태는 바뀌지만 그 존재의 지속성은 끊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도 의식은 소멸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둘째, 죽었다 살아 난 사람들이 전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가 많다.

의학적으로 분명히 죽었다 살아 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어린 아이가 전생에 있었던 일과 자기가 처해 있던 환경을 기억하는 것처럼, 죽음의 세계에서 경험한 일을 기억한다. 신뢰할 만한 학자들이 이런 사람들의 증언을 모아 비교해 본 결과 믿을 만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죽음 이후의 체험에 대한 다양한 증언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분류한 사람도 있고, 문화적인 성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죽음의 형태에 대한 안내서를 펴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중요한 사실은, 문명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일지라도 죽음 이후에 직면하게 될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 것도 아닌 것[無]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즐거운 것도 아니다. 단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깨어 있는 상태의 혼란과 고통에 비해 상대적으로 편안한 상태일 수는 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이다. 사실 고통은 당연히 두려워해야 할 그 무엇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죽음이 무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시체로 변하면 자신과 가족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앞으로 닥쳐올 고통스러운 상황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앞으로 닥쳐올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궁리한다. 오늘 밤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해서 내일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 낮 동안에 최선을 다해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한다. 준비를 잘하면 잘하면 잘한 만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잠에 빠진다고 해도, 자고 나면 저절로 내일이 오는 것처럼 의식의 다음 상황이 자동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살아 있을 동안 그 새로운 상황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준비를 잘하면 잘한 만큼 죽음 이후의 상태가 편안해지리라.

아무리 극단적인 유물론자일지라도 다음과 같은 파스칼의 유명한 '도박의 원리'에는 귀를 기울여 봄직하다. 죽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면, 살면서 준비하고 쌓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도 존재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악한 행위만 일삼으며 준비를 게을리 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오래도록 후회하게 될 것이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은, 그의 믿음대로 죽음 이후에 무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든지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도 존재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믿고 철저히 준비한 사람은,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전개되면 준비한 만큼 큰 행복을 누릴 것이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 모든 것이 소멸되어 버린다면 무엇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존재조차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존재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준비를 한 사람은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둘 것이고, 영원성을 부정하고 세상 일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한 사람은 생명을 낭비한 것을 깊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생이라는 판돈을 어느 쪽에 거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시간과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상대적인 삶의 상황을 대하는 태도가 신중하든지 아니면 모험적이든지,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 상호 연관성은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나쁜 쪽이거나 좋은 쪽이거나 발전할 가능성 역시 무한하다. 자신이 무한한 상대적인 연속성에 얽혀 있는 존재임을 이해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뒤따른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대적인 상호 연관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확실히 이해하는 사람은 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을 자신을 포함한 주변 상황을 개선하는 데 쓰고자 할 것이다.

합리적인 증거도 없고, 그럴듯한 추론에 불과한 종교적인 성격의 믿음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행위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과정은 끝이 없다. 왜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가? 죽은 다음에 평안한 마비 상태가 올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죽음을 모든 상황과 체험에서 단절된 영원한 고립이라고 보는가? 상대적인 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모든 상대성을 초월한 그런 절대적인 소멸 상태를 상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파스칼의 도박의 원리를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전능한 존재가 있어서 어떤 행동을 한 사람이든지 모두 구원해 준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준비한 사람이라고 해도 괜히 쓸데없는 고생을 했다고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무슨 불평이나 후회가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는 그런 전능한 존재는 없고, 우리가 준비한 만큼 우리를 도와주는 신적인 존재가 있다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오래도록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건전한 믿음이라고 해서 비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올바른 신앙은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맹목적이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신앙은 과학적인 탐구의 뒷받침을 받아 그 힘이 강화되어야 하고, 문자의 얽매임에서 풀려나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건전하고 유용한 신앙이라면 죽음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과학적인 탐구자들은 자기 보다 앞선 선배들이 시도한 행위와 그들이 남긴 방대한 문헌에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죽음에 관한 한 아마 인도-티벳의 전통 속에 남겨진 문헌이 가장 방대할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상호 연관 속에서 무한한 우주 속에 퍼져 있다. 유물론적 진화론은 이런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목적 없이 일어나는 자연 도태설과 돌연변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은 진화가 시작되는 어떤 한정된 출발점과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 출발점과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한 언급이 없다. 그들은 물질 세계가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전개되며, 때에 따라서 돌연변이가 일어나기도 한다고 말한다. 합리적인 견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 역시 육체와 마찬가지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발전하고 때에 따라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지 않겠는가?

'까르마[業]의 법칙'으로 알려진 불교의 정신.생물학적인 진화론은 다윈주의자들의 견해와 상당히 비슷하다. 까르마 이론은 모든 존재가 그물에 꿴 구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생명의 형태를 계속 바꾸어 나간다고 말한다. 까르마 이론은 인간은 과거에 원숭이였으며, 모든 동물을 단세포 생물이었다는 다윈주의자들의 주장을 부정하지 않는다. 까르마 이론이 다윈주의자들의 견해와 다른 점은, 까르마 이론은 모든 존재는 윤회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삶을 취하는 돌연변이를 한다고 말하는 데 있다.

윤회 과정에서는 미묘한 차원의 의식이 생명의 다음 형태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정신 수준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같은 種 안에서 발전하거나 돌연변이 할 수도 있고, 다른 種으로 뛰어 넘을 수도 있다. 까르마적인 진화 과정에서는 지금 보다 고등한 생명체로 태어날 수도 있고 열등한 생명체로 태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일정한 법칙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 따라 진화가 계속된다는 것을 일단 의식한 존재는, 자신의 생각과 행위의 선택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진화의 물줄기를 돌려놓을 수 있다. 물론 까르마 이론과 진화론적 설명 사이에는 명백하게 다른 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르마 이론이 어떤 존재가 어떻게 그런 형태의 존재가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는 진화론적 설명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까르마'를 '진화' 또는 '진화적 행위'라고 번역하고자 한다.

까르마란 변화와 발전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가 쓰는 진화라는 말과 그 의미가 비슷하다. 그러므로 굳이 '까르마'라는 인도 말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번역자들 중에는 '까르마'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독특한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적당한 번역어가 없다는 생각에서 '까르마'라고 그대로 音譯해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동양 사상에 깊이 심취한 서구인들 중에는 '까르마'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운명 같은 것으로 여기고, 번역하지 않고 고지식하게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까르마는 비인격적이고 자연적으로 전개되는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을 뜻할 뿐, 운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이다. 까르마는 삶과 죽음 또는 중간계를 포함하여 모든 순간에 원인의 힘으로 작용하는 일종의 총체적인 틀[原形]이다. 이 틀은 연속되는 삶을 살아오는 동안 쌓은 이전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전 행위에서 비롯된 까르마라는 복합체는 현재의 몸과 마음과 행위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행위와 말과 마음이 미래의 삶의 형태와 질을 결정하는 새로운 추진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이 되는 복합체인 까르마를 '진화의 추진력'(evolution\ary momentum)이라고 불러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티벳에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가르침이 있다. "그대의 전생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으면 그대의 현재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라. 그대의 내생이 어떠할지 알고 싶으면 그대의 지금 마음을 살펴 보라," 이 말 속에는 우리의 현재 상태는 과거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길고 긴 진화 과정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며, 우리의 미래 상태는 지금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진화의 방향을 의식적으로 좋은 쪽으로 돌리기에는 죽음에서 새로운 탄생으로 전이해 가는 중간계 기간이 최적의 기회다. 그 기간 동안 진화의 추진력은 일시적으로 유동적이 된다. 그러므로 중간계라는 결정적인 고비를 넘기면서 수직으로 상승할 수도 있고 하강할 수도 있다. 티벳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티벳 死者의 書>를 운명의 방향을 좋은 쪽으로 돌려놓는 안내서로 여기며, 보물처럼 귀하게 여긴다.


2. 여섯 차원의 존재 영역[六道]


불교는 생명의 존재 차원을 여섯으로 나눈다. 그 중에서 지옥계(地獄界)는 최고로 부정적인 몸서리쳐지는 상황을 경험하는 영역이다. 이 영역에 대한 생각은 서양인과 동양인이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불교도들은 뜨거운 지옥 8곳(8熱地獄), 차가운 지옥 8곳(8寒地獄), 누르고 짓이기는 지옥 8곳, 그리고 베고 자르는 지옥 8곳('짓이기는 지옥'과 '자르는 지옥'을 합쳐서 16遊增地獄이라고 한다.)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런 지옥의 모습은 더위로 인한 고통, 추위로 인한 고통, 압박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살을 에일 때의 고통을 상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묘사도 있다. 이런 여러 종류의 지옥은 '미움'의 힘에 이끌리는 부정적인 진화 행위가 만들어 낸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은 지속적으로 발산한 미움의 힘이 증폭되어 재생된 것이다. 지옥에 있는 동안에는 무한한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옥에서 영원히 머무는 존재는 없다. 나는 이런 영역에 거하는 생명을 '지옥 존재'라고 부르겠다.

지옥계 다음에는 흔히 아귀계(餓鬼界, 굶주린 귀신들이 사는 곳)라고 부르는 프레타preta 영역이 있다. 프레타 영역의 존재들이 목마르고 굶주린 것은 사실이지만 귀신은 아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좌절감과 욕구 불만에 사로잡혀 있는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은 프레타에 거하는 존재라는 뜻에서 '프레탄'이라고 부르겠다. 지옥은 미움의 힘이 만들어 내듯이, 프레타는 끝없는 탐욕의 힘이 만들어 내는 영역이다. 프레탄들은 끝없이 반복되는 탄탈루스의 고통을 겪는다. 어떤 프레탄은 밥통은 잠실 운동장 만한데 목구멍이 바늘 구멍처럼 가늘고, 그나마도 길이가 십리는 되어서 끝없이 배고파하고 목말라 한다. 먹을 만하게 생긴 음식을 발견해도 차지하기가 쉽지 않고, 또 용케 차지해도 먹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또 먹었다 해도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중에 시커멓게 타 버리는 바람에 만족은커녕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고통만 당한다. 프레탄의 이런 모습은 배고픔과 목마름, 즉 욕구 불만과 갈망이 형상화한 것이다.

아귀계(餓鬼界) 다음은 축생계(畜生界)이다. 미움은 지옥 존재를 만들어 내고 탐욕은 끝없이 갈망하는 프레탄을 만들어 내듯이, 무지와 어리석음과 우둔함은 동물적인 존재[畜生]를 만들어 낸다. 동물적인 존재와 인간적인 존재인 우리와 상당히 비슷하다. 동물적인 존재는 지적인 능력과 의사 소통 능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본능적인 반사 행위로 어떤 상황에 반응하다. 따라서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불교도들은 자신들 내면의 본능적인 부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동물적인 존재를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으며, 그들도 고통을 경험하고 따라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들에 처해 있는 상황은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발전해 나가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본능적인 무지에 단단히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붓다 역할을 하는 인간적인 존재가 있어서 특별히 보살피고 도와주어야만 한다.

축생계(畜生界) 다음은 인간계(人間界)이다. 인간 차원 역시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의 집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지옥 존재와 프레탄과 동물적인 존재들이 사로잡혀 있는 극단적인 미움, 탐욕, 그리고 무지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태이다. 인간은 미움과 탐욕과 무지라는 부정적인 요소와, 그와 반대되는 인내와 관용과 지적인 감수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진화된 존재이다. 수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과정을 거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해야만 인간 차원에 태어날 수 있다. 인간 차원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의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에는 아주 미미한 상태이겠지만, 인내심으로 지옥을 만들어 내는 미움의 힘을 감소시켜 누구를 해치고자 하는 반사적인 행위를 줄여 나가야 한다. 또 초연함과 관용으로 프레타를 만들어 내는 탐욕의 힘을 감소시켜 집착하고 욕심 부리는 습관적인 반사 행위를 줄여 나가야 한다. 그와 더불어 나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통해,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동물 차원을 지배하고 있는 본능의 힘을 감소시켜 나가야 한다. 그래서 가끔은 다른 존재들에 관심을 기울일 줄 알아야 비로소 인간 차원에 태어난다.

지옥계와 아귀계와 축생계라는 무섭고 지겨운 상태는 본능의 힘이 지배한다. 아무리 미미하다 할지라도 그런 본능의 힘을 약화시키는 노력이 쌓이면, 그것이 인간이라는 보다 고상한 존재 형태로 태어나게 만드는 진화의 추진력으로 작용한다.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이냐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쉽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위대한 성취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본능적인 충동에서 자유롭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자유와 지성과 감성의 힘을 궁극적인 자유와 지복의 삶을 누리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인간계 위에는 신들의 영역인 아수라계(阿修羅界, asura)가 있다. 아수라들은 인간 차원에서 진화해 올라간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 보다 더 큰 자유와 기회를 누린다. 그러나 자신의 인내와 관용과 감수성을 남보다 더 키우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경쟁심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들은 남보다 뛰어 나기를 바라며, 싸우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천상계와 아주 가까운 곳에 살면서, 천상계를 차지하기 위해 신들과 자주 겨룬다. 이렇게 계속 싸우고 죽고 죽이는 과정 속에서 아수라들은 습관적으로 화를 내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점차 지옥으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아수라계(阿修羅界) 위에 있는 천상계(天上界)는 '좋은 의미의 자기 중심적인 삶'이 영위되는, 윤회하는 세계[迷界] 중에서 가장 높은 영역이다. 천상계의 신들은 마음을 조절하는 훈련과 더불어 오랜 세월 관용과 아량과 감수성을 키우는 진화의 과정을 겪은 존재들이다. 그 결과 인간 차원을 초월한 여러 낙원을 거쳐 그 영역에 도달했다. 그들에게는 인간 보다 더 많은 자유와 기회가 있다. 하지만 그런 풍요로움이 오히려 위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천상계의 신들은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힘과 즐거움과 영광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수명도 상당히 길다. 차원이 낮은 영역과는 상관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면서, 자기의 삶이 고통스러워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않는다. 이런 자기 만족 때문에, 그들은 가지고 있는 자유를 창조적인 일에 쓰지 않는다.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는 천상계의 신들은, 그 영역에 도달하도록 만든 진화의 추진력을 서서히 잃는다. 그리고 이런 퇴화의 과정이 오랜 세월 지속되면서, 인간 차원 아래로 다시 떨어져 내려가는 경향이 있다.

신적인 존재들이 거하는 천상계는 욕망의 하늘[欲界天], 욕망이 없는 순수한 형상의 하늘[色界天], 그리고 형상마저 없는 하늘[無色界天]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욕망의 하늘[欲界天]은 다시 6영역으로 구분된다. 그 중 둘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상에 있으며, 나머지 넷은 하늘에 있지만 그 안에 거하는 신적인 존재들의 눈에 보이는 경계가 있다. 욕망의 하늘에 거하는 신적인 존재들은 안락한 낙원 생활을 즐긴다. 하지만 안락함 때문에 궁극적인 자유와 보다 뛰어난 끝없는 기쁨을 추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6단계의 욕망의 하늘 위에는 18영역으로 구분되는 순수한 형상의 하늘[色界天]이 있다. 거기에 거하는 신적인 존재들은 순수한 에너지 몸[心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은하계 너머에서 빛나는 밝은 에너지 구름 같다. 그래서 '(빛나는) 브라흐마의 몸을 가지고 있는 존재'[梵衆]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기뻐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지적인 능력은 엄청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약했던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잊는 경향이 있다. 고통받던 시절의 자신과 여러 차원의 영역을 거쳐오면서 만났던 이웃들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다시 그런 나약한 존재로 퇴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순수한 형상의 하늘[色界天] 너머-사실 여기서는 공간 개념인 '너머'라는 말이 별 의미가 없지만-에는 4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형상이 없는 하늘[無色界天]이 있다. 이 하늘은 무한 공간, 무한 의식, 즉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 선 절대 무의 영역이다. 이 하늘에 거하는 신적인 존재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들은 모두 형상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고, 궁극적인 실재를 추구하며 진화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지극히 평화롭고, 지극히 신비하고, 지극히 실제적인 상태를 추구한다. 그래서 자기를 감싸기 위한 모든 상대적인 관념을 버린 존재들이다. 그들은 죽은 것처럼 고요한 상태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평안하게 지낸다. 어떤 생각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으며, 궁극적인 목표를 성취하여 절대자와 하나 되었다는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간파하기 힘든, 아주 미묘한 자만심과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스스로 건설한 세계 속에 고립되어 있으며, 자신의 상상 속에 갇혀 있다. 불교에서는 수행자가 이런 상태, 즉 空에 떨어지는 것을 가장 위험한 일로 본다. 이런 상태에 빠지면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표현할 수 없는 무 또는 절대로 여기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또 때에 따라서는 空에 떨어진 자신의 상태를 궁극적인 깨달음이라고 막무가내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모든 것과 모든 상태의 '상대성'과 '비어-있음'[空]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 두 가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형상이 없는 하늘의 고요와 정적의 유혹에 말려들고 만다. 그러면 끝없이 계속될 미래를 살아갈, 새로운 존재로 거듭 날 수가 없다.

돌고 도는 '여섯 차원의 존재 영역'[六道]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은 티벳은 물론 불교 사회의 어딜 가나 쉽게 눈에 띤다. 사원 벽에 '윤회의 수레 바퀴'라고도 부르는 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그림은 '죽음의 입'을 향해 날아 들어가는, 죽음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사람의 체험을 묘사하고 있다(죽음의 신 야마가 윤회의 바퀴를 입에 물고, 두 손과 두 발로 바퀴를 지지하고 있다). 죽음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축적한 진화의 추진력에 따라 여섯 영역 중에 한 곳에 속하게 된다(4번 그림을 보라).

<티벳 死者의 書>는 윤회의 바퀴가 묘사하고 있는 우주적인 배경을 죽은 다음 중간계를 여행하는 사람의 여행 무대로 설정하고 있다. 모든 존재 영역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붓다의 경지를 향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할 가능성도 무한하고, 동물적인 차원이나 프레타나 지옥을 향해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할 가능성도 무한하다. 차원이 낮은 영역의 삶은 끔찍하고 비참하다.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무에 빠지는 것은 그 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지 못하다.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각성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가 되며,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는 효과 있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존재 양상의 변화를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고통받고 있는 다른 존재를 구원하겠다는 메시아적 깨달음도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존재 양상의 변화에 대한 개념은 이기적인 존재를 이타적인 보살로 변화시키는 영적인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몇 십년 동안, 아시아에서 온 선생들 중에 무시무시한 상태에 대한 묘사는 문자적인 사실이 아니고 피해야 할 마음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일 뿐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온 우주가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들의 서양인 제자들은 (기독교에서 배운)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이라는 개념을 버린 지 오래다. 따라서 그런 개념을 정신적인 상태에 대한 비유라고 설명하는 것은, 배움과 명상을 효과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게 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형이상학적인 접근은 궁극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며, 사실 이런 접근 방식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긍정적인 세상이든 부정적인 세상이든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대가 만약 달려오는 화물 열차 앞에 서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대의 마음은 아마 화물 열차에 깔려 죽을 것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존재의 실상을 명백히 깨닫고 완전히 해탈한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다른 존재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달려오는 화물 열차 앞에 서 있어도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정도의 사람이라면 지옥이나 프레타나 동물적인 영역이 존재하든 말든, 또는 자유와 기회가 털 끝만큼도 없는 지옥 보다 더 비참한 존재 상태가 있든지 없든지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

하지만 그 밖의 사람들이라면 달려오는 기차를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래야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칠 테니 말이다. 우리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부정적인 성향이 자라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 것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결과가 따라 온다. 완벽한 도인이 아니라면 부정적인 성향이 꽃으로 피어나 열매를 맺기 전에,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봉오리를 꺾어 버리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낫다.

잘 죽는 법을 터득하기 위하여 죽음에 관한 과학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다양한 존재의 영역을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인간 영역처럼 실제적인 영역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신의 여러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런 다양한 차원의 존재 영역이 실재하는 영역이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광대한 진화의 바다 속에는 지구라는 이 조그만 땅 덩어리 위에서 볼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많은 다양한 생명 형태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런 관점을 가질 때 비로소, '모든 것이 네 마음 속에 있다'는 식의 접근도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좋아하는 것은 실제처럼 여기고 싫어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마음의 작용이라고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모든 실체가 마음 속에 있다. 그리고 마음은 실체들을 '저기 밖에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저기 밖에 있는' 것을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또 '저기 밖에 있는' 것들을 두려운 상황을 예방하고 아름다운 상황을 증진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3. 붓다의 세 몸


생명체의 존재 영역을 여섯으로 나누는 것은 불교의 우주론과 관련되어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깨달은 사람은 여섯 영역을 끝없이 돌고 도는 윤회를 경험하고 이해한 사람이다. 한 영혼의 생명은 죽음 상태, 중간계 상태, 삶 상태를 반복적으로 거치면서 이어져 나간다. 이 생에서의 경험과 비교하자면 죽음은 깊은 잠이고, 중간계는 꿈이며, 삶은 깨어 있는 상태와 상응한다. 그 중에서 깨어 있는 상태는 다시 명상과 초월 상태, (육체와 별도로)마음이 만들어 내는 신비한 몸 상태, 물질적인 육체 상태로 구분할 수 있다. 이 3가지 상태는 붓다의 상태를 보여 주는 붓다의 세 몸과 관련되어 있다. 명상과 초월 상태는 붓다의 진리의 몸(法身)과 관련되어 있고, 신비한 몸 상태는 붓다의 깨달은 몸(報身)과 관련되어 있으며, 물질적인 육체는 붓다의 나투는 몸(化身)과 관련되어 있다.

<도표 2. 붓다의 세 몸과 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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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몸(法身)        깨달은 몸(報身)       나투는 몸(化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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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중간계                  삶

깊은 잠 상태            꿈꾸는 상태         깨어 있는 상태

명상 차원             신비한 몸 차원          육체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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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트라 요가 수행은 죽음과 깊은 잠과 명상 상태를 붓다의 진리의 몸으로 변형시키고, 중간계와 꿈과 신비한 몸 상태를 붓다의 깨달은 몸으로 변형시키며, 삶과 깨어 있는 상태와 육체를 붓다의 나투는 몸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티벳 死者의 書>는 중간계 기간을 붓다의 경지를 향해 속도를 붙여 전진해 나가는 좋은 기회가 되도록 안내해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일생은 여섯 중간계 즉 이승 중간계, 꿈 중간계, 명상 중간계, 죽음 중간계, 저승 중간계, 탄생 중간계로 이루어진다. 삶을 이런 도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수행자로 하여금 삶의 모든 순간을 중간계로 보도록 한다. 그래서 삶의 모든 순간을 깨달음을 얻어 해탈할 수 있는, 유동적이고 변형 가능한 순간으로 보도록 한다.

이승 중간계란 보통 말하는 삶 즉 탄생과 죽음 사이의 기간을 말한다. 꿈 중간계는 깊이 잠든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 사이의 기간이다. 명상 중간계는 이원성을 의식하고 있는 일상적인 의미의 깨어 있는 상태와 초월적인 지혜가 각성된 명상 상태 사이를 가리킨다. 죽음 중간계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밝은 빛이 비치는 며칠 안되는 아주 짧은 기간이다. 저승 중간계는 죽음 중간계와 탄생 중간계 사이의 비교적 긴 기간으로, 때에 따라서는 2주일 정도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이 기간에도 의식은 깨어 있다. 탄생 중간계는 저승 중간계와 태어 나는 순간 사이의 기간으로, 의식을 가지고 통과하는 중간계 중에서 두 번째로 긴 기간이다. 이 기간에는 자기가 태어날 장소로서 자궁이나 알이나 축축한 곳이나 연꽃 등과 만나는 체험을 한다. 이와 같이 진행되는 한 영혼의 일생은 <도표 3>처럼 요약할 수 있다.


<도표 3. 여섯 중간계로 이루어진 삶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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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중간계  | 기간(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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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 중간계  | 태어남과 죽음 사이

꿈 중간계    | 잠과 깨어 있음 사이

명상 중간계  | 이원적인 의식과 초월적인 각성 사이

죽음 중간계  |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기간

저승 중간계  | 저승에서 실체를 체험하는 기간

탄생 중간계  | 저승 중간계와 태어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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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중간계에 대한 이런 설명은, 현재 어느 차원을 지나고 있든지 삶의 모든 순간이 변형 가능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붓다의 세 몸과 여섯 중간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이기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모든 것이 고통스럽기만 한 삶을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삶으로 변형시키는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다.

4. 몸과 마음의 복합체

<티벳 死者의 書> 바닥에 깔려 있는 우주론을 개관하려면 먼저 몸과 마음의 복합체라는 티벳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불교는 목적에 따라 인간과 우주의 여러 가지 모델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복합체인 인간에게는 거친 차원[肉]과 미묘한 차원[魂]과 지극히 미묘한 차원[靈 ]이라는 세 차원이 있다는 모델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5가지 무더기[五蘊]와 5가지 근본 요소[五大]와 6가지 감각-의식[六識]에 관한 것이다.

이들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기억해 둘 사실이 있다. 불교 과학이 제시하는 이런 도식적인 구조는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교수법의 일종으로, 기억하기 쉽도록 일정한 패턴에 따라 만든 하나의 방편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꼭 5가지이고 저것은 꼭 6가지뿐이라는 식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모든 범주를 보다 더 크게 나눌 수도 있고 보다 더 잘게 나눌 수도 있다. 티벳 사람들이 위와 같이 나누는 것은, 오랜 경험에 비추어 그렇게 나누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개념상의 도식은 사진과 비슷하다. 동일한 피사체를 향해 셔터를 눌러도 105미리 렌즈를 끼우고 찍은 사진과 35미리 렌즈를 끼우고 찍은 사진은 서로 다른 그림을 나타내 보인다. 그 두 사진을 놓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따지는 것은 전혀 필요치 않은 일이다. 모습은 서로 다를지라도 둘 다 진실한 사진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의 복합체에 세 차원이 있다는 것은 일상적인 체험을 하는 자기와 명상 상태의 미묘한 자기를 통합하고자 하는 불교 수행자에게 유용한 틀 역할을 한다. 이 틀을 기반으로, 습관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관념[我相]을 떨쳐 버리기 위해 의식이 말똥말똥 깨어 있는 상태로 意識下意識 속으로 들어가는 수행을 한다. 우리가 보통 무엇을 보거나 느끼는 것은 의식의 표면에서 이루어진다. 저기에 나무가 있다든지 아니면 배가 아프다고 느끼는 것 등은 모두 표피 차원 의식의 활동이다. 시신경을 자극하여 무엇이 보이게 만드는 빛 에너지[光子]는 의식하지 못한다. 중추 신경계를 통해 뇌로 하여금 배가 아프다고 느끼게 만드는 신경 전달 물질의 활동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면 세계를 탐구하는 불교 수행자 혹은 정신세계 비행사들은 意識下意識 영역에서 일어나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의식하기 위해 훈련해 왔으며, 자신들의 내적인 탐험 결과를 표현할 개념이 필요했다. 그래서 인간 존재를 묘사하는 특이한 모델을 만들어 냈다. 이 모델은 표면 의식으로는 알 수 없는 내적인 과정을 직접 체험하기 위한 오랜 수행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몸과 마음의 복합체인 인간에게는 거친 차원[肉], 미묘한 차원[魂], 지극히 미묘한 차원[靈]이라는 세 차원이 있다. 거친 차원은 육체와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차원의 육체는 피와 살과 뼈 그리고 앞으로 살펴볼 5가지 근본 요소[地.水.火.風.空]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는 원소를 아주 잘게 분류하는 현대 과학의 화학적인 분석은 필요치 않다고 본다. 그런 방법으로는 '나'라고 하는 실체를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거친 차원의 마음은 6가지 감각-의식[六識]으로 이루어진다. 6가지 감각-의식이란 육체의 감각 기관인 눈.귀.코.혀.피부[眼.耳.鼻.舌.身]를 통한 5가지 감각-의식[五識: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에 감각이 받아들인 정보를 통합하는 생각, 상상, 충동과 의지 등의 정신[意] 작용[意識]을 더한 것이다.

미묘한 차원의 몸은 우리가 중추 신경계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거친 차원에서 경험을 정리하는 뇌는 축축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중추 신경계는 축축한 물질 구조가 아니다. 우리 몸에는 미간에서 정수리를 거쳐 꼬리 뼈와 성기 끝에 이르는 신경[에너지] 통로가 있는데, 그 통로 중간 중간에 5개나 6개 또는 7개의 차크라가 있다. 차크라는 원반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바퀴라고 부르기도 하고 연꽃 모양이라고 해서 연꽃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빛을 내뿜는 일종의 섬유질을 발산한다. 이 발광체 섬유질이 바로 미묘한 몸을 구성하는 물질 아닌 물질이다. 신경[에너지] 통로로 골격을 이루고 있는 이 미묘한 몸 속에는 존재의 精髓를 담고 있는 각성된 빈두[精液]가 프라나[氣또는 숨]의 기운을 타고 흐른다.

이렇게 형성된 미묘한 몸에도 3단계가 있으며, 3단계의 몸은 모두 육체적인 감각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주체적인 의식 활동을 한다. 3단계의 미묘한 몸은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수록, 차원에 따라 밝은 달빛, 밝은 햇빛, 그리고 순수한 어둠의 빛과 같은 빛을 발산한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보통 이 세 몸이 잠재의식과 뒤엉켜 80가지 형태의 본능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80가지 형태의 본능적인 행위란 욕망과 공격성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여러 행위들을 (편의상 80가지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지극히 미묘한 몸[영적인 몸]은 흔히 불멸의 빈두[精液]라고 하는데, 보통은 심장 부근에 있는 차크라에만 미미한 에너지 형태로 존재한다. 여기에 상응하는 지극히 미묘한 마음은 투명한 직관의 빛이다. 이 차원에서는 몸과 마음의 구별이 사라진다. 몸이 마음이고 마음이 몸인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투명한 각성을 그 내용으로 하는 이 불멸의 빈두[精液]가 바로 생명과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영혼이다. 삶은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불멸의 빈두[精液]인 영혼의 연속성은 끊어지지 않는다. 이 지극히 미묘한 몸과 마음의 복합체를 각성시키는 것이 곧 佛性을 깨닫는 것이다. <티벳 死者의 書>도 바로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도표 4. 몸과 마음의 복합체의 세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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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원            몸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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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차원       5가지 근본 요소           6가지 의식-작용         

(肉)             (五大)                    (六識)


미묘한 차원     신경(에너지) 통로,         80가지 본능과 뒤얽힌     

(魂)             (신경) 에너지,            세 차원의 직관

                각성된 빈두[精液]


지극히          불멸의 빈두 속에          투명한 빛 에너지의 精髓   

미묘한 차원     있는, 투명한 빛을         또는 불멸의 빈두[精液]

(靈)            운반하는 에너지체(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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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의 복합체를 이해하기 위해 만든 또 다른 중요한 도식은, 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몸(色), 느낌(受), 지각(想), 의지(行), 의식 활동(識)이라는 다섯 무더기[五蘊] 또는 5가지 과정에 대한 개념이다. 이를 일컫는 산스크리트어 '스칸다'skandha는 문자 그대로 '무더기' 또는 '더미'를 뜻한다. 나는 몇 가지 이유에서 이들의 역동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과정'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지만, 불교의 표준 번역어는 '무더기'[蘊]이다.

다섯 과정 중에서 첫 번째인 몸(色)은 거친 차원의 육체에 상응하며, 나머지 넷은 거친 차원의 마음과 그 마음의 내적인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를 이렇게 다섯으로 분석한 근본 목적은 몸과 마음의 복합체인 자기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여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되는 구속에서 해방되는 데 있다. 즉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과정[무더기]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통해 '나'라고 생각하는 습관적인 에고 의식[我相]에서 비롯되는 굴레에서 벗어는 것이 이 구조를 만든 목적이다. <도표 5>는 몸과 마음의 복합체를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 또는 다섯 과정의 구조를 요약해 놓은 것이다.


<도표 5.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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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기          구성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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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色)           5가지 근본 요소(地, 水, 火, 風, 空),

                또는 5가지 감각 대상(色, 聲, 香, 味, 觸)과

                 5가지 감각 기관(眼, 耳, 鼻, 舌, 身)

느낌(受)         5가지 감각 기관의 작용

                 쾌감, 불쾌감, 즐거움, 고통 또는 무감각 등

지각(想)         체험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말과 상징[이미지]

의지(行)         욕망, 증오심, 망상, 그리고 여러 가지 감정

의식 활동(識)     6가지 감각-의식(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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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식에서는 거친 차원[육적인 차원]의 몸과 마음의 복합체는, 의식 활동[識] 하나를 뺀 나머지 넷은 출생과 더불어 시작했다가 죽음과 동시에 끝난다. 정신적인 의식은 죽음과 동시에 오감(五感)과 관련을 끊고 육체에서 빠져나가, 중간계 존재의 의식으로 변한다. 정신적인 의식이 물질적인 육체와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꿈이다. 꿈을 꾸는 동안, 의식은 육체와는 다른 새로운 몸이나 주변 환경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꿈 속의 존재도 경치나 색깔을 보기도 하고 소리를 듣기도 한다. 꿈을 꾸는 동안 자기라는 몸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중간계 존재의 자아 의식이 그와 비슷하다.

물론 특별한 훈련을 하지 않고는 그런 몸에 대한 자각이 생기지 않는다. 보통의 경우에는 꿈을 꾸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꿈을 기억한다 할지라도, 꿈이 시작되는 상황과 끝나는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특별한 훈련을 하면 꿈을 꾸면서도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하는 자각을 가질 수 있다. 즉 잠을 자면서도, 의식이 각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투명한 꿈을 꿀 수가 있다. 이런 능력이 계발되면 투명하게 죽는 능력도 생긴다. 즉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죽음의 과정을 의식이 초롱초롱 각성된 상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투명하게 죽는 능력을 계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몸과 마음의 복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차원 또는 다양한 상태를 이해하고 그 변화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것이다. 미묘한 차원[혼적인 차원]의 몸과 마음을 묘사하는 도식은 특별히 이 목적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에너지 통로[수슘나, 이다, 핑갈라], 프라나[氣], 빈두[精液]로 이루어져 있는 미묘한 몸의 구조에 대한 이해는 특별한 내적인 감각을 각성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이마에서 시작하여 정수리로, 정수리에서 척추를 타고 아래로 꼬리뼈까지, 그리고 꼬리뼈에서 생식기 끝까지 연결된 중앙 에너지 통로가 있다. 3개의 줄기[수슘나, 이다, 핑갈라]로 이루어져 있는 중앙 에너지 통로는 정수리, 목, 심장, 하복부[단전], 생식기 부위에 있는 바퀴 모양의 차크라[에너지 센터] 중앙을 관통한다. 그리고 이 중앙 통로에는 72,000 개의 부수적인 에너지 순환 통로가 연결되어 있으며, 이 작은 에너지 통로들이 온 몸에 퍼져 있다. 에너지 통로로 에너지 센터를 묘사하고 있는 그림은 종류가 다양하다. 수행자마다 자기가 특별히 계발하고자 하는 내적 감각이 다르기 때문에, 묘사하는 방법도 자연히 달라진 것이다.

에너지 통로 내부에 흐르는 에너지를 프라나[氣 또는 숨]라고 한다. 프라나는 5가지 주요 프라나와 5가지 부수적인 프라나로 나뉜다. 그리고 각 프라나는 모양, 크기, 색깔, 기능, 성격이 다른데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므로 생략하겠다. 단, 이런 여러 종류의 프라나의 상태에 따라 몸의 기능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과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계발하는 열쇠라는 사실 하나만은 강조해 두기로 하자.

빈두[精液]는 각성-전달 물질로서, 생식과 관련된 일종의 화학적인 엣센스[精]이다. 빈두가 어느 차크라에 도달하느냐에 따라 의식 상태에 변화가 생긴다. 예를 들어 칼라차크라 시스템의 경우, 4종류의 빈두에 대한 체계가 있다. 깨어 있는 상태로 활동하는 동안에는 빈두가 이마나 배꼽[丹田]에 있다. 그래서 깨어 있다는 생각과 자아 의식을 갖도록 만든다. 꿈꾸는 동안에는 빈두가 목이나 꼬리뼈 부근에 있으면서, 꿈 체험의 진원지 역할을 한다. 깊이 잠들었을 때에는 빈두가 심장 의식 센터 주위나 생식기 중심에 자리 잡고 편안한 휴식을 체험하도록 만든다. 마지막으로 4번째 상태의 빈두는 심장 센터 중심이나 생식기 끝에 머물며, 깨달음으로 인한 희열과 지복감 또는 성적인 오르가즘의 근원이 된다. 수행자는 빈두의 활동과 역할을 이해함으로써 각성에 수행의 초점을 맞출 수 있고, 또 일상적인 체험과 깨달음의 강도를 높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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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서 39쪽 그림(차크라 모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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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6. 미묘한 몸을 구성하는 에너지 통로와 차크라>

미묘한 몸의 신경 시스템을 묘사한 그림이다. 3개의 중앙 통로와, 그 통로를 따라 5개나 6개 또는 그 보다 많은 신경 에너지[의식] 센터가 배치되어 있다. 신경 에너지 센터에는 이 그림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72,000개의 부수적인 에너지 순환 통로가 연결되어 온 몸에 퍼져 있다. 이 그림에서 보듯, 요가 수행자들이 계발한 인간의 자기 이미지는 에너지와 의식이 회전 운동을 하는 역동성과 민감성을 가지고 있다. 경직된 에고 의식이 결코 아니다.


<도표 7. 미묘한 차원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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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마음      경험상의 유추      관련된 본능적인 행위  또는 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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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직관        밝은달빛           욕망에서 비롯되는 33가지 본능적인 행위

2단계 직관        밝은 햇빛            공격성에서 비롯되는 40가지 본능적인 행위

3단계 직관       어두움             무지에서 비롯되는 7가지 본능적인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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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차원의 마음은 에너지 통로와 프라나[氣]와 빈두[精液]로 구성되어 있는 미묘한 몸의 주체로 보면 된다. <도표 7>은 3가지 상태로 나타나는 미묘한 차원의 마음과, 그에 관련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의) 80가지 본능적인 행위를 요약한 것이다. 1, 2, 3 단계의 직관은 미묘한 몸이 특정한 상태에 도달할 때 나타나는 마음 상태이다.


티벳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이런 미묘한 마음이 있으며, 누구나 이 세계를 체험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미묘한 차원의 몸과 마음을 체험적으로 알고 느끼기 위해서는, 이 차원에 대한 각성을 키우는 특별한 훈련을 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존재의 가장 깊은 단계인 지극히 미묘한 차원[영적인 차원]이 있다. 이 차원에 이르면 몸과 마음이라는 이원성(二元性)이 사라진다. "투명한 빛을 발산하는, 에너지와 마음이 하나로 융합된" 불멸의 빈두[精液]가 이 차원의 몸과 마음이다. 불멸의 빈두는 설명하기도 곤란하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불멸의 빈두를 어떤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물질로 오해하면 안된다. 불멸의 빈두는 인간 존재의 지극히 미묘한 핵심으로써, 물질이면서 마음이고 마음이면서 물질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미묘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살아 있는 지성적인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불멸의 빈두는 영혼의 속알이다. 이 속알에서 발산되는 빛이 지성과 생명과 독자성의 근원이다. 지성과 생명과 독자성은 만물과 무한한 관계를 맺으며 변화한다. 하지만 영혼의 속알인 불멸의 빈두의 연속성은 끊어지지 않는다.

불멸의 빈두는 탐욕과 공격성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본능적인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모든 이원성(二元性)을 초월해 있다. 불멸의 빈두는 궁극적인 실재와 모든 붓다들의 진리의 몸과 하나이다. '불성(佛性)'이라는 말과 '불멸의 빈두'라는 말은 는 같은 뜻이며, <티벳 死者의 書>의 목표는 바로 이 불멸의 빈두 즉 불성을 체험적으로 깨닫는 데 있다. 티벳 불교의 닝마파(派)에서는 수행이 최고 단계에 이르면 존재의 가장 깊은 본래 상태에서 휴식하는 특별한 방법을 가르치는데, '위대한 완성'(the Great Perfection)이라고 부르는 그 특별한 수행의 핵심이 바로 불멸의 빈두 행법(行法)이다.

모든 생명체의 가장 깊은 차원에는 불멸의 빈두가 있다. 불멸의 빈두는 모든 존재의 생명이며 영혼이다. 끝없는 환생 과정은 불멸의 빈두의 끊어지지 않는 연속성 때문에 생긴다. 불멸의 빈두는 항상 열려 있는 해탈로 들어가는 문이다. 휘몰아치는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영혼의 속알인 불멸의 빈두는 늘 자유롭다. 불멸의 빈두는 평화롭고 투명하며 조화롭다. 불멸의 빈두는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다. 붓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 미소 지었다. 이 자리에서는 모든 붓다와 중생이 하나가 된다.

힌두교에는 에고 의식이 모두 부정된 자리에 남는 아트만[atman 眞我]과 파라마트만[paramatman 至高我]에 대한 개념이 있는데, 불멸의 빈두와 상당히 비슷하다.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결코 교리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이랄 수 있는 '비어-있음[空]'에 대해서조차 그랬다. 절대주의자들에게는 '비어-있음'에서 '빔'을 강조했고, 허무주의자들에게는 '있음'을 강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초기 불교가 '빔'에 매달린 반면, 후대에 탄트라와 티벳 불교가 '있음' 또는 '자아'에 대한 탐구로 방향을 바꾼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붓다는 인간을 수없이 반복되는 윤회 과정을 거치고 있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그에 따르면 고정 불변의 절대적인 자아는 없으며,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상대적인 자아만이 있을 뿐이다. 지극히 미묘한 불멸의 빈두에 대한 확실한 체험과 '비어-있음' 또는 '자기 없음'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은 그 내용이 같다. 그 자리에 도달하면 <마이트레야나타 Maitreyanatha>에 나오는 표현대로 '비어 있는 지고한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미묘한 차원을 철학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창조적으로 죽는 법을 수행하는 요가 체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 존재에 관한 도식만을 확실히 설명해 두는 것으로 그치기로 하겠다.


5. 죽음의 단계


앞에서는 세 차원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이제는 죽음의 여러 단계를 살펴 볼 차례다. 죽은 사람이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티벳 死者의 書>의 대전제이다. 죽는 사람은 소위 '8단계의 해체 과정'을 거친다. 죽음의 세계를 탐구한 티벳 사람들은, 죽는 사람이 아래에서 설명할 8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각 단계마다 그 단계에 해당하는 체험을 한다고 말한다. 해체의 각 과정에서 주관적인 체험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불교 요가를 닦는 남녀 수행자인 요기와 요기니들은 생명 에너지를 이해와 깨달음을 위해 쏟는 사람들이다. 죽음의 과정이 8단계로 진행된다는 모델은 그들의 수행 전통에서 확립된 것으로써, 죽음이라는 전이(轉移) 과정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계발하는데 아주 유용한 역할을 한다. 8단계 중에서 처음 4단계는 '25가지 거친 요소의 해체'로 다시 세분되는데, 이 단계에서는 다섯 무더기[五蘊]와 그에 관련되어 있는 깨달음의 에너지인 지혜가 해체된다.

첫 번째 4단계의 해체 과정을 25가지 거친 요소와 연관시켜 고찰하게 되면, 죽음의 과정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가능해 진다


<도표 8. 죽음의 단계 : 해체와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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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지 요소의 해체                      체험


1. 흙[地]이 물[水]로                    신기루

2. 물[水]이 불[火]로                    연기

3. 불[火]이 바람[風]으로                반딧불

4. 바람[風]에서 의식[空]으로            밝은 촛불

  (거친 차원의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마지막 단계)


5. 거친 차원의 의식이 1단계 직관으로    달빛 밝은 하늘

6. 1단계 직관에서 2단계 직관으로        햇빛 찬란한 하늘

7. 2단계 직관에서 3단계 직관으로        순수한 어두움

8. 3단계 직관에서 투명한 차원으로       투명한 새벽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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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형성하고 있던 흙[地]이 물[水]로 해체되는 1번째 단계에는, 분명한 형체를 가지고 있던 몸이 묽은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지며, 따라서 사지[色]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음을 느낀다. 이때 망상과 관련된, 거울과 같은 지혜가 해체되고 시력이 떨어진다. 모든 것이 비오는 날 젖은 도로에 반사되는 영상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2번째 단계인 물[水]이 불[火]로 해체될 때는 액체처럼 흐물흐물하던 몸이 건조되어 말라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온 몸이 언 것처럼 감각 작용[受]이 마비된다. 이때 집착이나 자만심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평등하게 봄으로써 좋고 싫음을 초월하는 지혜가 감각과 함께 사라진다(동시에 집착하는 힘이 사라진다). 청각이 소멸되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며, 연기가 자욱한 방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3번째 단계인 불[火]이 바람[風]으로 해체될 때는 추위를 느낀다. 이때 욕망이나 정욕과 관련된, 분석하는 지혜가 흐릿해 진다(동시에 욕망과 정욕의 힘이 사라진다). 들숨이 약해지면서 후각이 떨어져 더 이상 냄새를 맡지 못한다. 이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주위가 온통 반짝거리는 반딧불로 뒤덮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또는 폭죽이 터질 때 퍼지는 불똥 같은 것으로 뒤덮인 공간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4번째 단계인 바람[風]이 의식 공간[空]으로 해체될 때는 숨이 멎고, 온 몸을 돌고 있던 에너지가 중추 신경계로 모두 철수한다. 이때 시기심이나 경쟁심과 관련된, 모든 것을 성취하는 지혜가 소멸된다(동시에 의지와 충동의 힘[行]이 사라진다). 혀가 굳고 미각이 사라지며, 피부의 감촉과 더불어 육체 의식이 사라진다. 이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마치 촛불을 켜 놓은 것과 같은 밝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의학적으로는 이 때부터 죽은 것으로 취급된다. 육체의 기능이 모두 정지하고, 두뇌와 순환계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친 차원의 의식은 거친 차원의 육체 기능이 모두 멈춘 다음에도, 80가지 본능의 힘과 더불어 3단계로 이루어진 미묘한 마음 차원에서 계속 활동한다. 거친 차원의 의식은 5번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해체된다.

5번째 단계에 이르면 80가지 본능적 행위에 힘을 불어넣던 프라나[氣 또는 에너지]가 중앙 통로로 철수한다. 그리고 남성 엣센스인 흰 색 빈두[흰 색 '영적 각성 물질']이 중앙 통로를 타고 정수리 차크라에서 심장 차크라를 향해 내려온다. 그러면 마음-공간이 밝은 달빛으로 충만한 하늘처럼 느껴진다. (이 단계에서 거친 차원의 의식이 사라지고 미묘한 마음의 1단계 직관이 나타난다.)

6번째 단계에는 여성 엣센스인 붉은 색 빈두[붉은 색 '영적 각성 물질']이 생식기 차크라에서 심장 차크라로 올라온다. 그러면 마음-공간이 붉은 태양 빛으로 충만한 하늘처럼 느껴진다. (이 단계에서 1단계 직관이 사라지고 2단계 직관이 나타난다.)

7번째 단계에는 미묘한 마음의 2단계 직관이 사라지고 3단계 직관이 나타난다. 이 단계에서 흰 색 빈두와 붉은 색 빈두가 심장 차크라에서 만나 의식을 에워싼다. 그러면 ‘마음-공간’이 칠흙같은 어두움으로 꽉 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지막으로 8번째 단계에 도달하면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사라진, 전혀 새로운 투명한 빛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도표 9. 단계별로 해체되는 무더기와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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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蘊]      지혜        요소[五大]    매체[六根]     대상[六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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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色]      거울 지혜   흙[地]        시각[眼]       형태[色]

   (1번째 단계에서 해체)


느낌[受]    평등 지혜   물[水]        청각[耳]       소리[聲]

   (2번째 단계에서 해체)


지각[想]    분석 지혜   불[火]        후각[鼻]        냄새[香]

   (3번째 단계에서 해체)


의지[行]    성취 지혜   바람[風]      미각[舌]      맛[味] 촉각[身] 감촉[觸]

   (4번째 단계에서 해체)


의식[識]   궁극적 지혜   공간[空]      마음[意]      비감각 대상[法]

     (5번째 단계에서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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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과정이 여기에 이르면 한 존재를 구성하고 있던 핵심 요소인, 심장 차크라에 있는 6겹의 매듭이 풀린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수태되는 순간부터, 좌우측 중앙 통로[이다와 핑갈라]가 심장 차크라를 6겹으로 단단히 에워싼다. 그리고 그 6겹의 심장 매듭을 중심으로 중추 신경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제 그 매듭이 풀리는 것이다. 6겹의 매듭이 완전히 풀리면 심장에 갇혀 있으면서 진화적 행위의 정보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지극히 미묘한 차원의 의식[靈]이 해방된다. 이 순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의 순간이며, 이 순간이 곧 죽음 중간계이다.

지극히 미묘한 차원의 의식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하다. 존재의 핵심인 지극히 미묘한 순수 의식의 빛은 유한과 무한, 시간과 영원, 주관과 객관, 자기와 남,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이원성(二元性)을 초월해 있다. 그 안에는 무지와 깨달음이라는 분별도 없다. 그 빛은 너무나 투명하기 때문에 생전에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은, 막상 그 상태에 도달해도 그 빛을 의식하지 못한다. 죽음의 단계를 밟는 사람은 3단계 직관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의식을 잃는다. 그런 다음 깜깜한 상태를 지나 새로운 의식 상태로 돌아오는데, 마치 깊은 잠을 자다 갑자기 깼을 때처럼 주변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몽롱한 상태로 돌아온다. 죽음 중간계를 통과하는 법에 대한 안내는 모두 이 순간에 주어진다. 즉 <티벳 死者의 書>에 나오는 죽음 중간계의 길을 안내하는 가르침은, 이승에서의 습관적인 삶을 떠나 지극히 미묘한 의식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 자유, 완전한 지성, 풍부한 감수성으로 충만한 존재의 본래 상태 즉 완전한 깨달음의 길로 안내하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연결점에서, 대부분은 완전한 무의식 상태로 여러 날을 보낸다. 3번째 단계의 직관을 거친 다음 무의식 상태가 되는데, 그 무의식 상태에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그 안에는 또 절멸될 것이 아닐까 하는 무의식적인 두려움도 깃들어 있다. 그래서 투명하게 맑은 빛이 자신의 가장 깊은 근원임을 인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빛 속에서 온 우주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강력하고, 안전한 존재들과 영적으로 하나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란과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거부한다. <티벳 死者의 書>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죽기 전에 죽는 훈련을 해 두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지 못했다면 죽음의 길을 가는 동안 그 길에 대한 안내를 받는 것이 좋다. 물론 수행이 전혀 없는 사람은 그런 안내를 받아도 자기 중심적인 본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고도의 에너지 위기 상황인 이 시기에 밀려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한 해탈을 이루기가 어렵다. 심장 차크라를 둘러싸고 있는 6겹의 매듭이 풀리는 순간은 대단한 위기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그 매듭을 점차 느슨하게 푸는 훈련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죽음의 길을 가는 동안 거치는 매듭이 풀리는 순간에, 자신이 해체되는 듯한 느낌에서 비롯되는 극심한 고통을 피할 수 있다.

이런 해체의 과정을 지나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맑고 투명한 빛 속에서 쉬지 못하며, 자신들의 본래 상태인 자유와 행복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또 자신이 모든 생명체와 기쁨을 나누는 무한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의식은 맑은 허공을 가로질러, 해체 과정과는 반대 순서를 밟아 다시 거친 육체의 세계로 되돌아온다.

죽음의 과정과 반대 순서로 진행되는 환생 과정은 이렇다. 먼저 투명한 빛 속에 있던 의식이 몽롱한 흑암 상태의 3단계 직관이 된다. 다음에는 밝은 햇빛 같은 2단계 직관과 밝은 달빛 같은 1단계 직관 상태를 통과한다. 본능적인 직관 단계를 지난 다음에는 자신의 영적인 유전자 - 각 사람의 영적인 유전자[씨]의 특성은 전생의 행위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 속에 암호처럼 기록되어 있는 진화 패턴의 이미지에 따라, 5가지 근본 요소[地, 水, 火, 風, 空]를 취해 존재를 재구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몸과 마음은 한동안 꿈 속의 존재처럼 유동성을 갖고 중간계에 머문다. 그러다가 연꽃이나 자궁이나 알이나 축축한 곳에 깃들어 거친 차원의 존재로 구체화된다.

중간계 기간의 에너지 체(體)는 매우 미묘하고 유동적이다. 의식의 힘도 강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지성적인 상태에 있다. 따라서 이 때야말로 <티벳 死者의 書>의 내용을 읽어 주거나 정신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최적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환생 과정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처참한 존재 상태로 태어나는 것을 막고, 바람직한 상황에 태어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것이 <티벳 死者의 書>라고 알려진 <中間界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책>을 지은 사람이 의도했던 가장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이다.

중간계에서는 의식이 마치 유령과 비슷한 중간계의 몸을 갖고 있다. 그 몸은 마음의 이미지가 만들어 낸 일종의 에너지 체(體)로, 우리가 꿈 속에서 경험하는 미묘한 몸과 비슷하다. 그러나 아무리 미묘해도 몸은 몸이며, 그 몸이 해체 순서의 반대 과정을 밟아 자궁 속에 수태되는 순간 거친 차원의 몸으로 변한다. 그때 일종의 '작은 죽음 과정'(minideath process)을 체험한다.

앞서 설명한 대로, 죽음의 8단계 해체 과정은 이승 중간계의 몸이 투명한 의식의 빛으로 전이해 가는 과정을 밟는다. 그런데 (저승 중간계의 입장에서 보면 이 역시 해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환생이라는 8단계 해체 과정은 죽음의 과정과는 반대로 투명한 의식 상태에서 점차 거친 차원의 몸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실제로 우리는 깊은 잠에 빠지고, 꿈을 꾸며 꿈 속에서 꿈을 현실로 여기고, 또 꿈에서 깨어나 거친 차원의 몸으로 되돌아 올 때 해체 과정을 경험한다. 보통은 그 과정의 전이(轉移)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중간계와 관련된 명상 수행에서는 이런 각 과정의 전이를 충분히 의식하는 상태에서 천천히 경험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떤 상태로 옮겨가든지 명료한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고도로 집중하여 깨어 있는 훈련을 한다. 이것은 티벳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일구어 낸 죽음에 관한 과학으로서, 그들은 죽음에 관한 이러한 도식을 마음 속에 늘 간직하고 마스터하고자 한다.


6. 해탈이란 무엇인가?


의학은 의술의 바탕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과학은 죽는 방법의 토대가 된다. <티벳 死者의 書>를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죽음의 과정을 탐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분명히 이해하여야만 한다. '그 자리에서 해탈'이라는 말에서 '해탈'이란 무슨 뜻일까? 만물의 궁극적인 실체가 비어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자유라는 뜻인가? <中間界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책>이 약속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해탈'이란 일종의 '완전함'을 가리키는 말인가? 아니면 '기쁨'이나 '현상계에 다시 태어나지 않음' 또는 '고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불교는 과연 현실 도피적인 종교이며 <티벳 死者의 書>는 현실 도피를 위한 일종의 처방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불교 자체에도 해탈과 자유에 관한 이론이 하나 둘이 아니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4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중에서 3번째인 니로다(nirodha)의 문자적인 뜻은 '단절'인데, 고통의 단절[滅]을 의미한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도달하는 궁극적인 실재 상태를 가리키는 니르바나[涅槃]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촛불이) 꺼짐' 또는 '사라짐'이다. 붓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 모습의 지적인 금욕주의가 퍼져 있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영적인 분위기였다. 금욕주의자들은 깨달음이 없는 삶에서 비롯되는 속박에 넌더리를 치며, 강력한 초월적인 사마디[三昧]를 통해 몸과 마음을 절멸시키고자 했다. 붓다가 이원적인 냄새가 풍기는 니르바나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붓다는 니르바나가 마치 금욕주의자들이 그렇게도 열렬히 갈구하는 최종적인 초월 상태인 것처럼 말했다. 그가 그런 가르침을 펼 때 그는 이미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에 도달한 붓다였다. 그는 인도 전역을 돌면서 가르침을 펴는 동안에도 결코 니르바나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현실적인 존재인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죽음을 '궁극적인 니르바나(parinirvana)'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와 해탈을 일종의 현실 소멸이라고 생각하는 다분히 개인주의적인 이원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자기 중심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은 -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한데 - 자기라고 하는 고립된 존재가 있으며, 습관적으로 그게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그들 속에는 망각에 대한 은밀한 갈망이 깃들어 있다. 그들에게는 망각이 혼란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한다. 그들은 그런 망각 상태에 도달하면 소란스러움도 없고, 책임지고 돌보아야 할 가족도 없고,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괴로움도 없으며, 따라서 진정한 기쁨을 맛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들은 위험한 요소나 상처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망각 상태에 이르면 말 그대로 모든 괴로움이 잊혀질 것으로 본다.

그런가 하면 현대인들 중에는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적인 절멸주의와 현실 도피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며, 현실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강하게 현실 참여를 부르짖는 것은, 근본적으로 망각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 내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망각이 찾아 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따라서 망각 상태가 되면 모든 것이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지옥이니 뭐니 얘기하는 것은 씨가 먹히지 않는다. 반면에 자멸을 초래하는 전쟁이나 마약 중독 또는 니코틴이나 알코올 중독을 통해 멸망을 향해 치달리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다. 지금 이러한 절멸주의가 온 세상을 휩쓸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내면을 살펴보면, 이런 절멸주의자들의 행동은 단절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 상황이 이러하므로, 니르바나를 마치 행복감이 넘치는 지고한 망각 상태인 양 말하는 것은 상당히 기민하고 효과 있는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무(無)를 탐닉하고 공허한 사마디를 추구하는 사람을 이런 방법으로 이끌어 들인 다음, 사라지는 것은 삶이 아니라 무지와 오해와 에고에 대한 집착과 주관과 객관을 가르는 망상일 뿐임을 알려 주어, 그들의 삶이 영속적인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면 이 방법이야말로 더 없이 훌륭한 방법이지 않겠는가. 에고라는 올가미를 뒤집어쓰고 누리는 세상의 자그마한 행복은, 현실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여 누리는 행복에 비하면 허접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에고의 껍질을 깨고, 현실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궁극적인 희열이 보너스로 따라 온다. 이 희열이 진정한 의미의 해탈이고 자유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독립된 고정 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와 사물이 무한하고 영원한 관계의 그물로 짜여 있음을 안다. 무와 망각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고, 자신의 운명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다른 존재들과 끝없이 얽혀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행복을 서로 나누고, 사랑을 베푸는 삶이 시작된다. 그렇게 나누고 베풀어도 자신이 누리는 궁극적인 니르바나의 자유와 희열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다른 존재들과 사랑의 결합을 하는 것과 자신이 개인적으로 누리는 기쁨이 하나라는 사실은 이원론적인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자유와 기쁨을 자발적으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위해 바치는 사람은 그렇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단절, 소멸, 종결, 그리고 자아 도취로부터의 해방은 진정한 행복과 참 사랑과 무한한 기쁨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티벳 死者의 書>의 저자가 말하는 '해탈'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한층 수월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상황이 이러하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티벳 死者의 書>가 말하는 해탈을 죽은 다음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유물론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일종의 망각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크다. 해탈이 만약 그런 종류의 망각이라면 그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나 삶을 변형시키는 가르침은 필요성도 없고 존재할 가치도 없으리라.

요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에 속하는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8장을 보라)에서 뽑은 짤막한 철학적인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파드마 삼바바는 여기에서 모든 종류의 불교가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해탈, 니르바나, 진리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세 점의 시간의 문을 통과하려면 -

과거는 맑고 텅 비어 자취도 없으며,

미래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것이며,

현재는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일 뿐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시간이 이러함을 알고,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을 볼 때,

투명한 보는 행위만 있을 뿐

보이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투명한 바라봄이

있는 그대로를 직접 바라보는, 밝은 지성이다.

이 지성이 바로 아무 것도 첨가되지 않은 맑은 공(空)이며,

이원성이 사라진 투명하고 순수한 공(空)이다.

이 상태는 어떤 고유한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이 상태는 밝고 분명하다.

따라서 완전히 멸절된 상태가 아니다.

이 상태에서는 다양한 것이 동시에 식별된다.

따라서 일종의 단일체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라는 생각이 없고,

나눌 수 없는 하나라는 느낌이 든다.

이 상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각성이며,

있는 그대로의 실체다.


이 구절은 니르바나의 궁극적인 실상을 묘사하고 있다. 니르바나는 '위대한 완성'의 영역이자 진리의 영역이다. 또 궁극적인 자유와 해탈이며, 불성(佛性)을 향한 진화의 정점이다.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것은 <티벳 死者의 書>에 담겨 있는 모든 가르침의 목적이기도 하다. 원칙적으로 보면 니르바나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일상적인 상황일지라도, 니르바나는 모든 현재 상황의 내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 니르바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을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보는 행위 자체를 주시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 속에 자아라고 하는 고정 불변의 독립된 알맹이가 있고, 그대의 생각과 행위가 거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점을 180도 바꿔서, 보는 행위 자체를 보려고 해 보라. 그러면 그대라고 하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데카르트도 이런 사실을 알았다. 그는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생각이 시작하는 지점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인식 주체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서, 발견할 수는 없지만 인식 주체라는 알맹이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 행위가 일어난다고 거칠게 주장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지만,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고 기정 사실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발언은, 끝까지 의심하기를 포기한 게으른 불교 철학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데카르트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보는 행위 자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보는 자'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실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시작되는 지점을 찾아내기 위해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의 분별이 사라지고, 보는 행위만 투명한 상태로 남는 단계에 도달한다. 그 투명성은 무한대로 확장되어 나간다.

인식 주체는 발견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맞다. 그러나 주체가 없다면 대상도 없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주체가 다른 대상을 확실하게 인식한다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보는 행위 자체를 응시하는 통찰 속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분별이 녹아 버리고, 모든 것이 자유로운 상태로 투명하게 존재한다. 이 투명성이 바로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있는 그대로를 직접 바라보는 순수한 지성'이다. 이 상태는 밝고 분명하며, 직접적이고, 비이원적이며, 어떠한 고유한 성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는 비어-있음[空]이면서도 비어-있음[空]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그 어떤 고유한 성질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명료한 지적인 각성은 멸절되지도 않고 망각되지도 않는다. 또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실재인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것에 의지해서 존재하거나 또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그런 이원성의 실재가 아니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이 자유로운 상태를 맛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자리에서 해탈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사람의 진정한 본성인 영원 불변의 금강실체(金剛實體)이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붓다이다. 불성(佛性)은 힘들여 만들어 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 자체가 이미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은 모든 것이 소멸되어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영역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사물이 투명한 상태로 존재하는 '비어-있는'[空] 영역이다. 영혼 속에는 아무 것도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투명한 비어-있음 속에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과 기쁨을 나누는 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 관계의 폭과 깊이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우리들 내면의 붓다의 진리의 몸(지혜와 자유), 우리들 내면의 붓다의 깨달은 몸(기쁨과 희열), 그리고 우리들 내면의 붓다의 나투는 몸(자비와 사랑)은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본성이 자유와 기쁨과 사랑임을 깨닫도록 돕는다.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존재와의 이 객관적인 동일시 속에는

나누어질 수 없는 (붓다의) 세 몸이 온전히 담겨 있다.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진리의 몸,

빛과 자유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깨달은 몸,

모든 곳에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나투는 몸이

그 속에 하나로 깃들어 있다.

이 셋이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이것이

곧 실재의 모습이다.


이렇게 볼 때 <티벳 死者의 書>가 목표로 하고 있는 해탈이 망각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진리의 몸은 우리들 저 너머에 초연하게 존재하는 몸이 아니다. 그 몸은 우리들 내면에서 무한한 지혜의 빛을 발산하며, 자신의 아름다움 속에 거하고 있다. 동시에 자신이 고립된 존재라고 느끼는, 에고에 중독된 처량한 존재들을 사랑과 자비의 힘으로 끌어안고 있다.

사람들은 <티벳 死者의 書>의 저자인, 연꽃에서 태어난[化生] 파드마 삼바바를 붓다의 세 몸이 세상에 나타난 존재였다고 믿는다. 그는 저 높은 곳에서 시나 읊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인간 현실 속으로 들어와서 자유와 해탈에 이르는 실제적인 통로를 알려 주었다. 그는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의 다른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실체 세계로 들어가는 강력한 방법을 터득하려면

지금 그대의 각성이 바로 실체 세계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그대 마음의 본성이 아무 꾸밈없이 명료한데,

그대는 왜 "나는 마음의 본성을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깊게 생각할 마음이라는 대상도 없고,

그대의 지성이 스스로 밝게 빛나고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마음 속에 이미 생각하는 존재가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가?

(깨닫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대는 왜 "나는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가?

지금 있는 그대로 있으면 되는데,

그대는 왜 "나는 고요히 머물 수가 없다"고 말하는가?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만족할 수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명료함, 각성, 비어-있음은 그 자체로 나눌 수 없는 것인데,

그대는 왜 "수행이 효과가 없다"고 수행을 들먹이는가?

모든 조건과 상황이 있는 그대로 자유롭고 자발적인데,

그대는 왜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생각과 해탈은 동시적인데,

그대는 왜 "벗어날 길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대의 지성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이 가르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을 해탈과 연결시키고 있다. 표현도 아주 단순 명료하다. 이 구절들은 중간계의 여행을 안내하는 <티벳 死者의 書>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에고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 그런가'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공백을 만들어 준다. 그리하여 에고를 벗은 자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 각 구절은 에고의 독단과 자기 연민 그리고 스스로 해탈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도전하면서, 동시에 지겨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든든한 토대 위에 서도록 유도하고 있다. 현대 서구 문화 속에 깊이 스며 있는 영적인 허무주의를 강화시키는 내용으로 오해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비어-있음'과 '없음'의 차이를 알고 '해탈'과 '망각'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이 가르침은 전혀 해로울 게 없다.

이제 지금까지 쌓은 토대를 발판으로, 티벳 사람들이 수행하고 있는 창조적으로 죽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 제 3 장 □

티벳 사람들이 행하는 죽음 연습


1. 서론


<티벳 死者의 書>를 현실적으로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담겨 있는 과학적인 차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이 티벳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첫째, 티벳 사람들은 이 책을 죽음의 실체와 체험에 대한 과학적인 안내서로 본다. 그들은 이 책을 죽음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현재의 행동이 죽음의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죽음을 경험하게 될 때 어떻게 대처해야 될 지를 알려 주는 책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하고, 대처하도록 도와준다.

둘째, 티벳 사람들은 이 책을 두 가지 면에서 영적인 수행의 지침서로 여긴다. 먼저, 요기와 요기니들은 죽음이라는 위기 상황을 자신만만하고 능숙하게 건너가는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 이 책의 도움을 받는다. 다음으로, 죽음에 대한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고 느끼며, 자신 있게 죽음을 맞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깨달음의 세계에 거하는 신적인 존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일종의 종교적인 역할을 한다. 낯선 땅을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준비물, 여행 중에 만나게 되는 위험과 장애 요소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안내서가 필요하다.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안내서 없이 낯선 땅을 향해 출발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티벳 사람들은 이 생을 떠나 미지의 중간계로 들어 갈 때 안내서가 없이는 가려고 하지 않는다.

죽음의 과정에 대해서는 앞 장에서 설명했으므로, 이 장에서는 죽음에 대한 준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저승 중간계를 성공적으로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윤리적인 관성, 관조하는 기술, 실체를 통찰하는 능력 등을 키우는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런 것을 설명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로 <티벳 死者의 書>의 틀에 따를 것이지만, 간혹 확고하게 성립되어 있는 티벳의 다른 가르침도 소개하게 될 것이다.



2.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준비


오! 이제 이승 중간계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구나.

게으름을 버리고, 마지막 인생이라는 생각으로 살리라.

배우고, 생각하고, 명상하는 수행자의 길에 꿋꿋이 서서

현상과 마음의 실체를 밝히고,

깨달음의 세 몸을 실현시키고 말리라!

일단 인간의 몸을 입게 되면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리니,

허접 쓰레기 같은 것은 좇아 다니지 않으리라.

(여섯 중간계에 들어가기 전에 드리는 기도[眞言],     쪽)


준비를 잘하지 않으면 잘 죽을 수 없다. 어떤 여행이든지, 여행에는 항상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티벳 死者의 書>는 죽음이라는 여행을 위해 살아 있을 동안 최소한 5가지는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보, 상상, 윤리, 명상, 그리고 지적인 차원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기본적인 정보 차원의 준비란, 죽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준비는 죽음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탐구함으로써 할 수 있다. 죽음에 관련된 여러 가지 중요한 도식을 이해하고, 죽음이 언제 닥쳐오더라도 자기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억 속에 완벽하게 담아 놓는 준비가 바로 정보 차원의 준비다.

두 번째 상상 차원의 준비란, 죽음 이후에 오는 세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상상의 힘을 키우는 것을 말한다. <티벳 死者의 書>는 이 준비를 돕기 위해 여러 불교 전통의 가르침을 이용하고 있다. 불교가 상대적으로 억압을 받지 않는 사회, 특히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나온 불교 문헌 속에는 천상계나 신들의 세계 또는 눈에 숨어 있는 낙원 등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표현이 풍부하다. 물론 이런 표현은 모든 종교 전통에 다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내면 세계에 몰두한 신비주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 군사 패권주의, 그리고 산업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서구 사회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천상계의 기쁨에 대한 개인적인 상상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신비가들이 이단자 취급을 받곤 했다. 그러나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와 졌고, 그에 비례하여 사회적인 억압도 느슨해졌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상계에 대한 환상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분위기가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졌다. 현재로서는 기쁨의 세계를 상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분위기가 일반 예술이나 종교 예술을 막론하고 모든 예술 분야에 널리 퍼져 있다.

예를 들면 기쁨이 넘치는 아미타바 붓다의 순순한 땅[極樂淨土] 수카바티와 같은, 천상에 있는 붓다의 땅을 묘사하고 있는 경전이나 글을 읽는 것은 죽음을 대비하는 아주 중요한 준비가 된다. 환경 전체가 붓다인 상태를 일컫는 붓다의 땅은 유한한 개체가 무한한 깨달음의 몸으로 진화-변형하여, 에고가 사라지고 만물이 일체가 된 상태를 상징한다. <티벳 死者의 書>에 의하면, 죽은 자의 영혼을 자신의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붓다가 어떤 특정한 방향에서 나타난다. 이 때를 대비해서 경전이 말하고 있는 여러 붓다의 낙원들 중에서 어느 하나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상상하는 훈련을 해 두는 것이 좋다. 붓다의 땅에 대한 묘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상상력을 매혹적으로 자극한다. 그것들은 지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행복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 준다. 그런 이야기를 읽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장차 나타날 장엄하고 놀라운 영광을 맞을 준비가 된다.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자기들 종교 내의 신비가들이 본 환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고 상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화려한 천국의 진 주문을 상상하는 훈련 같은 것이 좋은 준비가 될 것이다. 종교와 무관한 사람이라면 사후 세계에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특히 죽음과 비슷한 근사(近死) 체험을 한 사람들의 경험담이나 죽음 이후의 체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읽어보는 것이 좋으리라. 위험과 모험이 뒤따르는 극적인 세계를 통과한 다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이상한 세상에 도달했다는 식의 공상 과학 소설도 죽음을 대비한 상상 차원의 준비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세 번째 윤리적 차원의 준비란, 죽음이 눈 앞에 있다고 가정하고 행동 방향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훈련을 말한다. 구석에 쳐 박혀 무서워 벌벌 떨라는 말이 아니다. 이 훈련을 하면 삶을 더 즐길 수 있고 더 강렬하게 살 수 있다. 이 훈련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죽으면 모든 재산과 가족은 물론 그대의 몸 마져도 잃는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대가 사로잡혀 있는 그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놓아 버리는 훈련을 한다면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윤리적 차원의 준비는 관대함, 동정심, 인내를 키우는 수행으로 이루어진다. 이 세 가지 수행은 모두 죽음에 대한 중요한 준비가 된다. 그러나 <티벳 死者의 書>에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불교 사회에서는 이런 수행을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덕성은 서구 사회의 종교에서도 가르친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이런 윤리적 덕성이 절대자와의 만남에 대한 준비가 될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주는 것을 통해 관대함을 키우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대에게 별로 관심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얼마나 비싼 것을 주었느냐 가 중요한 게 아니다. 주는 행위를 통해 그대가 극복하는 것은 정신적인 집착이다. 따라서 문제는 양이 아니라 질이다. 순간적인 감정에 휘말려 알거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게 된다. 물건이 아니라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작은 것을 주더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놓아 버릴 때 일어나는 정신의 변화 과정을 관찰해야 한다.

대인 관계를 부드럽고 원만하게 함으로써 동정심을 키우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대는 언제라도 죽어 이 자리에 없을 수 있다는 점을 늘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에 늘 관심을 기울여라. 그들로부터 무엇을 취하는 데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 질투심이 일어나면 면밀히 관찰해 보라.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이 질투심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 질투심이 그대의 마음을 얼마나 속박하고 있으며, 또 상대방을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에 그대 행동의 초점을 맞추라. 육체 차원을 즐거움이 아니라 그들의 진정한 행복에 관심을 두라. 자신 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라. 모든 관계는 일시적이다. 그러므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몸에 대해 편안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인내심을 키우는 수행을 해야 한다. 몸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라. 꼭 필요하지도 않는 것을 위해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몸이 혹사당한다.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일까를 염려하지 않을 때의 그대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당당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거울을 보라. 그리고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입술이 오그라들며, 피부는 탄력을 잃고 부패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라. 그러나 이런 병적인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마라.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음을 느끼도록 하라. 그대의 결점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몸을 돌보되 강박 관념을 갖고 사로잡히지는 마라. 예민하게 깨어 있으되 광기로 들뜨지는 마라. 그리고 어려움을 견디는 인내심을 키우라. 사고를 당하면 어쩌나, 누군가가 해꼬지를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지 마라. 모기가 문다고 화 내지 마라. 모기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위험으로부터 그대를 보호하라. 그러나 그 일에 몰두하여 넋을 잃지 않도록 하라. 고통과 난관을 인내심과 포용력을 키우는 기회로 삼아라. 그리하여 점점 더 큰 어려움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을 기르라. 한꺼번에 하려고 하지 마라. 자기 학대는 자아에 대한 더 큰 집착을 낳는다. 그런 방법을 실패할 수밖에 없다.

넷째로, 그대는 죽음에 대비하여 명상 차원에서 준비를 할 수 있다. 명상을 위해 좋은 스승을 찾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명상 그룹에 가입하거나, 종교를 바꾸거나, 일상적인 삶의 패턴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수행을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시도는 생명력이 길지 못할 뿐만 아니라,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기 어렵다. 이 책 이전에 번역된 <티벳 死者의 書>에는 명상 차원의 준비에 대한 안내가 없다. 죽음의 과정이 시작되는 순간과 그 이후에 전개되는 중간계 과정에 사용할 수 있도록 번역되어 있다.  물론 <티벳 死者의 書> 자체에도 명상 차원의 준비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다. 티벳 사람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명상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 인정하고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상 차원의 준비는 살아 있을 동안, 명상의 가치를 인식한 순간부터 시작해야 한다.

명상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고요하게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균형 잡힌 자세로 편안하게 앉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리를 틀고 결가부좌 자세로 바닥에 앉는 것이 좋다. 결가부좌 자세로 앉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자세로 앉으면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꼭 결가부좌가 아니라도 균형 잡힌 자세로 앉아서, 5분이나 10분 정도 집중하는 훈련을 한다. 처음에는 호흡을 세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일어났다가 제멋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 생각에 끌려들어 가면 안된다. 이 훈련은 편안한 상태를 즐기는 동안에 끝내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곤해질 때까지, 지루하게 계속하는 것은 좋지 않다.

편안한 상태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되면, 어떤 대상을 정해 놓고 집중하는 훈련을 시작한다. 불교인이라면 자그마한 佛像이 좋을 것이고, 기독교인이라면 그리스도의 聖像이 좋으리라. 이슬람 교인이라면 성스러운 문자를 선택할 수 있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모나리자나 꽃이나 천체 사진 같은 것도 집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고, 정신을 대상에 집중한다. 마음 속에서 생각이 일어나거나 감정의 변화가 생겨도 신경 쓰지 말고 대상에만 집중해야 한다. 처음에는 마음이 이리저리 흩어지기 때문에 실망하겠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계속 훈련해야 한다.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갖다 싶으면 즉시 다시 대상을 향해 돌이키는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조금씩 조금씩'.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 훈련의 목적은 마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능력을 키우고, 집중력을 통해 마음의 힘을 키워서 감정과 반응을 조절하는 능력을 증진시키는 데 있다. 이 훈련은 마음과 육체의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건강을 증진시켜 준다. 또 무엇을 성취하는 능력도 강화시켜 준다. 이 훈련을 하고자 한다면, 이 훈련에 대한 보다 정교한 가르침을 소개하고 있는 최근에 출판된 여러 책들을 참고가 될 것이다.

집중하여 마음을 가라앉히는 훈련은 다음 단계의 명상을 위해 도구를 마련하는 것과 같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훈련만으로는 깊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는 내적으로 통찰하는 명상을 해야 한다. 내적으로 통찰하는 명상은 죽음을 대비한 결정적인 준비라고 할 수 있다. 내적으로 통찰하는 명상이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하는 훈련을 통해 강화된 마음을 사용하여 실재와 환경과 자아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명상은 의식이 온전히 각성된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과 육체를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주시하는 훈련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수행은 집중의 대상이 자신의 마음과 육체로 바뀌었다는 것을 빼면, 객관적인 대상에 집중하는 앞 단계의 명상과 비슷하다.

이 단계에서는 마음과 육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천천히 세밀하게 관찰한다. 어떤 식의 반응도 보여서는 안된다. 마음과 육체를 주시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다섯 무더기[五蘊]와 같은 도식을 염두에 두고 그것들 하나 하나에 대해 주시하는 훈련을 한다. 그리고 그대의 진정한 자아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본다. 그대는 아마 '나'라고 하는 고정된 주관적인 존재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 깨달음은 해탈로 인도하는 문인 '자기-없음'(無我)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이 명상은 대단히 복합적이다. 이 명상에 대한 가르침 또한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요점은 간단하다. 즉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 과정에 대해 명민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수행은 항상 깨어 있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된다. 깨어 있을 수 있는 힘이 커지면, 의식이 각성된 상태로 꿈을 꿀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수행은 의식이 각성된 상태로 중간계를 체험하기 위한 중요한 준비가 된다. 내적으로 통찰하는 명상은 생각과 감정 등을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망상을 제거한다. '나'라고 하는 절대적인 존재는 없으며, 그것은 일시적인 구조물일 뿐임을 깨닫게 해 준다.

명상을 통해 얻은 내적인 통찰력은 죽음 순간에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티벳 死者의 書>에는 무엇이 나타나도 두려워하거나 정신을 잃지 말라는 권고가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다. 이 권고는 어떤 일시적인 상황에 휘말려 그 상황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습관을 버리고, 전개되는 현상을 냉철한 눈으로 주시하라는 뜻이다.

명상의 세 번째 형태는 마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치료-명상이다. 예를 들어 사랑에 대해 명상한다고 하자. 그때 그대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련성을 관조하게 된다. 이 명상에서는 다른 존재에 대한 반감을 제거하고 그들은 아름다운 존재로 보려고 애써야 한다. 대상이 어떤 존재이든, 그대에게 무슨 의미가 있든, 그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대에게 유익이 있든 없든, 또는 아름답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그대의 사랑의 힘이 강화된다. 쉽게 화내는 습관을 고치고, 관용을 키우기 위해 인내에 대해 명상할 수도 있다. 집착을 떨쳐 버리기 위해 명상할 경우에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제일 좋다. 죽음을 생각하면 소유에 대한 집착이나 이 세상 일에서 한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명상의 네 번째 형태는 시각적인 상상이다. 이 명상에서는 바람직한 환경과 사건을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이 명상을 통해서는 죽음 이후에 직면하게 될, 전혀 새로운 상황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시각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 범위가 넓다. 평화롭고 안정된 가정을 그려 볼 수도 있고, 어떤 상황을 만나도 꿋꿋하게 헤쳐 나가는 자신의 믿음직한 모습을 그려 볼 수도 있다. 意識下意識 속에 쌓여 있는 좌절감을 극복하고, 금강석과 같이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성취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고, 신비스러운 만다라와 같이 완전한 환경이나 아름다운 붓다의 땅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그려보는 것도 좋다.

명상의 마지막 형태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명상이다. 이 명상에서는 일상 생활의 모든 행위가 영적인 방향을 향하게 한다. 본래 상태의 해탈을 조망하면서, 시간과 노력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영적인 성숙을 위해 사용한다. 그러면 아주 평범한 일일지라도 명상 수행을 위한 기회로 삼을 수가 있다.


오! 이제 꿈 중간계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구나.

시체처럼 우둔하게 망상 속에서 헤매는 잠을 떠나,

온전히 깨어 있는 상태로,

실체를 체험하는 흔들리지 않는 경지로 들어가리라.

꿈 속에서도 정신을 차려,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로 꿈을 꾸리라.

짐승처럼 정신을 잃고 잠에 빠지지 않고,

잠 속에서도 깨달음을 얻는 수행을 소중히 여기리라.

(여섯 중음계에 관한 기도[眞言],     쪽)


이쯤 되면 잠자는 것도 수행으로 연결된다. 잠드는 과정을 죽음 이후의 해체 과정에 대한 연습으로 삼을 수 있다. 일상적인 차원의 의식이 8단계의 해체 과정을 거쳐 깊은 잠 차원의 투명한 빛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나아가 꿈꾸는 상태를 중간계 경험에 대비한 준비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꾸는 동안 꿈을 꾸고 있다고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수행을 지속해 나간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꿈을 꾸면서 꿈을 꾸고 있다는 명확한 자각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죽음 이후의 중간계를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로 즉 자기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아는 상태에서 통과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일상 생활 중에 행할 수 있는 명상의 또 다른 형태로 만트라를 반복하는 아주 단순한 방법이 있다. '옴 마니 파드메 훔'(OM MANI PADME HUM)은 자비를 비는 만트라로써, '옴 - 연꽃 속의 보석이여! - 훔'이라는 뜻이다. 티벳 사람들에게는 이 만트라가 만사 형통을 기원하는 뜻으로 통용된다. 그들은 우주 속에 충만하게 깃들어 있는 붓다[아발로키테스바라]의 사랑과 자비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만트라를 외운다.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를 돕기 위해서도 이 만트라를 외운다. 따라서 이 만트라의 울림 속에는 긍정적인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티벳 사람들에게는 마음 속으로 또는 낮은 목소리로 '옴 마니 파드메 훔'을 외우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들은 이 만트라를 외울 때, 만트라와 아발로키테스바라(觀世音菩薩)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피부로 느끼는 법을 배웠다.

티벳 사람들은 명상 중에도 '옴 마니 파드메 훔'을 반복해서 외운다. 만트라를 반복하면 일상적인 의식 작용이 정지하고 의식의 지평이 만트라의 흐름과 하나가 된다. 이 만트라를 심장 차크라를 상징하는 바퀴에 새겨진, 보석으로 장식된 여섯 문자와 연결하여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수행자도 있다. 그들은 입으로 '옴 마니 파드메 훔'을 반복하면서, 보석으로 장식된 여섯 문자에서 다섯 지혜를 상징하는 무지개 빛이 비쳐 나와 온 우주 만물에 은총을 베푸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한다. 가슴에서 발산하는 다채로운 빛깔의 사랑 에너지의 흐름과 만트라의 흐름이 하나 될 때까지 그렇게 한다.

다른 만트라도 같은 방법으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자신의 종교가 유대교나 기독교 또는 이슬람교라면, 자기에게 맞는 짤막한 기도문을 만들어 만트라로 사용하면 된다. 만트라의 목적은 마음 속에 긍정적인 흐름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만트라를 반복하는 훈련은 특히 죽음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그 가치가 빛난다. 이 수행을 하면 모든 것을 저절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힘이 생기며, 간섭하지 않는 힘이 있으면 죽음에 임박해서 또는 중간계로 옮겨가는 중에 당황하지 않고 초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일상 생활 자체를 영적인 수행으로 생각하는 훈련도 중요한 명상 수행이다. 설거지할 때는 그릇 씻는 행위를 마음의 탐착을 씻어 내는 영적인 수행과 연결시켜, 설거지 자체가 기도가 되게 한다. 집을 지을 때는 마음 속에 천국을 건설하는 일과 연결시킨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낯모르는 사람을 볼 때는 붓다의 눈으로 붓다의 심정을 가지고 바라본다. 문을 열 때는 깨달음의 문을 연다는 심정을 갖는다.

죽음에 대비한 다섯 번째 준비는 지적인 차원의 준비다. 몇몇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불교는 결코 반(反)-지성적인 종교가 아니다. 지성은 자유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도구다. 지혜가 없이는 깨달음과 자유를 얻을 수 없는데, 지혜는 지성에서 나온다. 지혜가 빠진 명상, 사랑, 윤리적 실천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오랜 세월 배워야 한다. 배움은 학교에 몇 년 다니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지를 가르칠 뿐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의 공부는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삶, 자유, 자아 그리고 우주의 본성을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경전들이 있다. 특히 깨달은 자의 자비와 사랑, 비어-있음(空), 자아-없음(無我), 상호 연관성 등에 대한 가르침은 주목해서 배울 필요가 있다.

경전을 읽는 것은 세 번째 형태의 명상인 치료-명상과 직결된다. 경전을 통해 붓다의 순수한 땅[淨土]에 대한 이야기, 붓다와 그 제자들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 등을 읽으면 의식 속에 그 영향이 새겨지기 때문이다. 그대가 만약 다른 종교나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그 쪽 방면의 책을 규칙적으로 읽는 것이 좋다. 특히 죽음이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 세상과는 다른 영역에 대한 이야기에도 관심을 두라. 윤리적, 종교적, 지적 성숙을 도모하는 가르침에 주목하면서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읽어라. 종교와 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비판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로 집필된 과학 서적이나, 현대 심리학이 제시하는 자아 성장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는 것이 지적인 성숙에 도움이 될 것이다.


3. 죽음에 대한 특별한 준비

오! 이제 명상 중간계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구나.

이리 저리 흩어지는 산만함을 버리고,

마음을 풀어놓지도 않고 통제하지도 않는

궁극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초점을 맞추리라.

그리하여 창조 단계와 완성 단계를 확고하게 성취하리라.

이제 잡다한 생각과 행위를 포기하고,

한 점에 집중하는 명상 상태에 들리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탐착의 힘에 굴복하지 않으리라.

(여섯 중음계에 관한 기도[眞言],     쪽)


죽음과 삶의 영적인 목표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짐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앞에서 설명한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현실 생활에 초점을 맞춘 일반적인 준비에 만족하지 못하고 삶 전체를 바꾸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 땅에서의 삶 역시 중간계 과정이라고 여기고, 삶 전체를 바쳐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를 가속시키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불교 사회에서는 출가 수행자들인 비구와 비구니가 그들이다. 그들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일에 인생 전체를 바친 사람들이다. 가족과 친구를 버리고 집을 나왔으며, 음식과 의복도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한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도 관심이 없다. 쉽게 말해 깨달음을 위해 이 세상 즐거움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 서구 사회에는 그런 출가 수행자들을 받아들일 만한 시설이나 지원이 부족하다. 그래서 인생 전체를 바쳐 깨달음을 추구하려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을 개인적으로 조성해야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티벳에는 수행을 4단계로 구분하는 전통이 있다. 1단계는 준비 단계로서, 깨달음에 대한 외적인 가르침을 받는다. 2단계에서는 스승과 깊은 관계를 맺고, 개인적으로 비밀스러운 수행법을 전수 받는다. 3단계는 창조 단계로서, 창조적인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능력을 키운다. 마지막 4단계는 완성 단계인데, 이 단계에서부터 실제적인 변형이 시작된다. 4단계에 이른 요가 수행자들은 죽음 과정을 미리 체험하는 수행을 한다.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에는 1단계와 2단계 수행에 대해서는 암시만 되어 있을 뿐 자세한 언급이 없다. 티벳 사람들이 그 두 단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음을 인정하고 이야기를 전개시켰기 때문이다. 정교한 만다라를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훈련은 3단계 수행에 속한다. <명상을 통한 해탈>에 포함되어 있는 <본능의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은 3단계(창조 단계) 수행에 대한 가르침이다(본서 7장에 완역해서 실었다. 지금까지는 이 문헌이 외국어로 번역된 일이 없다).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에는 4단계(완성 단계) 수행에 관한 자세한 언급도 없다.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에 포함된 중간계 과정에 대한 가르침 속에 간간이 삽입되어 있을 뿐이다(      쪽을 보라).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의 사정은 이렇지만, 티벳의 다른 밀교 전통 속에는 4가지 수행 단계에 대한 방대한 가르침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붓다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에서 직접 유래되었다는 요가 탄트라 전통에 속하는 가르침이 제일 중요하다. 요가 탄트라는 죽음을 초월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 수행법은 파드마 삼바바 같은 고대 인도의 수행자들이 발전시켰고, 그들이 티벳에 전해 주었다. 그들 탄트라 수행자들은 붓다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뭇 중생을 해탈로 인도하기 위해 계속 인간의 몸 속에 머물러 있던 성자들이었다. 이 책에서는 각 단계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단 중간계 여행을 위해 준비 가능한 항목들을 개괄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전체적인 얼거리를 잡도록 돕고자 한다.


1) 준비 단계 [예비 수행]


이 과정은 내적 차원의 요가 탄트라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단계로써, 불교의 외적인 규율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대부분의 티벳 불교는 준비 단계에서, 4종류의 예비 수행을 10만 번씩 도합 '40만번' 행할 것을 요구한다. 예비 수행에는 의례에 따라 행하는 부복[五體投地], 정화 기능이 있는 100음절로 된 바즈라사트바 만트라의 반복(바즈라사트바는 남성 형상으로 나타난 자애로운 붓다의 원형으로 탄트라를 전수할 때 이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존재 요소인 오대[地, 水, 火, 風, 空]를 상징하는 제물을 바치며 깨달은 존재들께 경배하는 제사, 3가지 보물[붓다, 진리, 공동체]에 대한 명상 등이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이런 예비 수행은 자신에게 맞는 특별한 수행법을 전수 받기 전에 행한다. 겔룩파의 경우에는 9종류의 예비 수행을 10만 번씩 행해야 한다는 규율이 있다. 그 안에는 은거, 부복, 정화수 바치기, 만다라 그리기, 진흙 불상 만들기, 바즈라사트바 만트라 반복하기, 서원 만트라 반복하기, 불을 바치는 제사, 3가지 보물에 대한 명상 등이 포함되어 있다.

준비 단계에서 지켜야 하는 여러 가지 규범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小乘] 수행자의 자세와 중생을 구하겠다는[大乘] 자비심을 굳건히 하는 일이다. 티벳에서는 내적인 수행을 위한 준비 단계를 크게 3과정으로 분류해서 가르친다. 제 1과정은 세속의 포기, 제 2과정은 사랑과 자비의 정신 함양, 제 3과정은 '자기-없음'을 깨닫는 지혜 획득이다. 제 1과정은 개인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소승 불교에서 강조하는 내용이고, 제 2과정은 보편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내용이다. 제 3과정은 소승과 대승을 막론하고, 자유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구나 통과해야 하는 문이며 열쇠다.

제 1과정의 포기는 자신의 존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 저절로 성취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냉혹하게 반복되는 윤회, 무지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을 직시하면서 인생 전체를 무한한 진화 가능성 측면에서 바라보는 명상은 포기하는 힘을 키워 준다. 자신의 존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 되면, 감정과 혼란에 휩쓸리는 습관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체계적인 포기 수행을 시작한 사람은 몸과 마음 전체를 뜻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기를 열망하게 된다. 그리하여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고, 위험한 중간계 여행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수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를 알고 추구하는 것의 방향을 바꾼다. 추구하는 것의 방향이 바뀌면, 그 동안 짓눌려 오던 허접 쓰레기 같은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제 2과정에서 추구하는 사랑과 자비의 정신이란, 삶이 이기적인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염원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때 발산되는 활기찬 기운을 말한다.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에게서 발산되는 생명력 넘치는 분위기가 곧 사랑이요 자비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편안하고 행복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포기를 통해 참 자유와 평안한 쉼을 경험한 사람만이 이 과정에 들어갈 수 있다.

이 과정의 시작 단계에서는 모든 중생들과 자신의 연관성에 대해 명상한다. 모든 중생을 차별 없이 대하고, 그들에 대한 친밀감을 키운다. 어머니가 젖먹이를 껴안는 심정으로 그들을 껴안고 애정을 듬뿍 쏟는다. 그들과 시작도 끝도 없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진화의 길을 함께 가고 있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든 중생이 피붙이처럼 느껴질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수없는 생을 반복하면서 경험하는 괴로움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게 된다. 그대는 이미 포기를 통해 자유로움을 얻었다. 그들은 고통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신음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이때 발산되는 기운이 곧 사랑이요 자비다.

사랑과 자비의 힘을 키우는 명상은, 모든 중생을 자유의 길로 인도하겠다는 영웅적인 맹세로 끝맺는다.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열망이 확고한 결단으로 바뀌면,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우주적인 사랑과 자비의 힘이 분출한다. 그리하여 그대는 메시아적인 영웅 즉 보디사트바[菩薩]가 된다. 깨달음, 사랑, 자비는 오직 방향 설정과 결단에 달려 있다.


제 3과정에서 추구하는 지혜는 자유를 실제로 누리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다. 지혜는 주관과 객관의 '비어-있음'에 대한 체계적인 명상을 통해 계발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주관의 '비어-있음'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나'라고 하는 어떤 고정 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에고다. 에고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탐구해 보라. 에고에서 충동과 생각과 행위가 나온다. 그대는 그런 것들을 의심도 하지 않고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당연한 일로 여긴다. 에고의 뿌리는 이렇게 깊다.

그러나 깊게 파고 들어가 근원을 찾아 보라. '나'라고 생각하는 그대가 진정으로 누구이며 또 무엇인지 탐구해 보라. 자아 탐구를 체계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수행법이 이미 개발되어 있다. 그런 수행법의 도움을 받아 그대를 구성하고 있는 내적인 요소들을 분석해 보라. 몸과 마음과 감각을 낱낱이 조사해 보라. 감정과 사고의 메커니즘을 분석해 보라. 복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의식 그 자체를 조사해 보라. 이 일을 위해서는 먼저 집중력을 길러야 한다. 우리 보다 앞서서 자아 탐구의 길을 간 수많은 선배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 남겨 놓은 단서와 방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자아를 탐구하기 위해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고자 하는 강렬한 염원만 있으면 된다.

깊이 파고들어 가면 갈수록, '나'라고 하는 실체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실히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라는 존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런 느낌조차도 그대의 실체가 아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나 존재하지 않는 다는 느낌을 '나'라고 하는 에고의 생각이나 느낌이라고 판단한다. 이런 오류를 피하려면 지혜에 대한 가르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본능적인 그릇된 자기 동일시 철저하게 규명할 수 있다.

이 과정에 들어 선 수행자는 뭐가 뭔지 모르는 막연한 상태에서 한 동안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러는 동안 절대에 대한 느낌은 점차 침식하고 상대적인 연관성에 대한 감각이 살아난다. '나'라고 하는 것은 일시적인 구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객관적으로도 '비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더불어 다른 사람이나 외적인 대상 역시 객관적인 실체가 없는, 상대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관계의 그물은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다. 상대적이다. 따라서 유동적이며, 창조적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다. 모든 것이 상호 연관 속에서 조립된 일시적인 구조물이라면, 좀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도록 애써야 한다. 상대성에 대한 깨달음은 수행자를 이런 결단의 자리로 인도한다. 모든 것이 변화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변형 가능성을 갖고 있다면, 부정적인 환경으로 퇴화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기쁨이 넘치는 세상으로 변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부정적인 가능성이 끼여들 자리가 없다.

이 과정의 명상은 깨달음이 현실 생활에 적용될 수 있을 때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이 단계는 중간계를 건너가는 특별한 탄트라 기법을 익히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다. 여기서는 자성(自性)을 갖고 있는 절대적인 실체는 없으며,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임을 추론을 통해 인식한다. 다음에는 '비어-있다'는 말과 '상대적'이라는 말이 같은 뜻임을 알게 되고, 그러면 이 세계를 초월한 어떤 절대적인 공(空)을 찾지 않게 된다. 상대적인 세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앝잡아 보는 태도도 사라진다.

그대는 이런 깨달음을 일상 생활에 이중적으로 통합시켜야 한다. 첫째, 그대의 모든 주관적인 경험이 자성이나 실체가 없는 상대적인 것임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확실한 경지로 들어가야 한다. 둘째, 그대가 경험하는 객관적인 대상 역시 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두 가지 인식이 확고해진 다음에는 점점 깊게 내면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나'라고 하는 에고를 습관적으로 부각시키는 본능적인 무지를 '비어-있음'에 대한 인식으로 완전히 뒤집어 씌워야 한다. 에고와의 동일시를 제압하면 하는 만큼 더 자유로워진다.

명상은 실제로 '비어-있다'는 인식과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 꼭 필요하다. 에고 의식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알게 되면, 깨달음을 심화시키고 자유를 확장하는 더 높은 차원의 수행법을 익히고자 하는 열망이 생긴다. 여러 생을 기다릴 수는 없다. 이 생에서 끝내고야 말겠다. 이런 열정이 솟아오르면, 자연히 요가 탄트라에 입문하는 길을 찾게 된다. 그리하여 이승에서의 삶을 유동적인 중간계의 삶으로 여기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된 자신과 환경을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창조 단계 수행에 들어간다. 또 내면 세계를 여행하는, 숙련된 정신세계 비행사가 되는 법을 배우는 완성 단계 수행에 들어간다.

요가 탄트라 수행자들은 변하지 않는 지혜를 추구한다. 이 지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 일종의 선동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비어-있음'은 외적인 수행 단계에서 보나 내적인 수행 단계에서 보나 똑 같이 '비어-있음'이다. 다만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 내적 단계의 수행에서는 깨달음에 가속이 붙는다. 수행법도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 내적 단계의 수행자는 의식적으로 수없이 여러 번 죽고 다시 태어난다. 이런 수행을 통해 진화 과정이 압축된다. 그래서 한 생, 아니면 단 몇 생으로 완전한 해탈에 도달하고자 한다. 한 생에 여러 생을 압축하는 것, 한 번의 죽음에 여러 번의 죽음을 압축하는 것, 한 번의 중간계에 여러 번의 중간계 체험을 압축하는 것, 이것이 비밀스러운 탄트라 수행의 기본이다.


2) 입문과 전수


준비 단계의 3과정에 대한 것은 혼자 책을 통해 배우고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때에 따라 그대에게 적절한 방법을 지도해 주는 영적인 스승이 있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이미 체험한 스승에게 배운다면 '자기-없음'에 대한 깨달음에 훨씬 쉽게 도달할 수 있다.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수행자들에게는 이미 스승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트라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스승을 찾을 필요가 있다. 스승이 없이는 탄트라 수행이 불가능하다. 변형을 위한 요가 탄트라 수행에서는 영적인 스승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스승을 선택하는 문제는 여러 문헌에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다 아니다. 그대는 스승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다. 아마 직감으로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살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 보아야 한다. 그의 가르침, 다른 제자들의 질과 성격 등을 엄밀히 관찰하고 검토해야 한다. 어디에선가 결점이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대의 지나치게 비판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이럴 땐 상식적인 판단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어떤 사람의 가르침이 애매 모호하고,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거나 전통적인 가르침과 다르다면 그런 사람을 스승으로 선택해서는 안된다. 입으로는 가르치면서도 행동을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 제자들을 이용하는 사람, 욕망에 흔들리는 자제력이 없는 사람도 피해야 한다. 그가 어떤 지위에 있고 어떤 배경을 등에 업고 있든지, 그런 사람을 스승으로 선택하면 안된다.

믿을 만한 스승이라면 가르침이 명쾌해야 한다. 가르침이 전통적인 경전의 가르침과 대체적으로 일치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제자들을 이용하지 않고 반대로 그들이 필요와 유익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현재 부유하든 가난하든, 또 유명하든지 유명하지 않든지 간에 부와 명예에 도통 관심이 없는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온건하고 절제되어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라면 믿을 만한 스승이다. 거창한 이름도 없고 혈통도 변변치 못하다 할지라도, 또 특별한 맛이 없고 그저 그런 것 같을지라도 이런 스승이 믿을 만한 스승이다.

일단 그대가 스승을 선택하고 나면, 스승은 그대에게 준비 단계 수행을 명한다. 예비 수행을 '40만 번' 반복해서 행하라고 하거나, 아니면 그대에게 적합할 듯이 보이는 다른 어떤 수행을 명할 것이다. 어쨌거나 스승이 그대를 제자로 받아들여 수행법을 전수해 주기로 결정하기 전에는, 요가 탄트라의 만다라에 접근할 길이 없다. 그러기에 스승과 관계를 맺는 것이 탄트라 수행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이다.

요가 탄트라는 자신의 깨달은 모습과 깨달은 후에 변할 주위 환경을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창조적인 명상에서 출발한다. 수행자는 깨달은 존재와 그의 주위 환경을 마음 속에 그리고, 자신과 세상이 그런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이 수행의 목적은 자기가 앞으로 변할 구체적인 모델을 만드는 데 있다. 무엇을 새로 만들어 내려면 먼저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을 상상해야 한다.

상상은 이승-중간계의 삶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고유한 자성(自性)이나 고정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상대적일 뿐이다. 주관적인 자아도 없고 객관적인 대상도 없다. 상대적인 관계에 따라 지금 이렇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상대적인 관계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유동적이며, 그 유동성은 상상의 힘에 의해 변형된다. 따라서 이승-중간계의 모든 현상은 상상의 힘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세상은 무지가 만들어 낸 현상이다. 무지한 존재들의 말과 행위 속에 담겨 있는 무의식적인 상상의 힘이 그에 부합하는 이런 모습을 만들어 냈다. 지혜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자신의 환경을 완전한 붓다의 땅으로 변형시킨다. 요가 탄트라 수행자의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붓다의 땅 만다라를 상상함으로써 온 세상을 붓다의 땅으로 만들고, 자신의 몸과 말과 마음이 붓다의 세 몸으로 변형된 모습을 상상함으로써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상상을 통한 변형 수행은 스승에게 입문하면서 시작된다. '바즈라-스승' 즉 다이아몬드 같은 스승과 관계를 맺기 전에는 탄트라 수행을 시작할 수가 없다. 이 점 때문에 탄트라 수행이 스승의 발 아래 엎드려 그를 예배하는 일종의 '스승 숭배'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짜 스승은 제자들이 자기 주위에 넋을 잃고 둘러앉아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자는 스승을 실제 붓다로 보아야 한다. 스승의 육체를 붓다의 나투는 몸으로 보아야 한다.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붓다의 전형으로 보아야 한다. 스승의 말은 붓다의 깨달은 몸으로 여겨야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다르마의 정수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스승의 마음을 붓다의 진리의 몸으로 보아야 한다. 스승의 마음이야말로 온 세상에 두루 깃들어 있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붓다의 진리의 몸이라고 믿어야 한다. 수행자는 스승을 3가지 보물[三寶: 붓다, 진리, 수행자 공동체]이 구체화된 존재로 보아야만 한다.

수행자는 자신의 불완전한 상상과 생각을 붓다인 스승의 완전한 모습 속에 용해시킨다. 스승과 융합하는 단계를 거친 수행자는, 스승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수행으로 넘어간다. 스승은 제자를 붓다로 본다. 스승은 그대 속에 있는 가능성이 이미 실현된 모습을 본다. 스승의 깨달음과 영적인 시각은 전수 의식을 통해 전달된다. 전수 의식은 다이아몬드 왕관을 쓰고 깨달음의 왕자로 즉위하는 일종의 도유식(塗油式)이다. 전수 받는 제자는 붓다의 장엄한 사자좌(獅子座)에 올라, 상상을 통해 앞으로 도달할 지극한 경지를 미리 맛본다.

탄트라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입문 의식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한 번의 의식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는 힘들다. 실제로 만다라 궁전에 들어가서 그 구조, 장식물, 그 안에 있는 스승 붓다와 수행자들의 모습을 세세하게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숙련된 수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야만 얼굴과 팔이 여러 개인 자신의 신적인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만다라는 완전한 우주다. 일상적인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초보 단계의 수행자는 상징이나 이상적인 인간상을 상상함으로써 만다라 세계를 언뜻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만다라 명상은 특별히 정해진 사원에서, 그 사원의 구조나 장식물을 상상의 매개체로 하여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탄트라에 입문한 수행자는 수행에 결부된 모든 맹세와 서원의 의미를 이해하고 지키도록 애써야 한다. 그를 통해 마음과 몸과 감각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스승이 아무리 뛰어도 입문자는 자신이 준비한 그릇에 넘치는 것은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첫 번째 의식을 치른 다음, 점점 더 완전한 경지의 깨달음을 전수 받기 위해 용맹 정진해야 한다.

입문-전수 의식은 대단히 복잡하다. 요가 탄트라에서는 4단계로 구분하여 이 의식을 행한다. 1단계[花甁入門]에서는 몸에 초점을 맞추고, 창조 단계에서 시각화 명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전수한다. 2단계[秘密入門]에서는 말에 초점을 맞추고, 완성 단계의 출발인 변형 수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전수한다. 3단계[智慧入門]에서는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보다 높은 수준의 완성 단계 수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전수한다. 마지막 4단계[大印入門]에서는 몸과 말과 마음 전체에 초점을 맞추고, 완성 단계 최고의 경지인 통합 수준에 이르는 수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전수한다.

<티벳 死者의 書>에는 자애로운 모습의 붓다와 보살 그리고 무서운 모습의 붓다와 보살로 가득 찬 만다라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만다라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입문 의식에 사용되는 기도문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히 자질을 갖춘 스승으로부터 전수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전수해 주는 스승이 없으면, 그런 기도문을 이 책 저 책에서 찾아내서 달달 외워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의 맨 처음 책인 <붓다의 세 몸인 스승에 대한 기도>에는 입문 의식에 관련된 내용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아래 인용에서는 입문 의식의 단계 별로 본문의 순서를 조정했다).


흠없이 완전한 연꽃 궁전에서,

스스로 나타나신 신성한 나투는 몸 스승께

한없는 경배와 기도를 드리나이다.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되는 증오심이 사라지지 않았어도,

지금 이대로 자유롭게 해 주소서.

당신의 나투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소서!

마음을 밝히는 투명한 빛을 비추어 주소서!


입문자는 이 기도에서 스승을 붓다의 나투는 몸이라고 고백한다. 이 1단계 입문식[花甁入門]에서 수행자는 붓다의 몸을 상징하는 종자 만트라 OM의 진동과 함께, 스승의 정수리 의식 센터에서 발산되는 백색 다이아몬드 광선의 축복을 받는다. 입문자의 정수리 의식 센터는 다이아몬드의 백색 광선으로 충만해지고, 창조 단계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이 부여된다.


순수한 지혜의 기쁨이 충만한 빛의 궁전에서,

죽음을 모르는 깨달은 몸 스승께

한없는 경배와 기도를 드리나이다.

탐욕과 정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도,

지금 이대로 자유롭게 해 주소서.

당신의 깨달은 몸에서 흘러나오는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소서!

해탈로 인도하는 내적인 지혜의 기쁨을 채워 주소서!


입문자는 이 기도에서 스승을 기쁨으로 충만한 붓다의 깨달은 몸이라고 고백한다. 이 2단계 입문식[秘密入門]에서 수행자는 붓다의 말을 상징하는 종자 만트라 AH의 진동과 함께, 스승의 목 의식 센터에서 발산되는 붉은 색 루비 광선의 축복을 받는다. 입문자의 목 의식 센터는 루비의 붉은 색 광선으로 충만해지고, 신비한 에너지 몸을 만드는 완성 단계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이 부여된다.


우주 속에 충만한 완전한 진리의 궁전에서,

태어나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않는 진리의 몸 스승께

한없는 경배와 기도를 드리나이다.

무지와 망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도,

지금 이대로 자유롭게 해 주소서.

당신의 진리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완전한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소서!

스스로 존재하는 근원적인 지혜를 밝혀 주소서!


입문자는 이 기도에서 스승을 붓다의 진리의 몸이라고 고백한다. 이 3단계 입문식[智慧入門]에서 수행자는 붓다의 마음을 상징하는 종자 만트라 HUM의 진동과 함께, 스승의 심장 의식 센터에서 발산되는 푸른색 사파이어 광선의 축복을 받는다. 입문자의 심장 의식 센터는 사파이어의 푸른 색으로 충만해지고, 투명한 직관의 빛을 체험하는 완성 단계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이 부여된다.


내면을 관통하는 투명한 빛의 궁전에서,

만물에 고루 축복을 베푸는 세 몸이신 스승께

한없는 경배와 기도를 드리나이다.

나와 너의 분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도,

지금 이대로 자유롭게 해 주소서.

당신의 세 몸에서 흘러나오는 지극한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소서!

근원적이 지혜의 세 몸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입문자는 이 기도에서 스승을 붓다의 세 몸이 통합된 존재라고 고백한다. 이 4단계 입문식[大印入門]에서 수행자는 붓다의 몸과 말과 마음을 상징하는 만트라 OM AH HUM의 진동과 함께, 스승의 세 의식 센터에서 발산되는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광선의 축복을 받는다. 입문자의 세 의식 센터는 흰 색, 붉은 색, 푸른 색으로 충만해지고, 투명한 빛과 하나가 되어 완전한 佛性을 성취하는 최고의 완성 단계[마하무드라]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이 부여된다. 이 단계에서 스승은 3가지 광선으로 변하여 제자 속에 녹아든다. 그리하여 스승과 제자는 분리할 수 없는 한 몸이 된다.

의식과 잠재의식 차원에서, 자신이 이미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라고 상상하는 것이 입문-전수 의식의 요체다. 이 의식에서는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실현된 것으로 본다. 몸, 말, 마음, 직관 전체가 깨달음으로 충만하다. 현재 상태는 완전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 수도 있다. 그래도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상상하고 그 모습을 향해 수행을 진전시켜 나간다. 마음 속으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현실적으로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장애물을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간다. 아직 깨달음을 얻기 못했다는 생각은 털 끝 만큼도 하면 안된다. 먼 훗날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해서는 안된다. 실제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만을 머리 속에 그려야 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결과를 목적지에 이르는 수레로 이용'하는 수행법이다. 외적인 준비 단계 수행에서는 계율을 지킴으로써 계율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경지에 도달한다. 하지만 내적인 단계에 들어서면 목표를 이용하여 목표에 도달한다. 목표를 이용하는 수행자는 현실과 상상 사이의 간격으로 인해 심리적인 중압감과 부조화를 체험한다. 일상적인 의식 상태에서는 자기가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을 스승처럼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로 상상하고 믿는 수행을 해야 한다. 현실과 상상 사이의 긴장은 상상의 승리로 끝난다. 지속적으로 시각화하는 상상의 힘이 현실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투명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동적인 현상이라는 자각이 깊어지면 이 수행은 쉽게 진전된다.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의 가르침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목표를 수레로 이용하는 수행법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목표를 수레로 이용하는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인식상의 불협화음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편안한 마음으로 투명한 빛 속에서 쉬라. 그대는 이미 완전한 붓다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대는 "아, 그래. 내가 붓다야."하면서 습관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에고와 붓다를 동일시한다. 이렇게 되면 깨달음은커녕 에고 의식만 점점 더 강화된다. 그러나 반대로 깨닫지 못한 현재 상태만을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며, 그대는 완전한 붓다"라는 파드마 삼바바의 말이 잘못 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가 가르치는 수행에 대해 냉소적이 된다. 오해에서 비롯되는 이런 두 가지 태도는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 속에 담겨 있는, 고도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 탄트라 수행법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만든다.

<티벳 死者의 書>에서 그대가 이미 완전한 상태에 있다는 말을 들으면, 입문-전수 의식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선언되는 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그대가 도달해야 할 목표지 현실이 아니다. 그대는 그 목표가 이미 이루어진 상황을 늘 마음 속에 품고, 현실적으로는 그 목표에 이르는 장애물을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가야 한다. 도저히 안된다는 좌절감이 생기는 것은 지나치게 조급하기 때문이다. 좌절감이나 자기 연민의 감정은 빨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나'라고 하는 에고에서 비롯된다. 에고라고 하는 습관의 상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상자에서 벗어나는 만큼 깨달음이 더 밝아진다. 장애물이 제거될수록 변명과 의심이 사라지고, 에고에 대한 탐닉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힘이 커진다. "그대가 완전히 깨달은 붓다'라는 가르침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에고를 강화시키거나 반대로 좌절감이나 의심의 수렁에 빠진다면 아예 듣지 못한 것만도 못하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환경에서, 괴로운 몸을 이끌고 귀한 인생을 허비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3) 창조 단계 [生起行]


<명상을 통한 해탈> 시스템에서 창조 단계 수행과 비슷한 내용은, 이 책 7장에 완역해서 실은 <본능의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에 나온다. 이 수행의 기본 목적은, 깨달은 상태를 상상함으로써 일상적인 의식을 깨달음에 대한 비전으로 가득 찬 의식으로 변형시키는 데 있다. 주객을 막론하여, 일상적인 세계의 모든 것이 지혜로 충만한 모습으로 변형된 모습을 상상한다. 죽음 중간계의 자기는 붓다의 진리의 몸[法身]으로, 저승 중간계의 자기는 붓다의 깨달은 몸[報身]으로, 그리고 이승 중간계의 자기는 붓다의 나투는 몸[化身]으로 변형된 모습을 상상한다.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무더기[五蘊]가 다섯 붓다로 변하고, 5가지 독이 5가지 지혜로 바뀐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한다. 미묘하게 잠복해 있는 본능적인 요소들이 모두 붓다의 신성한 성품으로 바뀐 모습을 상상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이 보석으로 장식된 만다라 궁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로 바뀐 모습을 상상한다.

이 설명은 <명상을 통한 해탈> 시스템에 따른 것이지만, 상상하는 내용이 이와는 다른 수행 체계도 많다. 꼭 이것을 저것으로 또는 저것을 이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불순한 것을 순수한 것으로 변형시킨다는 대원칙만 같으면 된다.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를 원형적인 다섯 붓다로 바꾼다. 몸(色)은 아크소비야(不動佛)로, 느낌(受)은 라트나삼바바(寶生佛)로, 지각(想)은 아미타바(阿彌陀佛), 의지와 충동(行)은 아모가싯디(不空成就佛)로, 의식 활동(識)은 바이로차나(大日如來)로 변형시킨다. 5가지 독(五毒)은 5가지 지혜로 바꾼다. 분노와 증오는 거울 같은 지혜(大圓鏡智)로, 탐욕과 정욕은 분석하는 지혜(妙觀察智)로, 시기심과 질투는 성취하는 지혜(成所作智)로, 아집과 자만심은 평등하게 보는 지혜(平等性智)로, 무지와 망상은 궁극적인 지혜(法界體性智)로 변형시킨다. 이런 식으로 지극히 일상적인 것,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 등을 붓다와 지혜의 에너지로 바꾼다. 각 붓다와 지혜를 상징하는 보석과 색깔 등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지금 그런 모습으로 변한 자신의 상태를 시각적으로 그린다. 그래서 실제로 깨달은 붓다가 되었다는 생각이 의식을 지배하도록 한다. 온 세상을 붓다의 눈으로 본다. 온 세상이 기쁨으로 충만하고, 자신에게서는 지혜의 빛이 발산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도표 10. 다섯 붓다, 무더기, 독, 색깔, 지혜의 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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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기      독      붓다           색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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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色)      분노    아크소비야      다이아몬드    거울 지혜

느낌(受)    자만심  라트나삼바바    황금          평등 지혜

지각(想)    정욕    아미타바        루비          분석 지혜

의지(行)    시기심  아모가싯디      에머랄드      성취 지혜

의식(識)    망상    바이로차나      사파이어      궁극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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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느끼는 혼란스러운 느낌은 바이로차나이다. 그대가 느끼는 분노는 아크소비야이다. 그대의 몸과 외부 세계의 대상은 아크소비야이다. 그대의 감각은 라트나삼바바이다. 그대의 인식과 지각은 아미타바이다. 그대의 의지와 충동은 아모가싯디이다. 그대의 의식 활동은 바이로차나이다. 스승이 더 이상 밖에 있지 않다. 그대의 상상 속에서 스승과 붓다가 하나가 되었고, 그대 또한 스승과 붓다와 하나 되었다. 그대는 붓다의 눈으로 중생들을 굽어살핀다. 그대는 중생들을 해탈의 길로 인도한다. 그대는 입문식을 통해 깨달음의 광휘와 축복에 휩싸인다. 온 우주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할 책임을 떠맡는다. 입문식을 통해 그대는 모든 중생을 보살피고 궁극적인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붓다가 되는 것이다.

창조 단계에서는 환경, 기쁨, 이웃, 육체, 자아가 완전한 모습으로 바뀐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한다. 주위 환경이 붓다가 지배하는 만다라 궁전으로 바뀐 모습을 상상한다. 환경 전체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형된 모습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한다. 일상적인 삶에서 느끼던 기쁨의 대상이 힘을 잃고, 깨달음으로 인한 기쁨이 솟아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한다. 모든 이웃이 붓다와 보살로 변형되어 그대의 깨달음을 도와주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한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그대의 육체가 모든 붓다의 지혜 덩어리로 변형된 모습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한다. 자아의 변형을 위해서는 원형적인 붓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모델로 삼는다. 그대의 기질에 따라 자애로운 모습의 붓다를 선택할 수도 있고, 그대 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에너지를 일깨우기 위해 무서운 모습의 붓다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대는 선택한 모델 붓다로 변형된다. 그럼으로써 '나'라고 생각하던 에고 의식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한다. 투명한 '비어-있음', 다이아몬드와 같은 지혜 자체가 되어 버린 그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이것이 요가 탄트라의 심미적인 차원이다. 우주 속의 모든 것을 완성된 모습으로 그리는 창조 단계 수행에서는, 3가지 차원에서 변형이 일어난다. 죽음 중간계가 진리의 몸으로 바뀌고, 저승 중간계는 깨달은 몸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승 중간계는 나투는 몸으로 변형된다. 이 변형 과정에서 두 가지 전환이 일어난다. 고통으로 가득 찬 일상적인 외부 환경이 완전한 붓다의 땅으로 전환되고, 괴로움 속에서 신음하던 에고가 완전한 붓다로 전환된다. 이러한 변형과 전환은 체계적인 시각화 수행을 통해 점차 완성된다. 붓다로 변형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수행이 경지에 오르면, 외적으로는 세상 전체가 기쁨이 넘치는 붓다의 땅으로 변하고 내적으로는 '비어-있음'을 인식하는 투명한 지혜가 빛난다. 외부 환경을 자유 자재로 통제하고 조절함으로써, 실제로 중생을 도울 수 있는 능력과 자비심은 이 단계에서 생긴다. 죽음, 저승, 이승을 붓다의 세 몸으로 변형시키는 상상에 관해서는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에 포함되어 있는, 기도문 형태의 <붓다의 세 몸인 스승에 대한 기도>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5장을 보라).

<본능의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의 내용은 창조 단계 수행과 아주 비슷하다(7장을 보라). 수행자는 원형적인 붓다와 보살들이 배열된 작은 만다라가 자신의 몸 속에 이루어진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한다. 소위 '육체 만다라'를 만드는 것이다. <티벳 死者의 書>에는 100명의 붓다와 보살이 등장한다. 하지만 만다라에서의 그들의 배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본능의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의 내용에 비추어 <티벳 死者의 書>에 나오는 붓다와 보살들의 위치를 정할 수 있으며, 창조 단계의 수행에서 그 만다라를 이용할 수 있다.

불상이나 보살상 앞에 명상 자세로 앉는다. 사만타바드라(普賢菩薩) 상도 좋고 위대한 스승 파드마 삼바바 상이라도 좋다. 여러 불상과 보살상을 함께 놓아도 괜찮다. 그 앞에 상징적인 제사를 드릴 자그마한 제단을 마련한다. 정화수, 꽃, 촛불, 향을 준비하고 금강저(金剛杵)와 작은 종도 준비한다. 기타 제사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다 준비한다. 그대 마음 속에 상상의 하늘을 그리고, 그 하늘에 나타난 사만타바드라와 아미타바와 파드마 삼바바 등 모든 붓다와 보살과 스승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한다. 원초적인 붓다로부터 그대의 스승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적인 존재의 모습을 상상의 하늘에 떠올린다. 귀의하는 심정으로 그들을 초청한다. 그들이 나타나면 엎드려 절한 다음 제물을 바친다. 그들에게 그대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가르침을 청한다. 니르바나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함께 있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그대 자신의 수행의 공덕을 뭇 중생의 깨달음을 위해 바칠 것을 맹세한다

다음에는 그대 자신이 바즈라사트바 붓다의 진리 영역에 녹아드는 모습을 상상한다. <본능의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에는 바즈라사트바 붓다가 보석으로 장식된 왕복을 입고, 흰 얼굴에 평화로운 모습을 한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이 때 100음절로 되어 있는 정화를 위한 만트라 '옴 바즈라사트바 삼마야 ...'를 21번 또는 108번 반복한다(7장을 보라). 이 만트라는 죄를 정화시키고 감정과 지성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본능의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에 나오는 10가지 준비 단계를 이런 식으로 밟아 나간다. 10단계 준비 수행이 끝나면, 순서에 따라 몇 가지 시각화 수행을 더 거쳐야 한다. 그런 다음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에 뒷부분에 나오는 '육체 만다라' 수행에 들어간다.

10단계 준비 수행이 끝난 다음에는 <본능의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의 시각화 훈련을 거쳐야 한다. 모든 붓다와 보살과 스승을 초청하여 그들과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절대 투명한 '비어-있음' 속으로 해체된다. 이 때 '옴 수냐타 즈나나 바즈라 스바바바 아트마코 함!' 만트라를 외운다. 이 만트라는 '옴, 나는 투명하게 비어-있는 직관의 정수'라는 뜻이다. 이 투명한 '비어-있음'에서 완전한 우주가 출현하는 모습을 시각화한다. 우주의 중심에는 5가지 보석으로 지은 궁전이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우뚝 서 있다. 그 보석 궁전의 중앙에 사만타바드라(普賢菩薩)가 앉아 있다. 그대는 그대의 이상적인 짝인 사만타바드라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된다. 다음에는 <본능의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바이로차나(大日如來)와 결합하여 하나가 된다. 배우자와 보필하는 보살과 수호불에 둘러 싸여 4방향에서 나타나는 원형적인 붓다들과 차례로 나타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그리고 그들과 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상상 속의 만다라 궁전이 붓다와 보살과 수호불로 가득 찬 다음에는, 붓다의 땅에서 '지혜로운 존재'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청한다. 그들은 그대와 한 몸이 되어 있는 붓다 상 속으로 흘러들어 와서 그대에게 경배한다. 그대는 만다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지혜로운 존재'들의 경배를 받으며 축복에 휩싸인다. 그대에게서 활기찬 축복의 에너지가 발산된다. 온 세상 모든 존재들이 그 에너지 광선의 은혜를 받는다. 모든 존재가 그대에게서 발산되는 자비로운 에너지 광선에 이끌려 만다라 속으로 끌려들어온다. 만다라 속에 들어온 그들 역시, 그대와 마찬가지로 붓다로 변형된다. 그들도 자신들의 만다라를 만들고, 그들에게서 발산되는 축복의 기운이 우주 속으로 끝없이 확장되어 나간다.

여기에서 그대가 붓다의 무한한 진리의 몸이 된 모습을 다시 상상하면서, 그대의 몸 속에 2개의 만다라 궁전을 만든다. 하나는 심장 센터에 만들고 다른 하나는 정수리 센터에 만든다. 심장 센터 만다라에는 42명의 붓다와 보살들이 빛을 발하고, 정수리 센터 만다라에는 58명의 붓다와 보살들이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대의 감정, 본능, 성 에너지가 그들과 하나로 결합된 모습을 상상한다. 그대의 모든 것이 붓다와 보살로 변형된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한다.

이제부터는 <본능의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에 나오는 순서대로 상상을 계속해 나간다. 경전에 언급되어 있는 신들이 그대의 몸 속에 나타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한다. 이 시각화 수행은 앞으로 중간계를 여행하게 될 때 상상을 통해 완성한 만다라의 힘으로 해탈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 그리고 만다라 궁전이 자신의 가장 깊은 실체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로 끝맺는다.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훈련은 처음부터 잘되지는 않는다. 혼란스럽기도 하고, 뜻대로 잘되지 않기 때문에 좌절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의를 집중하여 꾸준히 수행해 나가다 보면 점점 익숙해진다. 스승의 올바른 지도를 받는다면,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시각화 상상을 진행해 나갈 수 있다.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에 나오는 100명의 붓다와 보살과 수호불들의 모습을 일일이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티벳 탱화인 탕카(tangka)에 그려진 그들의 모습을 참고로 하면 좋을 것이다.

불교도가 아니라도 중간계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티벳 사람들이 발전시킨 죽음의 기술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누구라도 자기 종교의 상징물을 통해 창조 단계 수행을 할 수 있다. 나름대로 상상의 체계를 만들면 된다. 이 때 티벳 사람들이 발전시킨 순서를 응용해서 적용하면 좋다.

먼저 자신이 섬기는 신이나 천사 또는 위대한 성인들께 기도한다. 그들의 사랑과 힘이 그대에게 흘러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대에게 충만하게 채워진 사랑과 능력이 이웃과 세상을 향해 흘러 나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육체와 마음 속에 신성이 충만한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한다. 온 세상이 신성으로 충만한 모습을 상상한다. 그대와 세상 전체가 신적인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찬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한다. 그 완전한 고요함에 의식의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중간계가 시작될 때 그대가 합일의 대상으로 선택한 신과 성인들이 나타나 주기를 기원한다. 끝으로 그대가 상상으로 완성한 순결한 우주가 일상적인 세계 속으로 녹아드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리하여 온 우주와 모든 중생이 완전히 새로워진 모습을 보면서 명상을 끝낸다.


4) 완성 단계 [圓滿行]


창조 단계에서는 보석처럼 빛나는 붓다의 형상을 세부적인 데까지 상상한다. 상상을 점점 더 깊이 확장시켜 나가, 만다라 궁전 전체를 시각화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리하여 코 끝이나 심장 의식 센터 또는 생식기 의식 센터의 빈두[精]가 만다라 궁전으로 충만하게 될 때까지 상상을 지속해 나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묘한 만다라의 홀로그램[干涉圖形]을 여러 시간 유지한다. 이 상태가 되면 완성 단계 수행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창조 단계 명상은 시각적으로 창조한 영상들이 투명하게 빛나는 '비어-있음' 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시각적으로 창조한 영상들은 완성 단계에서 4종류의 황홀한 체험과 함께 다시 되살아난다. 그 4종류의 체험은 일상적인 자기가 아닌 붓다와 보살의 체험이며, 완성 단계의 뼈대가 되는 체험이다. 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자.

완성 단계 수행은 다른 방식으로 단계를 설정할 수도 있지만, 보통 5단계로 진행된다. 1단계는 '육체를 분리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일상적인 육체에서 자신을 분리한다. 2단계는 '말을 분리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바즈라 만트라[金剛眞言]을 반복함으로써 프라나[호흡 에너지]와 만트라를 하나로 결합한다. 3단계는 '마음을 분리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의식 에너지 전체를 중앙 통로로 끌어 들여, 신비한 몸 즉 미묘한 에너지 신체를 만든다. 4단계는 '투명한 빛과 융합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3단계에서 만든 신비한 몸과 우주적인 실체인 투명한 빛이 하나가 된다. 이 체험을 통해 비이원성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진다. 5단계는 '통합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우주적인 실체인 투명한 빛과 신비한 몸과 일상적인 차원의 육체가 온전히 하나로 통합된다. 투명한 빛은 진리의 몸[法身]이고, 신비한 에너지 신체는 깨달은 몸[報身]이며, 일상적인 육체는 나투는 몸[化身]이다. 이 세 몸이 온전히 하나 되어 완전한 불성(佛性)을 성취한다.

인도에는 창조적인 수행법을 개발해 낸 위대한 성자들이 많다. 티벳 불교는 그들로부터 다양한 탄트라 수행법을 물려받았다. 여러 종류의 탄트라 수행법은 나름대로 이해를 표현하는 방식과 체계가 다르다. 창조 단계와 완성 단계를 거쳐 최종 목표인 완전한 붓다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전체적인 구조는 같지만, 각 단계별로 수행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세속의 포기, 사랑과 자비의 정신 함양, '비어-있음'을 통찰하는 지혜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모든 탄트라 수행이 깨달음을 가속시키며, 자비로운 마음을 키워 준다. 그리하여 이 생에서 완전한 붓다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도와준다. 모든 탄트라가 목표를 미리 상상함으로써 목표에 빨리 도달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깨달음의 희열로 충만한 미묘한 차원의 마음을 활성화시켜 그 마음으로 궁극적인 실재를 통찰하도록 하고, 깨달음의 에너지를 모든 중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산하도록 하는 것도 탄트라의 기본 정신이다. 완전한 통합을 성취해 붓다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를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그 내용은 같다. '위대한 완성'이라고 불러도 좋고, '마하무드라(大印)'라고 불러도 좋다. 또는 '기쁨으로 충만한, 분할할 수 없는 비어-있음'이라고 불러도 좋다. 용어만 다를 뿐 실제 내용이 다른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육체와 자기 이미지에서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 '육체의 분리'다. 창조 단계 수행은 '육체의 분리'가 시작되면서 끝난다. 창조 단계에서 그대는, 시각화 상상을 통해 그대 자신을 실제로 붓다와 보살로 체험한다. 그대의 얼굴, 눈, 팔, 감각 등 신체의 모든 부분이 붓다와 보살로 변한 육체 만다라를 완성시킨다. 그러나 이 단계는 아직 거친 육체 차원이다. 시각화 상상의 폭발적인 확장을 통해 거친 차원의 육체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넘어서야 한다. 자신의 모습 속에서 붓다나 보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붓다나 보살이 되어서 자신을 느끼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이것이 완성 단계 수행의 1단계인 '육체의 분리'이다. 여기에 이르면 인간적인 형상으로 자신을 느끼는 감각이 사라지며, 중앙 통로와 프라나와 빈두로 이루어진 미묘한 차원의 몸에 대한 감각이 살아난다. 이 때 거친 차원의 마음은 3가지 형태의 직관으로 변형된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바 있다(도표 7.을 보라).

만다라 궁전과 자신의 몸이 붓다와 보살의 형상으로 변한 모습을 시각적으로 그리는 것은 아직 거친 차원의 수행이다. 이 수행은 미묘한 차원의 몸과 마음에 대한 감각을 깨우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완성 단계에서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미묘한 차원을 깨우는 수행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간다. 거친 차원과 미묘한 차원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참조하라(도표 4.를 보라). 미묘한 차원의 몸은 10종류의 프라나[신경 에너지]로 형성되어 있다. 10종류의 프라나는 5가지 주요 프라나와 5가지 부수적인 프라나로 나뉜다. 5가지 주요 프라나는 전신에 퍼져 있는 생명 에너지인 '비야나', 심장 센터(목과 심장 사이)에서 호흡을 주관하는 '프라나', 배꼽 센터(배꼽과 심장 사이)에서 소화를 관장하는 '사마나', 목 센터(목과 정수리 사이)에서 근육의 활동을 주관하는 '우다나', 생식기 센터(배꼽에서 발바닥 사이)에서 생식과 배설을 관장하는 '아파나'를 말한다. 5가지 부수적인 프라나는 다섯 감각 기관의 감각 능력과 관련된 신경 에너지이다.

'육체의 분리' 단계에서는 이러한 10가지 프라나가 붓다와 보살의 생명 에너지로 의식된다. 미묘한 차원의 몸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인 빈두[精]는, 정액 속에 들어 있는 남성 호르몬의 정수와 난자 속에 들어 있는 여성 호르몬의 정수를 가리킨다. 미묘한 차원의 몸을 구성하는 남성 호르몬의 정수는 '각성된 백색 빈두'라고 부르며, 여성 호르몬의 정수는 '각성된 적색 빈두'라고 한다.

중앙 통로의 중심에 심장 센터가 있는데, 심장 센터 한 가운데에 '불멸의 빈두'라고 부르는 지극히 미묘한 마음이 갇혀 있다. 심장 센터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지극히 미묘한 마음이 궁극적인 자아인 무아(無我)다. 궁극적인 자아는 온 우주가 투명하게 빛나는 '비어-있음'임을 통찰하는 희열[法悅]로 충만하다. 불멸의 빈두 속에 있는 간직되어 있는 에너지가 지극히 미묘한 차원의 몸을 이룬다. 물론 이 차원에 이르면 몸과 마음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으며, 주관과 객관의 구분도 사라진다.

'육체의 분리'를 실현하기 위한 수행법은 다양하다. 그런 수행을 통해 '육체의 분리' 상태가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면, 실제로 죽을 때나 경험할 수 있는 과정을 수행 중에 체험할 수 있다. 호흡이 점차 약해지다가 마침내 완전히 멎는다. 다음에는 흙이 물로, 물이 불로, 불이 바람으로, 바람이 의식 또는 空으로 해체되는 4과정을 겪는다. 각 과정마다 신기루, 연기, 반딧불의 반짝임, 밝은 촛불과 같은 주관적인 상황을 경험한다(도표 8.을 보라). 이 수행은 지각이 순수해진 다음, 즉 붓다로서의 자기 이미지가 확고해진 다음에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와 저항 때문에 혼란이 생기고, 해체 과정을 성공적으로 건너기 위해 필요한 신경의 평형이 깨진다.

육체를 구성하는 4가지 요소[地, 水, 火, 風]가 해체된 다음에는, 거친 차원의 의식[空]이 해체되면서 3단계 직관으로 이루어진 미묘한 차원의 의식이 각성된다. 미묘한 차원의 의식은 일상적인 상태에서는 80가지 본능적인 행위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의식이다(도표 7.과 도표 8.을 보라). 수행자는 여기에서도 각 단계를 거칠 때마다 달빛 밝은 하늘, 햇빛 찬란한 하늘, 순수한 어두움, 투명한 새벽 빛과 같은 주관적인 체험을 한다. 이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투명한 빛과 같은 지극히 미묘한 차원의 마음으로 넘어간다.

이 수행을 하는 동안에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 해체되는 본능의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안정이 깨지면 그 소용돌이에 휘말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거친 차원의 의식[空]이 해체되어 투명한 직관 차원으로 넘어갈 때, 모든 프라나가 중앙 통로로 퇴각한다. 전신에 퍼져 있는 부수적인 통로와 좌우측 통로로부터 중앙 통로로 퇴각하는 프라나는, 생명의 정수인 백색 빈두와 적색 빈두를 함께 이끌고 들어온다. 중앙 통로로 퇴각한 프라나와 빈두는 미간을 거쳐 정수리 센터로 들어간다. 입문과 수행을 통해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이 순간에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 중앙 통로는 평상시에는 닫혀 있다. 정수리 센터가 열리면서 출구가 생기면 모든 생명 에너지가 그 곳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중앙 통로를 묶고 있는 매듭은 쉽게 풀리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죽을 위험은 거의 없다. 이 수행을 통해 경험하는 주관적인 죽음 체험은 희열이 넘치는 깨달음의 세계로 통하는 내면의 문을 활짝 열어 줄 것이다.


<도표 11. 프라나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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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부위       주관적 체험     객관적 체험       반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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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에서 목   무아경       비어-있음       생식기에서 배꼽

목에서 심장   2단계 무아경        2단계       배꼽에서 심장

심장에서 배꼽 3단계 무아경        3단계        심장에서 목

배꼽에서 생식기 오르가즘      투명한 빛       목에서 정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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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의식 통로, 프라나, 빈두로 이루어진 미묘한 몸에 대한 각성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모든 에너지를 배꼽 센터[丹田]에 집중시킨다. 배꼽 센터에 뭉쳐 있는 붉고 뜨거운 기운을 생생하게 느낀다. 그 기운은 빛을 발하며 중앙 통로를 타고 상승한다. 정수리 센터에 도달한 기운은 의식의 주체인 백색 빈두와 함께 목 센터로 하강한다. 의식 에너지가 하강할 때 '비어-있음'을 체험하는 무아경에 빠진다. 의식 에너지가 목에서 심장 센터로, 심장에서 배꼽 센터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무아경의 심도는 점점 더 깊어진다. 생식기 센터에 도달하면 황홀한 오르가즘을 체험한다. 투명하게 '비어-있는' 상태를 경험한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투명한 빛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그러나 아직은 상대적으로 투명한 빛이다. 절대 투명한 빛은 4단계에 가서 체험하게 된다. 투명한 빛을 체험한 수행자의 의식 에너지는 반대 순서로 상승한다. 이 과정에서도 각 단계에 상응하는 무아경의 체험이 뒤따른다. <도표 11>은 의식 에너지의 하강과 상승, 그리고 각 단계에서 경험하게 되는 체험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투명한 빛 속으로 녹아드는 황홀한 오르가즘[法悅]을 체험한 다음에는, 해체와는 반대 순서를 밟아 거친 차원으로 돌아온다. 투명한 새벽빛, 순수한 어두움, 햇빛 찬란한 하늘, 달빛 밝은 하늘을 거쳐 일상적인 의식으로 되돌아온다. 빠져나갔던 의식 에너지가 정수리 센터로 다시 들어오는 순간, 시체 속으로 들어와 소생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시 들어 온 생명 에너지는 중앙 통로와 지엽적인 통로를 타고 전신을 돈다.

여기까지의 1단계 수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 졌다고 해도 완전한 붓다의 경지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 중앙 통로가 열리긴 했어도 아직 여기 저기 억제된 부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심장 센터가 그렇다. 통로가 시원하게 뚫리지 않았기 때문에 프라나와 빈두가 원활하게 소통되지 않는다. 완전한 붓다의 경지, 즉 지고한 깨달음을 통한 우주적인 오르가즘[法悅]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통로에 찌꺼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다음 단계의 수행이 필요한 것이 이 때문이다.

완성 단계의 2단계에서는 바즈라 만트라[金剛眞言]의 반복을 통해 '말을 분리하는' 수행을 한다. 좌우 통로[이다와 핑갈라]가 심장 센터를 단단히 얽어매고 있다. 미묘한 차원의 몸과 마음[魂]이 좌우 통로라는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는 셈이다. 바즈라 만트라 수행은 이 밧줄을 풀어 심장 센터를 해방시키는데 특히 효과가 있다.

중앙 통로가 열리는 것을 1회적인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중앙 통로가 일단 열리면 그것으로 완전히 열린 것이라고 본다. 불교의 탄트라 요가는 힌두교의 쿤달리니 요가와 대단히 비슷하다. 道家의 氣 수행[蓄氣와 行氣]과도 비슷하다. 이들을 엄밀히 구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모든 외과 수술처럼, 중앙 통로를 개통시키는 것도(이 경우에는 창조적인 상상과 명석한 지혜가 메스의 역할을 한다) 단계적으로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단계에 따라 무아경을 체험하는 강도가 다르며, 강도가 다른 만큼 중추 신경계에 미치는 영향도 다르기 때문이다.

육체를 분리하는 수행을 통해서는 공간을 초월한다. 바즈라 만트라 수행을 통해서는 시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얻는다. 시간의 뿌리는 호흡이다. 만트라 특히 붓다의 육체와 말과 마음을 상징하는 바즈라 만트라[金剛眞言] '옴 아 훔'을 반복할 때 의식 에너지인 프라나와 만트라가 하나가 된다. 수행자는 텅 빈 우주의 중심에 '옴 아 훔'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자신만이 홀로 남게 될 때까지 만트라를 반복한다. 이 상태가 되면 호흡이 정지하고, 위에서 언급한 해체의 과정이 뒤따른다. 중앙 통로로 퇴각한 프라나와 빈두가 심장 센터를 통과할 때는, 1단계에서 있었던 4가지 황홀한 체험과는 농도가 다른 황홀한 오르가즘[法悅]을 체험한다. 여기까지가 '말을 분리'하는 2단계이다.

3단계에서는 심장 센터의 매듭을 풀어 '마음을 분리'하는 수행을 한다. 심장 센터를 얽어매고 있는 매듭이 풀리는 과정은 극히 미묘하다. 때문에 이 수행을 무리하게 진행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뛰어난 자질을 갖춘 요기와 요기니라 할지라도 바즈라 만트라 수행을 여러 해 거친 다음에 이 수행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수행의 목표는 심장 센터를 억제하고 있는 군더더기를 완전히 제거하여, 심장 센터 전체를 불멸의 의식 에너지 빈두로 충만하게 채우는데 있다. 이 때에도 강렬한 환희[法悅]를 체험한다. 여기에서는 마음이 일상적인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기 때문에, 이 상태를 '마음의 분리'라고 한다. 일상성에서 완전히 분리된 마음이 '지극히 미묘한 마음'[靈]이다. 이 단계의 지극히 미묘한 마음도 투명한 빛과 '비어-있음'을 체험한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한 붓다의 체험에 비하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의 분리'가 성취되면 이전 보다 훨씬 강렬한 환희를 체험한다. 투명한 빛에 대한 통찰도 깊어진다. 佛性의 한 표시인 신비한 몸도 만들어진다. 신비한 몸은 투명한 빛이 발산하는 신경 에너지로 형성되는 일종의 에너지 체로써, 꿈 속에서 경험하는 몸과 비슷하다. 그 몸은 꿈 속에서 무엇을 보는 것처럼 볼 수 있고, 꿈 속에서 소리를 듣는 것처럼 들을 수 있다. 다른 모든 감각도 꿈이나 중간계 상태에서의 감각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다. 이 상태에 도달한 수행자는 다시 거친 차원의 육체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본인의 선택에 따라 다시 육체로 돌아올 수 있다. 또 잠을 잘 때는 자동적으로 투명한 빛 속으로 들어간다.  꿈꾸는 동안에도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꿈을 꾸며, 꿈 속에서의 자기가 곧 붓다의 깨달은 몸이라는 사실을 안다. 잠에서 깨어난 상태에서의 자기는 곧 붓다의 나투는 몸임을 안다. 어떤 상황에서 일상적인 차원의 육체를 떠나기로 결정하면 곧 바로 해체 과정을 거쳐 붓다의 진리의 몸과 하나로 융합할 수 있다. 이렇게 진리의 몸, 깨달은 몸, 나투는 몸을 차례로 경험할 수 있다.

심장 매듭을 풂으로써 '마음의 분리'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지극히 미묘한 차원의 몸과 마음[靈]이 각성된다. 지극히 미묘한 차원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불멸의 빈두는, 주관적으로는 궁극적인 오르가즘을 체험하게 하고 객관적으로는 투명한 빛을 체험하게 만든다. 내적으로 해체와 응축(또는 이탈과 복귀) 과정을 거치는 동안 외적으로는 수행의 짝과 결합한다. 호흡이 멎고, 이어 8단계의 해체 과정을 통과한다. 해체 과정을 통과하면서 정도가 다른 4종류의 오르가즘과 '비어-있음'을 체험한다. 응축 과정을 통해 돌아올 때는 반대 순서로 체험한다. 다음에는 투명한 빛에서 발산되는, 다섯 붓다의 지혜를 상징하는 다섯 무지개 빛 에너지로 만들어진 신비한 몸이 형성된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순수한 몸은 아니다.

흔히 5가지 비유적인 표현으로 신비한 몸을 설명한다. 꿈 속의 몸, 거울에 비친 바즈라사트바의 영상, 물에 비친 달, 유령, 물거품 등으로 표현한다. 신비한 몸은 거친 차원의 육체와 연결되어 있지만, 육체와는 분리되어 있는 듯이 느껴지는 꿈 속의 몸과 같다. 신비한 몸은 112가지 초인의 표지를 갖고 있는, 거울에 비친 바즈라사트바의 영상과 비슷하다. 미묘한 차원의 신비한 몸은 물에 비친 달과 같다. 달은 물이 있은 곳이면 어디나 비친다. 마찬가지로 신비한 몸은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에나 나타날 수 있다. 신비한 몸은 실체가 있는 듯이 보이나 실체가 없는 유령과 같다. 마지막으로 신비한 몸은 물거품과 같다. 물거품이 물에서 떠나는 즉시 터져 버리는 것처럼, 신비한 몸은 투명한 빛이라는 토대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더 없이 투명한 빛을 체험하는 완성 단계의 4단계 수행은, 신비한 몸을 만드는 3단계 수행을 6개월 내지 18개월 계속한 다음에 시작한다. 투명한 빛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가 다시 거친 차원의 육체로 되돌아오는 수행을 계속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열심히 봉사한다. 투명한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정도가 점점 더 깊어지다가, 마침내 절대적으로 투명한 상태에 도달한다. 3단계에서 형성된 신비한 몸은, 무지개가 하늘에서 흩어지듯이 그 빛 속으로 사라진다. 습관으로 인한 모든 장애물도 사라진다. 물론 황홀경과 '비어-있음'도 체험한다. 투명한 빛에서 나와 직관 차원으로 돌아올 때 그대는 성자가 된다. 그대의 신비한 몸에는 더 이상 감정적인 장애물이 남아 있지 않다. 그대는 해탈에 이르는 길을 터득하고, 초보 단계의 통합을 성취한 순수한 몸으로 돌아온다.

마지막 5단계는 '통합 단계'이다. 진정한 통합은 지적인 장애물까지 완전히 제거될 때 이루어진다. 지적인 장애물은 투명한 빛 속으로 몰입하는 4단계 수행을 계속 진전시킴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 지적인 장애물이 제거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인과 관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완전한 자유도 없다. 전쟁터에 나간 용사처럼 용맹스럽게 정진하지 않고는 장애물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다. 여기에서의 통합은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한 신비한 몸과 더 없이 투명한 빛과의 통합이다. 오르가즘의 환희를 체험하는 완전한 자비와 '비어-있음'을 통찰하는 완전한 깨달음의 통합이다. 인도의 위대한 성자 나가르주나(龍樹)는 <다섯 단계>라는 글에서 통합 단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윤회하는 세상과 니르바나의 해탈 세계에 대한 분별심을 버리고, 그 둘이 하나가 될 때 그것을 '통합'이라고 한다. 습관에 물든 자아와 순수하게 정화된 자아를 있는 그대로, 동일하게 보는 사람이 통합에 도달한 사람이다. 깨달음과 자비가 하나인 줄 알고,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을 통합을 이룬 사람이라고 한다. 통합에 이르면 주관적인 '자아-없음'(無我)과 객관적인 '비어-있음'(空)이라는 두 가지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와 진다. 통합 단계에 도달한 수행자는 집착과 무관심의 양변을 여의고, 순간 순간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 . . 순수하고 완전한 신성과 '불완전함'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통합에 도달할 사람이다. . . . 이런 상태에 도달한 수행자는 통합 경지에 머문다. 그는 궁극적인 실재를 깨닫고 다양성을 포용한다. 이 상태에 도달한 붓다들은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그들은 있음(有와 色)과 없음(無와 空)의 양변을 떠나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 . .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수행의 힘으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성취한다. 지고한 다섯 번째 단계에 대한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온 세상이 통합의 사마디에 들기를 바란다.

나가르주나가 묘사하고 있는 완성 단계 상태는 사실 엄청난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묘사나 앞에서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가지고는 실제 수행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설명하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자극이 되어 죽음과 중간계와 환생을 준비할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죽음의 해체 과정과 중간계의 여행과 환생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생에서 아니면 다음 생에서라도 그 과정을 마트터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 보편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에는 완성 단계의 최종 단계에 대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완성 단계 수행의 4단계와 5단계는 목표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성자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라면 배우고 닦은 수행이라는 토대가 있기 때문에 4단계와 5단계에 대한 간단한 가르침만 주어져도, 저승 중간계가 시작되는 죽음 중간계에서 즉각 해탈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티벳 死者의 書>는 그렇게 고도의 경지에 오른 정신세계 비행사가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을 위해 기록된 책이다. 그래서 최종 단계인 4단계와 5단계에 대한 가르침이 생략된 것이다.

<티벳 死者의 書> 자체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책 독송하는 것을 듣는 중간계 여행자에게 완성 단계의 가르침을 은밀하게 전달할 수는 있다. 죽음 이후에 여행하는 중간계는 일종의 위기 기간이다. 그때 미묘한 차원의 몸과 마음인 영혼은 지극히 유동적인 상태에 있다. 대부분의 탄트라 기법은 변형 가능한 그런 미묘한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진화의 추진력이 좋은 방향으로 강력하게 쏠려 있는 사람일지라도, 중간계를 대비한 준비를 하지 않은 경우에는 휘황 찬란하게 빛나는 눈부신 빛에 놀라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릴 수도 있다. 반대로 좋지 않은 진화의 추진력이 축적되어 있는 사람일지라도, 생전에 중간계에 대한 적절한 준비를 했다면 용감하게 빛을 향해 뛰어 들 수 있다. 그러면 수없는 생을 통해 쌓아온 바람직하지 않은 진화의 추진력을 순식간에 극복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미묘한 차원에서 하나를 성취하면 거친 차원에서는 열을 성취하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중간계의 영혼은 상상하는 대로 즉시 변형 된다. 불교에서는 현실을 변형 시키는, '영적인 유전자' 역할을 하는 지속적인 상상을 염상속(念相續)이라고 한다. 중간계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지적인 능력이 최대 한도로 확장된다. 집중력도 강해지고, 천리안이나 투시 또는 상념에 의한 원거리 이동 능력도 생긴다. 영혼 상태 자체가 대단히 유동적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생각이나 가르침에 의해서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중간계를 여행하는 동안 궁극적인 실체에 대해서, 또 누구와 결합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 지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이 생에서 일단 최종적인 묘표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그에 대해 배운 게 있기 때문에 중간계의 위기를 훨씬 잘 통과할 수 있다. 이것이 <티벳 死者의 書>를 저술한 파드마 삼바바의 의도다. 파드마 삼바바는 완성 단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도 완성 단계의 최종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티벳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오늘날의 티벳 라마승들이 전 세계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불교도가 아닌 사람이 완성 단계의 5가지 단계적인 수행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지, 또는 이 가르침의 단계를 자신의 종교에 적용하거나 응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지구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각 종교마다 믿음직스러운 성자들의 전통이 있다. 그들은 모두 삶과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샤먼[무당]도 죽음의 해체 과정을 체험하며, 자기에게 내린 신과 하나가 된다. 때로는 악한 신의 방해도 받는다. 대부분의 샤먼들은 아발로키테스바라(觀世音菩薩) 같은 자비로운 신에게 귀의하여 믿고 따른다. 각 종교의 수도원 전통 속에는 영혼의 여행에 대한 체험이 수북히 쌓여 있다. 기록으로 남아 전해 오는 것도 많다. 이슬람 신비가들인 수피나 도교의 성자인 도인들의 가르침도 살아 있다. 수행이라는 맥락에서는, 티벳 전통이 확립해 놓은 체계적인 수행법과 통찰은 어떤 전통에 속한 수행자에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




□ 제 4 장 □

문헌의 역사와 구성


1. 문헌의 역사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 자체의 내용에 따르면 <티벳 死者의 書>는 위대한 성자 파드마 삼바바의 작품이다. 파드마 삼바바의 수행의 짝인 요기니 예셰 초걀(Yeshe Tsogyal)은 파드마 삼바바가 불러 주는대로 기록했다. 기록 연대는 대충 8세기 후반이다. 파드마 삼바바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신비하다. 석가모니 붓다의 생애담과 비슷한 부분도 있고, 84명의 위대한 성자들의 생애담과 비슷한 부분도 있다. 파드마 삼바바라는 이름 자체가 하야그리바(Hayagriva)를 상징하는 만트라로 사용된다. 말 머리 형상으로 나타나는 하야그리바는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난 아발로키테스바라(觀世音菩薩)이다.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붓다와 보살들의 내면 상태는 자비로움이다. 무서운 모습은 사랑하는 방법이 격렬함을 상징할 뿐이다.)

전설적인 생애담에 의하면, 파드마 삼바바는 서쪽 붓다의 땅을 지배하는 아미타바 붓다의 입에서 나왔다. 아미타바 붓다의 입에서 무지개가 뻗어나와 그 꼬리가 현재 파키스탄이 자리 잡고 있는 인도 북부 웃디아나 왕국의 한 연못에 떨어졌다. 무지개가 떨어진 자리에서 커다란 연꽃이 피어 올라왔고, 그 연꽃 속에서 한 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의 몸에서는 광채를 발하고 있었고 영롱한 무지개 빛이 그 아이를 감싸고 있었다. 그가 곧 파드마 삼바바이다. 웃디아나 왕에게는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그는 아발로키테스바라(觀世音菩薩)에게 아들을 얻게 해 달라고 기원했고, 그 응답으로 파드마 삼바바가 태어난 것이다. 사람들이 파드마 삼바바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파드마 삼바바는 "나의 어머니는 지혜고 아버지는 자비다. 그리고 내 나라는 실체 다르마 세계다."라고 대답했다.

티벳에서는 파드마 삼바바가 성자들 중에 성자다. 그는 붓다의 여러 나투는 몸 중에 하나다. 그는 중간계를 자유 자재로 왕래하면서 중간계에 대한 가르침을 폈다. 파드마 삼바바는 인도에서 여러 세기 동안 살면서 수행했다. 그리하여 놀라운 경지에 도달한 파드마 삼바바는, 티벳 황제 치송 데쩬의 요청으로 티벳으로 건너갔다. 그는 치송 데쩬의 후원을 받으며, 철학자 샨타라크쉬타와 함께 호전적인 땅 티벳에 최초의 불교 승원을 세웠다. 그는 티벳에서 활동하고 있던 악마들을 길들였고,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을 포함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폈다. 그리고 코퍼 산에 있는 자신의 낙원으로 사라졌다. 티벳 사람들은 코퍼 산이 아프리카나 아라비아의 어딘가에 있으며, 파드마 삼바바가 아직도 거기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파드마 삼바바는 9세기에 있을 대대적인 불교 박해를 예견하고 <티벳 死者의 書>를 포함한 여러 문서들을 티벳 전역에 흩어 감추었다. 박해 시대를 지나 불교 부흥 운동이 일어나자, 비장 문헌 발굴자(티벳어로 떼르또엔 tertoen)들이 속속 나타났다. 그들은 천리안이나 투시 능력과 같은 초능력을 사용하여 숨겨져 있는 문서들을 찾아냈다. 사람들은 비장 문헌 발굴자들을 파드마 삼바바나 그의 25명의 제자들의 환생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들은 바위 절벽에 뚫린 동굴이나 바위 속 또는 나무 밑 땅 속에서 여러 문서들을 찾아냈다. 심지어는 자기들 마음 속에서 찾아내기도 했다. 전생에 스승 파드마 삼바바가 제자들의 기억 속에 감추어 놓고, 몇 생이 지난 후 적절한 시기가 되면 그 기억 코드를 풀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이런 전통은 고대 인도 불교에도 있었다. 일례로 대승 경전[般若經]과 탄트라 문헌들은, 붓다가 기록하여 바다 속 용궁에 감추어 놓은 것을 B.C. 1세기 경에 나가르주나(龍樹)가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14세기에 까르마 링빠라고 하는 유명한 비장 문헌 발굴자가 나타났다. 사람들 중에는 그를 파드마 삼바바 자신의 환생으로 보는 이도 있었다. 까르마 링빠는 티벳 고원 중앙에 위치한 감뽀 다르 산의 한 동굴에서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을 찾아냈다. <명상을 통한 해탈>과 같은 비장 문헌의 저자에 대한 의심은 서구 세계는 물론 티벳 자체에도 있다. 그러나 저자 문제는 우리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우리는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을 표지가 아니라 내용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 내용이 만약 불교 전통의 주요한 흐름과 상반되고 근거도 확실치 않다면 조잡한 위조 문서로 내팽개쳐도 된다. 그러나 만약 그 내용이 지적이고 영적인 불교의 전통과 부합될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고 유용하다면 진정한 불교의 가르침으로 받아 들여야만 한다. 만약 후자의 경우가 확실하다면, 불교의 과학과 신앙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은 경전에 포함 시켜야 한다. 또한 문헌 자체에 언급되어 있는대로,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은 파드마 삼바바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받아 들여야 한다.

<티벳 死者의 書> 본문을 연구하고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면 파드마 삼바바가 진짜로 영적인 초능력자 였는지, 아직도 살아 있는지 하는 등등의 문제의 진위를 꼭 밝혀야 할 필요는 없다. 마음 속으로는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파드마 삼바바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이기를 은밀히 바랄지라도, 이런 이야기를 드러내 놓고 사실로 믿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까르마 링빠가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을 발굴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4세기의 티벳은 영적.제도적.사회적 르네상스였다. 까담파, 샤키야파, 까귀파, 닝마파에서 배출된 뛰어난 라마승들이 그 부흥 운동을 주도했다. 부흥 운동은 1400년 경 쯔옹 까빠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부흥 운동에 참여한 라마승들은 모두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다. 또 정신계를 비행하는 내면 세계 탐험가이자 성자들 이었다. 의식이 각성된 상태로 죽음의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앞 장에서 설명한 완성 단계 요가를 수행하며 깨달음을 추구했다. 그 결과로 우리 시대의 우주 비행사들이 달에 착륙하여 달 표면을 거닌 것처럼, 내면 세계의 해와 달과 투명한 빛에 도달했다. 그들이 죽을 때 놀라운 표징이 나타나기도 했다. 죽은 뒤에도 의식이 해체되지 않고 연속성을 유지했다. 그들은 죽음을 자신들이 성취한 붓다의 세 몸을 결정화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투명한 실체 세계와 하나된 다음에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다시 티벳 여인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환생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는 죽기 전에 환생한 자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단서를 제자들에게 남겨 놓는다. 환생한 라마승을 뛸꾸라고 하는데, 뛸꾸로 판명된 아이는 그가 전생에 수행하던 승원으로 돌아가 전생의 제자들의 섬김을 받는다. 티벳의 라마승들은 이렇게 생을 거듭하면서 깨달음의 완성을 추구해 나간다. 깨달은 스승의 환생은 제자들이 성숙하도록 가르치며, 티벳을 위시한 주변 여러 나라가 깨달음의 세계로 진화하는 것도 돕는다. 티벳 사람들은 깨달은 라마승의 환생을 익숙하게 받아 들인다. 심지어는 깨달음을 얻은 후 3번이나 7번 또는 11번 정도의 환생을 거치지 않은 라마승의 가르침은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마저 있다.  티벳 사회에서는 환생한 라마승들이 최고의 학자이자 권위자로 뭇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14세기 티벳의 분위기는 죽음과 환생에 대한 가르침이 펼쳐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해 있었다. 중간계의 존재와 현상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티벳에 불교가 전해진 다음 5세기 동안 엄청난 양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티벳어로 번역 되었다. 그 안에는 중간계에 대한 가르침도 거의 완벽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티벳 死者의 書>에 나오는 것과 같은 중간계를 통과하는 기법도 방대한 탄트라 문헌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기본적인 탄트라 문헌과 성자들이 붙인 주석도 티벳어로 거의 다 번역되어 있었다. 어림 잡아 우리 책으로 2000쪽에 달하는 책 수 백권  분량이었다. 거기에 티벳 자체에서 산출된 문헌들이 속속 덧붙여 졌다. 불교 중흥 시대에 티벳에는 수 천이 넘는 각 종파의 승원이 건립 되었고, 거기에서 교육 받은 수많은 학자와 성자들이 저술한 2차적인 자료들이 인도에서 건너온 원래의 경전과 결합되어 방대한 탄트라 문헌을 이루었다.

연꽃에서 태어난 전설적인 성자 파드마 삼바바가 숨겨 놓은 보물이 세상에 빛을 발할 분위기가 이렇게 무르익어 있었다. 옛날부터 전해진 탄트라 중에서 구야가르바 탄트라Guhyagarbha Tantra라는 중요한 수행 체계가 있었다('비밀의 정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구야가르바 탄트라 경전은 이미 8세기와 9세기 어간에 번역되어 '옛 종파'인 닝마파를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새로 발견된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에 나오는 만다라는 구야가르바 탄트라를 통해 전해지고 있던 만다라와 완전히 일치했다. 이 만다라의 내용은 일상적인 인간 세상을 행복이 넘치는 완전한 환경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만다라는 자애로운 모습과 무서운 모습의 붓다와 보살 1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 100명의 붓다와 보살들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완성된 상태를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유로움과 초월적인 능력과 행복을 표출하고 있다. 또 다른 존재들과 무한한 행복을 나누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인간 진화의 목표이다. 또 깨달음은 얻은 인간의 육체적 에너지와 영적 에너지가 변형할 변화의 원형(原形)이다. 수행자들은 오래 전부터 창조 단계 수행과 초월 명상에서 이 만다라를 사용했다.

새로 발견된 <티벳 死者의 書>는 진화의 원형인 만다라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를 넓혀 주었다. 승원에서 교육 받지 못한 사람, 수행에 전념하지 못한 사람, 그래서 죽음에 대한 적절한 준비를 못한 평범한 사람도 죽는 순간과 저승 중간계에서 100명의 붓다와 보살들로 구성된 만다라 세계에 접할 수 있는 문이 열렸다. 물론 본문에는 죽음이라는 위기의 순간까지 미루지 말고, 이 생에서 죽음을 준비할 것을 직.간접적으로 요청하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문하여 수행에 몰두할 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중간계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실재를 이해하는 지적인 능력, 상상력, 자유 의사에 따른 선택의 기회, 변형 능력 등이 9배로 증가한다. <티벳 死者의 書>는 그렇게 일시적으로 확장된 능력을 이용하여 즉각적인 해탈에 이르도록 안내한다. 이 책은 자신의 죽음은 물론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에도 이용할 수 있다. 중간계에서 <티벳 死者의 書>의 내용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은 정신세계 비행사들이 체험한 것과 동일한 체험을 할 수 있으며, 그들이 도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정신세계 비행사들이 말한 대로 중간계의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체험함에 따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심이 커진다. 그러면 그들이 언급하고 있는 인도자나 결합해야 할 붓다나 보살들이 나타나기를 정신 똑바로 차리고 기다리게 될 것이고, 그들이 나타날 때 결합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은 당연한 이치다.

<티벳 死者의 書>를 포함하여 새로 발견된 경전들은 티벳 불교 중흥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세기 부터는 많은 필사본과 인쇄본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했다. 비장 문헌을 모방한 유사한 작품들도 많이 나타났다. 대부분이 새로 발견된 비장 문헌에 그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티벳 불교 4종파의 구전(口傳) 가르침과 전승을 덧붙인 것이었다. 문헌의 유포와 확장 과정은 매우 넓고 다양하게 전개 되었다.

민중 차원에서는 경구가 적힌 부적을 통해 경전 내용이 널리 퍼졌다. 일반인들은 신의 가호를 비는 기도문이나 그림이 그려진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금속으로 만든 부적을 지니기도 했으며, 죽은 자의 품 속에 넣어 주기도 했다. 붓다의 말씀을 새겨 넣은 불상을 예불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경전의 내용은 길고 짧은 여러 만트라를 통해서도 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갔다. 민중 사이에 퍼진 만트라는 대부분 신의 가호를 비는 기도문이었다.

엘리트 계층의 경우에는 영혼의 전이(轉移) 수행을 위한 기법을 안내하는 책자들이 유포 되었다. 수행자들은 그런 안내서의 도움을 받아 의식이 각성된 상태로 육체를 떠나는 수행을 한다. 간략하게 구성된 원형적인 패턴의 만다라도 만들어 졌다. 그런 만다라는 기억하기가 쉽기 때문에 시각화 상상을 명료하게 진행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새로운 세대의 수행자와 성자들의 체험에서 비롯된 보다 더 명백한 가르침과 새로운 사상, 그리고 보다 더 정교한 기법도 보충 되었다.



2.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의 구성


다른 고대 문헌들과 마찬가지로,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 역시 시대가 흐르면서 약간의 수정과 교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 포함된 문서의 종류도 약간씩 차이가 있다. 내가 구할 수 있던 것 중에서 가장 믿을 문헌에 포함된 문서들을 티벳 알파벳 순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 색인. <자애로운 모습과 무서운 모습의 붓다와 보살들에 대한 명상을 통해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근본 가르침>에 실려 있음. (1쪽)


ka.  <붓다의 세 몸인 스승에 대한 기도>. <3가지 독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에 포함되어 있음. (3쪽)


kha. <저승 중간계에서 드리는 기도>. <中間界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책>에 포함되어 있음. (36쪽)


ga.  <무서운 모습의 붓다와 보살이 나타나는 중간계에서 깨어나는 법>. (21쪽)


nga. <붓다와 보살들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 (3쪽)


ca.  <여섯 중간계에 들어가기 전에 드리는 기도>. (3쪽)


cha. <중간계의 곤경에서 구원을 청하는 기도>. (4쪽)


ja.  <탄생 중간계에 대한 안내>. <中間界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책>에 포함되어 있음. (35쪽)


nya. <육체의 자연스러운 해탈>. (24쪽)


ta.  <중간계 여행의 두려움으로부터 구원을 청하는 기도>. (3쪽)


tha. <본능의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 (26쪽)


da.  <죄악과 장애물에서 벗어나기 위한 100가지 맹세>. (15쪽)


na. <자애로운 모습과 무서운 모습의 붓다와 보살들께 드리는 즉각적인 해탈에 대한 고백>. (24쪽)


pa.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 (15쪽)


pha. <죽음의 표징을 통해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 (25쪽)


ba.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의 벗어나는 법>. (11쪽)


ma.  <탄생 중간계의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에 대한 가르침, 탄생 중간계에서 즉시 해탈에 이르는 법>. (18쪽)


tsa. <탄생 중간계의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에 대한 보충 가르침>. (8쪽)


◎ 인도 샤하타다라의 Great mNga sde에서 1985년 1월 1일에 인       쇄된 본문에는 이상과 같이 275쪽의 문서가 실려 있다.


우리 책에는 총 275쪽의 본문 중에서 150쪽에 해당하는 본문을 번역해서 실었다. 150쪽 중에서 108쪽이 <티벳 死者의 書> 주요 내용이고, 나머지 42쪽은 예비 기도와 본문과 관련된 수행법에 관한 것이다. 108쪽에 해당하는 본문은 이미 영어로 두 차례 번역된 적이 있다. 첫번째 번역은 카지 다와-삼둡과 에반스-벤츠에 의해 이루어졌고, 두번째 번역은 프란체스카 프레맨틀과 초걋 뚜룽빠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리 책 3장에 실린 <본능의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은 아직 번역한 사람이 없다. 이 책에서 처음 번역되는 것이다.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은 에반스-벤츠가 처음 영어로 번역했고, 후에 존 레이놀즈(John M. Reynolds)가 다시 번역한 바 있다. 이 문서는 <티벳 死者의 書> 내용의 철학적인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번역하는 <티벳 死者의 書>의 용어나 개념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새 번역을 시도했다. 간략한 해설도 붙였다. 죽음의 표징을 다루고 있는 'pha' 문서는 우리 책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글렌 물린(Glenn Mullin)이 번역한 역본이 있다. 기타 나머지 문서들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장래에 훌륭한 연구가가 나와 좋은 번역본을 내놓으리라고 본다.

파드마 삼바바는 전문적인 수행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런 의도에 따르기 위해 최대한 보편적이고 실용적인 번역을 하기 위해 애썼다. 자신의 죽음이나 친구나 가족의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이용하기 쉽도록 문서의 순서도 조정했다. 중요한 여러 기도문은 저승 중간계로 들어가는 초입 부분에 언급된 순서에 따라 본문 맨 앞에 배열했다. 맨 앞에 실린 이 기도문들은 새로운 중간계로 옮겨갈 때마다 그에 해당하는 기도문을 찾아 반복해야 한다. 기도문 다음에는 <티벳 死者의 書>의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 중간계, 저승 중간계, 탄생 중간계에 관한 가르침을 차례로 실었다. 죽은 자에게 큰 소리로 읽어 주어야 하는 부분은 큰 글씨로 구별했다.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예비 기도

붓다의 세 몸인 스승에 대한 기도 (ka)

붓다와 보살들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 (nga)

중간계의 곤경에서 구원을 청하는 기도 (cha)

중간계 여행의 두려움으로부터 구원을 청하는 기도 (ta)

여섯 중간계에 들어가기 전에 드리는 기도 (ca)


중간계 여행의 안내서

예비 단계

죽음 중간계

자애로운 모습의 붓다와 보살이 나타나는 저승 중간계

무서운 모습의 붓다와 보살이 나타나는 저승 중간계

탄생 중간계


보충 문서

본능의 해탈을 위한 다르마 수행 (tha)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 (pa)



이번 번역에 두 종류의 티벳어 판을 사용했는데, 둘 다 말끔하게 다듬어 진 책은 아니었다. 곳곳에 미스 프린트가 있었고, 철자의 배열도 들쭉날쭉 했다. 미세하긴 했지만, 간혹 두 본문 사이에 내용의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도 있었다. 여러 가지 본문을 수집해서 학문적인 본문 비평을 거친 믿을만한 판본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판본에서 서로 차이가 나는 부분을 밝히는 각주도, 번잡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붙이지 않았다.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학문적인 정밀성이 아닐 것이다.

붓다나 보살들의 이름은 가능한 한 산스크리트어 명칭을 발음을 따라 표기했다. 그들 이름은 원래 산스크리트어에서 왔다. 티벳 사람들은 인구 어족에 속하는 산스크리트어의 이중 모음과 자음 결합을 발음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자기들 식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러나 영어는 인구 어족에 속하는 언어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 발음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티벳 死者의 書>의 주요 배경이 되는 개념들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다. 본문에서는 단락 마다 작은 글씨로 해설을 덧붙였다. 처음 등장하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나 개념은 해설 부분에 그 설명을 포함시켰다. 나머지는 책 뒤에 첨부한 <어휘 사전>을 참고하기 바란다.

현재 미국에서 불치의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나 노인들 중에 안락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보고는 충격적이다. <티벳 死者의 書>는 중간계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 자살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살은 부정적인 진화 행위다. 탄트라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자살이 곧 신을 죽이는 일이다. 자신의 육체 속에 수많은 작은 신들이 거하고 있으며, 자신의 몸이 곧 신의 몸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통을 수용하지 못하고 자살이나 안락사를 통해 모면해 보려고 한다. 그들은 비참하게 오래 사는 것 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결단을 용감하게 실행에 옮긴다.

불치의 병이나 고통으로 이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어떻게 죽을까 궁리하거나 실제로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두뇌의 활동이 정지하면 모든 것이 잊혀지고 '즉시 자유로운' 상태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건 불행한 일이다. 판단 착오에서 비롯된 비극일 뿐이다. 분명히 천성적으로 즐겁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늘 친절하고 관대하며, 사는 데에도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평소에 무슨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밝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늘 긴장 속에서 어둡게 사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육체나 소유에 집착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일신상의 안락을 얻고자 발버둥 친다. 이런 사람은 중간계를 여행하는 동안 엄청난 혼란에 휘말린다. 그 혼란에서 빠져나와, 좀 더 나은 진화의 영역으로 들어갈 확률도 적다. 해탈에 이를 확률을 더 더욱 적다.

그런 사람들 중에 단 몇 명이라도 이 책 <티벳 死者의 書>를 읽고 자신들의 삶에 적용 시킨다면 더 바랄게 없겠다. 파스칼의 도박의 원리가 제시하는 것처럼, 이 책을 통해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면 좋겠다. 이 책이 그런 사람들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책을 통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나타난다면, 파드마 삼바바와 그의 동료들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이리라. 그렇게 되면 나의 노력 또한 헛되지 않으리라.


모든 중생이 3가지 보물의 축복 받기를 바라나이다!

이 별에 평화가 넘치고, 늘 아름답게 빛나기를 바라나이다!

모든 중생이 행복에 휩싸이기를 바라나이다!

모두에게 좋은 미래가 열리기를 바라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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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_()_ 2014-03-31 오후 8:00:25 덧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