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경향신문 달라이 라마의 방한 문제를 놓고 정부와 불교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과의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인데 반해, 불교계에서는 문화주권국가로서의 위상을 찾고 국민의 종교·인권·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해 달라이 라마의 방한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로 정부 당국자들이 재고하기를 촉구한다. 첫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단순한종교 지도자가 아님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지금 나라를 잃은 망명자로서,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독립운동가이며 티베트인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고있는 정치 지도자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온갖탄압과 역경 속에서도 일체의 무력적 행동을 지양하고 비폭력적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어왔다. 종교 지도자답게 가는 곳마다 인류의 평화를 호소해왔고, 동체대비(同體大悲)를 바탕으로 한 인류의 공생(共生)을 주장해왔다. 그와 같은 평화운동의 공로로 1989년에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세계인들이 그런 그의 평화운동을 지지해 준 셈이다. 둘째, 달라이 라마는 독립운동가이면서 정치 지도자임에 틀림없지만 우리 불교계에서 그를 초청하고자 하는 것은 티베트의 독립을 돕자는 것도 아니요, 티베트 내부의 정치 상황을 듣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종교 지도자로서의 설법’을 듣고자 하는 것뿐이다. 티베트 불교는 어떤 교리나 이론보다도 ‘살아있는 신앙’의 불교로 알려져 있다. 종교의 목적은 교리나 이론에 있지 않다. 교리나 이론은 강을 건너는 뗏목이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이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이다. 대승 불교권의 나라에서는 교리적인 연구나 담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티베트 불교에는 신앙과 실천이 살아 있다고 한다. 우리들은 그런 생명력 있는 신앙과 실천의 설법을 그로부터 듣고자 하는 것뿐이다. 셋째, “오는 12~14일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불허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당국자들의 말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의 방한 초청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번을 포함해서 네 번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말에는 더욱 동의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헌법으로 명문화하고 있는 독립 주권국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 운운하는 것은 국민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처사이다. 우리와 인접해 있는 일본이나 태국은 물론 미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은 중국 정부의 반대 표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초청해서 ‘종교지도자로서의 설법’을 들어왔다. 일본의 경우 그를 10여차례나 초청해서 종교적 행사를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했을 때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동반자적인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로 다짐한 일이 있었다. 동반자적 관계는 어느 한쪽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속이며 상하 관계다. 우리는 고려나 조선왕조시대의 역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했는가. 갖가지 특산물을 가지고 가서 세자의 책봉을 보고해야했고, 왕위에 즉위하더라도 중국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현재 국제 사회에서, 특히 한반도 정세에서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할 때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보다 신중하고 원만하게 처리해야 하는 정부 당국자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 또 바람직한 자세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번 달라이 라마의 방한 초청은 더이상 중국의 눈치를 살필 사안이 아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법으로 정해 놓고 있는 주권 국가로서의 자존이 걸려 있는 문제다. 다른 나라의 경우와 같이 “하나의 중국 지지”라는 외교적 입장과 종교 지도자의 사적(私的) 방문은 엄격하게 분리해서 처리해야 한다. 〈이도업 법계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