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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된 자유 (Freedom in Exile) - 달라이 라마

박물관

 

 

「 유배된 자유 (Freedom in Exile) 」
정신세계사, 1991년.
심재룡 옮김.

머리말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에 저마다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를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의 현신이라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를 ‘세속적인 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1950년대 후반에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직함이 곧 달라이 라마를 뜻하기도 했다. 내가 인도로 탈출한 후에는 반혁명분자 혹은 인민의 기생충이라 불렸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와 다르다. 내게 있어서 달라이 라마는, 내가 담당한 직책을 가리키는 칭호일 따름이다. 나는 그저 승려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한 티벳인일 뿐이다.
지금부터 쓰려는 이 글은 한 승려로 살아온 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글은 결코 불교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데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우선은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에 대해 뭔가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며, 그 다음 이유로는, 내 손으로 직접 정확하게 기록해 놓고 싶은 역사적 사건이 많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서 이 이야기를 직접 영어로 쓰기로 하였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영어로는 언어구사력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 얘기가 함축하고 있는 미묘한 의미들 중의 일부가 내 의도와는 달리 엉뚱하게 잘못 이해될 소지가 있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티벳어로 이 글을 쓴다해도, 어차피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면, 다른 언어로 글을 쓰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몇몇 사람이 갖고 있는 한정된 조사자료를 내 임의로 썼다는 점과,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내 기억 역시 틀릴 수 있다는 점을 덧붙여두고 싶다. 끝으로 티벳 망명정부의 당국자들과, 여러모로 은혜를 베풀어준 노만 알렉산더 씨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1990년 5월 다람살라에서)


제1장 - 흰 연꽃을 든 보살

옛날을 생각할 때마다 어쩔 수 없는 슬픔에 잠기게 된다.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은 곧 내 동포들의 엄청난 고통에 대한 회상에 다름 아니다. 물론 예전의 티벳이 완벽한 나라였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풍속에는 상당히 훌륭한 점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보존할 가치가 있는 많은 것들을 이젠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9)

사람에 따라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에 대한 이미지가 제각기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그 칭호가 나의 신성한 직책을 환기시켜줄 따름이라는 얘기는 이미 하였다......티벳 불교는 다시 태어나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몇몇 특수한 존재만을 인정할 뿐인데, 달라이 라마도 그러한 존재일 따름이다. 티벳에서는 이러한 존재를 ‘툴쿠(化身)’라 한다. (10)

우리집엔 여느 집들과 달리 처마에 물받이가 있었다. 노간주 나무 가지로 만든 그 물받이는 빗물을 받아내리기 위해 가운데에 홈을 파놓았다. (14)

내가 태어날 당시에 있었던, 아버지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때 아버지는 몇 주일 동안 침대에서 꼼짝 못하고 앓아누워 계셨는데, 아무도 그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돌아가시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앓던 분이 내가 태어난 날 갑자기 회복되셨다. 그 이유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15)

물론 내가 보통 아이와 다르게 되리라는 생각 [달라이 라마가 되리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으리라. 한 가정에 화신이 둘이나 탄생한다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고, 우리 부모님 역시 내가 후에 달라이 라마라 불리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병환에서 갑자기 회복된 것은 길조임에 틀림없었으나 누구도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나 역시 내 미래에 대해 특별한 암시를 가진 적이 없었다. 내 어렸을 때의 기억은 평범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최초의 기억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만 나는 그렇진 않는다.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는 편을 갈라  싸움질하는 아이들을 보고 약한 쪽에 힘을 보태주려고 달려갔던 기억, 그리고 처음으로 낙타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16)  

특히 재미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또 하나 내가 좋아한 놀이는 먼 여행을 떠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가방에 잠을 꾸리는 일이었다. 이것은 내가 언제나 식탁의 상석에 앉으려고 고집을 부린 사실과 함께, 나 스스로 후에 큰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례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나는 어렸을 때 나의 미래에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꿈을 여러 번 꾼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 내가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나중에 어머니는 내가 보통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던 것 같은 몇 가지 사례를 내게 얘기한 적이 있다. 그 사례라는 것은 내 밥그릇을 어머니 외엔 누구도 만지지 못하게 했다든가, 낯선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든가 하는 것 따위이다. (17)

불교의 근본개념은 [현상계의 여러 가지 사물들이 서로 의존해서 생긴다고 하는] 연기(緣起)와 인과(因果)의 법칙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모두 동기가 있는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법칙이다. 그러므로 동기는 행위와 경험의 뿌리이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의식(意識)’과 ‘윤회’에 대한 불교적 이론이 구축된다.
우선 의식에 대해서 말하자면,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또 결과를 낳기 때문에 의식은 연속된다고 본다. 의식은 한순간에서 그 다음 순간으로 흘러가면서 경험과 인상을 축적한다. 육체의 죽음에 이른 한 개체의 의식에는 과거의 모든 경험과 인상이 각인되어 있으며, 그것에 선행하는 행위 또한 그 의식에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행위(行爲)’라는 의미를 가진 카르마Karma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몸-동물이나 사람, 혹은 신의 몸-에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은 카르마를 수반하는 의식이다. (18)

불교도들은 의식이란 본래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존재자인 한 회피할 수 없는 삶, 고통, 죽음, 그리고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해탈은 오로지, 나쁜 카르마를 제거하고 세속적 집착에서 벗어날 때라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의식은 자유로워지고,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깨달음을 얻은 존재는, 티벳 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윤회’, 즉 삼사라Samsara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존재자의 실상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고통 받는 중생들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때까지 그들을 돕기 위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19)

나는 앞서간 열세 명의 달라이 라마(제1대 달라이 라마는 서기 1351년에 태어났다)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달라이 라마는 범어로는 아발로키테쉬바라Avalokiteshvara라 하고, 티벳어로는 첸레직Chenrezig이라 하는 관세음보살, 즉 흰 연꽃을 든 보살의 화신이다. 실제로 붓다 샤카무니 당시에 살았던 한 브라만 소년에까지 소급하면 나는 74대째가 된다. 이러한 것을 진짜로 믿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여기에 대해선 대답이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이제 쉰 여섯이라는 나이를 먹고 이생에서의 경험을 돌이켜보거나, 또 내 개인적인 종교체험에서 볼 때, 나보다 앞서간 열 세 명의 달라이 라마와 첸레직, 그리고 붓다가 나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19)

내가 만 세 살이 되기도 전에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찾기 외해 정부가 보낸 일단의 관리들이 쿰붐 사원에 도착했다. 그들은 몇 가지 조짐을 보고 그리고 오게 된 것이었다. 그 조짐들 중 하나는 13대 달라이 라마인 툽텐 갸초의 시신에 관련된 것이었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1933년에 쉰 일곱을 일기로 돌아갔는데, 국무회의가 열리는 동안에 남쪽으로 향해있던 시신의 머리가 북동쪽으로 돌려진 것이 발견되었다. 그 바로 직후 고위 라마승인 섭정이 환상을 보았다. 섭정은 남부 티벳에 있는 신성한 호수 라모이 라초의 물을 바라보고 있던 중에 티벳문자 Ah와 Ka, 그리고 Ma자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청록색과 황금색으로 된 지붕을 이고 있는 3층 사원과, 그 사원에서 언덕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길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상한 모양을 한 빗물받이 홈통이 있는 조그마한 집을 보았다. 그는 Ah가 북동 지방인 암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파견단을 그리고 보내게 된 것이다.
파견단은 쿰붐에 도착해서는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Ah가 암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Ka는 쿰붐 사원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겠기 때문이었다. 그 사원은 실제로 3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지붕은 청록색이었다. 이제 그들은 언덕과, 이상한 물받이가 있는 오두막을 찾아내어야 했다.......
......아기는 그를 알아보고 “세라 라마, 세라 라마”하고 소리쳤다. 세라는 규창 린포체가 있던 사원 이름이었다......이번에는 13대 달라이 라마가 쓰던 소지품들과, 그와 비슷하지만 13대 달라이 라마의 소지품이 아닌 물건들을 함께 가지고 왔다. 아기는 소지품이 앞에 놓일 때마다 “이건 내꺼야, 이건 내꺼야”하며 13대 달라이 라마의 소지품을 정확히 가려내었다......물론 나는 이 모든 일을 다 기억하진 못한다. 나는 너무 어렸었다. 단 하나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꿰뚫는 듯한 눈빛을 가진 한 사람뿐이다. 나중에 그의 이름이 켄랍 텐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후에 나의 예복담당관이 되었으며, 내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19~20)

거기에 도착한 후에 열린 축제는 내게 티벳 국민에 대한 영적 지도력을 부여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축제는 온종일 계속되었다. 그때 기억도 흐릿하기는 하지만 비로소 진짜 내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꼈었다. 사람들이 끝없이 몰려들었다.......누구에게 들어봐도 그때 나는 겨우 네 살 된 아이치고는 꽤 의젓했다고들 한다. 그것은 내가 진짜 달라이 라마의 환생인지 지켜보기 위해 온 한두 명의 최고위 승려의 눈에도 그러했던 것 같다. (23)


제2장 - 사자좌

티벳인들은 채소가 아닌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 좀 까다롭다. 불교에서 육식을 절대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물이 식용으로 도살되어서는 안 된다고는 한다. 티벳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된다. 참파와 고기 외엔 먹을 것이라곤 거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짐승을 도살하는 행위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30)

나는 무엇이든 빨리 배웠음으로 근본적으로는 스승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다. 티벳에서도 ‘가장 뛰어난 학자’들의 지도를 받을 때 나 자신이 만족을 느낀다는 것을 깨닫고는 꽤 열심히 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단지 수업 받는 데 곤란을 당하지 않을 만큼만 열심이었다......어른이 되고 나서야 나는 내가 해야 할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으며, 그 후로는 공부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요즘인 어린 날의 게으름을 후회하고, 하루에 적어도 네 시간 이상은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40)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교실과 좌석을 보고 적잖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어쩐지 두 사원 다 매우 낯이 익어서 전생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42)

그즈음에 타탁 린포체로부터 제5대 달라이 라마의 특별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 가르침은 달라이 라마라면 누구에게나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환상을 통해 ‘제5대 큰 달라이 라마(당시 티벳인들에게 그는 이렇게 불렸다)’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 나는 그 뒤 몇 주일 동안 특이한 경험을 여러 번 했다. 특히 꿈을 통해서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지만, 이제야 나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43)

전임 달라이 라마(13대, 툽텐 갸초)에 대해 얼마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영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세속적 지도자로서도 매우 유능했으며, 앞을 내다보는 비범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나의 전임자는 현대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지대했다......그의 정치적 통찰력 또한 비상한 바가 있었다.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잊지 않았다. 만약 근본적인 변혁이 없다면, “티벳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스스로 티벳을 지킬 수 없다면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들, 스승과 제자들, 그리고 모든 위대한 신앙의 수호자들은 사라지고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승려와 사원도 몰수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적에게 봉사하게 될 것이며, 거지같이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모든 중생들은 크나큰 곤경에 처하여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중생들은 날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될 것이다.” (44~45)

달라이 라마인데도 내 부모님의 하인들은 나를 평범한 다른 꼬마들과 다름없이 대했다. 공식행사가 아닌 경우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특별대우 같은 걸 받지 않았으며,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내게 털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이미 우리 국민들의 삶이 그렇게 안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청소직 궁인들 역시 내게 그들 자신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고위 라마승들과 고관들이 자행한 비리와 불평등 사례에 대해서도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또 그 당시에 일어난 시시콜콜한 사건에 대해서도 모두 얘기해 주었다. 이런 얘깃거리는 민중이 일할 때 부르는 민요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나의 어린 시절이 때때로 너무 외로웠던 것은 사실이었고, 또 그나마 내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는 타탁 린포체가 부모님 집에 놀러 다니는 것조차 금했지만, 싯다르타 왕자나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어린 시절같이 삭막했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자라면서 재미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49~50)

 

 

제3장 - 침략, 몰아치는 폭풍

1950년 여름 가극 축제가 열리기 전날 노르불링카 욕실에서 막 나오는데 발 밑의 땅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처음엔 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바로 그때 먼 곳에서 폭발음이 크게 들려왔다......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또 폭음이 들렸다. 폭음은 계속되었다. 땅의 진동과 폭음으로 보아 대포 소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다음날 우리는 그 소리가 사격 소리가 아니라, 일종의 자연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폭음이 났던 쪽 하늘에서 붉은 섬광을 보았다고 했다. 이런 현상을 티벳 전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였다는 사실이 차차 밝혀졌다......이렇게 이상한 사건의 규모가 드러나게 되자 이번 일이 단순한 지진이 아니라는 생각들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뭔가 불길한 조짐이었다......어쨌든 그것이 천상의 계시이건 지각의 변동이건 그 일이 있고부터 티벳의 정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63~64)

재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라사도 함락될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맹공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티벳 군대는 인력이 부족한데다가 티벳 군대는 현대식 무기도 별로 없었으며,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섭정 기간 내내 군대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티벳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역사가 있긴 하지만 우리 민족은 근본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고, 군에 복무하는 것을 천시해 왔었다. 군인은 백정과 비슷하게 취급당했다. 예비군 몇 개 연대가 티벳 내의 여기저기서 비상소집되고, 정규 연대병력도 새로 창설되었지만, 전선에 배치된 군대의 전투력은 보잘것 없었다. (65)

겨울이 되자 상황은 더욱 불리해졌다. 그때, 달라이 라마의 성년식을 치르자는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두 해나 일찍 서둘러 달라이 라마에게 세속적 정권을 완전히 부여하기를 바랐다......여론은 두 가지로 갈려있었다. 하나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 내가 지도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중대한 책임을 떠맡기엔 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나 자신은 후자 편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 의견은 무시되었다. 그 대신 정부 당국은 이 결정을 신탁에 위임했다. 그것은 매우 긴장된 순간이었다. 신탁의 마지막 순간 쿠텐은, 의식에 쓰는 거대한 머리 덮개의 무게로 비틀거리며 내가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와, 카타(제물을 바칠 때 쓰는 비단보자기)를 내 무릎에 놓으면서 “툴-라 밥”하고 외쳤다. 이 말은 ‘그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다.
도르제 드라크덴이 이렇게 선언하자 타탁 린포체는 곧바로 섭정직에서 물러날 채비를 갖추었다......한 달 전만해도 가극 축제나 기다리는 철부지였는데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를 통치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곧 떠맡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나는 그때 놀라지 말았어야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신탁은 정부에 대해선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냈지만 나한테만은 지극히 공손했었다.  (66~67)

만약 내가 거절하면 형은 나를 죽여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형에게 포상할 것이었다. 그것은 괴상한 제안이었다.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생명을 죽인다는 것은 불교도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리사욕을 위해 달라이 라마를 암살하라는 제안을 한 것을 보면 중국인들이 티벳인들의 국민성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7)

붓다는 일체의 살생을 금하였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형은 현재상황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믿는 듯 했다. 따라서 그는 수도자로서의 서약을 포기하고, 승복을 벗고 티벳의 밀사로 외국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그는 미국과 교섭을 해볼 생각이었다. 형 생각엔 미국 사람들이 티벳의 자유를 지지해줄 것 같다는 것이었다. (68)

나는 그들(점성술사들)을 별로 신임하지 않았었지만, 그런 일로 더욱 그들을 탐탁찮게 여기게 되었다. 나는 사람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날(출생이나 사망과 같은)이 점성술사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밖의 인생사에 있어서도 점성술사들의 견해가 존중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티벳인들이 점성술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점성술은 우리 티벳 문화에서는 무척 소중한 것이다. (69)

의식이 너무도 길고 복잡해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싸였다. 마침내 식이 끝났을 때, 나는 전면전의 위협에 직면한 연약한 티벳 국민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열다섯이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듯했다. 그러나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 재난을 막는 것이 나의 의무라는 것을 납득했다. (70)


제4장 - 남부에서의 피난생활

드로모까지의 여행이 내게 일깨워준 것은 열심히 공부하고 가능한 한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국민들의 충정에 보답하는 길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76)

매일 아침 나는 베이징 라디오 방송국의 티벳어 방송을 들었다. 때로는 관리 한 두 사람이 나와 함께 듣기도 했지만 대개는 혼자서 들었다. 방송 내용은 ‘영광스러운 조국’에 관한 선전 일색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방송을 상당히 감명깊게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방송은 시종 중국의 산업발전과 인민평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정신적 진보와 물질적 진보의 완전한 조화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 혼자 있는데 매우 색다른 방송이 들려왔다......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나는 거짓말과 진부한 수사가 그토록 교묘히 섞인 발표를 듣고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79)

티벳은 한번도 중국의 속국이 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옛 티벳 영토를 돌려줄 것을 중국측에 요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무엇보다도 중국과 티벳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혀 다르다. 우리는 언어도 서로 다르며 문자도 서로 다르다. 국제사법위원회의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2년 중국 세력을 축출한 티벳은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인정되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므로 티벳은 1911~1912년에 사실에 있어서나 중국의 법에 의해서나, 독립된 주권국가로 재수립된 것으로 본다. (80)

때문에 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였다. 큰형의 권유에 따르게 된다면 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생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이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한 끝에 두 가지 중대한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미국이나 또 다른 나라들과 조약이 체결될 경우, 그 결과는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리고 전쟁은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 미국은 강대국이긴 하지만 수백 킬로미터 밖에 있다. 반면에 중국은 바로 인접해 있으며 물자에 있어서는 미국에 뒤질지는 모르나 병력에 있어서는 미국보다 유리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면 여러 해가 걸릴 것이다......그 동안에 티벳, 중국, 미국,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무수한 인명의 손실이 따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가장 바람직한 길은 중국 장군의 도착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그도 사람일테니까. (82)

1951년 6월 16일 중국대표단이 드로모에 도착했다. 전령이 그들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사원으로 뛰어왔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한편으론 몹시 흥분했고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그들은 머리에 뿔이 달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들의 첫인상은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나았다. 내가 그들을 만나기 전에 했던 의심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회합을 하는 동안, 이 사람이 비록 적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인간이며 나와 같은 보통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깨달음은 아직 충격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었다. (83)

나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간에 종교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는 연설 솜씨가 시원찮았다. 연설할 때마다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자신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교사들이 그러하듯 배우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4)

나는 그(타탁 린포체)와 함께 가게 된 것이 몹시 즐거웠다. 그는 무척 친절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경지를 체득한 영적 스승이었다. 그는 말할 것도 없이 나의 가장 중요한 스승이었다. 그는 많은 경전과 은밀한 가르침을 내게 최초로 전수해 준 사람이다. 그 또한 그러한 가르침을 훌륭한 스승한테서 전수받았다. (84)

나는 불교 신자이기에 그의 죽음을 그다지 슬퍼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노르부 톤둡의 죽음이 나의 유년기를 상징적으로 끝막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며칠 후 나는 중국 대표단과 회합을 갖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나의 국민들을 위해서 별일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종교적인 탐구라는 것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열여섯 살 먹은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87)

1951~1952년 겨울 내내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공부를 했다. 어쩌면 평소보다 더 열심히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람 림 명상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이다. 이 명상은 영적 수련을 통해 점진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 경전에 의거한 명상법이었다. 내가 여덟 살쯤 되었을 때 사원의 교과과정에 들어있는 탄트라Tantra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었는데, 이 람 림 명상도 그와 유사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경전 이외에도 비법 전수자를 통해 비의적으로 전수된다. 몇 개월이 지나자 어느 정도 발전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미세하나마 영적 계발의 토대가 자리잡혀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90)

루캉와는 아직 젊긴 했지만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그는 지앙(장진우) 장군에 대한 감정을 한번도 숨기려 하지 않았다......지앙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티벳 국기 대신 중국 국기를 게양하는 것으로 문제를 일단 매듭지읍시다.” 그러자 루캉와가 그 말을 받았다. “만약 장군께서 그런 짓을 한다면 국기를 끌어내려 불을 질러버리겠소. 그렇게 되면 아마 당신네 나라에도 좋은 게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미 티벳의 존엄성을 모독한 중국이 티벳과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수작이라고 공격했다. “당신네는 이미 한 사람의 두개골을 깨버린 셈인데, 아직 그 두개골이 치유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얘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지앙 장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다. (93)

판첸 라마가 라사에 도착한 때는 그즈음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중국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어 이제야 자신의 정당한 지위로 복귀할 요량으로 타쉴훈포 사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암도 지방에서 라사에 들어올 당시, 자기 가족, 교사들과 더불어 상당수의 중국군들(사실은 그의 경호원들)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가 도착한 직후 나는 그와 공식적인 회합에 이어서 포탈라에서 사적인 만찬을 가졌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는 아주 강압적인 중국인 비서를 대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서가 우리가 대좌한 자리에까지 끼어들려고 하자 내 (의전)근위대들이 그를 제지하려고 하였다. 결국 나는 못볼 꼴을 봐야만 했다. 그는 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나는 판첸 라마와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가 아주 정직하고 믿을만한 젊은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데다 아직 어떠한 권력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했으며 아주 낙천적이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친근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도 그 앞에 놓여있는 비극적인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94~95)

나는 타탁 사원에 초대되어서 아주 정성스럽고 철저하게 축성(祝聖)하였다. 의식은 열다섯 시간이나 계속되었으며 나의 구루(스승)를 위한 스투파(기념탑)가 봉헌되었다 그 앞에 부복할 때는 슬픔이 복받쳤다. 얼마 후 나는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가까운 주변 산자락으로 소풍을 나갔다. 이 소풍에서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화장을 했던 타탁 린포체의 해골이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해골 위에는 그의 수호신을 나타내는 티벳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실제로 이런 신비한 현상은 고승들에겐 흔한 일이었다. 뼈가 형상이나 문자를 나타낼 수 있게 기묘하게 녹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전임 달라이 라마와 같이 육신에 어떤 형태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수도 있다. (95)

전수의식은 한 달 간의 안거기를 가진 후 거행되었다. 그 의식은 링 린포체는 물론 나에게도 매우 드물고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높은 경지를 이룬 영적 스승들에 의해 무한한 세월을 거쳐 전해진 전통의 한가운데 서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했다. 봉헌기도의 마지막 구절을 낭송하며 나는 너무나 감동되어서 숨이 막혔다. 그 당시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 역시 좋은 징조인 것 같았다. 지금 생각엔 그것이 내가 선대의 달라이 라마 중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칼라차크라를 많이 전수해 주게 될 것을 예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97~98)

그때 나는 친구와 적에 대한 붓다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다. ‘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친구보다도 소중하다. 왜냐하면 적은 너에게 친구가 가르칠 수 없는 그 어떤 것, 예컨대 인내 같은 것을 가르쳐준다.’ 붓다의 이 교훈에 나는 다음과 같은 나의 신념을 덧붙였다. ‘아무리 불운한 일도 결국은 차차 좋아질 것이다. 사람들 가슴 속에 본래부터 깃들여 있는 진리와 정의, 그리고 인간적 이해에 대한 열망은 결국 무지와 절망을 딛고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이 우리를 탄압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 우리 티벳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99)

 

 

제5장 - 공산당 지배하의 중국

다시 중국으로 여행을 계속하려고 할 때, 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티벳 수호신을 조각한 석상이 있었다. 물소 머리 형상의 그 석상이 아주 기민하게 움직였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표정을 감춘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동쪽을 바라보며 매우 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망명길에 오를 즈음에는 간덴에 있는 한 절의 벽이 피로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종교를 미신이라고 단정하는 데 대하여 나는 무엇인가를 진리로, 혹은 허위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것에 관해 철저히 탐구해야만 한다는 붓다의 교설을 인용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있어서 종교는 본질적인 것이며, 특히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고 얘기해 주었다. (107)

나는 중국과 티벳이 제휴할 가능성을 엿보고 몹시 마음이 들떴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만인에 대한 평등과 정의에 기초한 사상으로서 전세계적 병폐에 대한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듯했다. 내가 볼 때 이론적인 견지에서 본 마르크스주의 유일한 결점은 인간 존재에 대한 유물론적 시각이었다. 나는 그 경직성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산당원이 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정치를 하는 데 있어 효율적인 방편이 될 마르크스주의 순수 교의와, 불교를 종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110)

그러나 마오가 참석한 회의는 달랐다. 그의 연설은 마력적인 데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훌륭한 점은 그가 연설을 할 때는 청중들의 견해를 빠짐없이 경청한다는 것이다. 그는 주어진 문제에 대해 대중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듣기 위해 언제든지 귀를 열고 있었으며, 어떠한 얘기를 해도 수용하였다. 심지어 그는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언젠가 집회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을 때, 그는 지방 공산당 당국의 처사를 비난하는 자기 고향 사람들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매우 극적인 장면이었으나 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집회의 상당 부분이 조작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민들은 자기 생각을 말하기를 두려워했으며 비당원의 경우 특히 더 그러했다. 그들은 당원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나는 중국의 정치활동이,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모순에 차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111)

그(마오 저뚱)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 나와 개인적으로 얘기하려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얘기 도중에 ‘붓다’에 대해 호의적인 얘기를 해서 나를 놀라게 하였다. 붓다가 계급을 부정했으며, 인간성의 타락을 거부하고, 또한 착취를 반대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는 얘기였다. (111)

저우 언라이(주은래)는 한마디로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리우가 침착하고 근엄한데 반해, 그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었으며, 매력적이고 재치가 넘쳤다. 실상 그는 지나치리만치 공손했는데 그것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성이었다. (112)

내가 만난 몇몇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대단히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었고, 개인적으로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는 그들한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113)

마지막으로 그(마오 저뚱)는 가까이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태도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독약과 같습니다. 첫째, 비구승이나 비구니가 독신이기 때문에 인구를 감소시킵니다. 둘째, 그것은 물질적인 발전을 도외시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끓어오르는 격한 감정 때문에 온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래서 당신은 다르마의 파괴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이오.’......
......두렵고 놀라운 감정이 가시자 이번엔 의심이 꼬리를 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는 내 감정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일까? 왜 그는 종교가 나의 삶의 핵심에 들어있다는 점을 헤아리지 못했을까? 왜 그는 종교가 나의 삶의 핵심에 들어있다는 점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일까?......내가 하루에 적어도 네 시간 이상을 기도와 명상으로 보내며,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빠짐없이 교사들로부터 종교학습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 만무하다. 그는 또 내가 그 당시 최종 승단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아마 그가 과학기술과 물질적 진보에 대한 나의 남다른 관심을 잘못 진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중국을 모델로 하여 티벳을 현대화시키고자 하며, 나의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과학적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불교철학에 대해 무식해서, 다르마를 수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스스로 다르마의 타당성을 검증해야 할 것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알지 못했다는 것도 나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나는 현대 과학의 진리에 대해 개방적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것이 마오로 하여금 나의 종교적 수행이 단지 오랜 관습쯤인 것이라 생각하게 했던 것 같다. 그의 추론이야 어떻든 간에 그는 나를 완전히 오판했던 것이다. (120~121)

마오에 대해서는 종전과는 달리 생각이 많이 바꾸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위대한 지도자이며 진실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속임수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티벳에 파견된 그의 관리들이 그의 지시를 어기지 않고, 그들에 대한 마오의 통제력이 건재 하는 한 티벳의 미래는 낙관적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내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태도라고 생각되었다. 부정적인 태도를 취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121)

티벳에 파견된 중국 당국자들의 나에 대한 태도는 아주 흥미로웠다. 언젠가 중국 관리 한 사람이 내게 말했다. “중국인들은 티벳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사랑하는 것만큼 마오 주석을 사랑하진 않습니다.”


제6장 - 네루의 후회

중국 당국은 이 비옥한 지역에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유목민들을 붙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새로운 지배자들이 보기에 유랑생활은 야만적이어서 비위에 거슬렸다. [중국인이 일반적으로 티벳인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만쭈(蠻族)’라는 말도 사실 야만인을 뜻한다.] (126)

1956년 초, 로사 축제 동안에 나는 흥미있는 네충 신탁을 받았다. 이에 따르면 ‘희망을 이루어 주는 보석(티벳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일컫는 이름들 중의 하나)이 서쪽에서 빛나리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 예언이 더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그것을 내가 그해에 인도를 방문하게 되리라는 뜻쯤으로 받아들였다. (127)

마침내 레팅 사원에 도착하여 그곳의 가장 중요한 신상(神像) 앞에서 경의를 표하고 있을 때, 지금 기억으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는 매우 흥분되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그곳과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레팅 사원에 암자를 하나 짓고 거기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했다. (132)

다음날 아침, 나는 자무나 강 둑에 있는 라즈그하트를 참배했다. 그곳은 마하트마 간디가 화장된 곳으로서 매우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외국의 지배를 겪어야 했던 민족의 손님이 되어 그곳에 서 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했다. 또한 마하트마의 비폭력주의 ‘아힘사’를 채택한 나라에 와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나는 서서 기도하는 중에, 간디를 만나볼 수 없다는 슬픔을 느낌과 동시에 그의 위대한 삶이 보여준 교훈을 되새기며 행복을 느꼈다. 나에게 있어서 마하트마는 자신의 어떠한 사적 이해보다도 타인에 대한 사랑을 우선으로 했던 완전한 정치가였다. 나는 또한 그의 헌신적인 비폭력주의가 유일한 정치적 해결책이었다고 확신했다. (139)

항상 나와 동행했던 판첸 라마는 우리의 불행한 상황을 끊임없이 나에게 주시시켰다. 그는 더 이상 내가 전에 알고 있던 예의바르고 겸손한 소년이 아니었다. 중국인들에 의해 그의 여린 마음에 가해진 끝없는 압박이 불가피하게 영향을 준 것이었다. (141)

나는 신탁에 의뢰했다. 달라이 라마가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세 명의 신탁승이 있다. 그 중에서도 네충과 가동이 참석했다. 둘 다 내가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신탁을 구하고 있을 때 루캉와가 왔다. 신탁승은 화가 나서, 그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신탁승은 마치 루캉와가 결심한 바를 아는 듯했다. 그러나 루캉와는 그를 무시하고 앉아 있었다. 나중에 그는 나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절망적이 되면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신은 절망적이 되면 거짓말을 합니다.” (144)

비록 그때는 중국에 대항하는 무력투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형들은 내가 모르게 이미 미국 CIA와 접촉하고 있었다. 분명 미국은 티벳의 자유투사들에게 조금이나마 원조를 해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있을터였다. 그것은 미국이 티벳 독립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공산정권을 약화시키려는 그들의 범세계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유투사들에게 얼마 안 되지만 간단한 무기들을 공수해 주었다. 형들은 또한 CIA로 하여금 몇몇 자유투사에게 게릴라전술을 가르쳐주게 하여 그들이 낙하산을 통해 티벳에 잠입하는 계획도 세워놓았다. 당연히 형들은 나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형들은 나의 반응이 어떨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형들의 논리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설명했을 때, 걀로 툰둡 형은 동요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결국 나는 네루의 충고와 저우 언라이와의 약속에 따라 티벳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중국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다. (145)

제7장 - 망명

......너무 끔찍해서 나는 몇 년 동안 그 이야기들을 믿을 수 없었다.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해 중국인들이 사용한 방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증스러운 방법이었다. 1959년에 국제사법위원회의 보고서를 읽고 나서야, 나는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십자가 형(刑), 생체해부, 희생자들의 창자를 들어내거나 손발을 자르는 일은 보통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머리를 베거나 태워 죽이고, 죽을 때까지 때리거나 산 채로 매장하기도 했다. 말 뒤에 사람을 매달고 죽을 때까지 달리게 했으며, 거꾸로 매달아 놓거나, 손발을 묶은 채로 얼음물 속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희생자들이 ‘달라이 라마 만세!’를 위치는 것을 막기 위해 형장으로 가는 도중에 그들의 혀를 손으로 찢었다. (148)

6백만 티벳 국민들에 대한 나의 책임과 의무감에 가슴이 무거웠다. 그것은 나의 신앙이기도 하였다. 매일 아침 일찍 고요한 축복 속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오래 딘 제단 앞에 앉아서 예불을 올리면서, 나는 모든 유정(有情)들을 위해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발하기 위해 마음을 집중하였다. 나는 우리의 적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지키기가 힘들지라도 나는 결코 그들이 나의 스승이라는 생각을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53)

내가 네충 신탁을 요청한 것은 이때쯤이었다. 신탁승들이 급히 소집되었다. 내가 티벳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국외로 탈출해야 하는가? 내가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 것인가? 신탁은 내가 티벳에 머무르면서 중국측과 계속 대화를 해나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나는 그것이 최선의 길인가 의심하였다. 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신도 거짓말을 한다는 루캉와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나는 그날 오후 모[일종의 점(占)이다]를 해보았다. 결과는 같았다......답장을 보낸 후 나는 무엇으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 이튿날, 나는 다시 신탁을 구했다. 놀랍게도 영매(靈媒)는 내게 이렇게 외쳤다. “가라! 오늘밤 당장 가라!”고. 영매는 최면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걸어나오더니 종이와 펜을 잡아채어서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거기엔 내가 노르블링카를 벗어나 인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마지막 티벳 변방 마을로 가는 길이 명확히 그려져 있었다. 그 길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통로였다. 다 쓰고 나자 영매인 승려 롭상 직메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쓰러졌다. 그것은 도르제 드라그덴이 그의 몸을 떠났음을 의미했다. 바로 그때 신탁의 계시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보석공원 북쪽 문 밖에 있는 습지에서 두 발의 박격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31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때의 일을 회상해 보니 드라크덴은 내가 17일에 라사를 떠나리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그 얘기가 새어나갈까 저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리 계획되어 있지 않았으니 비밀이 샐래야 샐 수가 없었던 것이다. (160~161)

 

 

제8장 - 1959년, 참담했던 그 한 해

1960년에 티벳 자유투사들에 의해 탈취된 인민해방군의 한 문서에 따르면 1959년 3월에서 그 이듬해 9월 사이에 군사작전에 의한 사망자는 87,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숫자는 자살, 고문, 기아로 이한 사망자는 제외된 것이다.) (176)

여러 해 동안 인도 국민과 정부는 자기네들도 극심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티벳 난민들에게 재정적으로는 물론 여러 방면으로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나는 다른 어떤 난민들도 그렇게 잘 대접받았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티벳 난민들이 재정적인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바로 그 순간에도 아주 기본적인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있는 인도 어린이들이 수십만 명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곤 했다. (178)

네루는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답을 하기 전에 약간 내민 아랫입술을 떨면서 조용히 앉아 얘기를 들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분명하고 정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내게 나 스스로의 양심대로 말하고 행동할 완전한 자유를 허용했다. 반면 중국인들은 항상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항상 나를 속였다. (185)

녹야원에서 행한 첫 한 주 동안의 설법은 내게 있어서 일대사건이었다. 붓다가 2,500여 년 전에 가르침을 베풀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설법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설법을 하면서 나는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은 자유에 이르는 첫걸음이라는 붓다의 말을 들려주었다. 옛 티벳 격언에도 그와 비슷한 말이 있다. ‘고통으로 기쁨의 크기를 잰다’는. (186)


제9장 - 10만명의 난민

산업이 발달한 나라의 국민들로부터 오는 이러한 원조의 손길을 받으면서 나는 소위 ‘보편책임’이라고 하는 나의 근본적인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인류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보편책임’이 없다면 세계의 모든 나라의 격차는 심화될 것이다.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고립되어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좀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면-즉, 결국 우리들은 모두 형제 자매라는 것을-단지 지구상의 일부분의 발전이 아닌 인류 전체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205)


제10장 - 승복을 걸친 늑대

지도자 되는 사람은 서민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된다는 것을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을 경우 자기 주위에 있는 자문관이나 관리, 혹은 그 밖의 측근들 때문에 판단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지도자의 측근들이 자기들 나름의 필요에 의해서 지도자로 하여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14)

우리는 지금 이 시각에도 티벳 땅에서는 불안한 소요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나는 요즘 들어서는 나를 ‘승복을 걸친 늑대’라고 부르는 베이징의 정치지도자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한 적은 없다. 나는 중국 정부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이 달라이 라마라는 존재가 단지 종교적 지도자인 척 가장하는 한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실제로 중국인들은 나를 일컬어 도둑, 살인자, 약탈자라 하곤 한다. 그들은 심지어 내가 인디라 간디를 위해 놀랄 만한 성적(性的) 봉사를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15)

특히 나는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을 가진 사람을 포함하여 삶의 배경이 제각기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를 좋아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크리슈나무르티였다. 그는 날카로운 지성과 상당한 학식을 겸비한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외모도 점잖아 보였고, 삶과 그 의미에 대해서 매우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또 그의 가르침으로 많은 도움을 받은 그의 추종자들도 만났다. (222)

이 시기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 중의 하나는 토머스 머튼 신부를 만날 수 있었던 일이다. 그는 트래피스트파의 미국 수도사였다. 그가 다람살라에 온 것은 태국에서 죽기 몇 주 전 1968년 11월이었다. 우리는 한 번에 두 시간씩 사흘을 계속 만났다. 그는 중키에 몸매가 다부진 사람이었으며 오히려 나보다도 머리 숱이 적었다. 물론 나처럼 삭발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의 외모가 나이라 그의 내면 세계였다. 나는 그가 소박하면서도 정신적인 깊이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스로 기독교도임을 표방하는 사람들 중에서 영적인 힘을 느끼게 해주었던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후 나는 그와 비슷한 성격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내게 가르쳐준 사람은 머튼이었다......우리는 서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적이고 영적인 문제에 관해서 토론했으며 종교 교단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이 모든 것은 참으로 유용한 상호이해의 전범이 될 만 했다. 그것은 단지 불교와 기독교 간의 유사성 때문만은 아니었다......머튼은 다른 두 종교 전통 간에 훌륭하 교량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모든 종교가 사랑과 자비의 가르침으로써 인간을 선으로 인도한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토머스 머튼 신부와 만나고 난 뒤 죽 나는 여러 다른 기독교인들과 만나게 되었다. 유럽 여행길에서 나는 여러 나라를 돌며 수많은 수도원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많은 감명을 받았다. 내가 만난 수도사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의무에 헌신적이었으며 나는 그것이 몹시 부러웠다.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그들의 자질과 사회에 대한 공헌도는 매우 높다는 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우리 티벳에는 망명중이긴 하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승려들이 있다. 아마 망명한 인구의 4~5퍼센트는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 수도사들이 보여준 만큼 헌신적인 자세를 항상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또 기독교의 모든 교파가 인류의 건강과 교육을 위해 자선단체를 조직해 실질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인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기독교의 형제 자매들한테서 배울 점도 이것이다. 불교도들도 사회를 위해 이와 같은 기여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나는 비구승 비구니 할 것 없이 불교도들이라면 누구나 자비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동에 옮기지는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여러 번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나라 불교도뿐 아니라 티벳 불교도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었으며, 또 실제로 그와 같은 단체를 조직하도록 독려했었다. 한편, 우리가 기독교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 있는 반면 그들도 우리한테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우리가 발전시킨 명상술이라든가, 마음을 집중시키는 훈련 같은 것은 그들의 종교적인 수행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23~224)

그들은(티벳 게릴라) 이 공격으로 1959년 3월부터 1960년 9월에 이르는 동안 라사에서만도 87,000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는 문서를 노획하게 되었다......결국 티벳에 있는 동포들에게만 고통이 가중되게 되었다. 더욱이 반군들의 이러한 활동이 중국 정부에게 티벳이 외국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한다는 비난의 빌미를 제공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티벳의 독립투쟁은 티벳인들의 자발적인 의지의 결과이다.
결국 미국은 1970년대에 중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게릴라를 지원하던 정책을 포기했다. 이 조치로 볼 때 그들의 지원은 티벳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반공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225)

나는 그들의 결의를 항상 존중해 왔으나 그들의 행위에 공공연히 찬성할 입장에 있지는 않았으며......타클라가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그들은 배신당했다고 느낀 것 같았다. 지도자 몇 사람은 실제로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스스로 목을 잘라 자살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경각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내 행동이 옳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티벳을 위한 그들의 용기와 충성심과 사랑에 대하여 내가 거부의 뜻을 표한 것이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26)


제11장 - 동서양 여행

태국에서......내가 만난 고승 몇 분은 몹시 인상적이었다.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 다른 전통을 갖고 있으나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토론하였다. 이 토론은 나로 하여금 티벳 전통 불교가 불교의 완전한 형태에 가깝다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229)

나는 교황 바오로 6세와 잠시 환담했다. 그 환담에서 나는 종교의 교리가 어떻든지 간에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정신적 가치라는 나의 소신을 피력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내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으며 우리는 좋은 낯으로 헤어졌다. (229)

거기서 나는 유태교 랍비를 한 사람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특히 감격적인 경험이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의 눈에서 나는 유태 민족이 당한 고통을 읽을 수 있었으며,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눈물이 절로 났다. (230)

나는 표면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어디를 가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똑같다는 나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 모두 나와 마찬가지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누구도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누구나 사랑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며, 동시에 모든 사람이 다른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류가 서로간의 우정과 상호이해를 좀더 증진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흑 아니면 백이라는 논리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선택의 논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호의존성과 상대성을 간과한 것이다. 그들은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 사이에 놓여있는 회색지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한 가지는 많은 사람들이 큰 도시에서 안락하게 살고 있으나, 실제로는 인류애라는 커다란 덩어리로부터는 소외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특히 희한한 점은 그토록 물질적으로 풍요하며, 형제 자매와 다름없는 수많은 이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개나 고양이들한테만 정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정신적 가치의 결핍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부분적으로는 선진국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저 지나친 경쟁 의식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경쟁의식은 단지 두려움과 깊은 불안감만을 조장할 뿐이다. (232~233)

내가 말하는 바는 대충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 인간으로서 나는 ‘보편책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보편책임’은 우리 인간 모두가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중생에 대해서, 더 나아가 자연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음을 뜻한다.
둘째, 한 승려로서 나는 서로 다른 종교들이 화합하고, 상호이해를 증진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종교는 인간을 좀더 나은 존재로 이끄는 것이며, 철학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는 인류가 행복을 추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며, 철학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는 인류가 행복을 추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세계종교’를 지지한다거나, 아니면 무슨 ‘초종교’ 같은 것을 추구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차라리 나는 종교를 약 같은 것이라고 본다. 병의 증상이 다를 때 의사들은 증상에 따라 다른 처방을 한다. 모든 사람의 정신적 질병도 같지 않기 때문에, 각기 다른 정신적인 약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티벳인으로서 그리고 더 나아가 달라이 라마로서 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한, 나의 조국 티벳에 대해서, 그리고 티벳 민족과 문화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점령당한 나의 조국과 고통받는 민중에 대해서 크나큰 관심을 보여줄 때 내가 용기를 얻고 정의를 위한 투쟁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단지 티벳만을 지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그들이 정의를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233~234)

내가 서양인들과 만나 얘기하면서 알게 된 것은 그들은 대개가 몹시 회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의심하는 회의적 태도란 더 진전된 질문의 근거가 될 때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234)

때문에 나는 정치문제에 다다르면 대화를 중단했다. 나는 그것을 피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34)

해외에 갈 때마다 나는 종교간의 대화를 조장할 생각으로 가능한 한 많은 수도자들과 만나려고 하였다. 언젠가 외국에서 나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 몇 사람을 만났다. 그들과 협의하여 몇 주 동안 시한을 정해서 티벳승려가 기독교 수도원으로, 그리고 같은 수의 기독교 수도자가 인도에 있는 불교 사원을 견학하게 하는 상호 교환방문을 추진하였다. 그것은 양측에 똑같이 매우 유용했음이 입증되었다. 특히 우리한테는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235)

현재의 카톨릭 교황[요한 바오로 2세]에게 나는 깊은 존경심을 품고 있다. 처음부터 우리 사이에는 비슷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공통저인 대화의 장이 마련되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본 그는 매우 현실감각이 뛰어나고 포용력이 있었으며, 개방적이었다. 그는 의심할 바 없이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이다.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사람을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높은 정신적 경지를 개척한 수도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1988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델리 공항에서 만난 테레사 수녀(그녀도 그 회의에 참석했다) 또한 존경스러운 분이다. 나는 철저하게 검약한 그분의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불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녀는 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뛰어난 정신적 지도자라고 생각되는 또 한 사람은 스페인 몬세라 근처에서 은거하고 있는 카톨릭 수사였다. 그는 동양의 은자처럼 빵과 물과 약간의 차만 먹고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보다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을 보고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수행을 쌓아온 비범한 인물 앞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무엇에 대해 명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사랑”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후로 나는 그를 티벳의 영적 스승인 밀라레파의 이름을 따서 현대의 밀라레파라고 생각했다. 밀라레파 역시 명상과 종교적 저술에 몰두하며, 오랫동안 암굴에서 숨어 살았다.
내가 여러 번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또 한 사람의 종교 지도자는 위대한 캔터버리 대주교인 로버트 런시 박사(그의 용기있는 사절인 테리 웨이트는 기도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다)였다. 우리 두 사람은 종교와 정치는 서로 조화되어야 하며, 인류에 봉사하는 것이 종교의 의무라는 것, 그리고 종교가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의견을 함께 했다. 기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종교인들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할 도덕적인 의무가 있는 것이다. (235~237)

어느 인도 정치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 문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꽤 겸손하게 이런 말을 했다. “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정치가일 뿐입니다. 종교인이 아니죠. 우리의 첫 번째 관심사는 정치로서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대꾸했다. “정치가들은 은둔하고 있는 은자들보다도 오히려 더 종교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은자가 불순한 동기에서 행동한다고하면 그는 그 자신만 망칠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한 동기를 가진 사람이 이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위치에 있다고 한다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나쁜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정치와 종교 사이에 아무런 모순점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선의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은 다 종교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선의를 갖지 않고 있다면 사원이나 절에 모여드는 군중은, 설사 기도를 하고 있는 승려라 할지라도 결코 종교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237)

사람들이 불교 수행을 함으로써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지만, 종교를 바꾸고 싶다는 얘기를 해올 때면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깊이 생각한 후에 결정하라고 충고한다.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신적 갈등을 초래하기 쉬우며 또 항상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다. (238)

나는 이러한 새로운 불교 수행자들이 증가함에 따라서 그들 일부가 분파주의적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종교는 절대 분쟁의 씨앗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 사회를 또 다시 분열시키는 것이다. 나는 다른 종교 역시 인간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나의 깊은 신념에서 다른 종교 의식에도 참가해 왔다. 그리고 고금의 많은 티벳 라마승의 예를 본받아 가능한 한 많이 다른 종교 전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왔다. 일부 종파가 수행자들을 특정 전통 아래 묶어두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다. 더욱이 티벳 사회는 다른 민족의 신앙에 대해서 언제나 관대하다. 티벳 내에서는 이슬람교 사회도 번창하고 있으며, 기독교 전도사들 역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 나 또한 종교와 사상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분파주의란 일종의 독인 것이다.
나의 종교적 수행에 대하여 말하자면, 한마디로 나는 보살의 이상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불교적 사유 방식에서 보살은 불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려고 그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을 뜻한다......그러므로 보살의 이상은 무한한 지혜로 무한한 자비를 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뜻한다. (230)

티벳 불교에서는 비구에 대해서는 253개의 계율이 있고, 비구니에 대해서는 364계율이 있다. 이 계율을 지킴으로써 생의 혼란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가장 근본적인 네 가지 계율은 단순한 금기로서, 승려는 죽이지 말며, 자신의 정신적인 성취도에 대해서 거짓말하지 말 것이며, 마지막으로 여색에 대해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계율을 범한다면, 그는 이미 승려라고 할 수 없다.
나는 가끔 이러한 독신에 대한 맹세가 바람직한 것인지, 또 진정으로 가능한 것인지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러한 금욕의 수행이 단지 성적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란 생각이 든다. 그와 반대로 차라리 이러한 욕망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수행의 필요조건이며, 더 나아가 그것을 이성의 힘으로 초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렇게 근본 욕망을 극복하면, 그제서야 마음은 크나큰 힘을 얻는 것이다. 성적 욕망이 왜 문제가 되는가?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나는 이 세상에 만연한 빈곤을 뿌리뽑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과는 그 이성적, 합리적 계기가 같지 않은 것이다. 더 나아가 성적 만족은 단지 일시적 만족감을 주는 데 그칠 뿐이다. 이것은 위대한 인도의 학자였던 나가르주나(龍樹)가 말한 바와 같다.
어디가 가렵다면 긁으라.
그러나 전혀 가려움이 없는 편이
몇백 번 긁는 것보다 더 나으리라. (240)

내가 매일같이 행하는 수행을 소개해 볼까 한다. 나는 적어도 다섯 시간 반 이상은 기도와 명상과 공부에 쓴다. 그리고 짬이 있을 때마다(식사중이나 여행중에도) 또 기도를 한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일상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둘째,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다. 셋째, 두려움을 몰아내 준다. 그러나 불교도로서 내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종교적인 수행과 일상적인 생활 사이에 어떤 구별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 수행은 스물네 시간 근무하는 직업과 같다. 실제로 일어나서 씻고, 먹고, 잠들고 하는 모든 행위 전에는 기도를 한다. 탄트라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겐 깊은 잠이나 꿈을 꾸는 상태에서까지 이루어지는 수행이 죽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준비작업이다. (240)

이러한 일상적 수행의 이론적 근거는 아주 간단하다. 내가 불전에 오체투지의 예를 행하는 것은 삼보에 ‘귀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음으로 이러한 수행은 나의 심신을 강화해 준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무상하다는 진리와 고통받고 있는 존재의 실상을 깨달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러한 두 가지 깨달음과 수행은 나의 심신을 강화해준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무상하다는 진리와 고통받고 있는 존재의 실상을 깨달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러한 두 가지 깨달음에 의거하여 자비, 이타행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타심, 즉 자비심을 발하기 위해서 나는 소위 적을 포함한 모든 중생을 향해 애정을 갖게끔 하는 모종의 정신적 수행을 한다. 예컨대, 나는 어떤 사람을 나의 적으로 만드는 것이 그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존재의 행위라는 것을 스스로 일깨운다. 만약 그 행위만 바뀐다면, 적이었던 사람도 곧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명상은 공Sunya(空)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명상하는 동안 나는 사물의 상호의존성의 미묘한 의미에 온 정신을 집중한다. 이 수행에는 소위 ‘신성한 요가’인 라이 날조르Lhai naljor가 포함되어 있다. 이 요가를 하는 중에 나는 갖가지 만다라를 이용해서 나 자신이 서로 다른 신성의 연속체임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외적으로 독립된 실체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나의 마음을, 감각기관에 의해서 산출된 잡다한 정보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 집중시킨다. 이때 마음은 모호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각성된 상태에 있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순수의식의 훈련이다. 이 상태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공간-시간’ 개념의 진정한 의미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순수마음’을 언어로나 일상의 경험으로써 설명하는 것도 몹시 어렵다. 그것은 간단한 수행이 아니다. 그것을 숙달하는 데만도 몇 년이 걸린다. (242)

일상의 수행에서 중요한 부분은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관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를 갖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아예 무시해 버린다. 그런 경우에 아마 얼마동안은 그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태도는 죽음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에 맞닥뜨려서 분석함으로써 죽음이 야기시키는 불가피한 고통을 극소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태도는 어느 길이든 참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불교도로서 제 3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즉 죽음을 삶의 평범한 진행 과정의 일부로 본다. 나는 죽음을 윤회 속에 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실제적인 무엇으로 받아들이며,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걱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죽음을 옷이 낡고 헤졌을 때 새 옷으로 갈아 입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언제 어떻게 닥쳐올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이 닥치기 전에 미리 방비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도로서 나는 또한 죽음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아주 심오하고 유익한 경험을 얻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훌륭한 영적 스승들은 스스로 자신을 이 지상의 존재로부터 해방시킨다. 즉 그들은 명상을 하는 동안에 죽는다. 그럴 때 그들의 신체는 의학적으로 사망한 후에도 오래도록 썩지 않는다. (242~243)

안거 수행의 목적은 내면계발에 온 정신을 집중하기 위한 것이다. 평소에는 그러한 기회를 갖기가 몹시 어렵다......수행의 폭과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지금의 나는 정신적인 경지에 있어서는 아주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43)

사람들이 자신과 남들을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 반드시 불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전혀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내 일생에 일어난 많은 사례가 나의 신앙에 타당성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불교를 단지 하나의 예로써 제시할 뿐인 것이다. 그 밖에도 여섯 살 때부터 승려로서의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불교에 관한 한 약간의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교를 들먹였을 뿐이다. (244)

 

 

제12장 - 신통력과 신비

불교 사상에 따르면 의식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미묘한 단계는 죽음의 순간에 감지되는 감각들이다. 탄트라를 수행하는 목적 중의 하나는 수행자로 하여금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경험이야말로 가장 강한 영적 깨달음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246)

인간의 신체가 어떤 것인지 또 거기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 현재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는 그 현상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벤슨 박사는 명상 중에 있는 수행자의 정신 작용이 신체에 축적된 갈색 지방질을 태우기 때문에 체온이 상승하는 것이라고 믿는다-그것은 겨울에 동면하는 동물들에게서나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 내적 매커니즘이야 어떻든 간에 나의 관심의 초점은 현대 과학도 티벳의 전통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우리가 축적한 경험 중 몇몇 분야도 이러한 탐구를 통해서 현대 과학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탁 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실험을 진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247)

신탁의 목적이 단지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예언은 단지 부분적인 기능일 뿐이다. 신탁은 우리의 수호자로서 요청될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치료자로 이용된다. 그러나 신탁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다르마를 수행하는 것을 돕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또 ‘신탁orcle’은 잘못된 표현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때의 신탁이라는 말은 신탁의 권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티벳의 전통에서는 자연과 초자연적 영역 사이를 매개하는 특정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들을 쿠텐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의 뜻은 문자 그대로 ‘육체적 근거’를 의미한다. 또 이 신탁이라는 말이 종종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듯이 쓰이는데, 이것은 단지 편의에 의해 그렇게 쓰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영spirits’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들은 특정한 사물(예컨대 석상 같은 것) 혹은 특정한 사람이나 장소와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들을 독립된 외적 실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이러한 신탁이 20세기 서구의 독자들에게는, 아전인수격인 해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그러나 내가 질문을 했던 여러 경우를 돌이켜볼 때, 매번 네충의 대답이 옳았음이 판명되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나는 그를 신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오로지 신탁의 조언만을 듣는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네충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은 내각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과 똑같은 무게로서 그리고 내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비중으로서 고려할 뿐이다......행동 방식은 다르겠지만, 티벳에 대한 네충의 책임과 달라이 라마의 책임은 동등한 것이다. 지도자로서 나의 업무는 평화적인 것이지만, 수호자와 방어자로서의 네충의 업무는 더 투쟁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할이 비슷하기는 하나 나와 네충의 관계는 사령관과 부하 장교의 관계와 같다. 나는 그에게 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네충이 달라이 라마에게 절한다. 그렇긴 해도 우리는 매우 가까운 사이여서 거의 친구나 다름없다......네충은 항상 내게 존경심을 잃지 않고 있다. 섭정기의 마지막 몇 해 동안 그와 행정부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에도 그는 나 자신의 문제에 관해 질문할 때면 언제나 변함없이 성의를 다해 거기에 응답했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에 관한 질문에 대답할 때에는 가혹하기까지 했다. 때때로 그는 대답 대신 냉소하기도 하였다. 또 내가 열네 살쯤 되었을 때, 신탁을 구하던 도중 특별한 사례가 있었다. 네충은 그때 중국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받았는데, 대답 대신 쿠텐이 동쪽을 향해서 격렬하게 허리를 굽히기 시작했다. 이러한 동작은 쿠텐이 머리에 쓰고 있는 거대한 모자의 무게 때문에 목이 부러질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몹시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는 적어도 열다섯 번 이상은 그랬던 것 같다. 위험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47~249)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화신의 목적은 그들의 전생의 작업에 지속성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특별한 인물의 후계자를 찾을 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것은 특별한 인물의 후계자를 찾을 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일례로, 나의 일반적인 책무는 모든 중생을 돕는 데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동포 티벳인들을 돕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만약 티벳인들이 자유를 획득하기 전에 죽을 경우, 내가 티벳 밖에서 환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물론 내가 환생할 때쯤 해서는 내 동포들이 더 이상 달라이 라마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그들은 나를 찾고자 굳이 애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곤충이나 그 밖의 동물로 환생할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건 많은 중생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252)

가끔 전임자가 죽기 전에 후임 화신이나 그의 부모의 이름을 상세히 알려줌으로써 이러한 파견단이 필요없을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또 다른 경우에는 그 승려의 추종자들이 그 화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꿈을 꾸거나, 환영을 보게 되기도 한다. 그와는 달리 어떤 고승은 최근에 죽으면서 자기 환생을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남겼다. 그는 부처의 법과 공동체에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굳이 정확하게 자기의 화신을 찾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화신에 관한 엄격한 법칙은 없다. (253)

이떤 경우엔 나 자신이 이 화신을 찾도록 지시할 때가 있다. 이때 선택된 화신이 진짜인지 아닌지 최종결정을 내릴 책임이 내게 있게 된다. 나는 여기에서 내가 천리안과 같은 신통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이러한 분야에 능력이 있었지만, 나는 거기에 대한 수련을 할 시간도 기회도 갖지 못했다. (253)

1983년 늦여름, 나는 그(링 린포체)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스위스에서 들었다. 그는 뇌졸중 발작을 일으켜 마비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아직 살아있었으나 건강은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일생동안 열심히 수행한 덕으로 여전히 맑았다. 그의 건강은 수 개월 동안 그 상태로 유지되다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서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1983년 12월 25일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는 듯이 그의 몸은 그렇게 더운 기후였는데도 사망 선고가 내린 후 30일 동안이나 썩지 않았다. 그는 의학적으로 사망했지만 몸 안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사망하기까지의 태도를 돌이켜볼 때, 그의 병이 상당한 기간을 끈 것은 완전히 의도적인 것으로서, 나로 하여금 그가 없는 상황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그가 죽었다고 얘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티벳인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으므로 얘기는 행복하게 이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링 린포체의 화신은 지금 아주 명랑한 장난꾸러기인 세살박이 소년으로서 살아있다. 그는 파견단원 중의 한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었으므로 화신으로서 인정되었다. 그때 그는 단지 18개월 밖에 안 된 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파견단원의 이름을 부르면서 웃으며 다가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링 린포체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도 분명히 알아보았다.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가 링 린포체의 환생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최상의 존경을 표하면서 나를 잘 알고 있는 듯이 행동했던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나서 나는 어린 링 린포체에게 커다란 초콜릿을 주었다. 그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에 든 채 나와 함께 있는 동안 계속 손을 뻗은 상태로 머리를 조아리고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린아이가 만난 것을 맛보지도 않고 그토록 예의범절을 차리고 서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 소년을 나의 처소에서 만나 문 쪽으로 데리고 갔을 때, 그는 자기 전임자가 했던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 그는 전생에서 그가 했던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더구나 그가 나의 서재로 들어왔을 때, 그는 나의 시종들 중 한 사람을 즉시 알아보았다......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그가 두 살 때 보드 가야에 데려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거기서 설법을 하게 되어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그는 나의 침실을 찾아서 손과 무릎으로 계단을 기어올라가서는 내 침대에 카타를 깔았다. 요즘 그는 벌써 경전을 암송한다. 그러나 그가 읽기를 배웠을 때, 다른 어린 화신들과 마찬가지로 마치 그들이 놓아두었던 것을 집는 것과 같이 책을 놀라운 속도로 암기할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상당량의 글귀를 쉽게 낭송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화신을 확인하는 과정에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나는 마오나 링컨, 또는 처칠 같은 사람들이 우연히 태어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255)

내가 과학적으로 조사해 볼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또 하나의 티벳 전통은 티벳의 의료체계이다......티벳 의학에서는 병의 근본원인을 무지, 욕망, 증오로 보고 있다......치료방법의 첫 번째 단계는 주로 몸의 움직임이나 식이요법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약물이며, 세 번째 단계는 침과 뜸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단계가 수술이다. 의약품은 유기물질에서 추출해 낸 것이며, 때로는 철 산화물과 광물질을 혼합하기도 한다......개인적 경험에서 볼 때 티벳 의학이 상당히 효과적이라는 것이다......내가 생각하기에 현대 과학과 티벳 문화 사이에 대화가 가능한 영역은 경험적인 지식이라기 보다는 이론적인 지식인 것 같다. 현대 소립자 물리학의 최근 경향은 마음과 물질의 비이원론적(非二元論的) 시각에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진공상태가 압박되면 그 이전까지는 거기에 없던 소립자들이 나타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현대 과학과 불교 중도철학의 공(空)사상과의 유사점이다. 이 철학의 요지는 마음과 물질이 따로 존재하기는 하나 서로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이다. (256~257)

그러나 나는 영적인 종교와 과학적인 체계를 하나로 묶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불교는 창도된 이래 2,500여 년 간 지속되어 왔지만, 현대 과학이 등장해서 발전해 온 것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신탁이나, 영하의 온도에서 밤을 지샐 수 있는 승려들의 능력이 신통력이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중국의 형제 자매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티벳이 고유의 전통을 고집해 왔기 때문에 미개하고 야만적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가장 엄밀한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객관적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어떤 하나의 원리가 받아들여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그 원리와 관련된 모든 것이 타당하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분석과 검증을 거쳐 공산주의가 불완전한 체제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마르크스와 레닌의 모든 언명을 아무런 분별력 없이 노예적으로 따른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문제를 다룰 때는 언제나 상당한 주의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때 과학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어떤 것을 잘 이해할 수 없을 때 그것을 신비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법이다.
지금껏 내가 얘기한 모든 실험의 결과는 어느 편에나 유익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결론을 도출한 실험의 정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나는 어떤 것을 발견해 내지 못했다고 해서 곧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단지 실험방식이 부적당했다는 것만 말해 줄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어떤 실험을 할 때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특히 과학적 경험이 미미한 분야를 다룰 때 더욱 그러하다. 사물의 고유한 한계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과학적인 실험이 내 생각을 잘 포착할 수 없을 때에도 나의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또 그것을 조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얘기도 될 수 없다. 티벳인 특유의 경험도 이러한 성격의 것이다. 우리는 정신적 수련을 통해 과학이 지금까지 충분히 설명해 낼 수 없는 영역을 다루는 능력을 발전시켜 왔다. 이것이 티벳 불교의 소위 신통력과 신비의 현주소다. (257~258)


제13장 - 티벳 소식

마오가 죽자마자 그의 부인 지앙 창(강청)이 이끄는 4인방이 체포되었다. 그들이 체포됨으로써 지난 수년 간 마오의 배후에서 실제로 중국을 지배한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급진정책을 시행하려 했고, 문화혁명을 주도했다......그는(이선념-국가주석) 문화혁명에 관해 “훌륭한 성과도 많았지만 몇 가지 해악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260)

모스크바를 떠나 부르야트 공화국으로 가서 그곳 불교 사원에서 하루를 지냈다. 그곳에 있던 누구와도 직접 이야기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기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카톨릭이 전세계에서 라틴어를 사용하듯 그들도 티벳어로 기도했다. 승려들은 티벳어로 쓸 줄도 알았다. 그런데 그것보다 우리는 서로의 눈빛으로 더 잘 이야기할 수 있었다. 사원에 들어설 때 나는 운집해 있던 많은 승려와 평신도들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그것은 티벳에서나 볼 수 있는 자발적인 감정의 표현이었다. 나는 금방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부르야트 공화국의 수도 울란 우데에 있는 사원은 내가 소련에서 본 것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1945년 스탈린 전성기에 건립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인간에게서 정신적인 것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뿌리뽑기가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내 조국의 사람들처럼 부르야트의 인민들도 신앙 때문에 무수한 고초를,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겪어왔다. 그래도 어디를 가든지 그 척박한 토양 안에서도 그들의 정신적인 삶이 얼마나 풍성한지 쉽게, 그리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265)

내 생각에는 불교와 마르크스주의가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양자간의 생산적인 대화가 가능할 것 같다. 물론 모든 종교와 유물론적 이데올로기 사이의 대화도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부르야트 공화국 인민의 삶은 내 생각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유물론과 과학기술이 인간 문제 전반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다면, 가장 선진적인 사회에는 지금쯤 아무런 문제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그곳에도 여전히 문제가 산적해 있다. 마찬가지로, 만약 사람들이 정신적인 문제에만 몰두해야 한다면 우리 모두 우리의 신앙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회에는 진보가 없다. 물질과 정신 양면의 발전이 모두 요구된다. 그리고 인간애가 퇴색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265~266)

그 박물관에 걸린 그림 중에는 유목민들이 수레를 몰고 승려가 벌린 큰 입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그림도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반종교 선전을 위한 작품이었다. 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서자 안내원이 신경질적으로 나를 막아 공산주의 선전을 위한 그 황당한 작품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내게 감출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상당한 진실이 깃들여 있었다. 그런 것은 은폐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그림에서 보이듯 무릇 종교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사람을 이용해 먹는 일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종교 자체의 결함이 아니다.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만든 해독일 따름이다. (266)

제1차 진상조사단은 2주동안 베이징에 머물면서 중국 정부와 회합을 갖고 일정을 협의했다. 약 4개월 동안 티벳 전역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도록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표단이 암도에 도착하자마자 사태는 중국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대표단이 어디를 가든 그들은 수많은 군중에 휩싸였다. 군중 속에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축복을 빌며 내 안부를 물었다. 그곳 중국인들은 놀라 라사에 있는 당국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계속해서 보냈다. 회답이 왔다. ‘수도에서 고도의 정치적 훈련을 받았으므로 당황할 필요가 없다.’
죽국인의 염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표 다섯 명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라사에 이르자 그들은 거대한 군중-대표단이 보내온 사진에는 수천 수만의 군중이 거리에 빽빽이 서서 축복을 비는 모습이 보였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군중들은 해산하다는 경고도 무시했다. 중국인 고위 기간요원 한 사람이 자신의 동료에게 하는 말을 우리 대표 하나가 슬쩍 듣게 되었다. “지난 20년 간의 수고가 하루아침에 날아가버리는군.” (259)

다행히도 후 야오빵(호요방)은 이런 사정을 알아챘다. 그는 공공연히 티벳인의 생활상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티벳에 투자했던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다. 계속해서 그는 티벳 점령지에 주둔하는 중국인 요원을 85퍼센트 선으로 감축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개선안에 관한 얘기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후 야오빵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실각했고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났다. 그렇기는 해도 중국이 티벳에 저지른 잘못을 시인할 줄 알았던 그의 용기는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그가 보여준 용기는 사실 중국의지도자들 가운데도 그들 정부가 외국에 대해 취하는 억압적인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269)

제1차 진상조사단이 이룩한 또 하나의 고무적인 성과는 베이징에서 판첸 라마를 만나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정부가 행한 극심한 폭력에 시달려왔다. 대표 다섯 명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몸에 뚜렷이 새겨진 고문의 흔적들을 보여 주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내가 망명길에 오른 뒤에도 타쉴훈포에 있는 그의 사원은 인민해방군에게 피해를 입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그가 새로이 통치권을 잡은 중국인들을 비난하기 시작하자 군대가 사원에 들이닥쳤다. 그러다가 1962년에 나를 대신해서 준비위원회 의장직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그 직책을 거절했다. 대신에 7만 자에 달하는 장문의 탄원서를 마오 의장에게 보냈다. 즉시 그의 모든 공직이 박탈되었다......1964년 초 판첸 라마에게 복권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몬람 기도회 기간에 라사 주민들에게 연설을 하도록 초청을 받은 것이었다. 그해에 몬람 기도회는 단 하루 동안 치르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 그는 초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는 군중을 향한 연설을 통해 달라이 라마만이 티벳 인민의 진정한 지도자라고 선언함으로써 중국 정부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달라이 라마 만세!”라는 외침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연설을 마치자 그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17일 간 비공개재판을 받은 후 그는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도 처형을 당하지나 않았을까 걱정했다. 이제야 드러난 진상에 따르면, 처음에 그는 가택연금을 당했으며 그 뒤에 중국에서 제일 큰 감옥에 투옥되어, 거기서 극심한 고문을 당하면서 정치적인 ‘재교육’을 받았다. 그곳의 상황이 너무도 열악하여 그는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래도 판첸 라마는 살아 돌아왔고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 (271)

중국 정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티벳 인구를 조절하기로 결정했다. 티벳에서는 한 가구 당 두 명으로 산아제한이 실시되고 있었다. (오히려 산아제한이 필요한 중국 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제한을 초과하는 경우에 임산부는 갼체의 ‘외과의사’라고만 알려진 의사에게로 보내진다. 거기서 임산부는 중절수술을 받은 뒤 불임수술을 당한다. 할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이 피임기구를 쓴다. 최근에 티벳에서 온 여인은 조잡한 구리로 만든 링을 사용하고 있었다......그가 전해 준 폭력과 압제의 현실은 너무도 놀라워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다. 20여 년에 걸쳐 수차례 감금을 당하는 동안 그는 거의 굶어죽을 뻔했다. 그와 감옥에 같이 있던 사람들은 굶주림에 지쳐 자신의 옷을 먹기도 했으며, 그와 함께 입원을 하기도 했던 동료 한 사람은 변기 속에 있는 벌레들 잡아 씻어 먹기도 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한 승려로서 이 글을 쓰고 있을 뿐, 내가 사랑하는 중국 형제 자매들에게 적대감을 품고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해 주고 싶은 것이다. 중국에는 티벳의 실제상황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는 선량한 인민들이 분명히 많이 있다. 나는 분노 때문에 이런 무자비한 현실을 고발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런 일이 이미 일어났으며, 앞으로의 일을 예비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기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275)

 

 

제14장 - 평화의 씨앗

인간은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창의성을 발휘하려면 자유가 필수불가결하다. 나는 망명지에서 자유롭다. 31년이 넘는 망명생활을 하면서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우리 조국에서 똑같이 자유롭지 않고서는 내가 티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별로 잘하는 일이 아니다. (281)

후에 내가 만난 사람들은 중국을 방문하기 이전에는 대체로 중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티벳을 여행한 후에는 견해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자신들의 입장을 바꾸어야겠다고 말했다. 어떤 노르웨이 사람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그는 중국이 티벳 종교를 파괴한 것에 관하여 대단히 놀랍다고 말했다. 그는 두 번째로 라사에 다녀온 지금에서야 실제로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나의 동포들을 위하여 할일이 없느냐고 내게 물었었다. 나는 이런 질문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그가 본 것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런 방법으로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티벳이 겪고 있는 곤경을 점차 이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84)

롭상 삼텐(달라이 라마의 형)이 죽은 것이다. 그는 겨우 쉰네 살이었다. 나는 무척 상심했으나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제1차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것이 그에게 깊은 심리적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는 눈앞에 분명히 드러나는 티벳인들의 고통과 불행에 무관심한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언제나 농담도 잘하고 명랑한 편이었으나(그는 고도로 세련된 그리고 대단히 통속적이기도 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티벳에 다녀온 뒤로는 우울한 표정으로 지내는 때가 많아졌다. 그래서 좀 지나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울화병으로 죽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286)

롭상 삼텐 형을 회상해 보면 그의 인간성에 항시 감동받게 된다. 그는 나에게 다른 티벳인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존경심을 보여주었고, 나를 동생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집에 가거나 또는 다른 곳을 여행하기 위해서 집을 떠날 때면 그는 변함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문에 도열해서 인사를 했으며 나의 안전을 기원해 주었다. 그는 또 대단히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한번은 누군가 그에게 인도 동부 오릿사에 있는 나환자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그렇지만 그는 깊이 감동되어서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티벳 망명정부가 나환자 수용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물어보았을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대답했다. (286)

티벳 국민들과 중국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첫 번째 요건은 신뢰회복이다. 지난 3년 간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믿을 수 없게도 130만 명의 티벳인들이 굶주림과 사형, 고문과 자살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고, 수만 명이 투옥되었다.) 중국 군대의 철수만이 화해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289)


제15장 - 보편책임과 선의

여기에서 잠시 나는 몇몇 외국인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들은 전혀 그럴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와 같은 자발적인 인간애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희망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심한 부상을 입은 티벳인들을 돕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걸었다. 게다가 그들은 중국인들의 온갖 야만적인 행위들을 증언하고 사진도 찍었다. (295)

정오경에는 경찰이 조캉 사원을 덮쳐 적어도 12명의 승려들을 살해했다. 한 승려는 그들에 의해 몹시 구타당한 후에 두 눈이 뽑힌 채로 지붕 위에 내던져졌다. 티벳의 가장 거룩한 성지가 도살장이 된 것이었다......사건이 있은 후 한 달이 못 되어 라사를 갔다온 영국 정치가 애날스 경한테서 처음으로 자세한 소식을 들었다. 베이징 정부의 허가를 받은 대표단의 지도자였던 애날스 경의 방문 목적은 티벳의 인권 현황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대표단의 다른 일원과 마찬가지로 그는 광범위한 폭력이 티벳 인민들에게 행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대표단들은 또한 소요로 인한 투옥자들에게 고문과 학대가 자행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했다. 그들은 수많은 목격자들로부터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국제 인권감시위원회에 의해 출간된 그들의 보고서는 ‘신속하고 적극적인 대응책이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296~297)

1989년 1월 28일 판첸 라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때마침,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그는 티벳을 방문중이었다. 그는 당시 베이징에 살고 있었다. 그는 겨우 쉰세 살이었다. 당연히 나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나는 티벳이 진정한 자유의 투사 하나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일부 티벳인들이 그를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실은 나도, 그가 아주 젊었던 1950년대 초에 그가 중국 편을 들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애국심을 믿는다. 중국인들이 1978년 그를 석방한 이후로 줄곧 그를 꼭두각시처럼 이용해 왔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들에게 반대했다. 신화사통신의 보도에 의하면 죽기 직전에 행한 한 연설에서 그는 티벳에서 중국 당국이 저지른 많은 실책들에 대해서 몹시 심한 비난을 가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용기있게 행동했던 것이다.
이틀 후에 그는 타쉴훈포 사원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전임자들의 묘소를 참배한 직후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사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상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정신적 지도자가 보일 수 이는 사려깊은 모습이었다.
나는 비록 그가 죽기 전에 만날 수는 없었지만 전화를 통해서 세 차례나 대화를 나누었다. 두 번은 그가 베이징의 자기 사무실에 있을 때였고(그는 인민대표로 임명되어 있었다), 한 번은 그가 해외에 있을 때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베이징에서 그의 통화는 도청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두 번째 통화가 있은 지 몇 주일 후, 아주 신중하게 편집된 우리들의 대화 내용이 중국의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중에, 이미 약속된 시간에 감시원을 교묘히 따돌리고 독일(서독)에 있는 나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오래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자신의 종교와 민족과 조국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가 지나치게 많은 사업에 관심을 보인다는 좋지 않은 소식이 라사로부터 전해졌을 때에도 나는 별로 염려하지 않았다. 그가 결혼을 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299~300)

다음날부터 경찰 수사를 시작했으며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목격자들은 그들이 티벳인들의 집에 자동소총을 난사해 전가족을 몰살시키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불행하게도 티벳인들은 경찰과 보안요원들을 공격함으로써 이에 맞섰다. 아주 적은 수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무고한 중국 시민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것은 나를 아주 슬프게 했다. 어떠한 경우라도 티벳인들이 폭력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600만 우리 티벳인들에 비해서 10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중국은 만약 그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티벳인 전부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누구든지 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훨씬 건설적이다. 돌을 들어 분노의 대상을 향해 던지기보다는 그 분노를 잊는 법을 배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분노가 클 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선행을 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는 바로 가장 커다란 역경에 처해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런 말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너무 지나친 요구이다. 내가 그런 끔찍한 고통 속에서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티벳인들에게 중국인들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폭력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경우에 따라 불가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실제로 나는 우리 국민들의 용기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여자와 어린애들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수백 명의 남자들이 첫날 저녁에 체포되었다. 따라서 둘쨋날과 셋쨋날에 그렇게도 활발하게 자신들의 감정을 표출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아마 이제는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매맞으면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300~301)

(천안문 사태 당시) 정부 당국은 폭력을 씀으로써 중국 인민들 사이에 학생들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북돋웠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중국 공산주의의 수명을 2분의 1에서 3분의 1 가량 단축시킨 것이다. 그들은 또 자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전세계에 여실히 드러내었다. 중국의 인권탄압에대한 티벳인들의 호소를 비난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 (302)

노벨 평화상이 내 개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티벳 인민들에게는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왜냐하면 이 상의 진정한 수상자는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자비와 용서 그리고 사랑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사실에 나는 만족했다. 많은 국가의 국민들이 자신들에게도 평화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것이 기뻤다. 과거에는 비폭력적인 혁명은 관념적인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마오 주석은 정치적인 힘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부분적으로만 옳았다. 총구에서 나온 권력은 일시적일 뿐이다. 결국에는 진리와 정의, 자유와 민주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이 승리한다. 정부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인간의 정신은 승리하고야 만다. (304)

그와 같은 박애정신의 실례들은 중국인들에 의한 우리 민족의 고난도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왜냐하면 수억의 중국인들 중에서 어느 한 순간에라도 잔학행위에 참여한 사람은 수천 명에 지나지 않는 반면, 수백만의 사람들은 선행을 베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306)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들이 경찰이 시위진압시 사용하는 전기봉으로 고문받았는가를 얘기했다. 한 젊은이는 그들이 전기봉을 자기 입 속에 집어넣어서 입 속이 다 부르텄다고 했으며, 한 비구니는 취조관들이 이 도구를 자신의 항문과 질 속에 집어넣어 고문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자료들을 열거해 중국인 전부를 매도하는 것은 유혹적이기는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만행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 나는 비록 내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망명지에서 살아왔으며, 항상 중국인들의 문제에는 민감한 관심을 지녀왔지만(그 결과 나는 ‘중국 관측통’으로 제법 관록이 있다) 아직도 중국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307)

비록 공산주의가 ‘인민’에 봉사한다고 공언하지만 그 ‘인민’이라는 말은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견해와 의견을 같이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을 의미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309)

그들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고, 의심은 끔찍한 불행의 시발이 된다. 왜냐하면 의심은 기본적인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한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믿고 싶어하는 욕망은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309)

만약 내가 어떤 정치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아마 절반쯤 마르크스주의자일 것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실현되기만 한다면 아무런 반대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종교적인 믿음은 나로 하여금 사회주의와 보편주의로 가게 만든다. 그것들은 불교의 원리들과 보다 잘 어울린다. 마르크스주의의 다른 매력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불교도들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러나 민주적인 체제하에서 자본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국가들이 공산주의 이상을 추구하는 국가들보다 훨씬 자유롭다. 그래서 나는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에 봉사할 수 있는 인도적인 정부를 좋아한다. 어린이나 노인들, 그리고 장애자들까지도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절반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투표를 하게 된다면 나는 아마 환경보호론자들의 정당에 표를 던질 것이다. 최근 세계의 아주 긍정적인 발전 중 하나는 자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증대이다. 자연은 성스럽고 신성한 무엇은 아니다. 우리들이 지구를 돌보는 것은 그저 우리의 가정을 돌보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자연에서 왔으며 자연에 대적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환경은 종교나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말하는 이유이다. 그러한 것들은 장식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 없이도 생존할 수 있지만, 만약 계속 자연에 대해서 적대적이 된다면 생존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자연의 균형을 파괴한다면 우리 인간은 고통받게 될 것이다. 나아가 현재의 우리는 미래의 세대들도 생각해야만 한다. 깨끗한 환경은 다른 어떤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향유해야 할 권리이다. 따라서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세계가 우리가 그것을 물려받았을 때보다 더 건강하지 못하다 해도 최소한 그만큼은 건강하게 유지시켜야만 하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이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제안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우리는 개인적으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방을 나갈 때 불을 끄는 일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지구의 자식들이다. 이제까지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자식들의 행동을 잘 참아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녀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09~310)

한 승려로서 나의 관심은 전 인간 가족의 구성원들에게 걸쳐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에 대한 나의 관심과 배려는 지대하다.
이러한 고통은 무지에 의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과 내적인 평화와 만족감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내적인 평화와 만족감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기르고, 분노와 이기심 그리고 탐욕을 없앰으로써 함양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지나치리만치 소박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지구의 어느 귀퉁이에서 왔건 근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하며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공통적이고 기본적인 요구와 관심들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우리 인간은 모두 자유를 원하며 우리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원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311)

우리는 우리들이 공유하고 있는 지구와 서로에 대한 선의와 깨달음에 기초한 보편적인 책임의식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가 믿고 있는 불교가 사랑과 자비심을 길러주는 데 유익하다고 느껴왔지만 이러한 속성들은 종교를 믿건 믿지 않건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발전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또 모든 종교는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고 믿는다. 선을 장려하고 모든 인간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목적이라고 믿는다. 비록 방법은 달라 보일지 모르지만 목적은 다 같다고 본다.
우리들의 삶에서 과학기술의 영향이 증대하는 것과 더불어 종교와 그 밖의 정신적인 영역들은 우리 자신들의 인간성을 상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 양자는 각각 서로에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과학과 붓다의 가르침은 둘 다 모든 것들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말해주고 있다. (311)

우리도 더 평화롭고 더 인간적이며, 더 아름다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미래의 자유로운 티벳은 어려운 자를 돕고, 자연을 보호하며,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소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정신적인 것들과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융합시키는 티벳인들의 능력이 특별한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끝으로 나는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짧은 기도문 한 구절을 여러분들과 함께 음미해 보고 싶다.
세상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생명이 존재하는 한,
그때까지 나도 살아
이 세상의 온갖 고통을 물리치리.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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