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무료한 오후를 보내느라 골라 온 비디오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가슴 뭉클 밀려오는 감동과 뒤따르는 카타르시스에 젖어있던 중, 문득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과연 영화 바깥의 세상일까? 이런 류의 나치나 제국주의 만행의 역사를 다룬 영화들을 보면서 흔히 놓치기 쉬운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일종의 환상이다. 비극적 클라이막스가 끝나고 카타르시스에 의해 정신이 정화되는 단계에 이르면 어느덧, 그런 인종차별주의, 이민족 학살의 잔혹한 현실은 역사 저편에 있는 과거의 것에 불과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 한 개체가 아니라 어떤 ‘민족’, 어떤 ‘인종’이라는 범주에 귀속되는 순간, 그는 모종의 기준에 의해 층층이 서열화된 질서체계 속에 갇혀버린다. 백인 우월주의에 관해서야 익히 주지하는 바일 터이지만, 중국인들이 아시아인에 대해 가지는 화인 우월주의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진저리를 떨 것이다. 이 곳 타이완의 경우 이런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하다. 국제사회의 인가를 얻은 정식 국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국의 일개 성으로 복속되기는 죽기보다 싫은지라, 그들의 정체성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평소에는 자신들이 ‘중국인’이 아니라 ‘타이완인’임을 애써 강조하다가도, 타이완인 감독에 홍콩, 말레이시아(화교), 타이완, 대륙인이 함께 출현한 영화 ‘와호장룡’이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던 즈음에는 온 매스컴이 ‘우리 화인의 영광’이라며 들썩거렸다. 그 뿐인가. 경제적 생활수준이 낮은 대륙인들을 경멸해 마지않는 이들에게도 ‘한족 우월주의’는 여지없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타이완인을 원주민과 본성인, 외성인으로 구별하는데, 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층은 1949년 당시 장개석을 따라 이 땅에 발들인지 불과 50여 년밖에 되지 않는 외성인들이다. 대만이든 중국이든 그곳에 가 보았거나 그들과 접촉해 본 사람이라면, 호의에서든 악의에서든 “너희도 이전엔 중국인이었다”거나 “우린 같은 동방인이다”라는 그들의 말에 아연실색해본 기억이 있을지 모른다. 백인 우월주의에, 다시 중화 중심주의라는 이중의 원환이 교차하는 자리에 처해 있는 한국인.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문화적 특색과 존엄을 발굴하고 발전시키는 데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유행처럼 밀려드는 글로벌리즘. 그러나 진정한 국제주의란 각 민족의 평등한 관계 위에서 상호간의 사랑과 신뢰 속에서만 비로소 건립될 수 있다는 18세기 중엽의 헤르더의 말은, 전지구화의 물결에 참가하고자 하는 한 약소국의 일원의 귀에는 여전히 요원하게만 들린다. ( 백지운ㆍ중문학ㆍ대만 동해대학 방문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