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문화일보 구체적인 인연은 없었지만 너무나 만나고 싶었던 작가가 있었다. 왜 만나고 싶었을까. 따뜻하고 정겨운 글을 쓰는 그 사람을 만나면 함께 따뜻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어렵게 전화번호를 알아 전화를 걸었었다. 그렇지만 그 만남은 그 작가의 글맛처럼 따뜻하지는 못했다. 너무나 정중해서 냉정한 것보다 차가운 그런 태도. 의기소침해진 나는 전화를 건지 1분도 안돼 무슨 큰 죄를 지은 죄인인 양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 이후로 나는 새로운 인간관계에 적극적이어 본 적이 없다. 그 때 그 작가와의 부자연스러운 인연이 내게 분명한 것을 가르친 셈이다. 자연스러운 인연의 흐름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찾지 않는 법이라고. 가끔씩 생각한다. 흐르는대로 흐르는 인연을 믿는 나는 어쩌면 생에 대해 비겁한 게 아닐까하고. 무엇보다도 나는 포기가 빠르다. 보고싶지만 볼 수 없게 되면 인연이 아니라고 믿어 찾지 않는 것이다. 이 얼마나 소극적이고 무력한 태도인가. 그렇게 인간관계에 한없이 소극적인 내가 정말 안타깝고 속상했던 것은 달라이라마 연내(年內) 방한 불허(不許)라는 한 줄의 기사였다. 달라이라마가 오지 않는다. 아니 오지 못한다. 중국 눈치보기 급급한 외교 달라이라마가 온다해도 지척에서 만날 수 있는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왜 그가 오지 못한다는 소식에 이렇게 맥이 빠지는가. 그건 단순히 한 개인의 인연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체념으로 마음이 추슬러지는 어긋난 만남의 기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마음들이, 순수한 마음들이 달라이라마를 보고자 했는가. 불교계는 물론 김수환추기경이, 강원룡목사가 종파를 떠나 종교를 떠나 달라이라마를 초대했다. 영혼이 모든 것의 근본자리임을 믿는 이의 향기는 어떤 것일까. 순수한 마음들의 순수한 만남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벽이 된 외교통상부. 맥이 빠지는 건 단순히 달라이라마를 보지 못하게 된 것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을 움직이고 조직을 움직이는 게 간절한 마음이 아니라 천박한 힘이라는 사실을 보아버렸기 때문이다. 외교부의 판단이 이해는 된다. 이 문제에 대해 날이 서있는 중국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것 없다는 그 판단. 그러나 그 판단이 과연 옳은 판단이었는가. 순수한 마음들의 분노가 위로 폭발하고 마침내 외교부의 권위가 밑으로 곤두박질치게 된 그 판단이.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달라이라마는 미국도 가고, 일본도 가고 심지어 태국도 가는데, 그렇게 가도 그 나라들이 중국과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왜 유독 우리는 중국의 위협 앞에 굴복하는가. 세계 50여개국을 방문한 달라이라마가 중국의 위협 때문에 한반도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것이 현실이라면 그 현실은 얼마나 소름끼치는 비극인가. 더구나 초대한 사람이나 초대받은 손님이나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는데. 만일 중국이 달라이라마의 한국방문에 대해 유달리 날이 서있다면 그 강짜는 다른 차원에서 검토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중국이 명나라, 청나라 때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중국이 한반도를 자신의 정치적 영향권 아래 편입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그렇다면 더더욱 문화적 주권을 지켜내야 하는 게 아닐까. 순수한 만남조차 힘으로 막으려 하는 그 천박한 힘의 논리에 굴복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노벨평화상의 의미 되새겨야 이번 달라이라마 방한 불허 조치는 외교부가 말을 바꾼 것이었다. 방한 허용방침을 정한 뒤 장관까지 나서 중국의 양해를 요청한 후에 허용의사를 공표했다가 중국이 안된다고 하니까 불허방침으로 돌아선 것이다. 한 나라의 외교부가 이 무슨 모습인가. 나는 무섭다. 우리가 압력이 통하는 나라가 될까봐, 주체성보다 중요한 게 압력인 줏대없는 나라로 찍힐까봐. 어쩌면 이미 찍혔는지도 모르겠다.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가 이 땅에 들어오는데도 정부가 맞교환이라는 이상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제국주의자들의 문화재약탈을 합법적으로 묵인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우리의 외교능력이라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한 인간이 사는데도 원칙이 필요하다. 사는 게 힘들어서 흔들리고 흔들리더라도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만나고자 하는 달라이라마를 중심이 없는 정부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어야 할까. 정신을 차려보자. 우리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나라 아닌가. 평화상으로 국제적인 위상이 한껏 높아졌는데도 평화상 수상자 달라이라마를 초대할 수 없다면 평화상은 우리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이주향 수원대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