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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가 일러준 낮은 삶의 철학

박물관
 



온통 흰빛 세상, 인간의 붓질은 단순하여 위엄에 찬 히말라야의 광경을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단지 그곳을 벗삼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일부만을 담아낼 수 있을 뿐이다. 라다크에서의 생활은 나의 삶과 그림을 조용히, 그리고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특히 히말라야의 대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라다키와의 1년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생의 원형질과도 같은 삶의 극지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2003년 3월부터 2004년 2월까지 1년간을 히말라야에서 보냈다. 내친김에 세상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과 한번 어울려 지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네팔로 갈까 티베트로 갈까 고심하다가, 어느 날 문득 헤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를 읽고 그 책의 배경이 된 북인도의 라다크Ladakh에 가기로 결정했다. 가난하지만 웃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웃음으로 하루를 접는 샹그리라Shangri-La(티베트어로 ‘마음 속의 해와 달’이란 의미), 라다크. 주저함 없이 아내와 나는 작은 보따리를 챙겨서 인도 델리로 향했다. 겨울철이라 육로로 히말라야를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델리 인디라 간디 공항에서 이륙하는 국내선 항공기인 제트에어웨이를 타야만 했다.
낮게 엎드리면 세상이 평온하게 다가온다.

인도를 이륙한 지 한 시간가량이 지나자 마치 어느 혹성의 분화구 같은 라다크 평원이 눈에 들어왔다. 라다크는 히말라야 능선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서 전체 넓이는 남한의 4분의 3, 인구는 13만 명, 수도 레Leh의 인구는 약 1만2000명 정도다. 예로부터 이웃 티베트와는 형제 국가로서 티베트 불교를 비롯해 많은 생활문화를 공유하는 독립 왕국이었다. 라다크를 일러 작은 티베트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평균 고도 해발 3700미터. 백두산보다 1000미터나 더 높은 고산지대이다 보니 이곳에 머무는 동안 고산증 때문에 고생을 했다.






고산증은 가슴이 답답하고 현기증과 함께 두통을 수반하는데, 감기인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고혈압 증세와 비슷하여 증상이 올 때면 미리 준비해 간 ‘다이아막스’라는 알약을 복용하거나 그도 안 되면 병원을 찾아야 했다. 반면 아내는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고산증은 산소 부족에서 오는 증상으로 평소 건강 체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멀쩡히 잘 견디는가 하면 기골이 장대한 장정이라 할지라도 고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결국 고산증은 현지에 가봐야 확인는 증상인 것이다.

고산증은 라다크에서 지내는 내내 나를 괴롭혔지만, 그 고통은 라다키들과 함께 지내며 발견한 절박한 삶의 철학과 그 속에서 느낀 감동에 비하면 아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곧 이 절박한 삶 속의 철학이 라다키의 삶 전반을 에워싸고 있는 자연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그 본질을 찾아 장스카르 Janskar 트레킹에 뛰어들었다. 지구의 오지 라다크, 그중에서도 장스카르 계곡은 오지 중의 오지다. 그 장스카르 계곡을 9박 10일 일정으로 가이드를 대동하여 아내와 함께 종주하였다. 파둠 Padum에서부터 해발 5090미터 높이의 싱고라 Singge La를 넘어 다르차 Darcha라는 곳까지 말과 도보로 이동하는 총 176킬로미터의 코스였다.



고개 정상 부근에 이르러서는 만년설을 밟고 넘어가기도 했는데, 놀라운 것은 만년설과 매서운 찬바람이 거센 고산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들꽃이 피어 있다는 사실이다. 에델바이스는 물론 그 외의 수많은 이름 모를 꽃들이 평생 갈증으로 살아온 화가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긴 했으나, 한편 기후와 토양이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저토록 아름다운 생명을 꽃피울 수 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나는 들꽃 옆으로 다가가 최대한 자세를 낮추어 몸을 길게 뉘었다.

놀랍게도 바람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일조량도 제법 많아 몸이 차츰 따뜻해지는 것이 아닌가. 연약하게 나부끼는 들꽃이 어떻게 이 높은 히말라야 고봉에서 아름답게 꽃을 피울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들꽃은 나에게 혼탁한 세태 속에서는 자신의 키를 낮추어 살아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소중한 행복의 씨앗이 발아될 것이라는 깨달음도 전해주었다.



라다크에 머무는 동안 우리의 과욕과 과소비적인 삶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아가 겸허와 검약 정신으로 불편과 가난을 슬기롭게 극복하며 살아가는 라다키의 모습을 거울삼아 삶을 새로이 출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라다크를 본보기로 배우고자 함은 결코 라다키의 불편하고 가난한 삶을 따라 살자는 뜻은 아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한 무한 질주, 게다가 게임의 규칙마저 실종되어 마치 시스템이 고장 난 자동차처럼 우리 사회가 미구에 맞게 될지도 모를 도덕적 파멸과 그로 인한 생의 좌절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다.

라다키에 비하면 우리의 삶은 행복에 이르는 여러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행복 지수가 그들보다 낮은 이유는 그러한 물질적 풍요를 뒷받침하는 맑은 도덕적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풍요를 악취가 코를 찌르는 시궁창 속의 풍요라고 말하는 것이 나의 지나친 비약일까? 어쩌면 사회 전반에 걸쳐 신선한 도덕적인 기풍이 진작되어야만 비로소 우리가 찾는 샹그리라가 먼 곳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린천 산기슭에는 히말라야가 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좀 더 순도가 높은 삶의 토양을 찾아 지난 1996년 가을 내린천이 흐르는 강원도 인제 땅으로 온 지 벌써 9년이 되어간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내린천 근처 산 정상에 집을 지었다. 장스카르 트레킹 때 라루 마을의 어느 농가 옥상 위에서 별들의 전쟁을 바라보며 아내와 함께 라다크식 집을 구상한 지 16개월 만에, 그리고 착공한 지 6개월 만에 완성을 본 것이다. 아파트며, 단독주택이며, 전원주택이며….

그동안 남이 지어놓은 집만 전전하며 살아왔는데, 내가 살기 위하여 직접 설계한 집에 살림을 풀어놓고 나니 가슴이 설렌다. 작업실도 마련했고, 나의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전시 공간도 따로 마련했다. 그리고 나그네를 들일 수 있는 객실도 꾸며놓았다. 이제는 여건이 닿는 대로 집 주위의 조경에도 힘쓸 생각이며, 또한 마당 한쪽에 하얀 초르텐(석탑) 세 기를 세울 생각이다. 라다크식 집과 더불어 이 초르텐은 머나먼 히말라야로부터 초연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을 불러들일 것이다.

이곳에서의 일과는 눈부신 기쁨을 발견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삶이란 곧 기쁨’이라는 등식을 절실하게 깨닫게 해준 것은 종교나 철학이 아니었으며, 선생은 물론 선배나 부모 역시 아니었다. 오로지 말 없는 자연이었다. 돌이켜보면 지난날 서울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었던 수많은 언행의 절반가량은 위선이었던 것 같다. 소중한 생을 다분히 위선적인 도회의 환경 속에서 불살랐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때의 순수한 열정에 비해 삶의 진도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도시 환경이란 삶의 경유지이지 결코 양질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종착점은 아니다. 경유지는 경유지다워야 하는 법, 버스를 갈아타야 할 경유지에서의 체류 시간은 가급적이면 짧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도회에서 부지런히 일을 한 후,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지체 말고 하늘이 가까운 전원으로 내려오라’고 조언한다. 자연성을 상실하고 있는 도회의 어떠한 훌륭한 삶도 자연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부질없는 한낱 목숨 연명책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깊은 밤이면 멧돼지 떼들이 힘차게 행군하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숲 속에서는 부엉이의 주술하는 소리, 노루 떼가 내닫는 소리도 들려올 것이다. 이제 앞으로 남은 나의 생애는 이 산정에서 히말라야 꿈이나 실컷 꾸면서 살아갈 것이다. 이 세상 어느 하늘 아래에도 하늘이 나의 육신에 불어넣어 준 태초의 맑은 성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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