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의 세상보기] 외교의 윤리, 종교의 윤리 2000.10.18
관리자
출처 : 조선일보
널리 잘 알려져 있거니와, 정치 외교가 겨냥하는 바는, 상대적 의미에서의 정의일 뿐 절대적 의미에서의 정의가 아니다. 정치 외교가 자파 및 자국 이익을 지키려 할 경우 약간 비겁해져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07년 고종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을 밀파했다. 이준은 일본의 조선 침략 행위를 만방에 호소하고자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분사했다. 우리로서는 분하고 억울할 일이지만, 일본으로서는 약간 비겁한 수를 쓰더라도 그의 호소를 저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야당 지도자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에서 한국 독재 정부의 폭거를 고발하고자 했지만 정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분루를 뿌려야 했다. 민주화 운동 당사자들에게는 분하고 억울한 일이었지만 당시 정부로서는 약간 비겁한 수를 쓰더라도 그의 호소를 저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 끝까지 수수방관했다면 지금의 김대중이라는 존재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상기해야 한다.
중국 정부는 지금, 티베트 불교의 종사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의 이준 열사쯤으로 여기는 모양인가? 우리 정부가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두고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달라이 라마의 방한이 만에 하나 독립을 외치는 티베트인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 외교의 윤리와 종교의 윤리는 같지 않다.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는 캔트웰 스미드의 말을 빌어, 종교의 마당을 밟고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꿈이 서린 곳’을 밟는 일이기 때문에 지극히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쓰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인이지, 밀사 이준이나 야당 지도자 김대중 같은 정치인이 아니다. 종교가 정치 외교를 돕는 것은 부도덕한 짓이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그런 종교의 지도자가 아니다. 그가 92년 ‘리우 환경회의’의 발제자로 나섰던 일을 우리는 지금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 외교가 종교를 돕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박해받던 정치 지도자를 정점에다 두고 있는 우리 정부는 박해받는 종교 지도자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어야 한다.
( 소설가·번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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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06 오전 10:37: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