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소신·용기 부족 진리 대면 기회 외면 설법을 듣고자 워싱턴 광장을 꽉 메운 미국인들, 배우 리처드기어의 열렬한 신심. 달라이 라마로 인해 생겨나는 신선한 풍경들이다. 몇 해전, 한 TV에서 그의 일상을 담은 특집을 본 적이 있다. 그 한 장면. 이른 새벽 참선 시간, 홀로 앉은 그는 만다라를 쌓으면서 관(觀)을 챙겨가고 있었다. 일종의 행선(行禪)이다. 전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평소대로 공부를 짓는 그의 모습과 분위기는, 결코 범상치 않는 수행력으로 꽉 차 있었다. 그는 언론과 소문이 띄운, 그래서 실제보다 과장되기 일쑤인 유명인들과는 분명 다른 격(格)을 지니고 있었다. 간접 대면이었지만, 그에게서 발산되는 탄탄한 수행의 공덕은 일순간 매우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다른 한 장면. 달라이 라마를 친견할 수 있는 날, 그의 거처 문밖에는 새벽부터 몰려온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서구인들이 많았는데, 잠시 후 문 밖에 나와 선 달라이 라마 앞으로 한 사람씩 나아가 잠시 손 한번 잡고 합장하고는 곧 뒷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그렇게 잠깐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고 막 그 행렬에서 나온 한 서구 여성에게 카메라맨이 다가갔다.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감동에 젖어 있는 그녀에게 왜 우느냐고 묻자, 그녀의 대답. “나도 모르겠어요. 정면에서 그 분이 웃는 모습을 대하는 순간, 저절로 눈물이 터져 나왔어요. 참 이상한 일이네요.” 그 인터뷰를 듣는 순간, ‘아, 달라이 라마는 자비의 념(念)이 매우 강하게 계발되어 있는 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이어 떠오르는 것은, 부처님 당시 살인마로서 부처님 제자가 되어 성불한 앙굴리말라의 일화였다. 앙굴리말라, 그는 999명을 죽인 희대의 살인마였다. 삿된 가르침에 현혹되어 천명을 죽일 작정을 하고, 죽인 숫자를 기억하기 위해 죽은 자의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녔기에 앙굴리말라(손가락 목걸이)로 불리었던 지명 수배자였다. 국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체포 작전에 나서자, 걱정이 된 앙굴리말라의 어머니는 아들이 숨어 있는 숲으로 길을 나선다. 마지막 천 번째 희생자는 바로 어머니가 되려는 기구한 정황이다. 인연이 익었음을 살피신 부처님이 제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발 앞서 숲으로 들어가신다. 부처님을 발견한 앙굴리말라는 칼을 휘두르며 부처님 뒤를 좇지만, 어쩐 일인지 천천히 걷는 부처님을 따라 잡을 수가 없다. “사문아, 거기 서라!” “여래는 이미 서 있건만, 그대가 서지를 못하는구나.” “그게 무슨 말이냐?” “여래는 생명 죽이기를 그치고 우주적 자비와 지혜로 온전하게 섰노라. 그러나 그대는 살인하며 자비심을 버리고 자신을 돌보지 못하니, 서있지를 못하는구나.” 그 순간 앙굴리말라는 진땀을 쏟으며 털썩 주저앉는다. 조금 전까지 불타오르던 강한 살기는 부처님 몸에서 발하는 자비의 힘 앞에 흔적도 없이 사그라져 버린다. 마치 빛 앞에서 사라지는 어둠처럼. 그렇게 제 정신이 든 그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 제자가 되었고, 단기간에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다. 부처님은 자비의 념(念)을 계발하는 수행을 설하신다. 자애관(慈愛觀)이 그것인데, 해탈을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할 매우 중요한 참선법이다. 자비의 념은 그 감화력이 실로 크다. 증오·시기·질투·원한·공격의 모든 부정·배타의 기운은 자비 념의 긍정·포용 안에서라야 비로소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자비기운 앞에서 평안을 느끼며 긴장과 왜곡과 억지를 푼다. 달라이라마의 돋보이는 감화력 원천에는 분명 오랜 세월 지혜력과 균형을 이루며 계발시켜 온 자비의 힘이 있는 것 같다. 달라이 라마의 방한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달라이라마는 미국 스파이’ 라고 망발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이 고귀한 수행인의 감화력과 교감할 수 있는 진리 대면의 기회(法緣)를 외면해 버린 것이다. 보편적 가치에 대한 국가적 안목과 소신과 용기가 그토록 빈깡통이더란 말인가. 그렇다면 한민족의 비전은 과연 무엇인지 정부의 견해를 듣고 싶다. ■울산대 철학과 교수 (twpark@uou.ulsan.ac.kr) <현대불교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