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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속에서 ‘평화로움’ 찾던 히피의사 티베트 승려 되어 한국을 방문하다

화이트타라
마약 속에서 ‘평화로움’ 찾던 히피의사
티베트 승려 되어 한국을 방문하다


『티베트승려가 된 히피의사』의 저자 툽텐 갸초 스님
19일 일정으로 방한…미황사, 운문사 등 법문 예정
기사제공 :  

1960년대 서구의 젊은이들은 베트남전에 반대하며, 평화피켓을 들고 동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들의 결집지는 샌프란시스코였다. 이곳에서 반전시위를 벌인 히피들은 또다시 바다를 건너 인도 혹은 동양 그 어딘가 있을 그 무언가를 찾아 떠났다. 머리에는 꽃을 꽂고, 귀로는 비틀즈를 들으며, 눈은 LSD(마약의 일종)에 취한 몽환적인 빛을 띤 채.

그들은 동양의 사상, 그 중에서도 불교에 열광했다. 현재 서구의 저명한 50~60대 불교학자 가운데는 이 대열에 참가했던 이들이 많다. 또 일군의 젊은이들은 티베트사원을 찾아가 승려가 되기도 했다.

히피 의사에서 티베트 승려가 된 갸초 스님
당시 동쪽을 향해 떠난 ‘꽃을 든 젊은이’ 중에는 툽텐 갸초 스님도 포함돼 있었다. 히피였던 젊은 서양인 의사가 티베트 승려가 된, 마치 영화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10월 12일 한국을 찾았다. 스님은 올해 3월 출간된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양의 젊은이들은 왜 동쪽을 향해 떠났으며, 또한 그들은 왜 그토록 불교에 열광했던 것일까. 스님은 히피였던 당시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제가 젊었을 때 서양에서는 기성의 것은 모두 반대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졌습니다. 호주도 서양문화의 일부에 속해있는 지라 그런 운동이 호주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기성에 대한 반대 속에는 부모님까지 포함돼 있었고, 기독교와 유대교도 포함됐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가식을 발견했고,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정치인들이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은 아주 자유로웠고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기 때문에 세계를 여행할 여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사회에 대한 답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갸초 스님이 멜버른대 의대 5학년에 재학 중일 때 친구 게리가 비틀즈의 음반 한 장과 환각제 LSD를 가지고 유럽에서 돌아왔다. 친구들과 조용한 바닷가 오두막집에서 함께 맛본 음악과 마약의 결합은 그들의 세계를 영원히 바꾸어 버렸다. “그것은 상상 이상으로 멋지고 기막혔답니다.”

그때부터 그의 방랑벽은 시작되었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에서 ‘열대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런던이나 시드니에 정착하는 대신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떠났다. 이후 파키스탄으로, 인도로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인더스강을 장장 1000킬로미터에 걸쳐 작은 범선을 타고 여행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자유로웠다. ‘자유와 사랑’을 기치로 내건 이들은 성적으로도 자유로웠고, 마리화나를 피우고, 해시시와 LSD를 번갈아가며 복용했다. LSD를 복용하면서 ‘순간의 평화로움’을 맛본 갸초 스님은 친구에게 물었다.

“마이클, 눈을 감으면 나타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들은 마약이 만들어 내는 걸까, 두뇌가 만들어 내는 걸까? 아니면 그건 마약의 힘으로 들어가게 되는 또다른 세상인가?”
마이클은 말했다. “마약이 만들어내는건 아니지.”
스님은 또다시 물었다. “그건 다른 세상일까?”
“아니, 그보다는 또다른 실재라고 함직하지.”
“그 실재가 어디에 있단 말이지?”
“바로 마음에 있지.”
“마음이 어디에 있는데? 두뇌 속?”
“글쎄. 그 실재는 마음이 만든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자체가 마음일 수도 있어. 다만 그 물음에 대해 해답을 얻는 길이 명상인 것만은 확신해.”

하지만 갸초 스님은 ‘명상’이라는 말만 들어도 스승과 그를 열광적으로 따르는 제자의 그림이 떠올랐고, 그것이 내키지 않았다. 과학에 바탕을 둔 그의 세계관이 아직 미완성의 지식 영역이긴 하나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고 믿었다. 앞으로 자신이 찾아낼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과학적인 세계관에 맞아야 했다. 특히 마음에 관한 것이라면 더 그래야 했다.

하지만 마음의 문제는 항상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시드니의 라렌델 정신병원에서 진료를 할 때도,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만난 매력적인 미국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면서도, 인더스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도, 친구의 여자와 가정을 꾸리면서도.

그는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마약을 복용한 뒤 생기는 정신의 변화는 생리적인 것인가, 심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네 번째의 가능성, ‘영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영혼의 문제와 드디어 조우를 한 것은 네팔 카트만두에서 티베트 승려인 라마 조파와 라마 예세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히피들이 쓰는 언어를 갖고 히피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야기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라마 예세는 히피 청년들을 꽃아이(자유와 사랑을 으뜸으로 삼는 히피들이 평화와 사랑의 상징으로 꽃을 달며 스스로를 일컫던 말)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불교를 평이한 언어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라마 예세를 통해 만나게 된 불교는 항상 그를 따라다니던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었다.

“불교는 내 삶을 설명했고, 내 삶은 불교가 진실임을 증명했다. 그것은 일종의 집중적인 심리 분석이었으니, 붓다는 정신분석자요, 붓다의 가르침은 해석의 얼개요, 명상은 치료요법이었다. 편지를 부칠 길을 없었지만, 불교에 대해 의문이 생기면 라마 예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편지들은 끝맺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의문을 구체화하여 라마 예세에게 물을 것을 상상하는 순간 곧바로 답이 뚜렷해졌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겠지만, 그러면서 늘 라마 예세가 나와 함께 한다고 느꼈다.”

라마 예세를 만난 후, 갸초 스님은 불상과 라마들에게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붓다의 지혜가 나 자신의 지식을 뛰어넘는 것임을 받아들였다. 스님은 그 때를 “찬탄으로 가득한 믿음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후 1년 뒤 그는 라마 예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티베트 승가의 일원이 되었다. 라마 예세가 붙여준 툽텐 갸초라는 법명은 ‘’라는 의미이다. 그와 비슷한 출가를 한 많은 히피 친구들은 다시 환속을 하기도 했지만 갸초 스님은 30년째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다.

“나에게는 좋은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진정한 스승을 통해 불교가 진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스승님들에게 법을 배울 때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을 때도 있었죠. 특히 제가 가진 과학적 지식과 어긋날 때는요. 그때마다 저는 일어서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면 스승님은 그에 대해 더 정확하게 제게 답을 주었습니다. 불교가 진리가 아니라면 절대로 서구에서 그렇게 널리 퍼지지 못했을 껍니다.”

갸초 스님은 1975년 카트만두 코판 사원에서 사미계를 받고 티베트 승려가 된 뒤로 네팔에서 무료 의료원을 운영했다. 이후 호주, 프랑스, 미국, 대만, 홍콩, 일본, 몽골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불교회관을 건립하고 불교와 명상을 가르쳐왔다. 몽골 울라바토르에 불교회관을 건립한 것은 스승 라마 예세의 뜻을 받든 것이었다. 최근에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호주 캥거루섬에서 홀로 안거하며 3년 결사를 마치기도 했다.

스님은 서양에 대승불교의 전통을 따르는 사원제도를 확립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있다.

“라마 예세는 자신이 힘을 다해 돕겠지만 우리의 앞날은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서양에서의 대승불교의 미래는 사원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확립하는데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라마들이 우리에게 건네준 횃불을 전하는데 성공한다면 세상에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한다면 희망의 등불은 더 빨리 사라지겠죠. 그래서 저는 내 남은 삶을 훌륭한 승려가 되는 데에, 그리하여 두 라마가 서양에 대승불교 전통을 따르는 사원 제도를 확립하는 것을 돕는데 바쳤습니다.”

스님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9년전 한국을 방문한 이후 또다시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한국은 내 가족들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라고 스님은 설명했다.

“삼촌이 한국전쟁 때 UN 호주군으로 참전해 공로훈장을 여러개 받았습니다. 그 인연으로 삼촌의 딸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 한국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서 40여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구요. 그런데 그 삼촌이 암에 걸렸는데 더 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그때 딸이 있는 한국으로 와서 참선 수행을 하셨는데, 완전히 치유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어요. 삼촌은 그 체험기를 책으로 냈는데, 그 책이 호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항상 가보고 싶은 곳이었어요. 9년전 첫 방문 때 한국에서는 자연에 대해 민감함, 사람들의 너그러움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한국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정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갸초 스님은 꼭 한번 더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다고 한다. 스님은 10여일의 짧은 일정동안 10월 13일 불교영어도서관 법회를 시작으로, 미황사, 운문사, 대원사 등지에서 법문을 할 계획이다.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과 함께 한 갸초 스님

먼 길을 돌아 한국까지 찾아온 서양인 승려의 눈은 푸르고도 깊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는 미소를 지으며 10여개의 렌즈마다 눈을 마주쳐 주었다. 몸 전체에 ‘런던 신사’의 친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의 모습을 찍고 있노라니, 문득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떠올랐다. 포레스트가 사랑을 찾아 동으로 동으로 달렸듯이, 그는 멜버른에서 런던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 인도며, 파키스탄으로 ‘마음’을 찾으러 다녔다. 그리고 티베트불교를 만나 붉은 옷을 입은 눈푸른 납자가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포레스트의 뒤를 좇아 수많은 히피들이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달렸듯이, 이제는 서양인들이 이 눈푸른 납자들을 따라 불교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오래도록 와보고 싶었다는 한국을 방문했듯이, 언젠가 많은 서양의 수행자들도 한국을 찾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갸초 스님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눈높이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너그럽고 평화로운 정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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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s a wise answer That's a wise answer to a tricky qusoeitn 2015-10-11 오후 9:46:53 덧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