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중앙일보 전세계의 불교도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중국 공산당 정권으로부터 탄압받는 티베트인들의 정신적인 지도자 이상의 존재다. 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단순히 티베트 불교의 법왕(法王)이 아니라 높고 깊은 지혜와 자비와 통찰력을 가진 정신세계의 사도(使徒)다. 혼탁한 시대를 사는 한국의 불교도들이 관음(觀音)의 화신으로 추앙하는 달라이 라마로부터 직접 축복받기를 갈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달라이 라마의 한국 방문을 둘러싼 정부와 불교간의 갈등은 이런 종교적 열정에 대한 정부의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부는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허용하면 중국의 보복조치로 한국이 큰 경제적 손실을 본다고 주장한다. 아닌 게 아니라 달라이 라마의 한국 방문에 대한 중국의 반대는 강경하고, 두나라의 경제적인 이해관계는 밀접하다. 한주일에 1백50편의 항공기가 두나라를 왕복하고, 한국을 찾는 중국의관광객은 연간 1백50만명이다. 지난해의 경우 한국은 중국에 1백37억달러를 수출하고 89억달러를 수입해 48억달러의 흑자를 냈다. 중국에 대한 투자총액은 5천5백건에 69억달러다. 중국은 이렇게 우리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품시장이요 투자대상국가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당분간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 국가이익에 맞는다는 정부의 주장에는 두가지 허점이 있다. 하나는 국제관계에서 추구하는 국가이익에는 경제적인 실리 말고도 정신적.문화적.도덕적 가치와 주권국가의 최소한의 자존심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간에는 항상 이해의 충돌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을 해결하라고 외교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 문제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뒤로 미루는 것이다. 정부가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게 한가지 있다. 그것은 달라이 라마 문제로 한.중관계가 악화하면 중국이 남북관계의 훼방꾼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다. 그것도 상당부분 쓸데없는 걱정이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한반도에서 주변 4강의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개편되고 있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기득권에 안주할 처지가 아니다. 지금 예상되는 북.미관계와 북.일관계의 정상화는 중국에도 심각한 도전이다. 그래서 중국도 한.중관계의 긴장을 바라지 않는다. 지난 4월 정부가 달라이 라마의 한국 방문을 허용하지 않은 것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베를린선언과 무관하지 않다. 베를린선언에 북한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을 기대하는 정부로서는 중국의 \'심기\' 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남북관계가 궤도에 오르고 또 한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판단되는 지금도 정부의 입장에 변화가 없다는 게 문제다. 정부는 11월의 브루나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와 싱가포르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플러스 3\' 정상회의, 그리고 내년 5월 상하이(上海) APEC 회의에서 두나라 정상이 만날 때까지는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을 방침이다. 사대주의 외교라는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입장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정부가 불교도들에게 내년 하반기에는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허용한다는 확실한 언질을 주는 것뿐이다. 두나라 외무장관들은 지난 6개월 동안 세차례나 격론에 가까운 논의를 해, 중국도 조건에 따라서는 달라이 라마의 방한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불교도들은 달라이 라마가 가르치는 \'억제하는 마음\' 으로 내년 하반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외교에서 명분과 실리는 항상 충돌한다. 그래서 탁월한 외교팀의 균형외교가 필요하다. 관념적인 국가이익에 사회구성원들의 구체적인 요구를 희생시키는 것은 좋은 외교가 아니다. 외교는 정치의 연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