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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당신이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박물관

 

  • 글쓴이: 비올
  • 조회수 : 89
  • 09.03.29 15:17

 

 

    

당신이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2009/03/24/18:27

 

 

네팔 요리사 프라밧


돈벌러 온 인도, 기다리는 건 천민만 못한 멸시 
넉살 없어도 요리 못 해도 마음 씀씀이는 ‘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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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알프스’라는 마날리의 온천마을 비쉬쉿의 담마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었다. 도착 첫날은 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너무나 배가 고파 미처 식당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델리에서 마날리까지 12시간 걸린다던 차는 도중에 히말라야의 고지대에서 고장 나 20시간 만에야 도착했다. 중간에 짜이를 몇 잔 마시긴 했지만 차 안에서 워낙 추위에 떨었더니, 으스스 추워오는 게 몸살이 걸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닭국물과 야채를 넣고 끓이는 티베트 국수인 뚝파를 주문했다. 시장기가 심해 맛 타령할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간장 맛만 진할 뿐 아무 맛이 없었다.
 
국수 육수는 간장 맛만…‘시장’을 반찬삼으려 해도 안돼
 
프라밧은 그렇게 맛없는 뚝파를 만들어온 그 게스트하우스의 남자요리사였다. 요리사라곤 하지만 게스트하우스 청소 등을 하는 가정부와 같다. 각 층에 방이 네 개인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였으니, 손님이 꽉 차도 10명 안팎이고, 대개 4~5명의 손님이 묵었다. 더구나 게스트하우스에 묵는다고 해서 그 안에서 밥을 먹는 경우는 드물다. 더구나 프라밧의 요리 실력이 이러니 나 같은 초행자나 시킬까 이미 이곳에 며칠 머문 사람은 음식을 시킬 리 만무했다. 사람들이 요리를 시켜야 돈을 좀 벌 수 있을 텐데, 그런 요리 실력으로 돈을 벌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스물여덟 살의 프라밧은 네팔에서 돈을 벌러 이곳까지 왔다. 160cm 정도의 작은 키에 영어까지 서툴렀다. 인도엔 돈을 벌러 온 네팔인들이 많다. 인도도 거지가 넘쳐나는 나라이지만 네팔은 더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거리를 찾아 월경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겐 인도의 천민들보다  더한 멸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2층 베란다에 나가 마당을 내려다보면 찬서리가 내릴 만큼 추운 날씨에도 프라밧은 양말도 신지 않고 얇은 옷차림으로 떨고 있었다. 그리고는 간신히 산을 넘어 조금 비치는 햇살 아래서 몸을 녹이며 한 갑에 4루피씩해 꽁초나 다름없는 최저가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고 있었다.
 
Untitled-2 copy.jpg이곳에서 나는 히말라야 안의 옛 도시 라닥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겨울이 가까워오면서 눈이 많아져 차편이 끊긴 상태였다. 그런데 때마침 라닥에서 넘어온 3명이 이 게스트하우스로 찾아왔다. 눈으로 길이 끊기면 델리까지 항공편으로 오가는 방법 외엔 길이 없는 그곳에서 길이 끊기기 전 마지막으로 탈출했다고 했다.
 
에스키모처럼 중무장했으면서도 타고 있던 지프차 안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여전히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과 라닥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인근 꿀루 계곡을 여행하고 돌아오면서 야채 가게를 들렀는데, 배추와 무 등 눈에 익은 야채가 많았다. 그래서 함께 요리를 해먹기 위해 야채와 밀가루를 사왔다.  
 
갖은 구박하는 주인집 소의 진자리도 마른자리로
 
덜컥 재료를 사오긴 했지만, 부엌을 빌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더구나 첫날 뚝파를 시켜먹은 뒤로는 음식을 주문하지도 않은 주제에 부엌까지 빌릴 염치가 없었다.
 
프라밧이 음식으로 수입을 올리지 못해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눈총을 받고 있음을 아는 처지였다. 주인은 카스트에서 상당히 상위 계층에 속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애써 품위와 권위를 과시하는 듯했다. 주인은 인근에 근사한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20대로 보이는 그의 아들이 주로 하는 일 없이 이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주인 행세를 했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아들도 프라밧을 하인 다루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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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프라밧이 받는 월급은 고작 1200루피. 우리 돈으로 3만원밖에 안 되는 돈이다. 아무리 인도라지만 박하기 그지없는 월급이다. 그가 고향 네팔에서 1천루피나 되는 교통비를 들여 이곳까지 왔기에 그의 월급은 한심한 수준이다.
 
게스트하우스엔 조그만 텃밭과 외양간이 딸려 있다. 프라밧은 텃밭을 일구어 음식 재료로 썼고, 외양간엔 주인의 젖소가 있다. 프라밧은 매일 그 젖소의 우유를 짜 주인에게 대령했다. 그는 늘 젖소에게 풀을 먹였지만, 그는 우유를 맛도 보지 못했다.
 
내 방은 2층 끝방이어서 베란다에서 나와 의자에 앉아 있으면 그 외양간과 소가 바로 보였다. 주인의 그런 박대에도 그가 젖소를 돌보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였다. 틈만 나면 젖소에게 달려가 풀을 먹이고, 소가 눕는 자리의 습기가 차지 않도록 마른 풀을 깔아주곤 했다.
 
그리고 젖소가 풀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젖소의 목을 쓰다듬어 주곤 했다. 젖소는 그에게 주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의 친구이자 그의 자녀 같은 느낌이었다.
 
소도 그의 정성에 보답하듯 탐스런 젖꼭지에서 신선한 우유를 쏟아냈다. 그러나 주인 부자는 프라밧이 남몰래 젖소에게 들이는 정성도 모른 채 우유맛을 즐길 뿐 그를 더욱 더 괄시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을 알기에 선뜻 부엌을 쓰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아니고, 남의 영업장소를 빌려 요리를 해 먹겠다는 말을 하려니 절로 머리가 긁적여졌다.
 
염치불구하고 “부엌 좀 빌릴 수 있나요?”
 
“부엌을 좀 사용할 수 있을까요?”
의아하게 쳐다볼 줄 알았던 프라밧은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어보였다.
“당신이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의 말과 함께 저 멀리 보이는 설산보다 아름다운 마음이 전해져왔다. 이곳에서 더 깊은 히말라야 로탕패스쪽으로 1시간 반 동안 차를 타고 올라가면 뀐줌라가 있었다. 뀐줌라엔 티베트 불교의 전설적인 고승 아티샤 대사의 흔적인 발자국을 간직한 사원이 눈 속에 서 있다.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오네.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이타심에서 오네.

 
아티샤 대사의 <입보리행론>의 향기는 프라밧의 마음을 통해서 더욱 잘 느껴져왔다.
 
난 맛있게 요리를 했고, 프라밧에게도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더욱 가까워진 프라밧에게 “결혼을 했느냐”고 묻자, 고향에 아내와 1년 6개월 된 아들과 자신이 9살 때 홀로된 어머니가 있다고 했다.  그는 “아내가 예쁘냐”는 물음에 얼굴을 붉히며 “예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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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인도까지 온 그는 어서 빨리 돈 5천루피를 벌어 말을 사서 고향에 돌아가는 게 꿈이었다. 우리 돈으론 13만원에 불과했지만 그에겐 희망의 돈이었다. 그래서 그 말로 농사를 지어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와 행복하게 살 날을 꿈꾸고 있었다.
 
우리가 부엌을 쓴 사실을 안 주인은 음식값보다 비싼 부엌사용료를 요구했고, 난 주인에게 사용료를 주었다. 프라밧이 문책을 당하지 않았으면 했기에. 물론 프라밧에게도 남몰래 ‘성의’를 표했다. 음식도 못하고, 손님에게 너스레도 못 떠는 그는 그런 팁마저도 받아본 적이 없는 듯 눈이 토끼만해졌다. 난 그런 그가 점점 주인의 눈 밖에 더욱 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바쉬싯을 떠난 지 몇 달 뒤 그곳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프라밧이 결국 그 집을 나와 바쉬싯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네팔인들을 볼 때마다 인도 하늘을 떠돌 프라밧이 생각났다. 프라밧이 말 한필을 사 고향으로 돌아갈 날은 언제일까.
 
조현 종교명상전문기자 cho @hani.co.kr

 

 

 

침묵이 답했다. 히말라야에서의 내 질문에
2009/02/05/16:03

 

 

말없이 미소 띤 여인의 짜이 맛 ‘히말라야의 맛’


여유로운 세마리 양 보니 ‘난 뭐 그리 급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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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대를 빌려 타고 레콩피오로 향하는 길 역시 아슬아슬한 절벽 길이었지만 그 동안 풀 한 포기 없는 스피티 지역만 봐온 때문인지 계곡 옆의 나무들과 풀, 꽃의 어울림이 무지갯빛처럼 다가왔다.
 
레콩피오에 도착하니 벌써 어두워졌다. 힌두교의 성산인 카일라쉬는 티베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키노르 카일라쉬의 장관이 어스름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얻어 탄 차는 여섯 명이 타기엔 턱없이 좁았다. 난 짐과 함께 뚜껑이 없는 짐칸에 탔다. 설산 카일라쉬의 찬바람이 소매 깃을 타고 고스란히 내장까지 파고들었다.
 
밤바람을 헤치고 칼파로 향했다. 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인 시바 신의 겨울 집으로 불리는 곳이 칼파다. 키노르 카일라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카일라쉬의 장관만 눈이 부신 게 아니다. 검정 돌지붕과 나무로 이어진 집들이 고풍스런 마을과 사과밭이 어우러진 칼파 마을은 이상향인 샹그릴라를 연상케 한다.
 
히마첼 오지를 다니며 한 번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도저히 살 수 없을 곳 같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의문이었다. 마루에서 낮잠이라도 자다 잘못 뒤척이다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법하게 위태위태하게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이 넓은 세상을 두고 이런 곳에서 살아갈까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아무리 이곳에서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기엔 너무나 위험스러워 보인 때문이었다.
 
칼파 뒷산 언덕에 올라가면 티베트의 파고다라는 초르텐 뒤로부터 완전한 파노라마를 만끽할 수 있다. 가파른 뒷산으로 올랐다. 오르면 오를수록 건너편 6050m의 키노르 카일라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인다.
 
수풀을 헤치고 오솔길을 지나 언덕에 올랐다. 그런데 조그만 계단식 과수원들이 있었다. 사과나무밭에서 양 세 마리가 여유를 즐기며 흘긋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산을 오르냐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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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엔 조그만 외딴 흙집이 있었다. 입구쪽엔 마른 풀과 장작들이 쌓여 있었다.  오두막 안을 보니 60대 가량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나무로 불을 때고 있었다. 바닥도 천장도 벽도 흙인 이곳은 부엌이자 방인 듯 한 켠엔 흙침대가 있었다.
 
놀란 기색도 없이, 아무 말도 없이 미소만 흘렀다. 인걸은 지령이라던가. 그의 얼굴이 키노르 카일라쉬를 닮았다. 그렇게 30분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왜 왔느냐, 무엇하러 앉아 있느냐,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궁금증 같은 것도 없어 보인다.
 
땔감으로 불을 때 물을 끓이더니 짜이를 만든다. 여인이 주는 짜이맛은 히말라야 맛이었다. 여전히 말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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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침묵이 내가 히말라야 오지에서 수백번도 더 물었던 질문에 답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이미 히말라야가 된 사람은 히말라야를 정복하지도, 히말라야를 버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동영상 장수경 기자

 

 

 

무너진 계곡 한 발 한 발, 삐긋하면 저승 직행
2009/01/07/21:36

 

 

 

십 리 허공 외줄 케이블카는 더더욱 아찔 ‘사양’


어떻게 건넜는지 팔순 할머니는 넉넉한 미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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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출입 허가까지 얻어왔는데. 어떻게 온 길인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무너진 산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패인 산은 거대한 악어의 아가리같았다.
 
만약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다른 길을 통해 레콩피오까지 가자면 밤낮으로 2~3일을 달려야 했다. 불과 무너진 4km 때문에 수백킬로의 절벽길을 또 돌고 돌아야 하는 것이다.
 
불과 4km 앞에 두고 돌아가면 다시 수백km 절벽길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다. 우린 무너진 산을 건너기로 했다. 비상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걸어서 넘어가보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일이나 로프와 같은 암벽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청전 스님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난 암벽등반가보다 약초꾼이나 나무꾼을 산사람에 가까운 이로 본다. 또 힘들게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등반가도 존경스럽긴 하지만, 히말라야의 구도자들에게서 더 산의 내음을 느낀다. 정해진 길, 준비된 장비 없이도 전인미답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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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다리 근육이 튼튼해서 산을 잘 타느냐 마느냐와는 별개의 문제다. 다람살라에서 라닥은 차와 비행기를 갈아타고도 며칠이 걸리는 곳이다. 그러나 청전 스님은 다람살라에서 라닥까지 히말라야의 큰 산 7개를 넘고 넘어 걸어다닌 기적의 사람이니.
 
우리는 무너진 길을 정면 돌파하고 차는 운전기사 혼자서 2~3일간 돌아 산 건너편으로 오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운전기사 시티가 제동을 걸었다. 지금까지 상당히 용감해 보이던 그가 혼자서는 무서워 못가겠다는 것이었다.  “밤에 도로에 호랑이나 표범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혼자서 절벽 위를 달리려니 새삼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저승길도 동행이 있다고 여기면 덜 무서운 법이니 이해가 갈 만했다.
 
그래서 고민 고민을 하다 이 절개지를 건너는 것도 위험 천만일 테니 두 사람은 차를 타고 함께 돌아오게 하기로 했다. 청전스님과 나, 그리고 두 노승만 건너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시티는 오히려 하룻밤 새 마음을 다 잡았는지 혼자 돌아오겠다고 했다.
 

  
 
일단 먼 길을 떠나는 시티를 보낸 뒤 당카르곰파의 차를 빌러 타고 길을 떠났다.  타보에서 반나절 이상을 달리니 과연 큰 산 중턱에서 까마득한 아래 계곡까지 허물어져 내린 절개지가 나타났다.
 
그곳에선 인도 군인 100여 명이 있었는데, 이제 막 복구 작업을 시작하려는 듯 했다. 1년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를 복구공사가 끝날 때까지 양쪽 지역 주민들이 겪어야할 고통이 얼마나 심할까. 끊어진 도로 양쪽에  긴 케이블을 메달아 놓고, 그 케이블로 음식물과 공사 자재 등을 보급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어 짐을 싣고도 아슬아슬해 보이기만 한 그 화물용 케이블카를 인도 병사가 타고 오는 게 보였다. 우리도 그 케이블카를 탈 수 있는지 인도 군인들에게 사정해 볼 생각을 안해본건 아니지만, 아무리 위험을 감수한 여행이라도 차마 한가닥의 줄로 10리의 허공에 매달려 있는 아슬아슬한 화물 케이블카를 타는 모험은 하고 싶지않았다. 차라리 저 계곡을 걸어서 건너는 게 그래도 생명을 더 연장하는 길인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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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손자가 생각났을까, 감자 한 알 꼬깃꼬깃
 
우리는 무너진 계곡을 어떻게 건너야할지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인도 군인들은 멀쩡하게 생긴 외국인들이 저 험고를 걸어서 정말 넘어가려는 것인가 궁금한 듯 바라봤다.
 
마치 눈사태로 무너진 것 같은 절개지 저 건너편 멀리서 한 사람이 이쪽으로 건너오려는 듯 무너진 절벽 밑으로 내려가는 게 보였다. 반가웠다. 그가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람쥐가 다닌 것 같은 작은 발자국들이 있었다. 히말라야의 사람들이 길이 끊어졌다고 반대쪽을 바라보며 발만 구르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선수’인 청전 스님이 두 노승의 바랑을 뺏어서 걸쳐 메고 앞장섰다. 두 노승도 아무리 노구의 몸이지만 평생 히말라야의 산 속에서  잔뼈가 굵은 몸이었다. 
 
무너진 돌과 모래가 70도 정도의 급경사여서 만약 디딘 돌이나 모래가 미끄러지는 날이면 이 역시 49재가 필요 없는 일이었다. 수백미터 아래 계곡까지 굴러 떨어지던가 돌과 모래 무더기에 묻힐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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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은 밑으로 밑으로 나 있었다. 무너진 곳을 따라 가야 하니 이렇게 밑으로 갔다가 올라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 시간 가량 까마득한 계곡 밑으로 내려갔더니, 청전 스님과 두 노승은 벌써 한참이나 올라가고 있는 게 보였다.
 
긴장으로 온몸에 땀으로 목욕을 했다. 신발이 더욱 미끄러워 아찔아찔했다. 그런데 오직 한발 한발에만 집중한 순간 어느새 그 계곡을 건너와 있었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우린 건너편에 서서 지나온 험로를 바라보면서 아침에 준비해온 삶은 감자와 계란을 꺼내 먹었다. 감자가 이렇게 맛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옆엔 80살도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그 길을 어떻게 넘어왔는지 앉아서 쉬고 있었다. 평생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야위고 눈이 움푹 파인 할머니에게 감자와 계란을 주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자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저만치 떨어져 앉아있는 할아버지에게 계란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남은 감자는 헌 종이에 꼬깃꼬깃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아마도 멀리 나간 할머니를 기다리는 손자가 생각난 것이리라.
 
새 것을 주면 할아버지를 주거나 주머니에 넣어 본인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할머니를 보니 하나 남은 감자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먹다 반쯤 남은 감자를 할머니 손에 쥐어줬다. 할머니는 이번엔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라보기만 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사람이 “인도에선 먹다 남긴 것을 주면 큰 실례”라고 했다. 할머니는 결국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넉넉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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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동영상 장수경 기자

 

 

 

 

 

 

죽음 이고 절벽 길 넘어왔는데 ‘산 넘어 산’

 

 

2008/11/25/15:03

 

가장 아름다운 히말라야 계곡

 

직각 산 허리 다람쥐길, 오줌이 찔끔찔끔

지프차 짐칸에 타고 열흘 넘어 덜컹덜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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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했다. 벼랑 끝을 내려다보기만 해도 오줌이 찔끔찔끔 나올 정도였다. 그야말로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험준한 산에, 그야말로 다람쥐길 같은 도로를 뚫어놓았는데, 그 길로 차가 달리니 차 안에 있어도 늘 벼랑 끝에 한발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함께 가던 청전 스님에게 “이곳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라고 물으니, 걱정할 것 없단다. 뼛조각도 남지 않고 모두 산화할테니 천도재도 필요 없을 거란 얘기였다.

 

“여기서 떨어지면 뼛조각도 안 남고 산화할게요”

 

Untitled-2 copy.jpg누가 계곡 밑으로 금방 떠미는 것도 아닌데, 이곳에선 늘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만 같았다.


4년 전 네팔 히말라야의 고도인 단센을 올라갈 때와 3년 전 히말라야 다람살라를 가면서 “산도 높고, 절벽도 높고 깊다”고  아찔한 긴장을 경험했다.

 

그런데 정작 레콩피오와 샹글라, 자로리 패스 등 히마첼주 오지를 다녀보니,  그 때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음을 알았다. 그곳이 에버랜드나 롯데월드 놀이기구 타는 정도라면 이곳은 우주선을 탄 기분이라고나 할까.

 

영문 안내 책자에선 이곳 샹글라에 대해 “히말라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규정했다. 아름다운 것도 정도가 있지, 너무 아찔해서 기가 찰 정도다.

 

아득한 아래쪽에선 바스파강의 급류가 흐르고 있다. 그곳까지 천길인지 만길인지 알 수도 없었다. 산의 경사는 거의 직각이었다. 그 직각에 어떻게 길을 놓을 수 있느냐고? 벽과 같은 바위산의 허리둘레에 긴 홈을 판 것이 길이었다.

 

죽음을 이고 사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아예 살기 싫다는 것인지  차 두 대가 비켜 지나가기에도 좁은 길엔 가이드레일 하나가 없었다. 그나마 바위산은 다행스러웠다. 대부분의 산이 부스러기 같은 사토였다. 가끔씩 도로 한 쪽이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무너진 도로 옆을 지나자면 오금이 저린다.

 


 

특별 접대 위해 데려온 스님 “누굴 죽이려고…”

 

청전 스님이 몇 년 전 한국에서 스님이 와 이곳으로 데려왔단다. 그는 가장 특별한 손님이 오면 이 곳을 구경시켜준다고 했다. 그런데 그 스님이 이 계곡을 지나면서 “누구 죽이려고 이리 데려왔느냐”며 화를 내더란다.

 

관념은 더 이상 무용지물이다. 이 백척간두에서 어떻게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생사 위의 현존을 즐길 것인가.

 

Untitled-1 copy.jpg지프차 운전기사 시띠는 스물여덟살인데, 결혼할 처녀가  있다고 했다. 운전엔 이골이 난 그도 무서워 죽겠으면서도 이런 길의 드라이브를 포기하지 않는 우리들이 못내 미운 표정이었다. 장가도 못가고 죽으면 몹시 억울할 테니까.

 

얼마를 달렸을까. 머리 위엔 바위들이 지붕처럼 떠 있었다.  또 가끔 절벽쪽도 바위로 막혀 마치 동굴 같은 길도 나온다.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힌두 신전이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은 없는 것 같지만, 참 정성도 지극하다는 생각이 아니들 수 없다.

 

한 곳에선 우리 차를 뒤따라오던 트럭이 짐을 많이 실어선지 바위에 끼어 옴싹달싹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 차가 저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참으로 답답해 보이기만 했다.

 

이런 길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을 다녔으니 이골이 날만도 하건만 보면 볼수록 아찔했다. 그래서 가급적 절벽쪽 의자엔 누구도 앉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지프차가 떨어지면 절벽 쪽이고, 아닌 쪽이고 산화하긴 마찬가지일 텐데도 말이다.

 

그러니 지프차 뒤 짐칸에 타고 가는 내 심정은 어떻겠는가. 내가 자원한 것이지만. 이번 여행 명단에 나는 애초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청전 스님은 인도의 전설적인 고승인 샨티 데바의 저작인 <입보리행론>을 번역했다. 번역 작업을 도운 두 유학생과 마침 다람살라에 와 있던 두 라닥 노승들을 위해 히마첼주 오지 여행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하루 종일 걸려 겨우 출입허가 받았는데 환호는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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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기사까지 여섯명이 직접 해먹을 음식과 취사도구, 침낭, 옷 등을 챙겨 가려니 지프차 하나가 부족할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난 짐짝칸에 타기를 자처하고 여행에 동승한 것이다. 차편만 있다면 혼자라도 가겠지만 이 곳은 외부인들이 여행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곳이었다. 한 번 안 된다면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된다고 할 만큼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스님에게 매달려 동승했으니 내 열정도 어지간했던 모양이다.

 

특히 레콩피오지역은 티베트와 접경 지역이어서 비자 외에 또 출입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린 스피티의 주도 가자에서 평상 근무가 태업이나 마찬가지인 인도 지방정부 관리들을 상대로 출입국관리소와 경찰서를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면서 드디어 출입증을 따냈다. 청전스님은 이번엔 아주 운 좋게도 순탄하게 따냈다고 하니, 평상시 그 여정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출입 허가를 따냈다고 환호성을 터뜨렸는데, 더 큰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피티주의 따보 쪽에서 티베트 접경인 레콩피오 쪽으로 가는 길이 산사태로 끊겨버렸다는 것이다. 이 지역을 다녀보니, 푸석푸석한 돌과 모래산들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게 신기하다고 여겼는데, 기어코 우리 앞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이토록 어렵게 온 인도와 티베트, 중국 접경 지역 히말라야 오지 여행을 중단한 채 돌아가야 할 것인가. 기가 막혔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출처 - http://cafe.daum.net/bulkot/3A0m/801

다음카페-어둠속에 갇힌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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