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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여라, 티베트의 오체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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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여라, 티베트의 오체투지

높이 펄럭이는 오성홍기와 감춰진 달라이라마 사진, 티베트 난민에게 꺼내보여준 당신들이 직접 보았어야 할 그곳 풍경들

▣ 라싸(티베트)·포카라·카트만두(네팔)=글·사진 임종진 사진작가
stepano0301@naver.com

마음이 급했다.

시간은 저만치 지나가는데 갈 길은 멀고, 운전기사는 길까지 헤맸다. 강하게 쏟아붓는 빗줄기와 곳곳에 입을 벌린 웅덩이 투성이인 낡은 도로는 택시를 마치 굼벵이 기어가듯 더디게 만들었다. 마음이 급한 이유는 그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점점 불안감이 더해지면서 너무 섣부른 약속을 했나,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 달라이라마가 살던 포탈라궁과 함께 티베트의 상징인 조캉사원 앞 바코르 광장. 티베트 전역에서 광장으로 몰려온 순례자들은 사원에서 오체투지를 마친 뒤 다시 광장을 지나 힘겨운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자왈라켈 난민촌을 다시 찾다

‘그래. 아무도 없을 거야. 사실 꼭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좀 늦으면 어때.’ 스스로 위로를 곁들이지만 심장은 빠르게 콩닥거렸다. 어쨌거나 누가 기다리든 그렇지 않든 그곳에 가야만 했고 애꿎은 운전기사를 재촉해 닦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약속한 오후 6시를 훌쩍 넘긴 시간은 가속 페달을 밟은 듯 빠르게 속도를 냈다. 그만큼 입술도 타들어갔다.

‘그러면 그렇지.’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네팔 북부 포카라 시내 외곽에 있는 자왈라켈 티베트 난민촌. 마을 들머리에 도착하자 한 시간이 넘도록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노인 4명이 벌떡 일어나 반긴다. “혹시나 네팔 경찰에게 해를 당한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면서 “이젠 마음이 놓인다”고 환하게 웃는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거듭되는 사과도 받을 일이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늙은 그들은 티베트 난민 1세대들이다.

약속은 전날 오후에 있었던 난민촌 방문길에 몇몇 노인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에 우연히 이뤄졌다. 티베트 여러 지역을 여행하고 왔으며 사진을 많이 찍었다는 말에 그들이 조심스레 “그 사진들을 볼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해온 것이다. 사진이 저장된 노트북 컴퓨터를 가져오려면 다음날 다시 와야 하는데, 그날은 히말라야 산행이 계획돼 있었다. 조금 망설였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내겐 단순한 여행지였던 티베트는 그들에겐 돌아갈 길이 막힌 고향이자 한이 서린 땅이기 때문이다. 결국 원래 일정인 네팔 트래킹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트래킹 출발점인 나야푸르까지만 들르기로 하면서 “내일 오후 6시까지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히말라야의 설경에 잠시라도 묻히고 싶은 원래의 계획은 그들의 간절한 눈빛에 살그머니 사라졌다. 사실 나야푸르까지 다녀오는 내내 그들의 눈빛을 털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의 더딘 속도가 못내 가슴을 후벼댔던 것이다.


△ 중국화 바람과 함께 자전거를 개조해 만든 ‘릭샤’가 해발고도 3500m를 넘는 티베트 수도 라싸의 거리에도 등장했다.

마을회관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20여 명의 주민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회관 안에서 노트북 액정 화면의 푸른빛이 주변을 밝혔다.

“여기가 라싸(티베트 수도)예요. 여기는 장족거리에 있는 재래시장이고요.”

50년 만에 보는 고국 땅의 풍경에 그들은 감탄을 연발했다. 한 컷 한 컷 꼼꼼히 살펴보면서 혹시나 자신이 아는 지역이 나오지 않을까 시선을 거두지 못했고, 어떤 나이 지긋한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액정을 더듬으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눈빛들이 펄펄 살아 튄다.

“여기는 포탈라궁이지요. 이날은 인민해방군들이 광장에 많았어요.”

붉은 오성홍기를 든 인민해방군들이 포탈라궁 앞 광장을 행진하는 사진을 보자 ‘아휴’하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과거 티베트 독립투쟁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동포가 살해되는 모습을 뚜렷이 기억하는 1세대들에겐 인민해방군은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티베트인들의 상징인 포탈라궁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인민해방군들의 행위에 그들은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다.

중국어와 영어로 현란한 텔레비전

“팅그리 마을이에요. 네팔로 오는 길에 있지요. 아, 여기는 카루샹이라는 곳이네요.”


△ 포탈라궁 앞에서 펄럭이고 있는 오성홍기는 티베트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다시 이어지는 여러 지역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눈빛이 밝아졌다. 중국의 지배를 받기 전 티베트는 타클라마칸사막과 히말라야 북부를 아우르는 한반도의 12배가 넘는 땅을 가지고 있었다. 드넓은 평원과 뛰어난 자연환경 속에서 유목민의 기개를 맘껏 누렸던 자부심과 나라를 잃은 타향살이의 서러움이 그들의 표정에서 홀연히 교차됐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좀 행복해 보이더냐, 불행해 보이더냐”고 묻는다. 누군가 조용히 기억을 더듬듯이 입을 열었다.

“열다섯 명이 함께 산을 넘었지. 자고 나면 두세 명씩 죽어 있었어. 결국 끝까지 남은 것은 겨우 세 명이었지.”

다른 누군가가 이어받았다. “포탄이 마구 떨어지는 길을 헤치고 도망 나왔어. 살아남은 게 기적이지.” 누구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말문을 열었다. 눈시울을 붉혀가며 여러 차례 사진을 반복해서 보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티베트에서 목격한 수많은 형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라싸에 도착했던 첫날 게스트하우스에서 무심코 텔레비전을 켰다. 40여 개의 다양한 채널이 저마다 눈을 홀리며 지직거렸다. 무협물과 홍콩·할리우드의 액션물, 실시간 중계라는 스포츠물, 서너 개의 한국 드라마 등 현란한 영상물들의 뒤범벅이었다. 거기에 한국의 유명 연예인이 나오는 광고까지 끼었다. 모두가 중국어요, 영어다. 미련한 생각일까. 혹시나 기대했던 티베트의 문화와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단 하나도 볼 수 없었다.


△ 조캉사원을 찾은 순례자들이 불상 앞에서 마음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긴다는 라싸의 조캉사원의 새벽. 길게는 몇 년을, 짧게는 수개월을 땅바닥에 온몸을 내던지며 한 걸음 한 걸음 찾아온 수많은 티베트인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오체투지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춰 임하는 그들의 모습은 경외감에 달리 보였고, 지켜보는 것 자체가 대단히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단순히 어떤 열정이나 종교적 것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을 낳아준 대지와 몸을 맞닿게 하는 그들은 온몸을 땅에 던짐으로써 삶의 고단함과 여유로움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도 그들이 보여주는 환한 미소는 스스로 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어떤 경지와 같다. 중국의 지배를 벗어날 어떤 기미조차 없는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 얼핏 미련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그들의 의식은 나라 없는 서러움이든, 삶의 무게든, 수많은 번민이든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바꾸었다. 이미 역사를 거스른 채 은밀히 진행되는 중국화의 물결이 티베트인들의 정신까지 범람하지는 않은 듯 보였다.

10살 이하 아이들에게 난민증이 없어

다음날 오후 티베트 라마교의 상징인 포탈라궁 앞 너른 광장에는 중국 인민해방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기록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짙은 국방색 제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은 총검으로 무장한 채 감독의 지시대로 붉은 오성홍기를 올려 세운 채 걷고 서기를 반복했다. 레일 위에 놓인 카메라는 포탈라궁을 배경으로 군인들의 움직임을 포착했고, 높은 계급의 한 장교는 더 힘있게 손발을 맞추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언제부터 자기들의 땅이었을까. 누구를 해방시킨 것인지 알 수 없는 인민해방군들은 시시덕거리며 점령군으로서의 우위를 거만하게 드러냈다.


△ 국경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카루샹 마을의 한 인민학교 앞에서 아이들은 장난스런 몸짓으로 이방인을 반겼다. 목에 두른 붉은 두건과 학교 담장에 쓰인 한자를 통해 티베트의 정규교육 과정에 깊이 박힌 중국화의 이면을 읽을 수 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오래된 주택가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땅에 주저앉아 딱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낡고 소담스런 빈민가다.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여성들을 지나 안쪽으로 쭉 들어갔다. 목공인 실로(49)와 눈이 마주쳤다. 반가이 인사를 나눈 뒤 그의 권유로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부인 파쌍(47)은 계속 야크버터차를 건네며 환히 웃었다. 사는 데 어려운 것은 없느냐는 질문을 부질없이 건넸더니, 라마교의 경전이나 종교적인 문양을 조각해 내다 파는 목수일로 월 40위안(약 6천원) 안팎을 번다고 답했다. 라싸대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학교를 졸업한 뒤 식당이든 어디에든 취직해서 가사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족 풍경이 눈에 박힌다. 아쉬운 인사를 나누며 집을 나서려는데 벽면에 놓인 가구 유리창 너머로 달라이라마의 초상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 공안의 감시가 심해 평소 내놓지 못한다는데 괜찮으냐고 물으니 “요즘 들어 밖에 내걸거나 외부에 알리지만 않으면 그리 심하게 단속하지는 않는다”면서 “눈치를 보며 가끔 꺼내놓는다”며 웃는 모습이 선하다. 중국 당국은 티베트인 가정에서 ‘도망자’가 생기면, 남은 가족에게 1500위안(약 18만6천원)의 벌금을 부과한단다.


△ 오체투지는 홀로 치르는 의식이다. 무릎을 꿇는 순간 온 힘을 다해 앞으로 팔을 뻗으며 가슴을 바닥에 댄다. 땀이 줄줄 흐르는 육체의 고통은 순간 사라지고 얼굴에 고요한 평온이 흐른다. 잠깐의 흉내로는 따를 수 없는 경지다.

다시 네팔의 자왈라켈 티베트 난민촌. 인도 다람살라 티베트 망명정부에서 파견된 관리인 툽텐 초펠(45)은 네팔 전역 10여 군데의 티베트 난민촌에 10만여 명의 난민들이 살고 있다면서 2001년 독립을 희망하는 정치집회를 끝으로 현재는 전혀 허가를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어떤 형식으로든 독립을 위한 활동에 힘을 쏟고 싶다는 그는, 더 아쉬운 것이 1998년 이후 네팔 정부가 더 이상의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때부터 난민촌에서 태어나는 2세들에게도 난민증을 내주지 않는다면서 혹시 불법 체류자로 몰릴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카트만두 티베트 난민촌에서 만난 쉐랍 텐징(30)도 비슷한 걱정을 했다. 티베트의 명절을 지키고 역사를 가르치며 자신들의 전통과 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는, 네팔에서 태어났고 처음 다람살라 티베트 망명정부에 갔을 때 가장 벅찬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국이 있다는 게 너무 떨리고 감격스러웠지만 그래도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티베트 땅이다. 서른 살이 되도록 아직 가보지 못했다.” 그는 세 번이나 방문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티베트를 방문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망명정부를 부정한다는 서명을 해야만 가능하단다.


△ 카트만두 외곽 티베트난민촌 옥상에 액운을 없애주는 부적인 풍마(風馬)가 건물과 건물사이를 이은 채 바람에 날리고 있다. ‘룽마’라고도 불린다.

난민증은 이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신분증이다. 그것이 있어야만 그나마 소소한 자영업이나 카펫 제조업, 기념품 제조업 등을 할 수 있다. 난민촌을 떠나서는 어떤 경제 행위도 할 수가 없다. 1998년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난민증을 발급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신분의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중국 정부의 원조에 기댄 네팔로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는 정직하지 않다”

가만히 옆 자리를 지키던 타쉬 니마가 조용히 입을 열더니, 같은 말만 되풀이해댄다.

“Only 6 hours talking! 6 hours!”(6시간밖에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고작 6시간!)

그는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 형 둘과 함께 히말라야를 넘었다. 그는 여섯 번의 면회 신청 끝에 국경 근처에서 이뤄졌던 부모님과의 감격스런 만남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티베트를 탈출할 당시 자신의 나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글도 읽지 못했던 그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26년 만에 만난 부모님과 겨우 6시간을 함께 있었다. 자신은 두툼한 방한복과 얼마의 돈을 주었고, 부모는 통째로 말려온 양 한 마리를 건넸다. 울다가 웃다가 준비해온 음식을 함께 먹었고, 짧은 만남 뒤 기약 없는 이별이 슬퍼 한이 맺혔다. 같은 난민촌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한 타쉬는 이 마을의 직업훈련학교에서 전기기술 교사로 재직 중이다.


△ 라싸에서 만난 목수 실로는 중국 공안의 감시를 피해 집안에 달라이라마 사진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그 곁에 놓인 마오쩌둥의 얼굴이 선명한 중국 지폐가 낯설다.

“티베트의 영혼이 유린당하고 있다.” 니마 스테튼(54) 난민촌장은 “중국은 광활한 티베트의 자연 유산을 모두 가지려 한다”며 “고원에 매장된 우라늄이 그들의 목표”라고 말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사용할 금·은·동메달도 모두 티베트의 자원으로 만들어질 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제적 이득만 원하지 티베트의 독립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는 정직하지 않다. 정면으로 맞서 중국의 부당한 행위를 지적하지 않는 것이다. 티베트의 인권을 무시하면서 평화를 말하는 올림픽을 중국에서 연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날이 밝았다.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로 난민촌도 분주해진다. 여느 마을과 겉으로 보아 별다른 차이가 없다. 집집마다 문이 열리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학교에 간다. 구멍가게의 철문이 걷히고, 주인장은 물건을 정돈한다. 어느 누구나 자신에게 놓인 하루의 여백을 채운다. 날이 어두워져도 마찬가지다. 모두 거두어들이고 집으로 돌아와 고단함을 달랜다. 그러나 모두 난민촌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일 뿐이다. 돌아갈 고향이 그리운 티베트 난민들의 반복되는 하루일 뿐이다.


죽음 같은 순례의 길

1950년부터 매년 2500~3500명씩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로 다시 인도 다람살라로

지난해 9월30일 오전 8시께, 20~30명의 티베트인들이 해발 5700여m에 이르는 고산지역인 서부 낭파 국경지역을 넘어 네팔로 향했다. 그들이 국경을 넘는 모습은 초오유 산자락에서 등반 중이던 수십 명의 산악인들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한 발의 총성이 설원을 갈랐다. 중국 국경수비대원들이 망명길에 오른 티베트인들을 겨냥해 총격을 퍼붓기 시작한 게다. 당시 현장에 있다 중국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티베트 난민들의 모습을 우연찮게 카메라에 담은 루마니아 출신 카메라맨 세르기우 마테이는 “마치 개를 잡듯 총을 쐈다”고 말했다. 마테이가 찍은 화면은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를 타고 전세계로 퍼지면서 티베트인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중국이 티베트 땅의 ‘주권’을 차지한 것은 1950년이다.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지금껏 매년 2500~3500명의 티베트인이 히말라야의 험준한 산맥을 뚫고 ‘자존심’을 찾아 꾸준히 네팔로 향해 왔다. 난민들은 그곳에서 다시 인도 땅 다람살라의 망명정부까지 험난한 여정을 이어간다. ‘티베트를 위한 국제 캠페인’(ICFT)이 해마다 내놓는 ‘위험한 월경-티베트 난민들의 곤경에 영향을 끼치는 조건들’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 지난 2006년에도 모두 2600여 명이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티베트 난민접수센터에 새로 등록을 했다.

네팔 땅에서 피어난 민주화의 불꽃도 그곳에 삶을 의탁한 티베트 난민들의 삶엔 한 줌 볕이 돼주지 못했다. 지난해 5월 평화협상을 통해 마오주의 반군 진영이 오랜 내전을 그치고 정치권에 진입했지만, 오랜 세월 중국의 티베트 봉쇄정책을 지지해온 독재자 갸넨드라 국왕 시절의 정책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다. 올 들어 탕자쉬안 국무위원과 우다웨이 외교부장 등 고위급 인사들의 네팔 방문이 꼬리를 물면서, 네팔 정부는 자국 땅에서 ‘반중국 활동’을 철저히 봉쇄할 것을 새삼 약속했다. 그리고 중국 당국은 네팔 국경지역 감시망을 더욱 강화했다. 그럼에도 ‘순례의 길’에 나서는 이들은 줄지 않고 있다. 정치·종교적 박해와 사회·경제적 차별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는 티베트인들의 목숨을 건 탈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50년 한결같이 머리맡엔 짐

어린아이 안고 넘어온 히말라야를 다시 넘을 날은 언젤까, 자왈라켈 난민촌의 노인들

▣ 포카라(네팔)=사진·글 임종진 사진기고가 stepano0301@naver.com

남키 할머니는 여든다섯 살입니다. 난민촌의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할머니는 또래인 옆집 할머니와 이러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요. 눈이 살짝 마주쳤습니다. 머쓱하게 인사를 건넸더니 빙긋 웃어줍니다. 우람한 체구의 할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큼지막한 손을 펄럭입니다. 냉큼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세간도 많지 않은 단출한 벽돌집입니다.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 남키 할머니의 집안은 온통 푸른색이다. 네 평 남짓한 단칸방에 부엌이랑 침실이 함께 있다. 항상 앞뒤의 문을 모두 열어놓고 선풍기 하나 없이 찌는 무더위를 보내는데,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할머니의 얼굴에 가득 내려앉았다.

그것이 불편하거나 어색한 이유일 턱은 없었지요. 손가락으로 나이를 가늠해 서로 알려주면서 그걸로 헤헤거리며 웃습니다. 신경통이라도 있는지 조금 절뚝이는 할머니는 툭 트인 부엌으로 가서 쭈그러진 주전자를 들고 무슨 봉지를 주물럭거리더니만 주황빛 차 한 잔을 덜썩 내려놓았습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손님을 위해 내온 따스한 손길입니다. 마셔보니 뜨거운 오렌지 주스입니다. 어릴 적 무더운 여름날이면 엄마 몰래 살짝 꺼내 얼음을 섞어 타마시곤 하던 가루로 된 그 오렌지 주스랑 같았습니다. 이젠 보기도 어렵지요. 그런데 뜨거운 물에 휘저어 내준 오렌지 주스가 왜 그리 시원하고 달콤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 일흔여덟 살인 낭니 할아버지는 하루를 경전을 외우며 시작해서 역시 경전을 외우며 끝맺는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달래는 것인지 앉아 있거나 길을 걸을 때나 쉼이 없다.

네팔 포카라의 자왈라켈 티베트 난민촌.

그곳에서 만난 남키 할머니는 종종 창밖 허공을 바라보며 표정이 굳곤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어린아이를 안고 눈 덮힌 히말라야를 넘어온 게 벌써 50년 전이라는 얘기를 누군가에게 주워들었습니다. 고향이 그리운 것인지 이젠 삶을 다했을 두고 온 부모님 생각 때문인지 물어볼 수는 없습니다. 마을을 돌아보면 옹기종기 모여앉아 물레질을 하거나 우리의 염주와 비슷한 마니차를 돌리며 앉아 있는 칠십, 팔십 넘긴 노인들이 지천입니다. 이 마을을 벗어나 어디 갈 데도 없고 갈 수도 없습니다. 힘이 좀 남으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사원을 찾아 시계방향으로 몇 바퀴를 돌면서 중얼중얼 경전을 외웁니다. 저녁이면 마을회관을 찾아 여럿 노인들과 섞여 두런두런 하루를 채워 보냅니다.


△ 마니차(회전 법륜통)를 돌리며 경전을 외우고 있는 팔키(78) 할머니. 한두 마디 말을 건네자 다소 굳어 있던 표정을 바꾸어 웃는 모습이 꽤나 고왔다.

언젠가는 고향 땅에 돌아갈 수 있겠지.

가슴에 품어 기대하고 이제나저제나 짐을 쌀 준비도 되어 있는데 세월은 깊은 주름 한 줄 하나 더 남기고 오늘도 하루를 받아 떠나갑니다.


△ 티베트난민촌은 경전 외우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직업이 있는 사람들 외에 특별히 할일이 없는 주민들은 낮이건 밤이건 넓은 마을회관에 모여 마니차를 돌리면서 경전을 왼다. 마을회관은 무료한 일상을 달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 주민들의 보금자리다.

 

 

목숨을 걸고 달라이 라마에게로!

네팔을 걸쳐 인도로 탈출하는 티베트 난민들과의 동행기1… 매년 3천여명이 다람살라로… 그중 75% “교육 받고 싶어서”

▣ 다람살라=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마오주의자들의 총파업인 ‘반다’가 곧 시작된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서둘러 네팔을 빠져나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반다’가 시작되면 카트만두 시내를 제외한 모든 시 외곽의 교통이 두절되면서 인도로 가는 차편도 끊기게 된다. 무엇보다 총파업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자칫 네팔에서 머뭇거리다가 불법체류자로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컸다.

나를 빼곤 버스 안은 모두 난민들

인도 델리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티베트 난민들이 모여 사는 ‘보다나트’로 갔다. 총파업 소식으로 버스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한 티베트 승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마지막 남은 버스표 1장을 구할 수 있었다. 버스는 티베트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에다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 않았는지 때가 잔뜩 낀 얼굴을 한 어린이와 승려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눈으로도 티베트에서 넘어온 난민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들은 인도의 델리를 거쳐 다람살라로 가는 중이었다. 버스에 오른 승객들 중에서 외국인은 내가 유일했다.


△ 다람살라의 난민센터에서 난민증명서를 받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티베트 난민들의 표정이 밝기만 하다. 난민 대부분은 중국 국경수비대의 눈을 피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한 달여 이상 험난한 여정을 보냈다.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버스는 심하게 흔들렸다. 승객 대부분이 차멀미에 시달렸고, 특히 어린이들의 증세는 심각했다. 하루 종일 내달린 버스는 네팔과 인도 국경지대인 ‘소놀리’에 도착했다. 네팔 검문소를 간단히 통과해 인도 국경 검문소로 이동했다. 버스가 인도 땅에 들어서자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이더니, 이내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인도 세관 직원들은 버스 지붕에 쌓아둔 짐을 하나씩 풀어 검사하기 시작했고, 결국 모든 짐이 비에 젖었다. 차장은 사진이 붙은 흰 종이 서류와 인도 국경 검문소에 낼 돈을 티베트인들로부터 모으고 있었다. 여행 서류와 돈을 모으던 차장은 나에게 밖에 나가서 여권에 입국도장을 받아오라고 부탁했다. 정식 여권을 가진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었다. 그때서야 승객들이 모두 티베트 난민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국경을 통과한 버스는 한밤중에 갑자기 허허벌판 한가운데서 멈췄다. 전날 오후 출발했던 버스가 고장이 나 멈춰서 있었다. 승객들은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서 거의 12시간을 버틴 뒤였다. 물과 음식이 모두 동이 난 뒤 우리가 탄 버스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고장난 버스에 탄 승객들도 모두 티베트 난민이었다. 버스를 수리하는 사이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목 마르고 허기진 상태에서도 그들은 들뜬 표정이었다. “이제 달라이 라마를 볼 수 있다”고 누군가 신이 나서 외쳤다. 달라이 라마라는 존재는 이들에게 험한 여행길을 견디게 해준 힘이며 희망이었다. 그들의 흥분이 내게까지 전해졌다.

국경 넘기 위해선 1천~2천 위안 필요

버스 수리를 마친 뒤 다시 델리를 향한 여정이 시작됐다. 카트만두에서 꼬박 마흔 시간을 달려 델리에 도착했다. 역시 티베트 난민을 위한 버스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곧바로 난민들이 머물 티베트 난민센터에 멈춰섰다. 그곳에서 몇 명의 승려를 제외한 난민들은 모두 내렸다. 다람살라로 이동하기 전 이곳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1960년 티베트 난민들이 히말라야의 험산준령을 넘어 인도로 향하고 있다(왼쪽). 난민 1세대가 산악지역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다.

다음날 저녁 다람살라를 향해 떠났다. 밤새도록 달린 버스는 이른 아침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달라이 라마의 공개강좌가 있어서인지 다람살라는 승려들과 인도 전역에서 온 티베트인들, 외국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다람살라에 있는 난민센터를 찾아가니 나와 함께 네팔에서 여행했던 난민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큰 방에 50개 정도의 침대가 즐비하게 놓여 있고 이들이 가져온 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다람살라에 도착한 이들은 네팔에서 여행할 때의 모습과는 달리 한 점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화를 통해 그들이 티베트에서 네팔로 넘어온 경로를 대략 알 수 있었다. 대부분 가이드에게 돈을 지불하고 수십 명씩 함께 산을 넘어 네팔로 향했다. 티베트에서 중국 국경수비대의 눈을 피해 네팔로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들은 대부분 티베트와 네팔 국경지대에 사는 셰르파였다. 티베트 난민들이 이들에게 지불하는 돈은 일정하지 않다. 경로나 시일에 따라, 또는 티베트인들의 호주머니 사정에 따라 금액이 달라졌다. 어린이의 경우 부모가 5천위안(약 60만원)을 가이드에게 준 일도 있었지만, 1천~2천위안을 준 게 대부분이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까지 건너오는 데는 보통 20~25일이 걸렸다.

탐바(20)는 지난 2월 다람살라로 왔다. 그는 지난해 7월21일 20여 명과 함께 라싸를 떠났다. 라싸에서 국경지역까지 트럭을 타고 가서 그곳에서 산행을 시작해 25일 만에 네팔 산악지역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네팔에서 몇 달 동안 인도로 넘어올 준비를 하면서 지냈다. 인도에 와서 달라이 라마를 만나는 것 외에도 학교에 가서 제대로 교육을 받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수도승인 짐바 롭상(27)은 상상을 초월하는 모험을 겪으며 다람살라로 왔다. 그는 동료 2명과 함께 평생의 소원인 달라이 라마를 만나보기 위해 티베트를 떠날 결심을 했다. 인도에서 불교를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의욕도 강했다. 우선 라싸로 간 뒤 가이드에게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공사판을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티베트를 떠나던 날, 라싸에서 출발하는 트럭 짐칸에는 45명이 함께 탔다. 수도승만 15명, 수녀 5명, 어린이·노인·청년 등 다양한 ‘승객’들이 콩나물시루처럼 꼭 끼어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인도 다녀온 이들은 미행과 감시에 시달려

“먼저 중국 군대가 경비를 서는 티베트 국경의 산악지대를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를 산행에서 음식은 가장 중요한 짐이었다. 20kg이나 되는 삼바(보릿가루)와 버터를 지고 가야 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걸었다. 꼬박 11일을 걷고 나서야 티베트와 네팔을 가르는 ‘얄룽상부’라는 강이 나타났다. 수심이 1.5m 이상이어서 어린이들은 건널 수 없었다. 강을 건너기 위한 묘책을 짜내야 했다. 청년 2명이 강을 먼저 건너가 타이어를 사오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뒤에 남아 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기도했다. 이들은 강을 헤엄쳐 건넜고, 티베트인들이 사는 마을에서 타이어 4개를 구해왔다. 타이어들을 하나로 묶어 배처럼 만들어 45명이 모두 건널 수 있었다. 강을 건너는 데만 6일이 걸렸다. 강을 건너자 네팔 국경지대였지만 버스가 있는 곳까지는 다시 열흘을 더 걸어야 했다.”


△ 네팔에서 다람살라까지 동행했던 어린 난민들. 티베트 부모들은 교육을 위해 어린 자녀들을 다람살라로 보내고 있다(왼쪽). 남겔 수도원을 가득 메운 인파들 사이를 지나 강연장으로 향하던 달라이 라마가 곁에 앉은 티베트 난민을 위로하고 있다.

강가 찬다(53) 난민센터 소장은 매년 3천여 명의 난민들이 티베트에서 인도로 오고 있다고 말했다. “티베트의 정치적 상황이나 인권 상황, 교육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인도로 오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난민들 중 75%가 교육을 제대로 받기 위해 다람살라로 향하고 있는데, 이는 티베트에서 시행되는 중국 정부 교육의 문제점이 심각하다는 것을 뜻한다.

늘어나는 티베트 난민은 중국 정부의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체텐 규르매(52) 티베트 망명정부 내무장관은 “중국에선 티베트인들이 인도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가혹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며 “네팔 정부에 압력을 가해 티베트인들을 체포해 추방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반대로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자녀를 인도로 보내는 티베트인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도 하고, 인도에서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는 티베트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만들었다고 한다. 또 인도를 다녀온 이들은 반체제 분자로 분류돼 지속적인 미행과 감시에 시달린다고 규르매 장관은 덧붙였다.

드디어 공개강좌일, 설움은 녹아내리고…

다람살라에 도착한 다음날 이른 아침 달라이 라마의 공개강좌가 열리는 남겔수도원에 전세계에서 온 수만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붉은 승복을 걸치고 바닥에 앉아 기도하는 수천의 수도승들이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가 걸어올 길 양편으론 남루한 차림의 난민들이 앉아 있었다. 일부는 목숨을 건 탈출 행렬을 되새기는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윽고 달라이 라마가 수행원들에 휩싸인 채 환한 미소를 머금고 걸어 들어왔다. 그는 허리를 굽혀 길 양편에 늘어앉은 난민들을 향해 합장했다. 중국 공안의 눈길을 피해 몰래 감춰둔 채 숨죽이며 봐왔던 달라이 라마를 지근거리에서 마주한 난민들의 쌓였던 설움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독립 아닌 자치구면 족하다”

최근 연임에 성공한 티베트 국무총리 삼동 린포체 인터뷰

티베트의 정치·종교 최고지도자로서 달라이 라마의 권위를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5년 전 스스로 정치권력을 이양했다. 2001년 7월 실시된 선거에서 삼동 린포체(67)는 유권자 85%의 지지를 얻어 초대 국무총리에 올랐다. 최근 실시된 총선에서 연임에 성공한 린포체는 승려이자, 대학에서 불교철학을 강의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를 만나 티베트 문제에 대해 물었다.

티베트로 이주한 중국인이 벌써 1500만 명에 이른다.

=어려운 문제다. 티베트 인구가 600만인데, 중국 이주민 인구가 1500만이란 건 또 다른 비극이다. 우리 땅에서 우리가 소수민족이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티베트에 이미 정착한 지 30~40년 된 중국인들에게 나가라고 요구하는 건 현실성이 없고 분쟁만 키울 뿐이다. 그래서 중국 중앙정부에 일단 대규모 이주정책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요구하는 건 티베트의 분리독립이 아니다. 중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티베트를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특별자치구로 만들어 전통문화와 민족성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해준다면,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망명한 티베트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자기 집과 땅을 중국 이주민이 차지하고 있으면 당장 현실적인 문제가 될 텐데.

=귀환했을 때 닥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재산권 문제 역시 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런 모든 문제도 대규모 이주정책보다 심각할 순 없다. 고향에 돌아갔을 때 과거 재산을 모두 되찾을 수 없다 하더라도, 다시 정착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고 적절한 보상책이 마련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인도로 망명한 지 벌써 47년이 흐르면서, 젊은 세대는 ‘티베트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의 주장은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세대나 신세대 모두 달라이 라마가 주창한 ‘중도정책’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는 중국 정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그동안 ‘중도정책’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궁금하다.

=국제사회의 전폭적 지지에서 그 효과를 잘 알 수 있다. 세계 어떤 나라도 우리 정책을 비판하지 않으며, 중국 내에서도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다. 과거 중국 정부는 우리를 분리주의자로 매도했지만, 중도정책을 통해 이런 주장의 근거를 제거할 수 있었다.

중국 정부에선 노령의 달라이 라마가 숨을 거두면 티베트 문제가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고, 협상하는 척하면서 시간만 끌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 쪽에서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며, 이미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15만 티베트인들이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는 상황에서 설령 달라이 라마가 숨을 거둔다고 해도 티베트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티베트 소녀 데팔의 미래를 위해

[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네팔 - “늘 웃지는 마. 가끔씩은 울기도 해야 건강에 좋은 거야.”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인도에서 네팔로 가는 버스 안, 내 옆자리에는 한 소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무릎에는 헤세의 <데미안> 영문판이, 그 자세만큼이나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데팔, 나이는 열여섯. 물오르는 봄날의 나무만큼이나 싱싱한 나이였다. 데팔은 네팔에서 나고 자란 티베탄이었다. 네팔 땅에도 티베트에서 망명해온 사람들이 제법 살고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티베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인도의 다람살라 같은 곳으로 자녀를 유학 보내고 있었다. 데팔 역시 북인도의 무수리에서 티베탄 기숙학교에 다녔다. 그녀는 방학을 맞아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앙케트’라는 작은 노트의 사연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끝에 그녀가 제법 두꺼운 노트 한권을 내게 내밀었다. 아, 그건 내가 꼭 그녀의 나이였을 때 친구들과 주고받던, ‘앙케트’라는 이름의 설문과 답이 적힌 노트였다. 학년이 끝나거나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교실 곳곳에 이런 노트가 돌고는 했다. 거기에는 그 나이 또래가 궁금할 법한 질문과 답들이 적혀 있었다. 학교에서 혹은 교회에서 그런 노트를 친구들과 돌리며 우리만의 비밀과 두려움, 희망을 그려보던 기억이 아릿하게 떠올랐다. 티베트 소녀들도 그렇게 사춘기의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 환하게 웃고 있는 카트만두의 어린 소녀들.

열다섯 혹은 열여섯. 그 나이에 품는 세상에 대한 궁금함과 두려움은 어디나 다 비슷한지, 질문의 결은 닮아 있었다. 좋아하는 배우와 가수, 가장 기뻤던 순간, 슬펐던 기억, 존경하는 인물, 미래의 꿈…. 아이들은 정성을 다한 필체로 답을 적고, 어여쁜 그림이나 사진을 붙여놓기도 했다. 좋아하는 배우를 묻는 질문에 그들은 인도인 배우 이름을 적었고, 재미있게 본 영화도 인도의 국민 배우 샤루칸이 나오는 인도 영화,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도 전부 인도산이었다. 존경하는 인물을 묻는 질문에는 대부분 ‘부모님’이나 ‘달라이 라마’라고 답했고, 가장 두려워하는 건 ‘다가오는 미래’ 또는 ‘기말시험’ 같은 것이었다.

인생의 철학 혹은 삶의 좌우명을 묻는 자리에 적힌 말들은 이러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조국을 잊지 말자.”(그들 조국의 처참한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젖어왔다.) “공부 열심히 해서 부모님의 꿈을 이루어드리자.”(나의 꿈을 이루자가 아닌 부모님의 꿈을 이루어드리자라니?) “최선을 다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자.” 인생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한 소녀는 데이비드 베컴을 만나는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친구들은 데팔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겼다. “인생은 아름답지만 너무 짧아. 그러니 즐기고,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렴.” “늘 웃지는 마. 가끔씩은 울기도 해야 건강에 좋은 거야.” “천번을 실패했다면 한번 더 시도하자.” 눈이 아파왔다. 늘 웃지는 마라는 그 말이 내게는, 늘 울지는 마라는 말로 들렸다. 천번을 실패했다면 한번 더 시도하라니. 한번만 실패해도 두번 시도할 용기를 내기 어려운 게 삶의 여정이라는 걸, 어린 그들이 알고 있을까?


△ 나라없이 떠도는 티베트인들은 네팔 땅에도 짐을 내려놓고 정착했다. 카트만두의 티베트 불교 사원.

나라 없는 설움을 알아요?

영어와 티베트어, 힌디어, 네팔어를 동시에 배우며 자라는 저 소녀들. 좋아하는 가수와 배우는 죄다 인디언인데, 인디언도 네팔리도 완벽한 티베탄도 되지 못하는 그들. 가장 두려운 것을 묻는 난에 대부분이 다가오는 미래라고 적는 아이들. 문득 다람살라에서 카페 ‘리’를 운영하는 내 친구 잠양이 생각났다. 십대 시절 무섭게 방황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는 내게 반문했다. “누나의 고민은 누나 스스로 선택하거나 만들어낸 환경에서 비롯됐잖아요? 나는 아니었어요. 내 고민은 전부 내 삶의 외적 조건, 내가 사라진 나라의 국민으로, 남의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티베트라는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났다는 것, 거기서 발생했단 말이에요. 그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잖아요?” 나라 없는 설움을 내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알 수 있는 건, 티베트의 수많은 청소년들이 네팔에서, 인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배낭을 메고 길 위에 나선 이후, 내 이름 석자와 상관없이 ‘한국인’이라는 그것 하나로 내가 규정되고 받아들여지는 일들을 겪어왔다. 그제야 ‘조국’이라는 것, 내가 나고 자란 나라의 이름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구속하며 평생을 따라다닐 숙명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라 없이 망명 정부를 꾸려가는 이 티베탄들의 숙명이 내 것보다 좀더 비감한 것임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트만두에서 데팔과 헤어지며 나는 그녀의 꿈을 위해, 미래를 위해 기도했다. 사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가는 그 어린 소녀의 어깨는 가냘팠다. 그 가냘픈 어깨 위에 내려앉을 삶의 예외 없는 무게를 미리 생각해보며, 운명의 여신이 있다면 조금은 그녀를 편애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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