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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티벳의 심장 구게 왕국으로의 여정 - 강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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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티벳의 하늘위로 서서히 태양이 그 얼굴을 드러내려 한다. 아직 자욱히 깔려있는 안개 속에서 자다 (札達 Zanda) 마을도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산중턱에서 바라본 자다의 정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어디까지 계속되는지 모를 기괴한 모양의 토산과 그 앞으로 흐르는 스투레지 강, 시시각각 변화하는 구름. 바로 이 일대가 서부 티벳 최후의 왕국인 구게왕국(古格Guge)이다. 자다의 또 다른 이름은 퇼링. 마을에 위치한 곰파(사원)의 이름이 바로 퇼링(Tholing Gompa)이다. 티벳에서는 중국식 지명보다도 그곳에 있는 곰파의 이름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티벳인들은 곰파 중심으로 말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구게를 찾아서

이곳에서는 언제라도 경전을 넣은 회전기도기를 손으로 돌리며 '옴마니 받메홈'하면서 관세음보살의 여섯 가지 진리의 말을 되뇌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에게 생활은 종교이자 종교가 곧 생활인 것이다. 이런 종교적인 삶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불교를 크게 장려한 시기가 바로 구게왕국때이다. 이전에 중앙 티벳의 토번왕조가 불교를 받아들여 강력한 왕권을 세우려 했지만 티벳의 토착종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던 호족들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왕조는 분열되고 불교의 샘도 말라버리게 된다. 이후 9∼10세기 무렵 토번왕조의 후손 팔코르스탄(Palkhorstan)은 서부로 가서 정착하고, 그의 셋째 아들 데춘곤(Detsun gon)이 샹슝지역과 구게지역을 다스리면서 불토왕국인 구게왕국으로 발전시켰다. 구게의 2대 코레왕 예세외(Yeshe)왕은 인도로 수행승을 보내는 등 불교를 본격적으로 장려했다. 이런 왕실의 지원에 힘입어 란첸 장포와 아티샤는 곰파와 탑을 구게왕국 전역에 설립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였고 그 열기가 중앙 티벳로 옮겨갔던 것이다. 또한 서부 티벳의 불교는 카담파를 낳고 티벳의 한 종파인 겔룩파로 발전해 지금의 달라이 라마 제도를 형성했다.

여명의 빛 속에서 구게왕국의 여명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다에 도착하기 2시간 전부터 계속된 그 기괴한 형상을 한 토산의 정체가 궁금했던 탓에 이른 새벽 가로등 하나 없는 마을을 빠져나와 약 300m 거리에 있는 곳에 올라가던 참이었다. 대부분 4000m가 넘는 고원지대에서 하는 산행은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찼다. 헐떡거리며 산중턱에 나타난 평평한 지대에 도착했을 때 불탑 하나를 발견했다. 불탑 안을 들여다보니 티벳인들이 진흙으로 찍어 만든 아이들 손바닥만한 여러가지 불상들이 부조형태로 수없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불탑앞쪽에는 사람 머리 만한 불상머리가 떡 하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원래 이 불상이 놓였을 것으로 보이는 흙으로 빚어진 건물은 그 옆쪽에 폐허가 된 채 몸을 숨기고 있다. 마치 라캉(법당)과 같이 내부 중앙엔 이슬람 사원의 벽면장식에서 볼 수 있는 아라베스크 양식의 좌대와 벽 양쪽 면 상단에 작은 불상이 놓였던 흔적이 있다. 서부 티벳의 유적지는 대부분 발굴하지 않은 상태라 운 좋은 날은 그 어느 책에도 기록돼 있지 않은 이런 광경을 횡재하기도 한다.

이 작은 라캉 위로 크고 작은 수백 개의 토굴들이 산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토굴 안은 출입구 쪽에 방이 하나 있고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 한 개 아니면 여러 개의 방이 있다. 이 뒷방 입구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도 있다. 바닥엔 부드러운 흙이 깔려있어 푹신한 반면 벽과 천장은 진흙을 발라 흙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도록 했다. 토굴이 많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 지역의 토산은 건조한 기후 탓에 잘 부서지고 파내기도 쉽다. 벽에는 선반처럼 파놓은 곳도 종종 보이고 토굴과 토굴 사이에 구멍을 내어 다른 토굴로 연결한 곳도 여러 개 눈에 뛴다. 예전에는 이 곳에서 사람들이 생활하였을 텐데…. 혹시나 굴에서 수행하는 라마(승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모습은 자다 마을과 무척이나 대조적이다.




출렁이는 하늘의 호수

마을에는 침엽수림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가끔 물이 끊기기도 하지만 서너 군데 수도펌프장이 있어 우물터 마냥 옹기종기 모여 앉아 물을 긷고 빨래를 한다. 현재 자다 마을은 상당히 중국화 했다. 처음 마을에 들어섰을 때, 기대했던 바와 달리 서부 티벳 마을에 도착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사각형의 개성 없는 가옥, 코카콜라를 파는 상점, 서구화한 복장, 그리고 이주해온 수많은 중국 한족. 그러나 곰파 주변은 타르쵸(깃발)가 나부끼고 있었다. 흔히 우리나라 성황당과 비교하는 타르쵸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걸어놓는다. 티벳 전역이 이것으로 둘러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을입구부터 집집마다 인간의 손길이 닿는 곳은 타르쵸가 걸려 있다. 새하얀 담벼락에 손가락으로 둥그렇게 문질러 무늬를 낸 가옥, 연료로 쓰고자 담벼락 위에 쭉 널어놓은 야크 동물의 똥, 주식인 보리를 기르며 버터차를 만드는 주민, 부모를 따라 매일 곰파를 한바퀴 돌며 마음을 가다듬는 아이. 이 모두가 지금 티벳의 모습이다.

퇼링곰파에 들어가자 문화혁명 때 파괴돼 재복구했다는 문구가 확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도 훌륭히 보존한 몇몇 불상과 인도에서 들어온 밀교의 진수를 보여주는 벽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곧바로 근처 싸파랑마을(Tsaparang)에 있는 구게왕국의 궁성으로 이동했다. 입술과 손, 발은 다 터서 입을 오므려 밥을 먹기도 곤란하지만 걷기 위해 먹었다. 언제 또 식사를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가도가도 끝은 없고 강한 햇살에 살갗은 따끔거린다.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낮이다. 갑자기 호수가 머리 위에 나타났다. 이제 헛것이 보이는가. 그런데 정말 하늘이 호수처럼 생겼다. 금방이라도 빠져버릴 듯한 형상으로 푸르게 출렁이고 있는 이 하늘을 1940년대 티벳을 순례했던 서양인 최초의 라마승 아나가리카 고빈다도 보았을 것이다.

5시간만에 스쿠레지 강가에 있는 싸파랑 마을에 도착했다. 자다 마을 보다 소규모였다. 몇 개의 굴뚝에서 연기가 흘러나온다. 갑자기 비가 내려 한 싸파랑 주민이 잠자리를 권했지만 외국인이 티벳인 집에서 자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고발이라도 당하면 그 주인네는 큰 곤욕을 치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고마움의 표시로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 든 목걸이를 선물하자 합장하며 절을 했다. 실제로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걸어두는 것은 불법이어서 라싸같은 대도시에만 가도 판첸 라마의 얼굴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지만 달라이 라마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중국정부의 규제가 강하지 않는 이런 시골오지는 집집마다 모셔진 달라이 라마를 만날 수가 있다. 곧 해가 질 시간이었지만 산으로 올라갔다. 구게왕국의 왕궁이 위풍당당하게 서있다. 이 유적지는 스투레지강을 끼고 180,000㎡에 이른다. 아래쪽에는 사람들이 거주했던 토굴들이 수백 개, 수천 개로 셀 수가 없을 정도이고, 중간에는 라캉이, 정상에는 궁전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2㎞에 이르는 돌로 된 수로터널이 정상에서 강 아래까지 이어져 있어 물을 공급했다. 그러나 너무 늦게 도착한 탓으로 밖에서 날이 저물도록 바라만 보았다.



옴마니받메홈의 진실

이윽고 다음날 흰색 라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인의 안내로 흰색, 붉은색 라캉을 옮겨다녔는데 다른 유적지보다 사진촬영을 까다롭게 금지하고 있었다. 라캉 벽에 그려진 불화는 서부티벳만의 독특한 모습이다. 인도 후기 불교인 밀교가 사방의 모든 벽에 훼손의 손길을 피해 기나긴 세월을 숨쉬고 있었다. 1948년 이곳에서 벽화 보존, 연구작업을 했던 라마 고빈다는 자신의 책 '구루의 땅'에서 벽화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벽화에 비해 불상은 심하게 파손돼 있다. 이곳 역시 불상이 놓인 좌대는 아라베스크 양식을 띄고 있다. 특히 인상깊은 점은 벽화와 몇 개안되는 불상이 금과 은 등 풍부한 색채로 칠해져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경전도 은이나 금으로 기록했는데 이는 티벳 지역에 금 매장량이 많았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라캉 안은 어둡지만 약간의 빛만으로도 쉽게 반사돼 자세히 볼 수 가 있었다. 이렇게 몇 개의 라캉과 토굴계단을 지나 궁전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 안은 휑하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관리인의 간식인 음료수가 여러 개 있을 뿐이었다.

성의 정상에서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씁쓸함을 감추며 다시 아래로, 아래로, 땅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17세기 구게왕국 최후의 날에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웠던 목 없는 미이라 전사들은 보지 못했지만 무기로 사용했던 돌무더기를 볼 수 있었다. 현재 왕국의 멸망이 흔쾌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구게왕국이 내란으로 혼란스러울 때 라다크 왕조의 셍게 남걀왕(Sengge Namgyal)이 침입해 함락시켰다는 외부침입설과 내란으로 왕이 폐위하고 1650년 라싸의 지배를 받게됐다는 내부분열설이 있다. 잃어버린 왕국의 모습을 뒤로하고 돌아가는 길목에는 기도문이 새겨진 마니석 만이 아쉬운 기도를 해주고 있었다.


싸파랑에서 다시 자다로 와 하루종일 뙤약볕에서 기다려 도시로 나가는 트럭 한 대를 잡을 수 있었다. 히치라고 해도 우리나라와 달리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히치하이크다. 이제 낯선 이에게 말을 걸고 가만히 다가와 또랑또랑하게 쳐다만 보던 그런 눈빛들과도 이별이다. 트럭 화물칸에 앉아 온몸에 힘을 주고 덜컹거림을 견디며 그들과 안녕을 고했다. 2시간 후 트럭 운전수를 불러 차를 멈췄다. 나무 한 그루 없고 물도 인적도 없는 온통 자다와 싸파랑을 둘러쌌던 그 토산만이 가득한 곳에서 말이다. 다와쫑(달의 성)이라는 지명은 따로 있지만 꼭 생긴 꼴이 달 표면 같았다. 건조해 쩍쩍 갈라져 도자기처럼 구워진 땅, 빛의 움직임으로 그 색과 모양이 변하는 특이한 모양의 흙산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에는 보라빛을 띄고 있었다. 그래서 자다 마을 주민들이 지명에 상관하지 않고 이런 지형을 다와쫑이라고 불렀나보다. 무작정 내려 말똥이 떨어진 곳을 쭉 따라 가보았지만 더 이상 가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지내고 트럭을 기다렸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그늘을 찾았지만 그늘은 시원하다못해 너무 추웠다. 그나마 남아있던 그늘도 해가 머리 꼭대기에 이르자 사라져버렸다. 점점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티벳.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이 사막화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잠깐이지만 별안간 비가 내렸다. 물을 받아보았지만 한 모금 남짓. 그런데 곧이어 해가 나타나자 갈라진 흙 위로 내린 빗방울이 그대로 굳어버려 달 표면으로 변해버렸다. 또다시 어제 봤던 해질 풍경이 나타날 때쯤 달려오는 트럭을 잡아타 휑하니 뚫린 화물칸에서 수 없는 덜컹거림과 추위, 흙먼지에 허기를 달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구게왕궁터에서 보았던 마니석이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기도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옴마니받메홈'의 진리를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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