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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에 중원문화를 전한 문성공주

화이트타라
7세기 초 토번족(吐蕃族: 지금의 티벳족)의 제32대 찬보(贊普: 국왕) 송찬간포(松贊干布)는 청장고원(靑藏高原) 일대의 여러 부락을 통일한 후 라싸(拉薩)를 중심으로 강대한 토번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당나라와 밀접한 우호관계를 맺기 위하여 634년부터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요청했으나 승낙을 받아내지 못하였다. 이때 토번의 사자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문책이 두려워 토번에 돌아간 후 송찬간포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당나라 천자는 공주를 우리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는데, 마침 토곡혼(吐谷渾)의 왕도 혼인을 청하였기 때문에 우리와의 혼사를 늦추고 있습니다."
 
토번과 토곡혼은 원래부터 마찰이 많았던지라 이 말을 들은 송찬간포는 즉시 20만대군을 이끌고 토곡혼을 공격하였다. 토곡혼의 왕은 막강한 토번의 세력을 보고 기겁을 하여 환해(環海) 일대로 퇴각하였다.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14년(640) 송찬간포는 토곡혼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변경 송주(松州: 지금의 사천성 송반현<松潘縣>)를 침략하였다. 그리고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공주를 자기에게 시집보내지 않는다면 곧장 장안으로 쳐들어갈 것이라 위협했다.
매우 분노한 당 태종은 즉시 토번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다. 송찬간포는 애초에 당나라와의 전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당나라의 원정군이 오는 것을 보고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상대를 너무 얕잡아보고 무모한 행동을 하던 송찬간포는 결국 송주성 아래에서 당나라 군대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에 송찬간포는 신하의 예를 갖추고 사죄를 청하면서, 황금 5000량과 진귀한 보물들을 바치고 다시 혼인을 요청하였다. 당 태종(太宗)은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한 후 마침내 아름답고 총명한 문성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였다.
태종이 문성공주를 송찬간포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한 일에 관해서는 하나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당시 송찬간포의 명으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녹동찬(祿東贊)이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여 태종의 승낙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녹동찬이 장안에 갔을 때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목적으로 혼인을 청하기 위해 온 사신들이 많이 있었다. 태종은 혼인을 청하러 온 사신들에게 5개의 문제를 내고 정답을 알아맞히는 사람의 나라에 화친을 윤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문제는 아주 가느다란 실을 가지고 구멍이 아홉 개 있는 명주(明珠)에 꿰어라는 것이었다. 녹동찬은 먼저 실을 개미 허리에 매었다. 개미가 명주의 구멍속으로 들어가자 실도 따라서 들어갔다.
두 번째 문제는 어미말 백필과 망아지 백필을 함께 놓아두고 어떤 망아지가 어떤 말의 새끼인지를 판별하라는 것이었다. 녹동찬은 하루동안 어미말과 망아지를 분리시켜 놓은 다음 망아지에게 사료와 물을 주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그들을 함께 놓아두자 배가 고픈 망아지들은 각각 자기의 어미에게로 달려가서 젖을 빨았다.
녹동찬은 이렇게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여 나머지 관문도 하나하나 통과하였다. 제일 마지막 문제는 2500명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 중에서 문성공주를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녹동찬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단번에 그녀들 중에서 몸가짐이 가장 우아하고 단정한 공주를 식별해내었다.
이리하여 녹동찬은 마침내 다른 나라의 사신들을 물리치고 당태종의 윤허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문성공주의 티벳 입성도(포달라궁 백궁 벽화)>
  <문성공주가 티벳에 들어간 후의 불교 전파 모습>
  
문성공주는 원래 당 태종의 양녀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당 태종과 장손황후(長孫皇后)의 양녀로 궁궐에 들어가 깊은 사랑을 받으며 문성공주에 봉해졌다. 문성공주는 당 태종이 자기를 토번족의 찬보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매우 착잡하였다. 토번의 국왕 송찬간포와 결혼하여 두 민족이 대대로 우호관계를 맺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친지라고는 아무도 없고 풍속도 전혀 다른 먼 이역 땅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종은 그러한 문성공주를 위해서 많은 혼수품을 마련해 주었다. 그 중에는 각종 가구·그릇·패물·비단은 물론, 고대의 역사·문학·각종 기술서적 및 의약품·곡물·누에알 등도 있었다. 그리고 25명의 시녀와 악대, 많은 장인들을 함께 딸려 보냈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성공주는 동불상도 함께 가져갔다.
당시에 토번족은 서남지역에서는 여전히 강성한 국가였기 때문에 당 태종은 서남의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경제적 문화적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융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문성공주와 함께 대규모 문화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문성공주는 실제로 이러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중대한 정치적 임무를 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중국 역사상 왕소군(王昭君)에 이어 두 번째로 화친의 임무를 띠고 이역 땅으로 시집간 여인으로 기록되었다.
정관 15년(641) 정월 문성공주(당시 약 24세) 일행은 장안(長安: 지금의 섬서성 서안 서북)에서 티벳까지 약 3000km에 이르는 장도에 올랐다. 청장고원(靑藏高原) 일대에 살고 있던 티벳인들은 문성공주 일행을 환영할 준비를 하였으며, 송찬간포는 그녀를 영접하기 위하여 대규모 영친(迎親) 행열을 거느리고 청해(靑海)까지 달려갔다.
약 한 달간의 긴 여정 끝에 문성공주 일행은 청해 남쪽의 하원(河源: 황하 수원)에 도착하여 송찬간포의 영접을 받았다. 송찬간포는 후행(後行: 결혼 때 신부나 신랑을 데리고 가는 일) 온 예부상서(禮部尙書) 이도종(李道宗)에게 사위의 예를 표하고 찰릉호에서 성대한 영친(迎親) 의식을 거행하였다.
장력(藏曆: 티벳 월력) 4월 15일 송찬간포는 문성공주를 데리고 북문을 통해서 라싸성으로 들어갔다. 공주의 풍속을 존중한 송찬간포는 특별히 당왕조에서 하사한 화려한 예복을 입고, 티벳인들에게 홍갈색 흙을 얼굴에 칠하는 풍속을 금지시켰다. 그리고는 새로 건축한 화려한 왕궁에서 송찬간포와 문성공주는 혼례를 거행하였다.
문성공주가 티벳에 들어간 것은 티벳의 역사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었다. 문성공주가 지나간 청장고원에는 지금도 이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청해에는 일월산(日月山)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문성공주가 이곳을 지나면서 서쪽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고향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당 태종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하여 특별히 황금으로 일월보경(日月寶鏡)을 주조하여 멀리서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이때부터 이 산은 '일월산'이라 불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월산을 지나면 도류하(倒流河)가 있는데, 이 강은 서쪽으로 흘러 청해호(靑海湖)로 들어간다. 전설에 의하면 문성공주는 이 강을 건너자마자 가마를 버리고 말을 타고 초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기의 몸이 집에서 점점 더 멀어져감을 느끼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울음소리는 세상의 모든 강물을 모두 동쪽으로 흘러가게 하였지만 유독 이 강만은 서쪽으로 흘러갔다. '도류하'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문성공주가 고향을 그리워하다 흘린 눈물이 모여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도류하(倒流河)>
<문성공주가 당시에 송찬간포와 즐거운 밀월을 보냈다고 하는 계곡의 집(靑海 貝納溝)>
 
문성공주는 라싸에 도착한 이후 당왕조의 선진 기술과 문화를 티벳인들에게 전수하여 토번사회의 발전을 촉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성공주와 함께 티벳에 들어간 한족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티벳족은 야금·농기구제조·방직·건축·도자기제조·방아·술제조·제지 등의 기술을 신속하게 습득할 수 있었다.
문성공주는 티벳에 급류가 많은 것을 보고 강가에 물레방아를 설치하도록 하여 수력으로 방아를 찧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송찬간포는 이러한 기술이 토번의 경제발전 촉진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더 많은 기술자들을 요청했다.
문성공주는 또 시녀와 함께 티벳 여인들에게 방직과 자수 기술을 전수하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티벳 여인들이 짜는 푸루(야크 털로 짠 검은색 또는 다갈색의 모포)와 융단, 모전(毛氈) 등의 기술은 모두 문성공주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문성공주는 또 티벳인들에게 천문과 역법을 가르쳐주었다. 이후 장력(藏曆)에서는 한족의 음력 십이지간과 육십갑자에 따라 일시를 계산하는 방법을 받아들였다. 문성공주가 데리고 간 악대는 티벳음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악대가 가지고 간 악기는 지금도 50여개나 보존되어 있다. 라싸의 대소사(大昭寺)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그 악기들 중 대부분은 현악기인데 지금 보아도 색채가 선명하고 아름답다. 매년 장력 2월 30일 양보회(亮寶會)가 되면 그것들은 사내의 다른 문물과 함께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문성공주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녀가 그 멀고 험난한 길에 불상을 가지고 간 것 그 자체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불교를 깊이 신봉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송찬간포도 정치적으로 불교의 교의가 토번족 토속 신앙인 분교(분敎, 분=竹+本) 보다 통치에 훨씬 더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왕권신수(王權神授) 사상을 빌어 왕권을 공고히 하고 찬보의 절대적 권위를 수립하였다.
포달라궁 법왕동(法王洞)에 모셔진 문성공주상(상하 모두)
이에 그는 불법(佛法)을 제창하고 신봉한 문성공주의 주장을 강력하게 옹호하면서 400여개에 이르는 사원 신축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부터 티벳불교가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티벳에 세워진 최초의 불교사원인 방대한 규모의 라싸 대소사는 바로 문성공주의 배려로 건축된 것이다. 대소사 안에는 지금도 공주가 가지고 간 석가모니 불상이 모셔져 있다. 대소사 입구에는 공주가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버드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당류(唐柳)' 또는 '공주류(公主柳)'라 한다.
문성공주는 티벳에 들어간 이후 송찬간포와 적존공주(赤尊公主)의 부탁으로 와조(臥措)에 적존공주를 위해서 절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대소사이다. 그후 공주는 다시 와조의 서북쪽 모래밭에 순수한 당나라 양식의 사원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소소사(小昭寺)이다.
대소사의 건축 양식을 통해서 우리는 문성공주의 뛰어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대소사를 지을 때 계속 담이 무너져내려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문성공주는 천문학과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오행설을 운용하여 천문과 지리를 관찰한 다음, 라싸의 지형이 나찰마녀(羅刹魔女)가 누워있는 형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에 공주는 나찰마녀의 심장 부위에 절을 지어 그녀의 심장을 눌러야만 절이 온전하게 지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주가 계산한 나찰마녀의 심장 부위는 홍산(紅山)의 동쪽 1km 지점으로 그곳은 호수와 소택지였다.
문성공주가 지목한 대소사 부지는 호수와 소택지여서 그것을 메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이에 공주는 다시 오행의 상생상극 이론에 근거하여 송찬간포에게 절을 지을 때 흰산양으로 흙을 지고 호수를 메우게 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송찬간포는 공주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에 646년 비로소 대소사의 공정이 시작되었다. 이 사원의 공사는 라싸 역사상 최대의 대공사였다. 2년간의 공사를 거쳐 와조에는 마침내 웅장한 사원이 건축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대소사인 것이다. 648년 웅장한 대소사와 소소사가 모두 완공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도 문성공주와 송찬간포가 결혼할 당시에 그들이 연령적으로 어울리는 한 쌍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송찬간포의 생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설이 전해오고 있다. 하나는 송찬간포가 25세 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문성공주가 송찬간포와 함께 생활한 기간은 얼마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송찬간포가 오래 살기는 하였지만 문성공주가 시집간지 얼마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함께 생활한 기간은 불과 3년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간찬포는 현명하고 아름다운 문성공주를 위하여 포달라궁(布達拉宮)을 지어주었는데, 모두 1000간의 궁실로 이루어져 있는 포달라궁은 그야말로 화려하고 웅장하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두 번에 걸쳐 증축한 것이다. 포달라궁의 본전의 높이는 13층, 길이는 117m, 점유 면적 36만여㎡에 이른다. 포달라궁 내부에는 많은 벽화가 보존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녹동찬이 당태종을 만나 5개의 문제를 풀던 이야기와 문성공주가 티벳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겪은 일 및 라싸에 도착했을 때 열렬한 환영을 받던 장면 등의 벽화가 있다.
문성공주는 영륭(永隆) 원년(680)에 40년간의 티벳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티벳인들은 두 개의 기념일을 제정하여 그녀를 기리고 있다. 하나는 문성공주가 라싸에 도착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장력 4월 15일의 '사허다와절(沙喝達瓦節)'이고, 다른 하나는 문성공주의 탄신일로 알려져 있는 장력 10월 15일이다.
티벳에는 문성공주에 관한 희극이 많다. 민간에는 그녀에 관한 아름다운 시가와 전설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티벳인들은 라싸의 팔각대가(八角大街)와 같이 그녀가 지나갔던 곳을 성역으로 여기고 있다. 그녀는 한족과 티벳 두 민족에 있어서 우호의 화신인 것이다.
 
문성공주가 짠것으로 전해지는 당대 자수(甘丹寺)
티벳희극(藏戱) <문성공주(文成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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