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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연재에세이]카일라스 가는 길 25 - 연재를 마치며…

화이트타라

[박범신 연재에세이]카일라스 가는 길 25 - 연재를 마치며…
나, 이제 마음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황막한 티베트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길을 배경으로 한 필자. 티베트인들은 가혹한 삶의 조건 속에도 순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의 본질은 바로 나 자신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텅 비어 있기에

일어나지도 않고 어디에도 방해받지 않는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자연스럽고, 희석되지 않고,

마치 물에 불을 붓는 것처럼 본성에 맞게,

있는 그대로, 얽매임으로부터 풀려나 열려 있고, 긴장이 풀린 상태로 유지하라.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에서

어떻게 죽음을 해석하고 맞이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티베트 사자의 서’는 일반적으로 파드마삼바바의 저술로 알려져 있다. 인도로부터 티베트에 탄트리즘을 전파하고 많은 경전을 번역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티베트인들에게 부처로 칭송받는 사람이다.

티베트 고원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평균고도만 해도 해발 4500여m가 넘는 광대한 티베트 서부고원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텅 빈 대지로서 그 자체가 무엇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 ‘마음’의 한 표상이라 할만하다. 그것은 탄트리즘의 관점으로 보면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풀려나 열려 있고, 긴장이 풀린 상태로 유지’된다.

티베트의 성산 카일라스.

그러나 삶은 매우 한정적이다. 인간의 최저층엔 붓다가 그랬듯이 마침내 깨달음을 열어 스스로 신이 되어 불멸을 이루는 ‘위대한 사유’가 있으며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말(言語)이 있다. 짐승의 조건으로부터 신의 조건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모든 것 중에 인간만큼 어둠과 빛의 스펙트럼이 넓은 것이 없다.

티베트는 춥고 건조하고 척박하다. 더구나 해발 5000m가 되면 생존의 조건에서 최악이 된다. 티베트인들의 남다른 세계관은 그런 의미에서 티베트 고원의 고통스런 환경이 빚어낸 것이라고 할만하다. 이승에서 행복해지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차라리 상상력과 관념체계로 영생을 얻는 고유의 사유 틀을 만들어낸 샘이다.

그들은 한 송이 들꽃에서 우주를 본다. 현상은 영원한 게 아무것도 없지만 본질은 영원하고, 한 생으로서의 이승은 유한하지만 죽음을 거쳐 다시 태어남으로 본원적으로 삶은 영원히 계속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 언젠가 ‘어머니’였거나 아버지, 할아버지였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우리와 같은 혈족주의의 조상숭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두 개의 세계가 있다. 붓다가 ‘화택’(火宅)이라고 부른, 숨가쁘고 고통스런 생존의 세계사적 조건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일이 그 첫째이고, 그런 조건들에 의해 결코 방해받지 않는 불멸의 텅 빈 본성이 그 둘째이다. 티베트는 문명의 갑옷에 갇혀 사는 우리에게 그 두 가지 세계 사이의 거리를 극명히 보여준다. 삶의 충만감은 말할 것도 없이 물질세계의 만족으로 다 얻어낼 수 없다. 남보다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꼭 남보다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소유에 대한 경쟁의 정보로 가득 찬 문명사회에 살다 보면 파드마삼바바가 말한바, ‘텅 빈 마음’이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욕망을 쫓아갈 수밖에 없다.

티베트 아이들과 함께 한 필자(왼쪽)와 중국 국기가 펄럭이는 라사의 포탈라궁과 광장.

티베트 고원에서 내가 본건 티베트가 아니다. 나는 아무것으로도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운 내 본성을 우선 본다. 내 안에 깃든 ‘마음’을 천리만리 떨어진 황막한 고원에서 더욱 가깝고 명백히 볼 수 있다는 것은 놀랍고 감동적인 경험이다.

“네가 찾는 것은…이곳에 없다!”

티베트는 내게 이렇게 속삭여준다. 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보다 먼저 티베트가 알고 있다. 그것은 요컨대 본래의 ‘마음’이고, 평화이고, 중심이고, 또한 고요한 영적 세계이다. 나는 최근 10여 년간 줄곧 그것을 찾아 세상을 흘러다녔던 것이다.

티베트 여행은 한마디로 ‘내 안으로 걷기’이다. 단지 이상한 문화를 가진 오지여행으로 생각하고 티베트에 간 사람이라고 해도 한 주일, 한 달, 거친 티베트 고원의 길에 흐르다 보면 결국엔 문명과 과도한 정보 때문에 잃어버린 ‘내 안으로의 여행’이 시작되는 걸 느낄 것이라고 본다. 티베트는 그런 곳이다. 자신이 본질적으로 그리운 것과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가진 것 사이의 거리를 확연히 느끼는 것은 언짢은 일이다. 그렇지만, 티베트 고원과 고원의 순정적인 사람들은 가차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 행복해지는 길로 가고 있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편적으로 대답은 ‘노’이다. 그래서 후회와 상처들에게 둘러싸인 나에 대한 연민이 시작되고, 그 연민을 통해 최종적으로 새로운 인생의 실마리를 얻는다. 그것이 티베트 고원이 내게 준 감동이다.

라사의 골목을 거니는 젊은 스님들.

티베트의 황량한 길들이 지금 떠오른다. 가난하지만 아직 삶에 대한 순정을 다 버리지 않은 수많은 티베트 사람들이 떠오르고, 그들을 통해 불멸의 영성으로 이어지는 길도 떠오른다. 자연과 인간과 신이 지금도 행복하게 교접하고 있으니 어찌 그곳을 누추하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중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따른 정치적 억압과 쾌락적 자본의 술책에 의해 이미 한쪽으로부터 급격히 티베트의 영성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적 낙관론만으로 티베트를 말하는 것은 죄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에 갇혀버린 우리의 관점에서, 티베트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감회는 우리들 삶의 운영방식이 잘못돼 있다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우리들 내면에서 더욱더 멀어지는 길을 가고 있다는 자탄과 자기 비판이 티베트에서 받을 수 있는 제일의 선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티베트의 문제는 차선의 일이다. 나의 실존보다 더 앞서는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살고 싶은가?’

티베트는 계속 내게 묻고 충고한다. ‘진정으로 마음의 충만을 원한다면 쓸쓸한 유랑을 끝내고 네 마음의 집으로 돌아가서 해답을 구하라. 이곳엔 바람 찬 황막한 대지와 그 대지가 만들어낸 가혹한 삶의 한정적 조건으로부터 해방되는 몇몇 불멸의 예시와 표상이 존재할 뿐이다. 별을 보고 바람을 느끼고 우렁각시 같은 마음의 언어에 길을 기울일 수만 있다면, 구태여 이곳에 와서 눈물겨워할 필요는 없다. 어디에 있든 마음의 참된 말을 듣기만 한다면 그곳이 바로 너의 집이다.’

 

박범신 소설가

출처:스포츠월드   http://www.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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